구소련·아프가니스탄 전역

[스크랩] [번역] 러시아-소련의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비정규전, 1993 - `제 4장, 소련의 아프간 침공` (1)

박용수 2014. 10. 27. 16:27

< 원문출처 : 'Russian-Soviet Unconventional Wars in the Caucasus, Central Asia, and Afghanistan' by Dr. Robert F .Baumann, 1993, Leavenworth Papers Number 20, US ISSN 0195 3451, ISBN 0-16-041953-0, Combat Studies Institute,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

 

 


 

제 4장 - 소련의 아프간 침공

(The Soviet-Afghan War)

 

 

 소련(蘇聯)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介入)한 역사(歷事)는 사실(事實) 1922년 소련(蘇聯)의 공식 건국(公式建國)보다도 이전(以前)에 시작(始作)되었지만, 세계 대다수(大多數) 사람들은 1979년 12월 카불에서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은 군사개입(軍事介入)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이곳에 소련(蘇聯)이 활동(活動)하고 있었다는 사실(事實)조차 거의 모르고 있었다 (지도 11 참조). 이때부터 1988년 봄에 소련 군대(蘇聯軍隊)가 철수(撤收)하기 시작(始作)할 때까지, 소련(蘇聯)은 끈질긴 저항운동(抵抗運動)에 대항(對抗)하여 길고도 어려운 전쟁(戰爭)에 돌입(突入)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戰爭)은 소련 군대(蘇聯軍隊)가 수십 년(年)만에 처음으로 비정규전(unconventional war) - 즉, 교전(交戰)이 제한적(制限的)이고, 적은 정규군(conventional army)처럼 싸우거나 기동(機動)하지 않으며, 폭도(暴徒)들이나 빨치산 저항운동(抵抗運動) 등에 특징적(特徵的)으로 나타나는 게릴라 방식(方式)에 의존(依存)한다 - 에 직면(直面)한 사례(事例)이다.

 

(지도 11. 아프가니스탄 지도)

 

 아프가니스탄 전쟁(戰爭)의 분석(分析) 및 이를 통한 교훈(敎訓)의 도출(導出)이라는 과제(課題)는 역사가(歷史家)들에게 상당(相當)히 어려운 문제(問題)였다. 이는 역사적(歷史的)인 개괄(槪括)을 할만큼 충분(充分)한 시간(時間)이 아직 흐르지 않았으며, 또한 이 분쟁(紛爭)과 관련된 기록 문서(記錄文書)들이 기껏해야 부분적(部分的)으로만 존재(存在)한다는 점 등이 그 주요(主要)한 이유(理由)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쟁(紛爭) 내내 소련(蘇聯)에서는 활용(活用) 가능(可能)한 첩보(諜報)들을 거의 내놓지 않았으며, 소련 언론(蘇聯言論)들이 자국 군인(自國軍人)들이 일상적(日常的)으로 전투(戰鬪)에 개입(介入)된다는 사실(事實)을 인정(認定)하는 것조차도 여러 해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소련(蘇聯) 군사 잡지(軍事雜紙)들에는 아프간 전쟁(戰爭)에 대하여 단편적(單片的)인 정보(情報)들이 좀 나타나 있어서, 이를 통해 이론상(理論上) 교훈적(敎訓的)인 이야기들을 도출(導出)할 수가 있다. 전쟁(戰爭)이 진행(進行)되던 동안 병력(兵力) 및 부대 훈련(部隊訓練)에 관련(關聯)된 기사(記事)들을 살펴보면, 여기에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명시적(明示的)인 언급(言及)은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점차(漸次) 산악 지형(山岳地形)이나 사막 지형(沙漠地形)에 전형적(典型的)인 전술(戰術) 시나리오들을 강조(强調)하게 되는 것이 두드러지며, 이는 분명(分明) 독자(讀者)들에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투 교훈(戰鬪敎訓)들을 가르치려는 의도(意圖)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석(分析)들을 활용(活用)함으로써, 소련군(蘇聯軍) 사령부(司令部)에서 가장 시급(時急)하게 관심(關心)을 가져야 된다고 믿었던 문제(問題)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이 전투(戰鬪)의 성격(性格)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984년이 되면, 소련 언론(蘇聯言論)에서 특정(特定)한 군사작전(軍事作戰)에 관한 단편적(單片的) 이야기나, 각개 병사(各個兵士)들의 활약(活躍)에 대하여 소개(紹介)하기 시작(始作)한다. 그리고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글라스노스트 정책(policy of glasnost)이 개시(開始)되면서 보다 비판적(批判的)이고 광범위(廣範圍)한 서술(敍述)들이 문헌(文獻)에 등장(登場)하기 시작(始作)한다.

 

 아프간 저항운동의 시각에서 보게 되면, 1차 및 2차 언급들은 그 양이 대단히 많지만, 객관성에 있어서는 상당히 편차가 심하다. 게다가 소련측 언급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종종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재단된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전쟁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종합적인 그림을 얻기 위해서는 서방 특파원이나 독립적인 관찰자들(즉, 저항군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사람들)의 설명이 종종 도움이 된다.

 


아프간 전쟁의 개괄 (The Afghan War in Perspective)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갖게 된 역사는 표트르 1세(Peter I)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최근의 소련 개입의 근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현대 소련-아프간 관계의 특별한 상황으로 비정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은 때때로 서방 세력들과 경쟁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가지려는 종합적인 노력을 펼치게 된다. 1946년 시점에서 보았을 때, 아프간 정권은 제한된 민주주의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데, 당시 수반은 왕정이었지만, 통치는 의회정치 구조로 이뤄졌던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의 등장과 개혁 운동은 이 신생 국가의 방향을 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53년, 모하메드 다우드 칸 중장(Lieutenant General Mohammed Daoud Khan)이 총리직을 차지하였고,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내부의 현대화 및 국제적인 경제 연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어 COMECON 국가들이 아프가니스탄과 가까워졌고, 소련의 군사원조 역시 시작되었다. 1956년은 소련-아프간 관계에 있어 기념비적인 해인데, 아프간 군대를 재무장시키는 것을 소련이 담당한다는 협정이 이뤄진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소련군 전문가들에 의하여 아프간 군대가 훈련되는 단계를 의미하게 되어 있었다. 196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 생도들과 장교들을 소련에 유학보내게 되며, 1963년이 되면, 아프가니스탄에는 군사 교관으로서의 소련 장교들이 대단히 많이 보이게 된다.

 

 소련은 카불과 다른 주요도시들을 잇는 주요 고속도로들을 건설하였고, 또한 소련 국경의 테르메즈(Termez)로 향하는 도로에 있는 살랑 터널(Salang tunnel) 역시 건설한다. 소련은 1970년대 중반까지, 경제 프로젝트, 학교 건설, 기타 물자 원조 등을 모두 총괄하여 대략 10억달러 이상의 원조를 아프가니스탄에 제공한다.

 

 1973년, 다우드는 아프간 왕정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이는 소련과의 국가간 관계에는 겉보기에 별다른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내각의 고문들은 친소련계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주의당(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 PDPA) 소속이거나 또는 이에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7년 4월 다우드가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을 때, 소련 서기장(Soviet General Secretary)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는 다우드의 충성심에 불만족을 표현하였다.

 

 소련과 PDPA에 의해 환영받은 1978년 아프가니스탄의 "4월 혁명(April Revolution)"을 통하여 소련과 새로 선포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Afghanistan, DRA)간에 보다 공개적이고 긴밀한 정치 관계가 조성되었다. 사실 다우드는 축출되기 이전부터 이미 PDPA의 파르참 파벌(Parcham faction)(주민 중에서 상대적으로 도시민들과 교육받은 분자들에 근거를 두고 있었음)과 점점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1976년에는 내각에서 몇몇 파르참 파벌의 장관들을 숙청한 바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미 많은 기간요원들을 아프간 군 내에 두고 있던 칼크 파벌(Khalq faction)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다우드의 축출을 보다 용이하게 만드는 효과를 낸 것으로 보인다. 소련과 인도, 그리고 여러 공산주의 권역(Eastern bloc) 국가들이  즉각 PDPA 치하의 새 정권을 승인하였고, 이어 일련의 서둘러 만든 정치 및 원조 협정들이 이어졌다. 1978년 12월, DRA 총리 누르 모하메드 타라키(Nur Mohammed Taraki)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우호조약에 조인하였으며, 합동 선언문을 통하여 소련과의 장기적 협력을 추구한다고 합의하였다.

 

 한편, 카불에서의 수년간의 정치적 다툼으로 인하여 파르참 파벌과 칼크 파벌은 서로간은 물론 대다수 주민들과도 소원하게 되었다. PDPA의 정권 장악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혼돈과 상호비방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타라키는 자신의 라이벌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을 제거하는 데에 실패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아민은 9월 정권을 장악하여 1979년 10월에는 타라키를 제거하게 된다. 아민은 유엔 총회에서 러시아어로 연설하는 등, 소련에 대하여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기도 했지만, 소련 정부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1979년 9월 15일자로 기록된 한 비밀 보고서에서, 소련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Anderei Gromyko)는 모스크바로서는 아민의 정부를 계속 상대하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가 정치적 라이벌들에게 취하는 "압제적인 활동들(repressive actions)"에 대해서 지지해서는 안된다고 조심스럽게 조언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소련 중앙 측에서는 능력(competence)을 신뢰(trust)보다 우선시했던 것 같다. 아민은 사회주의 원칙에 입각한 급속한 현대화 정책을 고수하였고, 이에 따라 전통적인 무슬림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실질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대규모 소련군 투입이 있기 1년여 전인 1978년 말에 이미 시작되었다. 당시 소련군 고위급 사절단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였는데, 그들의 단장으로는 국방부 차관이자 지상군 총사령관 이반 파블로브스키 장군(General Ivan Pavlovskii)과,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항쟁에 개입한 주요 참가자였던 알렉세이 에피셰프 장군(General Alexei Epishev)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타라키에게 소련측의 염려들을 전달하게 된다. 실제로 염려할 사항들이 많이 있었다. 1979년 3월, 헤랏(Herat)에서는 폭도들이 공개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 과정에서 주로 기술 고문으로 있던 여러 러시아인들이 백주 거리에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소련측은 즉각적으로 군사장비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반응하였다. 여기에는 Mi-24 헬리콥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장비는 에티오피아에서 에리트리아 반군들을 제압하는 데에 그 효과를 증명한 바가 있다. 또한 소련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3천명 가량으로 증가시켰다. 가을이 되자 국가의 북동부 지역은 완전히 카불의 통제 밖으로 벗어나게 된다. 소련 측에서는 아마 아민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국가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직접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낸 것 같다.

 

 대규모 소련군 개입의 동기의 경우, 상당히 진지한 논의와 고찰이 필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확장주의자(expansionist)" 견해를 갖고 있는 관찰자들의 경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진출이 그 자체로 소련의 최종목표가 아니며, 장차 이란의 석유와 부동항(warm-water ports), 그리고 페르시아만에 있어서의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소련측의 활동들을 보면 이러한 해석을 지지할 만한 내용들이 별로 없다. "반응주의(reactive)"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반대로 소련이 이슬람 근본주의(Islamic fundamentalism)의 확산 및 민감한 중앙 아시아 변경지역에 적대적 국가가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어적인 목적에서 선제공격을 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만약 소련인들이 1979년 순수하게 중앙 아시아의 이데올로기적 오염을 걱정하였다고 한다면, 이들이 공식 언론에 이에 관한 효과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이 모순이 된다. 사실 중앙 아시아에 대한 이슬람의 부정적인 영향이라던가, 민족주의적 경향이라던가 하는 염려는 8년 후 소련이 철수하기 전날까지도 공식 자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소련측의 결정에 대한 제 3의 설명으로 제시되는 것은, 소련측이 이미 많은 자원과 노력을 쏟아부은 이웃한 위성국(client regime)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하여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브레즈네프 독트린(Brezhnev Doctrine)(이 독트린에서는 사회주의의 보존을 위하여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 집합체가 개별 소속국의 일들에 간섭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으로 정당화한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소련의 무력사용을 비춰보았을 때에도, 이러한 방식의 소련측 행동의 설명은 일관성을 갖게 된다. 특히 1979년 폴란드에서 벌어진 사태들을 보게 되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몰고온 소련의 결정에 대한 불운한 전조임을 알 수가 있다. 부족한 정보와 분석이야말로 소련측이 아프가니스탄 상황을 비합리적으로 결론내리게 하는 한편, 이들의 개입 결정을 부추겼다고 볼 수 있다.

 

 소련 정부에서는 처음부터 이들의 "원조(assistance)"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이 주장은 아프가니스탄 정부 수장이었던 아민을 몰아낸 뒤 처형한 것과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1988년 소련군의 철군이 시작된 이후, 몇몇 소련 언론인들과 유명 군사 및 정부 인사들이 소련의 개입의 동기와 그 결정의 책임 소재에 대하여 논란을 벌였다. 일부 공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DRA의 입장이 악화되면서 대규모 전투부대 파병을 꺼리던 소련측 입장이 변화하게 된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타라키와 아민은 1979년 4월 14일에서 12월 17일 사이에 적어도 16회 이상 소련군 투입을 공식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90년 콤소몰스카이야 프라우다(Konsomol'skaia pravda)에 게재된 것에 따르면, 최초의 정책 변화는 1979년 8월 1일에 나타났으며, 당시 카불에 있던 3명의 핵심 소련 관리였던 알렉산드르 푸자노프 대사(Ambassador Alexander Puzanov), KGB 중장 B.S. 이바노프(B.S. Ivanov), 소련 군사고문단장 L.N. 고렐로프 중장(Lieutenant General L.N. Gorelov)는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한다: "... 8월과 9월에 나타난 반군 활동의 증가에 비춰보았을 때... 아프간 동지들의 요청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즉각적으로 카불에 1개 특수 여단을 파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렐로프는 1989년 크라스나이야 즈베즈다(Krasnaia zvezda)지와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다르게 설명하였다. 그는 1979년 8월,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Iurii Andropov), 국방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Dmitrii Ustinov),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yko), 총참모장 니콜라이 오가르코프(Nikolai Ogarkov)와 만났던 회합에 대하여 회상하면서, 자신이 "아프가니스탄의 소련 군사적 존재를 증가시키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며... 더구나 병력을 이곳에 파견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라는 견해를 보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념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고렐로프는 11월 경 소련 군사고문단장 직위에서 경질된다.

 

 최종적인 개입 결정과 관련된 세부 내용들은 아직도 불분명하다. 1989년 12월 27일 출판된 최고 소련 재심 위원회(Supreme Soviet review committee) 보고서에 따르면, 이 결정은 브레즈네프와 소수의 측근들, 즉 우스티노프, 안드로포프, 그로미코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재심위원회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노력이 결실을 거둘것임을 계속 희망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 단계에서, 소련 언론에서는 소련측의 목적이 아프간 인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혁명(revolution)"을 용병 도당들과 이들에 대한 외부 지원자 - 즉 미국과 중국, 그리고 몇몇 이슬람 국가들 -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고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그러나 1987년이 되면, 아프가니스탄이 샤 치하의 이란과 마찬가지로 적대적인 미국의 활동기지가 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안보상의 목적을 강조하게 된다. 1989년의 한 소련 군사 관찰가는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지역이 분리독립하여 적대적인 파키스탄과 합병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아마도 아프가니스탄의 목적이 안보상 목표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소련측에서는 전쟁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성공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정치적 근거를 마련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장 개요 (Theater Overview)

 

 아프가니스탄의 지리를 다소 과도하게 간략화하자면, 이 지역을 대략 5개 지역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동부 가장자리는 대부분 산악 지대이며, 특히 북동부 끝자락은 파미르 고원으로 향하는 와칸 회랑(Wakhan corridor)이 위치하고 있다. 고도가 1만 피트를 상회하는 경우가 흔하며, 중고도 정도 지역에 종종 숲들이 나타난다. 중앙 산악지역, 즉 힌두 쿠시(Hindu Kush) 지역은 아프가니스탄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장애물이 된다. 이 지역을 구불구불 지나는 2개의 주요 통행로가 있다. 하나는 살랑 도로(Salang road)로서, 1960년대 후반 소련이 살랑 터널을 만들어 줌으로써 활용 가능해졌고, 카불 북쪽으로부터 소련 변경지역까지를 연결하고 있다. 또 하나는 카불 서쪽의 시바 도로(Shibar road)로서, 193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힌두 쿠시를 가로지르는 첫번째 통로가 되었다. 투르코만 평원은 모래 사막과 곳곳에 산재한 덤불 초지들로 특징지어지며,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서부의 헤랏-파라 저지대(Herat-Farah lowlands)는 이란 고원의 일부로서, 일부 경작이 가능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남서부는 대다수 모래 사막으로 이뤄져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종 구성 또한 대단히 다양하다. 약 6백만 인구의 파슈툰 족(Pashtuns)은 아프가니스탄 남동부와 남중부에 거주하고 있으며, 전쟁 전까지 가장 우세한 인종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프간 국경 북부 지역을 따라서는 소련 중앙 아시아계 민족들과 근연인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350만 인구의 타지크 족 사람들이다. 그 외에도 우즈벡 족과 투르코만 족도 상당수 인구를 갖고 있다. 기타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인종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중부 지역에 사는 하자라 족(Hazara)과 아프가니스탄 서부 및 남서부에 사는 발루치 족(Baluchis)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인종적 차이 외에도, 아프가니스탄의 약 1500만명의 주민들은 지역색과 부족(clan)색에 다라서 심하게 분열되어 있으며, 이는 오랜 세월 동안 정치적 통합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사실상 인구 대다수가 무슬림이며, 이들 중에서 상당수는 순니파에 해당한다. 서부에는 소수의 시아파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을 잠재적 작전지역으로서 검토하는 과정에서, 소련인들은 1941년 소련 일반참모부가 이란에 대하여 연구하였을 때 내린 것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작전축과 전략 도시, 전략 거점, 비행장, 기타 등등을 확인하는 것과 별개로, 이 연구에서는 인종적, 사회적 요소에 대하여 심층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기타 국력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이란에 대한 전장 분석 과정에서 지형이야말로 모든 분석에 끼어들어가는 요소로 드러났으며, 지형이야말로 "사실상 모든 방향으로의 자연적 장애물" 역할을 하며, 방자에게 유리한 수많은 장소들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고지대로의 이동은 힘들었으며, 특히 기계화된 부대와 중포병에게는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몇몇 사활적인 보급품인 식량, 물, 연료 등을 확보하기 어려운 지역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군수지원 또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병사들은 사막에서 산꼭대기에 이르는 기후의 급변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총체적으로 이란은 상당히 벅찬 전장이었으며, 이란의 군사력이 명백히 허약함에도 그러한 것이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략 요소 (Elements of Soviet Strategy in Afghanistan)

 

 1979년 12월부터의 소련 전략에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소련의 군사 개입 정도를 일정 수준 안으로 제한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이때 당장 투입할 수 있던 전력으로는 어떠한 식의 정복 계획 내지는 점령 계획이라도 실행할 수가 없었으며, 또한 이를 추구하려 했다는 징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련측의 전략은 처음부터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Afghanistan) 군대를 재건한다는 데에 기반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갖고 있던 임무는 더 이상 소련군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저항세력을 두들겨 놓는 데에 있었다. 처음에 소련인들은 자신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제한된 수준의 폭도들과 직면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민들과의 소원한 정도가 엄청나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으로서는 제대로 대응할 만한 자원이나 능력을 보유하지 못할 정도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인들의 도착이야말로 엄청나게 분열되고 초보단계에 불과했던 저항세력들을 공동의 적 앞에 뭉침으로써 내란의 정도를 오히려 심화시킨 꼴이 되었다.

 

 확실히 무자헤딘 사이에는 공통적인 프로그램이란 것이 없었다; 과거부터 이어져오던 부족간 갈등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전국에 걸쳐 벌어진 반응을 민족주의적(nationalistic)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외부 간섭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이라고 볼 수 있으며, 외부인이 마을 안의 일이나 종교사에 대하여 간섭하는 데에 대한 깊은 적개심도 함께하고 있었다. 또한 북부 아프가니스탄 지역 주민들의 상당수가 우즈벡인들과 타지크인들이며, 여기에는 지난 19세기 러시아의 중앙 아시아 정복 및 20세기 바스마키 저항운동 진압 당시 남쪽으로 도주한 사람들의 후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 결과 비록 10개에 이르는 주요 저항 그룹들이 통일된 군사 지휘를 이루지 못한데다 오히려 서로 공격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DRA)은 PDPA만의 지지, 즉 도시민들 중 일부의 지지만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것이 군사/정치적으로 승리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소련의 군사원조는 이러한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러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지역에서 상대방을 거대한 포위를 통해 진압해 들어갔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DRA 스스로가 이러한 포위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소련의 지원 자체야말로 이 정권의 자활에 필요한 지지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련 전력은 반드시 5가지의 주요 목표들에 집중하게 되며, 이 중에서 단지 3가지만이 군사적인 것이었다. 첫째, 소련인들은 카불을 확보하는 것과, 카불에서 칸다하르, 남부 헤랏에서 살랑 고개를 거쳐 소련 국경 테르메즈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들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함을 인식하였다. 주로 기계화 보병 부대(motor-rifle units)들로 구성되었던 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군의 최소 60퍼센트 이상이 이 임무에 할당되었다. 카불은 정교한 삼중 경계지대로 둘러싸인 요새도시가 되었는데, 각각은 10~20마일 종심에 벙커망과 포상, 지뢰들로 구축되어 있었다. 소련군은 모든 주요 도로마다 전초기지(outpost)를 설치하였으며, 특히 카불과 테르메즈 사이에 있는 북부 지역을 평정하는 데에 많은 활동을 하였다. 카불 내에 있던 저항군 조직은 반복적으로 사격과 폭파, 암살을 수행하였다. 1987년 소베스키 스포츠(Sovetskii sport) 신문사에서는, 저항세력의 금지 경고에도 불구하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가하였던 한 아프간 레슬링 선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올림픽 참가 이후 그는 카불 내에서 도망자처럼 살 수 밖에 없었으며, 비밀리에 친구들과 생활하며 빈번하게 이사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2년 암살당한다.

 

 소련인들은 저항군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반군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작전에는 통상 공중폭격- 종종 대규모인 경우도 있었다- 이 동반되었으며, 이는 대규모 피난 행렬을 불러옴으로써 아프가니스탄 학자인 루이 듀프리(Louis Dupree)가 일명 "강제 이주형 학살(migratory genocide)"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설명할 지경이었다. 1986년 당시 이란과 파키스탄에는 약 5백만명의 아프간인들이 피난 중에 있었다. 한 서방측 연구에 의하면, 1987년까지 아프간 총 인구의 9퍼센트 가량이 살해된 것으로 추산되었다.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데이터에 의하면, 이들 사상자들의 45.8퍼센트 가량이 폭격으로 인한 것으로 나타난다. 총탄에 의한 것은 33퍼센트였으며, 포격은 12퍼센트, 지뢰가 3퍼센트 가량을 차지했다. 베트남에서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소련인들은 저항군 지역으로 의심되는 곳을 목표로 삼았으며, 마을과 작물을 파괴하고, 기타 게릴라 활동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파괴했다. 따라서 무자헤딘이 대다수 시간에 걸쳐 국토 대다수 지역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권력이란 단지 견뎌내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저항세력이든 정부든 어느 쪽도 아프가니스탄 대다수 지역에 대하여 통제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무자헤딘을 바쁘게 만들고 이들을 지탱케하는 주민들을 망명길에 오르게 만들음으로써, 소련측에서는 저항세력에 타격을 입히거나 적어도 최소한 군사적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의사나 의약품을 접하기 어려웠던 이들 자유의 투사들은 스스로 부상을 치료해야 했다.)

 

 셋째, 소련인들은 파키스탄 국경지대를 차단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반군들에게 전사들과 무기들을 제공해 주는 대상단(caravans)을 차단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소련인들은 미국인들이 호치민 루트를 차단하려고 시도했던 당시와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된다. 그 결과 대규모 외국 원조가 저항군의 지탱을 도와주게 된다. 1987년 당시 미국의 원조만해도 총 25억달러 가치에 해당했다.

 

 소련 전략의 나머지 2개의 비군사적 요소들 또한 그 중요성에서 결코 덜하지 않았다. 다만 이 지역에서 이것들이 실패함으로써 결국 전체적인 성공을 가로막게 된다. 첫째, 소련인들은 상호 알력으로 분열되고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던 아프간 정부와 군대를 재건하는 것이 시급함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기간요원들을 교육하는 데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으며, 수천명의 젊은 아프간인들을 소련으로 장기 유학을 보내게 된다. 소련군은 아프간 군대(DRA 군대) 내에서의 대량 출혈 이후, 유능한 장교단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게 된다. 8년간에 걸쳐 그저 그런 성과만을 냈음에도, 여기에는 대단히 엄청난 노력이 투자되어야 했다.

 

 둘째,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회원국 정권이 주민들로부터 인기가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으며, 이에 따라 지지층을 얻기 위핸 민사 및 정치 활동 계획을 만들어낸다. 소련측 주장에 따라, 이 정권에서는 여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온갖 방식의 활동을 펼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것 역시도, 대규모 투자에도 수익은 별로라는 결과가 나왔다. 저항세력은 정부 일꾼들과 프로젝트들을 특히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DRA의 주장에 따르면, 두쉬마니(dushmany)(무법자)들은 1983년에만 1812개의 학교를 파괴하고 152명의 교사들을 살해하였다. 게다가 소련-DRA측의 군사 작전이 주민들에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이러한 정치 프로그램의 효과를 상쇄시키기도 하였다.

 


소련 군사 개입의 경과 (The Course of Soviet Military Involvement)

 

 소련 정책당국자들의 계산과는 반대로, 소련군의 투입은 아프가니스탄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프간 전쟁의 시작부는 소련군에게 오히려 상서로운 - 하지만 기만적인 - 길조를 보여주었었다. 1979년 크리스마스 직전 며칠 동안, 소련군은 지상과 공중을 통하여 카불로 진격한다. 12월 26-27일간 약 15000명으로 구성된 제병연합부대가 일련의 잘 짜여진 기동을 실시함으로써 카불을 마비시킨다. 소련군은 아프간 제 7사단 및 14사단으로 구성된 수비대를 봉쇄하였으며, 바그람 비행장을 점령하였고, 내무부 부대들을 무장시켰으며, 이어 아민의 다룰라만 궁전(Darulaman Palace)을 공격하게 된다. 한편, 앞서 2개월간 소련 제 40군이 투르케스탄 군구(Turkestan Military Districe, TMD)에서 창설된다. Iu. V. 투하리노프 상장(Colonel General Iu. V. Tukharinov)은 과거 TMD의 초대 부사령관이었는데, 이제 제 40군 사령관이 된다. 그는 12월 12일 혹은 13일에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한다는 작전 계획을 수령하게 된다. 이 계획에서는 전쟁 수행 과정 내내 통신로로 활용할 2개 주요 통로에 위치한 주요 중심지들을 소련군이 장악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이 통로는 테르메즈 - 카이라톤(Khairaton) - 풀레쿰리(Pul-e-khumri) - 카불 통로와, 쿠쉬카(Kushka) - 헤랏 - 신단드(Shindand) - 칸다하르 통로의 2개였다. 당시에는 아직 아무 강(Amu River)에 친선교(Friendship Bridge)가 건설되기 전이었으므로, 최초 부대는 폰툰 부교(pontoon bridge)를 활용했다. 배치 직전, 투하리노프는 최초 부대를 카불이 아닌 테르메즈에서 쿤두즈에 이르는 지역에 투입하라는 수정 명령을 받는다.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는 아무래도 살랑 고속도로를 경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다른 부대들은 카불로 공중수송되고 있었다. 12월 25일 도하가 개시되었고, 27일에는 공수부대가 살랑 고개를 장악하는 한편, 최전방 부대는 카불까지 육박한다. 1979년 12월 카불 접수가 성공적으로 수행된 이후, 소련인들은 1980년 2월~3월 기간동안 쿠나르 계곡(Kunar Vally)에서 이 전쟁 최초의 대규모 공세를 수행하게 된다. 당시 이들은 약 5000명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현대적인 기갑전력과 풍부한 공중지원을 동반하였다. 게릴라들은 이러한 소련군 진격을 막는데 있어 사실상 무기력하였으며, 포격에 놀란 약 15만명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파괴된 마을을 버리게 된다. 소련측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소규모 병력들을 전략적 능선들과 건물 옥상에 배치함으로써 진격로는 확보하였지만, 반면 무자헤딘들의 도주로는 차단하지 않는다. 그 결과 소련인들은 자신들이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음을 증명해보일 수는 있었지만, 반면 저항군을 사냥하고 붕괴시키는 데에는 실패한다. 저항군은 산악지대나 골짜기 등으로 녹아들어갔다. 이 공세는 그리 오래가는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게릴라들도 돌아왔다. 1981년 당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지 특파원 에드워드 지라데(Edward Girardet)는 약 700마일간 산악지대를 걸어다니면서 소련의 영향력을 거의 목격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살랑 고개)

 

 소련의 역사가 V. G. 사프로노프 (V. G. Safronov)의 전후 분석에 따르면, 양측 모두 초기 전술적인 수정을 하였다고 하였다. 무자헤딘들은 1000명 이상의 대규모 무장그룹은 강력한 재래식 군대의 먹음직한 목표가 될 뿐임을 알게 되었으며, 곧장 20에서 200명 가량으로 구성된 빨치산 부대 형태로 주로 활동하게 된다. 한편 소련인들은 "대규모 군사 대형을 이루어 전통적인 전쟁법칙에 따라 '두쉬맨' 부대들을 추격하고 공세를 취하려는 것은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한다.

 

(아프간 촌락민들이 소련군이 투하한 불발탄을 살펴보고 있다.)

 

 1981년의 대규모 소련군 작전들은 판시르 계곡(Panjshir Valley)에 집중된다. 이곳은 카불 북동쪽으로 40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반군 거점으로서, 카불과 소련을 잇는 살랑 고속도로로부터 쉽게 닿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으며, 1982년에 계속된 소련군의 작전들 역시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4월, 5월, 8월에 실시된 판시르 계곡에 대한 5차 및 6차 공세는 저항군을 격파하고 그 지도자 아흐메드 샤 마수드(Ahmad Shah Masoud)(타지크인)를 무너뜨리려는 소련측의 결의를 반영하고 있다. 마수드는 일찌기 저항군 중에서 가장 유능한 조직가임을 증명한 바 있다. 5월 작전 과정에는 약 15000명의 소련 및 아프간 병사들과 150대의 Mi-24 건쉽이 투입되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이 전쟁에서 최대 규모의 작전이었다. 판시르에서의 전투는 약 6주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소련군과 DRA 군대는 약 3000명의 전사상자를 낸다. 또한 약 1000명 가량의 아프간 정규군이 저항군으로 전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투를 참관한 지라데의 추산에 따르면, 격전이 벌어진 초기 10일간 동안 소련군은 약 50대의 차량과 35대의 헬리콥터를 상실하였다고 한다. 판시르로 진격해들어가기 전, 소련 항공기는 약 1주일간 반군 진지로 의심되는 곳을 폭격하였으며, 여기에는 마을들도 포함되었다. 공격부대가 도착하기 3일 전, 헬리본 부대가 계곡 가장자리의 핵심 지점들을 장악한다. 게릴라들은 소련군 기갑부대 행렬이 계곡 내에서 상당히 신장되기 전까지는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으며, 때가 되자 박격포 및 RPG-7을 활용한 공격을 실시하였다. 재미있게도, 소련군은 야간에는 움직이지 않았으며, 소련 병사들은 텐트에 있다가 사격을 받기 시작하고 나서야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저항군에 단지 가벼운 피해만을 안겨준 상태였던 6월 말 경, 소련군은 계곡 입구로 퇴각한다.

 

(반군 지휘관 아흐메드 샤 마수드가 노획한 AKS-74를 살펴보고 있다. 이 소총에는 BG-15 언더바렐 40mm 유탄발사기가 장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련군은 6월과 7월에 파그만 지역(Paghman area)에 대해서도 공격을 실시한다. 이곳에서 거뒀다는 소련의 성공 주장은 이어진 가을에 동 지역으로 2차 공세를 실시해야 했다는 점으로써 신뢰성을 잃게 된다. 이 시점이 되면 과거 러시아인들이 겪었던 것들과 상당히 일치하는 패턴이 이미 나타나게 된다: 해당 지역에 대한 소련의 지배는 단지 소련군이 물리적으로 해당 지역 지상을 점령한 동안만 유지되었다. 일단 소련군이 떠나게 되면, 즉각 저항군이 이 곳을 장악하였다.

 

(산악지대에 모여있는 아프간인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소련측에서는 점차 헬리본 강습으로 지원받는 대대 규모의 기동에 의존하게 된다. 지라데는 1982년의 소련 전술이 베트남에서의 미국식 수색-및-파괴(search-and-destroy) 임무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당시에도 덜 무장된 적을 제거하는 데에도 겁주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어떤 이들은 소련 전술을 "초토전술(scorched earth)"에 비유하는데, 이는 소련 측에서 해당 지역을 게릴라가 활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마을과 작물, 관개시설, 가축등을 조직적으로 파괴한 점을 뜻하고 있다. 이 전술은 한 세기 전 코카서스를 정복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음이 증명된 바 있다. 물론 이보다 덜 흉악한 비교 역시도 존재한다. 소련군은 종종 행군간에 신장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특히 좁은 산악 험로에서나 아군과 멀리 고립된 상황에서 갑작스런 반격에 점차 취약해지게 되었다. 소련군들은 상당수의 경우 적들을 끝장낼 수단을 결여한 경우가 많았는데, 적들은 접근이 불가능한 지점에서 소련군에 사격을 가하면서 극도로 거칠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십분 활용하였다. 소련 측으로서 또한 불길했던 점으로는, 마수드와 같은 유능하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반복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주변 다른 주들의 게릴라들로부터 명성과 지원을 얻기 시작했다는 점인데, 이는 이처럼 부족 갈등이 심각한 분열된 사회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었던 것이다.

 

 1982년 당시 소련군의 작전을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4월에는 파라 주(Farah province)에서, 5월에는 고르반드 계곡(Gorband Valley)에서, 6~10월에는 파그만(Paghman)에서, 6월에는 로가르 계곡(Logar Valley)에서 작전을 펼쳤는데, 이는 카불 남쪽의 고속도로의 재개통과 카불 동쪽의 라그만 계곡(Laghman Valley)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각각의 사례 모두에서, 반군들은 소련군과 정부군이 떠나면 즉각 그 공백을 메우곤 했다. 연말이 되면 저항군은 카불 내부에서도 수 많은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경제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였고, 카이라톤(Khairaton)의 대규모 환적장(transshipment complex)과 테르메즈 시를 잇는 아무 강(Amu River)의 철교(road and railroad bridge)를 완성한다. 또한 소련은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모든 지역의 대표자들이 참가하도록 PDPA가 초대 국회(First National Congress)를 소집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수백만명의 아프간인들이 이미 국내에서 탈출하였으며, 저항군은 굴복할 낌새를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유엔에서 중재한 제네바 회담(그러나 저항군 지도자들은 여기에 참가하지 않았다)을 배경으로, 정부측은 1983년 판시르 계곡의 마수드와 6개월간의 휴전을 성립시킨다. 양측 모두 기본 입장은 별로 변한 것이 없었지만, 이 기간을 활용하여 정부는 다른 곳에 집중할 수가 있었고, 마수드 역시도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 꼭 필요했던 숨쉴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여러 주에서 전투가 재개되었으나 이번에는 헤랏이나 칸다하르 같은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지게 되었으며, 해당 지역은 대규모 폭격에 시달려야 했다. 불행하게도 양측 모두 이러한 도심지 전투에 관하여 일관된 묘사를 내놓지 않고 있다. 한편 전략적 상황은 변함이 없었는데, 전국 대부분의 지역 - 어떤 이는 80퍼센트로 추정하였다 - 이 아직도 정부 통제 밖에 있었다.

 

 1984년 시점에서, 대규모 정치적 노력과, 민사 프로젝트, 대규모 아프간인들의 소련으로의 유학, 저항군으로의 침투 및 전복을 위한 정부의 끊임 없는 노력, 시골 지역 주민들의 대규모 피난 생활을 부른 쉴새 없는 군사적 압력 등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프간 정권 요인들에 대한 공격이 지속되었으며, 군대의 탈영율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저항군은 DRA의 중심지인 카불 근교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습격을 해대고 있었다. 카불과 주요 핵심지역들, 통신선 등을 방어하느라 바빴던 소련군과 DRA군은 선택적으로 공세를 펼쳐야 했으며, 점차 고도로 훈련된 부대에 의한 소규모 작전을 강조하게 되었다.

 

(헤랏 주민들이 소련군 공습 후 잔해들을 치우고 있다.)

 

 마수드와의 1년간의 휴전이 끝나면서 4월과 5월에는 제 7차 판시르 전역(seventh Panjshir campaign)이 개시된다. 고공에서는 Tu-16 배저 폭격기가 강력한 공습을 실시하였고, 근접 거리에서는 Su-24 펜서 공격기가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한편 마수드의 군대는 살랑 고개의 양측에서 소련군 수송 행렬을 괴롭혔고, 또다시 추격을 회피했다. 침공군은 계곡의 경제적 근거 - 작물, 가축, 관개 수로 등 - 를 상당수 파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공식 카불 라디오 방송에서는 정부가 이 지역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250여대의 전차와 150여대의 장갑차를 동반한 1개 기계화 사단(motorized rifle division) 전체를 갖고 있으며, 헬리콥터 건쉽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에 힘입어, 소련측에서는 추가 공세를 펼치기 위해 9월까지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들은 계곡 입구로 퇴각하게 된다. 언론 보도에서는 서방 정보기관을 정보원으로 칭하면서, 소련군이 전투 임무를 맡으면서 DRA 부대들이 점령지역 확보 및 통신선 방어 임무를 맡았다고 하였다. 약 5000명에서 10000명 가량으로 추산되던 마수드 군대는 단순히 산속으로 도주하였는데, 이는 소련측으로 하여금 계속 추격하여 무작정 긴 시간 동안 지역 점령을 실시하던가, 아니면 결국 퇴각하던가 해야 하는 상당히 어려운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1985년, 소련은 오지에 위치한 저항군 거점을 타격하기 위한 헬리본 부대와 특수부대의 활용을 눈에 띄게 증가시키게 된다. 이 해에 가장 두드러진 활동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쿠나르 계곡(Kunar Valley)으로의 대규모 공세인데, 이는 반군의 파키스탄과의 연락로를 차단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이 작전에는 바리콧(Barikot)의 고립된 전초기지에 포위당한 정부군 수비대를 구출하려던 작전이 이어졌으며, 또한 팍티아(Paktia)에 대한 하계 작전도 벌어졌다. 이 해 초반 무렵, 한 소련 기갑 부대가 바리콧에 포위된 수비대를 구출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그러나 2번째 시도는 성공하였다. 능선들에 대한 공습과 헬리본 공격을 동반하면서, 약 10000명의 병력이 2주간에 걸쳐 계곡으로 진군하여 수비대를 구출하였으며, 이후 퇴각하였다. 한편 페쉬고르(Peshgor)가 함락되었는데, 이는 저항군에 의해 주요 정부군 기지가 함락당한 최초 사태였다. 700명의 정부군이 저항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소련군은 6월 해당 기지를 탈환하기 위해 사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한다. 마수드는 소련-DRA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페쉬고르에서 퇴각한다. 이어 저항군은 이번 전쟁에서 가장 대규모의 조직적 공격을 펼치게 되며, 약 5000명의 병력이 코우스트(Khowst)의 정부군 수비대를 공격한다. 그러나 함락에는 실패한다. 한편, 칸다하르에서는 게릴라들이 치열한 시가전을 펼쳐 도시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며, 이로 인하여 소련군의 폭격을 부르게 된다. 소련측은 항공기를 통하여 저항군의 보급망을 차단하는 데 있어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는데, 이는 아프간 보안부대인 KHAD가 창설한 마을 정보망의 효과가 증대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었다.

 

 1986년이 되면서 비록 전투 수준은 다소 감소하지만, 군사적 동향은 전년도와 비슷했다. 5월 3일, DRA 지도자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이 KHAD 수장인 나지불라 아드마지 박사(Dr. Najibullah Admadzi)로 교체된 정치적 사건이야말로 소련의 전쟁 접근방식에 분수령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카르말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는 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1979년 소련이 사주한 정권 장악에 연관이 있던 점과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1989년, V. I. 바레니코프 장군(General V. I. Varennikov)는 카르말을 교체한 근거로서, "그는 전우들과 인민, 고문관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그가 제거됨에 따라 국가 화해 캠페인(National Reconciliation Campaign)이 보다 탄력을 얻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내의 모든 정치 파벌들의 참여를 보장한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 정책이 군사적 압력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는 전쟁 다른 기간 동안과 마찬가지로 잔인하게 벌어졌다. 소련군이 주도권을 잡았으며, 저항군은 산발적인 타격과 습격 외에는 그 행동이 제한되었다. 1986년 1월에 벌어진 작전들은 동부 지역의 난가라르(Nangarhar) 주와 팍티야(Paktia) 주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파키스탄으로부터 반군 전사들 및 보급품이 유입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실, 비엔나 대학교의 펠릭스 에르마쿨 교수(Professor Felix Ermacoul)이 작성한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DRA는 동부 지역의 칸다하르, 라그만, 팍티야 주의 35만명의 아프간 주민들을 이란과 접한 서부 주들로 이주시킴으로써 이곳을 텅 비게 만들 계획까지도 검토했다고 한다. 한편,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대상 교역로(caravan trail)는 (무자헤딘의 관점에서 볼 때) 계속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였고, 이는 워싱턴 포스트 지(The Washington Post) 특파원이었던 윌리엄 브래니건(William Branigan)이 길을 따라 가면서 여러 찻집(teahouse)들을 목격하였고, 월스트리트 저널 지(The Wall Street Journal) 기자인 프레데릭 켐프(Fredericke Kempe)가 산간 지역에 보급 창고들이 숨어있음을 보았다는 점에도 잘 드러난다.

 

(바브락 카르말. PDPA의 파르참 파벌 지도자이자, 1979년 12월의 소련 개입 이후의 DRA 대통령)

 

 산악지대와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원시적인 오솔길들을 이용하는 잘 참호화된 보급 시스템을 차단하기 위하여, 소련측에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활용했다. 여기에는 공습, 공수부대의 습격, 지뢰 매설, 중요 교차로에 대한 요새지 건설 등이 활용되었다. 소련측에서는 변경 지역에 사는 파슈툰 부족들의 협조도 구했는데, 가끔씩은 대놓고 댓가를 주고 고용하기도 했고, 어떨 때는 정부측 보안요원을 침투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동시에 소련측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 또한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히 상징적이었던 사건은 1986년 4월에서 5월간 자와르(Zhawar)에 대한 공세였는데, 당시 1200명의 소련군 지원하에 12000에서 15000명의 DRA병사들이 투입되었다. 이 작전의 목표는 단지 주요 저항군 거점을 점령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프간 군대의 유능함을 입증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는 베트남 전쟁 말기에 베트남 공화국군이 미군 지원 하에 대규모 작전을 수행했던 것과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정부군측의 공세로 파키스탄 접경 지역 부근의 1마일 길이의 벙커와 수리 시설을 함락할 수 있었으며, 특히 헬리본 부대의 새벽 공세가 눈에 띄는 것이었다. TASS 통신사에서는 이 주둔지를 지휘소(command center)라고 묘사하였으며, 이곳에는 무전 시설과 영국제 재블린 미사일, 대공포, 기계 공작 설비, 엔필드 303 소총 제조 설비 (이 무기는 1차 대전 당시 연합군측이 많이 사용한 무기인데, 현대식 자동무기에 비해 사거리가 훨씬 더 길다), 자동차 정비소, 지뢰 18000발, 기타 보급품 등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소련측에서는 이 작전 과정에서 반군 2000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하였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매설한 지뢰에 부상당한 아프간 어린이)

 

 1987년, 소련군과 DRA군은 마지스트랄 작전(Operation Magistral)(주 도로 작전)을 실시한다. 이는 전쟁 중에 벌어진 연합 작전으로 최대 규모였으며, 가르데즈(Gardez)에서부터 보급품을 전달하고, 팍티야 주의 코우스트를 돌파하는 작전이었다. 제 40군 사령관 그로모프(Gromov)의 회상에 따르면, 사테쿤다우 고개(Satekundau Pass)를 장악하고 작전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하여 소련측에서는 위장 강습부대를 고개로 직접 강하시켜 반군 방어작전이 가동되게 하였고, 이를 통해 공군과 포병이 중화기 진지를 공습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87년 내내 격전이 벌어졌으며, 특히 코우스트와 칸다하르 부근에서 격심했다. 이는 소련 측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고자 함과 동시에 앞으로 있을 철군이 패배로 간주되지 않도록 보이게 하려 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소련 언론인이었던 A. 프로하노프(A. Prokhanov)는 1988년 5월의 소련 철군이 시작되기 직전, 다음과 같은 말로 이러한 견해를 간단히 나타낸다: "우리 군대의 철수는 패배가 아니다. 군대는 최고의 전투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장병들의 사기는 드높다. 이는 우리가 점령하거나, 파괴하거나, 합병하려는 의도가 없는 국가로부터 질서정연하게 떠나가는 것이다. 군대는 정치적 지향점이 바뀜에 따라 떠나는 것이며, 군대는 이러한 지향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 - 소련군은 아프간 땅에서 쫓겨가는 것이 아니다 - 은 사실 그리 쉽게 내릴 것이 못되었으며, 이러한 선언이 심각한 정치적 분란을 막아주지도 못했다. (표 4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 손실이 나타나 있다) 소련군이 철수하던 당시, DRA는 정치적 힘이 약한 상태였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부족 세력들 중에 일부만이라도 자기편으로 할 방법을 찾느라 고심하는 상황이었다.

 

(표 4.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의 손실. 1979년-89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투의 성격 (The Nature of Combat in Afghanistan)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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