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미국 위스키 반란, 1794 (Whiskey Rebellion)

박용수 2014. 10. 27. 16:12

< 원문출처: 글로벌시큐리티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ops/whiskey_rebellion.htm) >

 

< 사진 및 역주 출처:

[1] (http://www.earlyamerica.com/earlyamerica/milestones/whiskey/page1.html)

[2] (http://www.earlyamerica.com/review/fall96/whiskey.html)

[3] (http://www.gallon.com/proddetail.asp?prod=gl-pr-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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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반란, 1794 (Whiskey Rebellion)


 1794년의 위스키 반란은 미국 역사에 있어서 연방 권한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신생 국가가 헌정 법치 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계기였다.

 

 1790년, 새로 탄생한 미합중국 정부는 스스로 일어서기 위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이유는 독립전쟁으로 인하여 발생한 각 주의 부채를 연방정부가 모두 책임지기로 하였고, 이로 인해 연방정부는 빚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791년, 국회 겨울 회기 당시, 상하원 모두 증류 주정(distilled spirits)에 대한 세금 부여 법안을 통과시킨다. 미국 재무 보좌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국채가 더 이상 증가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 법안을 제안하였다. 곧이어 이 신생 국가의 모든 동네들에서는 커다란 항의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러한 불만이 특히 심했던 곳은 펜실베니아주의 서부 카운티들이었다.

 

 

(위스키 반란과 관련된 워싱턴 대통령의 포고문 일부[1])

 

 세금 부과에 대하여 받아들이는 정도는 생산 규모에 따라서 달라졌다; 상업 목적으로 알콜을 생산하는 대규모 생산업자들의 경우 세금 부과에 대해서 보다 순종적이었다. 이들의 경우 1년에 대략 갤런당 6센트 씩의 세금을 내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가끔씩만 위스키를 만드는 보다 소규모의 생산업자들의 경우, 1년에 대략 갤런당 9센트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야만 했다. 생산업자들은 대량 생산을 할 수록 세금으로 인한 비용 부담을 줄일 수가 있었다. 그 결과 이 새로운 세금 법안은 대규모 생산업자들이 소규모 생산업자들에 비해 상대적 경쟁 우위를 갖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소규모 생산업자들은 대개 서부 카운티들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 세금에 대해 대단히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변경지대의 농부들도 세금 부과에 반발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세금 납부가 현찰(cash)로만 가능하도록 되어있었던 데에 있었다. 당시 서부 변경지대에는 현찰이란 것이 희귀한 물건이었다. 또한 농부들은 산악지대를 넘어 동부 지역까지 물품 수송을 하는 데에 있어서 힘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곡물 그대로 형태로 운반하는 것보다 곡물을 주정(distilled spirits)으로 만든 다음 운반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부 변경지역 전역에 걸쳐 위스키 반란이 발발하였다. 또한 뉴욕 남쪽에 있는 주들은 모두 각자의 서쪽에 위치한 카운티들이 새로운 세금에 대해 다양한 폭력을 동원하여 저항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세금 부과에 대하여 서부 사람들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이러한 세금을 지원받게 되는 연방 정부가 자신들을 제대로 대표하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인디언 문제(Indian problems)와 미시시피 강 항해권 개통 문제(opening the Mississippi River navigation) 등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저들은 국민 대다수가 마시는 술에 대한 세금은 사람의 재산이 아닌 머릿 수를 기준으로 매겨지는 효과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 불공정하고 빈자에 대한 압제이다라고 믿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연방정부는 주류 소비세를 부과하는 데 대한 합의에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서부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주류 소비세에 저항하였다. 대다수는 단지 세금 납부를 거부하였으며, 일부는 폭력을 통한 반란을 일으켰다. 세금 징수관들은 이들 반군들로부터 가장 심한 위협을 당했다. 세금 징수관들은 각자의 활동 카운티 지역에 사무실을 열게 되어 있었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러한 세금 징수관 사무실이 자기 카운티에 생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반군들은 세금 징수 사무실로 자신의 집을 제공하는 사람에 대하여 협박을 실시하였다. 종종 세금 징수관이 스스로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위협은 세금 징수관으로 하여금 남아서 세금을 거두려 시도하는 시도를 포기하게 만들기에 통상 충분하였다. 해당 징수관이 남아 있을만큼 용감한 경우, 세금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이들 징수관에게 타르 칠, 깃털붙이기, 고문하기 등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대부분의 징수관은 이 지역을 떠나곤 했다.

 

(위스키 반란 당시 타르 칠을 당하고 깃털이 붙여진 세금 징수관의 모습[2])

 

 서부 펜실베니아 주민들은 이 "위스키 반란"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794년에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12950명의 민병대를 소집하게 만든 것도 이들의 폭력적 반응이 원인이었다. 서부 펜실베니아 주민들은 세금 징수원들을 위협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위협을 가했다. 성난 군중들이 워싱턴 카운티의 세금 징수관 존 네빌의 집으로 몰려가 그와 그의 노예들과의 총격전을 벌였고, 결국 그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운 좋게도 네빌은 군중들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탈출할 수가 있었다. 이들 군중들은 단지 세금 징수원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피츠버그에서 출발한 우편 배달원으로부터 편지도 훔쳤다. 이러한 행동이 벌어졌던 배경 논리를 살펴보면, 이 지역에서 반군에 누가 반대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반군들이 기소할 수 있는 연방 정부의 잘못(federal offense)이었다. 이러한 시민 불복종(civil disovedience)을 완전히 부당한 것이라고 잘못 여겨서는 안된다.

 

 서부 펜실베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국회(Congress)에 의하여 제대로 대표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 자신들의 의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각각의 카운티는 3에서 5명 가량의 대표자를 선출하기로 하였다. 이 사람들은 각자 카운티의 요구를 의회로 가져올 사람들이었다. 대표자들 상당수가 연방 정부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서부 펜실베니아 주민들을 봉기(open insurrection)으로 몰아가고자 시도하였다. 휴 헨리 브라켄리지(Hugh Henry Brackenridge)와 앨버트 갈라틴(Albert Gallatin) 등은 온건파 사람들로서, 과격파들이 회의를 주도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앨버트 갈라틴의 역할은 파예트 카운티의 대표자였다. 따라서 그는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회의가 결정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파할 의무가 있었다. 갈라틴은 비서 역할을 수행했으며, 회의에 참석한 과격파들을 잠잠하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갈라틴은 종종 이들 과격파들이 군종 속에서 무기를 들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이러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갈라틴은 정부에 대항하여 공개 반란(open rebellion)을 벌이는 것이 잘못임을 이야기하였다.

 

 갈라틴에게는 불행하게도, 정부 관리들은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과격파와 온건파를 구분하지 않았다. 정부 입장에서는 참석 자체가 유죄의 요인이었다. 1794년, 워싱턴이 소집한 민병대가 서부 펜실베니아의 반군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진군하였다. 이들은 일련의 명부도 가져왔는데, 여기에는 대통령 일부 측근들이 체포하도록 지정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명부에는 브라켄리지와 갈라틴도 들어있었다. 반군 20명이 체포당했다. 다행히도 이들 사이에 갈라틴은 없었다. 체포된 20명 중에서 유죄로 판명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794년 10월 10일, 펜실베니아주 칼슬리에서 대통령이자 미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 서부 펜실베니아의 위스키 반란을 진압하러 출발하는 군대를 사열하고 있다. [3])

 

 1794년 11월 17일, 해밀턴은 서부 펜실베니아에서 워싱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죄수들의 숫자가 매우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대략 150명에 이른다... 정보에 따르면 도망자들 사이에서는 정기 모임이 없다고 한다... 단지 소규모 방랑자 집단들... 이들은 공격할 이유가 없다. 모든 상황들이 병력들을 귀환시키는 쪽을 지지하고 있다." 1794년 11월 19일, 해밀턴은 워싱턴에게 군대가 "대체로 고향으로 향하고 있으며" 단지 1개 연대만이 남아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1795년 6월 10일, 워싱턴은 죄수로 붙잡힌 폭도들 중에서 형을 선고받거나 기소받은 경우가 아닌 자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린다. 이 시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상태였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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