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군대 가려움증(army itch)" : 미국 남북전쟁 중에 있었던 미스테리한 피부병- 미국 피부병 학회

박용수 2014. 10. 27. 15:59

< 원문출처 : 미국 피부병 학회지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Dermatology 2006 Aug;55(2):302-8) >

 

< 원문파일 :  첨부파일 sdarticle.pdf>


< 사진 및 역주 출처 :
[1]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0/Scabies-burrow.jpg)
[2] (http://www.lib.uiowa.edu/hardin/md/dermnet/scabies11.html)
[3] (http://cme.medscape.com/viewarticle/418772_4)
[4] (http://www.naturalremedyreports.com/what-does-eczema-look-like/)
[5] (http://www.bodylicekiller.com/bodylicephotos.html)
[6] (http://en.wikipedia.org/wiki/Scabies)
[7] (http://www.fcps.edu/islandcreekes/ecology/sarcoptic_mange_mite.htm)
[8] (http://www.homeoint.org/illustr/p/phyt.htm)
[9] The Experiences of Combat in the American Civil War by Gerald Linderman (http://www.zimbio.com/member/fyb109/articles/598737/Experiences+Combat+American+Civil+War+Gerald)

[10] 헬스코리아 뉴스 (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49)

[11] (http://entomology.ifas.ufl.edu/creatures/urban/human_lice.htm)

[12] (http://www.musicanet.org/robokopp/usa/armybugs.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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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당시의 이(lice)에 관한 노래인 Army Bugs. 작자 미상. 멜로디는 찬송가인 'The sweet by and by'를 사용한다. [12] )



"군대 가려움증(army itch)" : 미국 남북전쟁 중에 있었던 미스테리한 피부병
(The "army itch:" a dermatological mystery of the American Civil War)

 

저자: 토마스 G. 크로플리, 의학박사, 매사추세츠 주 워세스터

 

 

초록:

 

 '군대 가려움증(army itch)'은 심각한 소양증(瘙痒症; 가려움증)을 일으키는 만성 피부질환으로 미국 남북전쟁(1861-1865) 초기에 최초로 나타났다. 전쟁이 진전됨에 따라 '군대 가려움증'의 확산도 진전되어 1862년에는 매릴랜드 주의 포토맥 계곡(Potomac Valley of Maryland)에서 유행하였고, 1864년에는 버지니아 주에까지 번졌다. 전쟁이 끝난 직후, 귀환병들과 접촉한 민간인들에게서 발생한 사례들에 대해서는 추적이 되어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전쟁 후에 이 질환이 유행했던 시기는 극히 짧았고, 1867년 말에 이르러서는 '군대 가려움증'은 완전히 사라진다. 당대의 의학 전문가들은 이 '군대 가려움증'의 원인에 대해서 명쾌히 밝혀내지 못했는데, 그래도 상당수 사람들은 이 원인을 옴(scabies; 진드기 일명 옴벌레의 기생에 의한 피부 질병)의 창궐 탓으로 생각하였다. 옴약(scabicides)으로 군대 가려움증을 치료할 수 있던 사례가 상당수 있었음에도, 동 질병은 난치병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군대 가려움증'에 대한 당대 기록들과 이 병을 관찰하고 치료했던 당대 의사들의 기록들을 검토해 본 결과, 비록 함께 나타났던 다른 이 기생증들과 양진(痒疹; 두드러기가 돋고 가려운 병), 기타 가려움증 관련 피부병들로 인하여 의학적 증상이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옴의 창궐을 원인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

 

 

 

본문:

 

 미국 남북전쟁 당시 대단히 심한 만성 가려움증이 양측 모두의 병사 및 민간인들에게 발생하였다. 북군에서는 "군대 가려움증(army itch)", 남군에서는 "캠프 가려움증(camp itch)"라고 불렸던 이 질병은 당대의 군의관들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그저 불편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당대의 '군대 가려움증'은 군대의 사기와 전투 효율성을 위험한 수준까지 저하시켰다. 전쟁 당시 북군측 의학 잡지에는 이 질병에 대해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전쟁이 종결된 직후, 귀환병사들로 원인이 추적되는 집단 발병이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원인론과 치료에 관한 논쟁이 필라델피아의 '의학 및 외과학 동정(Medical and Surgical Reporter (Philadelphia))'지에 실렸다. 반면 남군의 의학 부서의 경우에는 전쟁 중에도 적극적으로 이 질병의 원인과 적합한 치료방법에 대하여 알아내고자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미국 땅에서는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의학 연구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리치몬드의 '남부연합 의학 및 외과학 학회지 (Confederate States Medical and Surgical Journal (Richmond))'와 기타 몇몇 공식 문서들에 이러한 노력들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대부분의 남부연합 의학 기록들은 1865년 리치먼드가 불타는 과정에서 소실되었다. 군대 가려움증의 성격에 관한 의학적 소견은 갈려 있었다. 의사들 상당수는 이것을 옴(scabies)으로 보았다; 반면 군대 가려움증을 양진(prurigo; 痒疹; 두드러기가 돋고 가려운 병)의 일종으로 보는 의사들도 있었다; 제 3의 집단으로서 이를 위생 불량으로 기인한 이 기생증(pediculosis), 옴(scabies), 양진(prurigo), 습진(eczema), 기타 여러 피부병들의 혼합된 결과로 보는 의사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피부학 전문 군의관(military dermatologists)이 없었다. 따라서 외과 전문 군의관(army surgeons)이 이 병을 맡아서 나름대로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매우 소수의 민간인 피부병 의사들이 이 증상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군대 가려움증'의 유일한 원인이 옴이라고 보았다.

 

 이 연구에서는 '군대 가려움증'의 증상에 대한 역사를 고찰하도록 하겠다. 그 다음으로 역사적인 의학 기술들 및 병인과 치료에 관한 의견들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이 증상에 대한 현대 피부학적 분석을 실시하도록 하겠다.

 

   

(옴에 감염된 피부를 확대한 모습(좌측)과 손목에 옴이 발병한 모습(우측) [1][2])


 

'군대 가려움증'의 연혁 (Chronology of Army Itch)

 

 남북전쟁 직전인 1850년대 말, 중서부 지역 주(states) 및 준주(territories) 지역에서는 일명 '초원 가려움증(prairie itch)', '초원 파기(prairie dig)', '일리노이 가려움증(Illinois itch)', '서부 가려움증(western itch)', '미주리 옴(Missouri mange)' 등으로 불리는 증상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군대 가려움증'의 초기 보고들이 1862년 서부 전역(일리노이, 미주리, 아칸소, 테니시, 미시시피)에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이들 풍토병들과 '군대 가려움증'과의 연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여러 해 뒤에 피부병 학자들은 '초원 가려움증'의 원인이 옴(scabies)였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나중에 피부병 학자가 된) 남부 연합군 외과 의사 룬스포드 피츠 얀델 주니어는 1862년 서부 테네시 지역의 남부연합 군인들과 민간인들 사이에 번지고 있던 옴에 대하여 기술한 바가 있다. 북군 외과 의사들도 전쟁 전에 아이오와와 펜실베니아, 메릴랜드에서 비슷한 사례들을 보았다는 것을 술회한 바가 있다. 전쟁 초기, 북군 내에서 군대 가려움증은 그리 흔한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 말에 이르러서는 총 35236건의 군대 가려움증이 미군 의무감실(US Surgeon General's office)에 공식 보고되었다. 이 숫자는 명백히 전체 발병 사례 중에 일부에 불과한 것인데, 북군 군의관들이 이를 보고하는 경우는 그 증상이 심각하여 해당 병사를 직위 해제하거나 입원시켜야 할 정도일 경우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본 연구서의 저자는 북군에서 발생한 실제 '군대 가려움증' 환자의 수를 보고된 숫자의 5배~7배 가량으로 판단하며, 즉 175000명에서 245000명을 환자로 보는 것인데, 이는 북군 병력의 11%~15%에 해당하는 수치다. 한편 남부 연합군에서 이 병의 감염율은 훨씬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특히 전쟁 말에 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남북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이 증상은 점차 널리 확산되었으며, 미시시피 계곡 전투에서부터 조지아, 버지니아, 펜실베니아에 이르기까지 양군 병사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전쟁이 끝난 후, 상당수 북부 저자들은 이 군대 가려움증이 남부에서 시작되어 군대 이동에 맞춰 북쪽으로 확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습진(eczema)의 여러 형태. 습진은 다양한 형태를 가지며, 발진이나 뾰루지와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4])

 

 남부연합 정부가 이 질병에 대해 기울인 공식적인 관심의 정도로 판단하게 될 경우, 이 병은 마치 남부 군인들에게만 나타난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다. 1864년까지 로버트 E. 리 장군 휘하의 북부 버지니아의 남부연합 군대는 버지니아 피터스버그 주변에서 참호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 전투는 향후 1차대전 당시의 것과 비슷한 양상의 참호전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각종 유행병들이 남군을 덮쳤고 여기에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과 의약품, 피복의 부족에도 일부 원인이 있었다. '군대 가려움증'으로 인하여 병력들의 전투 효율성은 심각하게 저하되었는데, 이는 이 질병으로 인하여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하여 각종 질병 감염과 우울증 증상에 취약해졌기 때문이었다. 피터스버그 전투와 대단히 유사한 상황이었던 채터누가 포위전에 참가했던 한 남부연합군 병사의 회고에 따르면, "내 일생동안 그토록 심하게 억압받고 모욕받은 경우를 기억할 수가 없다. 병사들은 굶주리고 헐벗었으며, 몸 전체가 이(lice)와 '군대 가려움증(camp itch)', 오물과 진흙으로 뒤덮혀 있었다." 라고 하였다. 리 장군의 군의관은 이 가려움증의 원인을 위생 상태의 불량으로 판단하였으며, 이는 병사들에게 비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았다. 1864년 8월, 리 장군은 남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이 군대에 대한 비누 공급량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청결함에 대한 필요성은 ... 이제 참호에 있는 사람들에게 질병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라는 편지를 작성하였다. 대통령에게 탄원한 것은 효과를 발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800 배럴의 비누가 리치몬드의 병참창고에 도착하였고 이는 곧 병사들에게 분배되었다. 리가 기울인 관심으로 말미암아, 남부연합 의무감이었던 새뮤얼 프레스톤 무어는 남부연합 육군 및 해군 외과의사 협회를 개최하여 '군대 가려움증'에 대하여 토론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J.C. 베일러로 하여금 "'군대 가려움증' - 그 특징적 증상 - 일반 옴과의 진단상의 차이점과 가장 효과적인 치료방법"에 대하여 연구하도록 지정하였다. 베일러가 보고서를 완성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남부연합 사람들은 리치몬드의 침보라조 병원에서의 군대 가려움증에 관한 다양한 치료방법들에 관한 시도 사례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양진(prurigo) 병변의 예. [3])

 

 전쟁이 끝난 후, 참전 용사들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군대 가려움증' 역시 함께 가져왔다. 이에 따라 민간인 의사들 역시 이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1866년 전쟁터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버몬트 주 같은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집단 발병 사례들은 의학 언론들의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질병의 창궐은 급속하게 감소하여 1866년 이후로는 그다지 씌여진 것들이 없다. 하버드 의학 학교의 제임스 클라크 화이트 박사는 '군대 가려움증'은 옴의 창궐에 다름아니라고 못박았다. 그는 전쟁 기간 및 바로 직후 시기 보스톤에서 다수의 옴 사례들을 기록하였으며, 전쟁이 끝나고는 1869년에 이르기까지 메사추세츠 일반 병원 피부과에서 50건의 사례를 관찰 및 기록하였다. 1871년에는 30건을 치료하였다; 1877년까지는 단지 2건이었다. 1888년 출간된 '반란전쟁 기간의 의학 및 외과학 역사(Medical and Surgical History of the War of the Rebellion)'의 공식 저자는, 기존 출판된 문헌들과 북군의 공식 통계를 바탕으로, 군대 가려움증의 원인으로서 일부분은 옴으로 볼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상반된 의학적 기술들을 근거로 하면 이 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인 다원성이라고 주장하였다. 1867년 이후, '군대 가려움증(army itch or camp itch)'은 최소한 이 이름으로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옴벌레의 일종인 Sarcoptic Mange Mite(Sarcoptes scabiei)의 사진. 1/64인치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여 육안 관찰은 어렵다. [7])

 


'군대 가려움증'에 대한 역사적 기술들 : 육군 외과의들
(Historical Accounts of Army Itch: The Army Surgeons)

 

 여러 육군 외과 군의관들이 '군대 가려움증'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들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술들에 대하여 아래에 발췌하도록 한다.

 

 미 육군 2군단 찰스 스마트 소령(외과의). 1862-1865년간 버지니아에서 복무:

 

 나는 단지 몇몇 옴 사례들을 관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찌르는 듯한 열로 고생하였다... 습진성 증상이 발생한 사람들도 있었다. 거친 피복으로 말미암아 태선(lichen; 마찰 등으로 피부가 변형되어 생기는 가려움증)이 빈발하였고, 전투 기간만큼 심한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중대 또는 연대 전체가 몸이(pediculus corporis; 일명 body louse. 살색을 띠는 피부에 감염되는 기생충의 일종)에 감염되기도 하며, 다양한 원인으로 하여 피부 질환이 발생함에 따라 때때로 병사를 제대시켜야 할 정도로 증상이 심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질환의 증상으로는 심각한 고통과 정신적 불안, 휴식 불능 등이 있으며... 우리 군의관들은 '군대 가려움증'이라는 용어를 2가지 사례로 한정지었다 - 한가지는 옴(scabies)에 의한 것이며, 또 한가지는 기생충에서 유래하지 않고 여러가지 자극 원인 및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말미암은 피부 염증에 대한 것이다.

 

(몸이(body lice)는 남북전쟁 기간 양군 모두에게 대단히 흔했다. 양군 병사들은 자신들의 몸에서 몸이를 찾아내는 것을 "남군(grayback)과의 전초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몸이(body lice)의 모습 성장단계마다 모습이 달라진다. 자연상태에서 최대 2~3mm 크기까지 자란다. 머릿나(head lice)와는 외형상 거의 차이점은 없으나, 자연상태에서는 상호 교배하지 않는다. 숙주에서 떨어지면 24시간 내에 죽는 머릿니와는 달리 몸이는 먹이 없이도 최대 1주일을 생존 가능하다. [5][11])

 

 미 육군 명예소령(보조 외과의) 조지 M. 스턴베르그. 1861-65년간 버지니아에서 복무 :

 

 민간인 시절 관찰한 옴(scabies)과 '군대 가려움증'과의 차이점으로 내가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정도의 차이 뿐이었다. 병사들은 온 몸이 발진으로 뒤덮일 때까지 치료를 받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이런 경우 환자의 손톱에 의한 열상(찢어짐)이나 2차 발진으로 인한 열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흔했다. 이런 경우 병을 식별하기가 힘들었다... 병사들이 막사나 천막에서 밀집하여 생활한다는 것과, 이들 사이에 개인 위생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질병이 관절부 뿐만이 아니라 피부 표면 및 사지 외곽 등의 광대한 영역을 뒤덮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스턴베르그는 이후 미국 의무감으로 진급하였다. 선구적인 박테리아 학자로서, 황열병의 원인을 밝혀주게 되는 것과 연관된 초기 연구들을 수행하였다.)

 


 미 육군 보조 외과의 W. E. 화이트헤드. 미시시피 계곡에서 복무:

 

 나는 이 병이 남부지역 주들의 풍토병인 것을 밝혀냈다... 이 병은 미주리, 아칸사스, 테네시에 많이 퍼져있다... 나는 '군대 가려움증'이 전염성이며 특히 같은 가족 혹은 중대원들끼리 잘 번진다고 본다... 이 병은 신체 특정 부위에만 국한되지는 않지만, 본인의 관찰에 따르면 넙적다리 윗부분의 내측부, 복무의 하부, 팔의 내측부에 특히 발진이 많이 나타난다.

 


 계약 외과의 S. J. 래드클리프, 매릴랜드 주 아나폴리스 미국 일반병원:

 

 나는 이 병을 전염성, 소포성(vesicular) 피부병으로 간주한다. 이 병의 소포(vesicle; 내부에 액체가 있는 것이 특징)에는 곤충 형태의 내용물은 없으나 피부를 벗겨지게 만드는 림프액이 들어있으며, 열을 유발하지는 않으나(non febrile), 대단히 심한 조직적 염증 상태를 유발하며, 접촉을 통해 무한정 확대되는 특징을 갖는다... 환자가 이 질병에 걸린 상태에서 우리에게 치료를 위해 불려오는 것은 통상 수 주 혹은 수 개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 이 질병의 최초 발현 당시에는 거의 관심들을 갖지 않는다... 이 증상은 손과 손가락, 팔꿈치에서 주로 나타나며, 겨드랑이에서 팔목 부분에도 흩어져 나타나고, 궁둥이와 사타구니, 발목 등에도 나타난다. 특징적인 붉은 반점과 소포들을 볼 수 있다.

 

( 아나폴리스의 미국 일반병원(US General Hospital in Annapolis)는 석방된 전쟁포로(paroled prisoners of war)들에 대한 수용시설이었다. 악명 높은 남부 연합의 감옥들이었던 리치몬드 리비 감옥, 앤더슨빌 감옥, 조지아 감옥 등에서 돌아온 북군 병사들에게 나타난 '군대 가려움증'의 정도는 평균 이상으로 심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

 


 남부연합군 외과의 존 허버트 클레이번. 1864-1865간 버지니아주 피터스버그 남부연합 병원에서 수석 외과의로 근무:

 

 의무관들에게 '가려움증(itch)' 혹은 '군대 가려움증(camp itch)'으로 분류되어 내게 맡겨진 환자들 중에서 실제 옴(scabies)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옴에 반드시 수반되는 미소생물인 진드기(acarus)가 발견되지를 않는다. 이 병은 소포성(vesicular) 질병도 아니다. 소포성이 아닌 뾰로지성(papular; 여드름처럼 피부에 볼록 튀어나오는 작은 것들을 통칭) 질병이다... 이 질병은 태선(lichen)에 가까우며, 일부 사례에서는 양진(prurigo)에 가깝다. 만성인 경우 수많은 자극들과 긁음, 무관심 기타 수백가지의 나쁜 조건들에 따라 ... 병의 성격이 바뀐다 - 농포성(pustular; 고름이 들어있는 것이 특징) 혹은 소포성(vescular)으로 가끔씩은 비늘상(squamous)으로도 보인다 - 얼굴과 목, 머리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농가진성 습진(eczema impetiginodes)으로 오인하기 쉽다.

 


 남부연합군 외과의 룬스포드 피츠 얀델 주니어, 제 4 테네시 연대. 1862년에 테네시와 미시시피에서 복무:

 

 남부연합군에서 나는 대단히 많은 옴(scabie) 사례들을 관찰할 수가 있었다. 우리 병사들은 급양 및 피복에 있어 열악한 상황이었으며, 비누도 귀하여 흔히 말하는 '군대 가려움증(army itch)'이 정말 심각하게 흔했다. 군대 가려움증은 ... 옴(scabie)에 다름아니다... 남부연합군에서 복무하던 1862년 당시, 나는 옴벌레(sarcoptes hominis)에 감염된 바가 있다. 당시 여러 장군들과 내가 알고 있던 귀부인들도 이 병에 감염되곤 하였다. 처음에는 가려운 것이 그다지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곧 가려움증은 끔찍해지기 시작한다. 한밤 중에 수면을 취하다가 격렬하게 몸을 긁으면서 탈진한 채로 잠을 깨고 마는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황 연고(sulphur ointment)는 3일간 내게 효과가 있었다.

 

(얀델은 1861년 전쟁 발발 당시 24세였으며, 멤피스 의학 대학의 약물학 교수(Professor of Materia Medica)였다. 남부연합군에 일반병으로 지원하였으며, 곧 연대 외과의로 승진한다. 전쟁이 끝난 후, 얀델은 영국과 프랑스로 건너가 피부학을 공부한다. 그는 나머지 일생 동안 루이스빌 대학교 의학 교실에서 치료학 및 피부학 교수(Professor of Therapeutics and Dermatology)로 지내게 된다.)

 

(에이즈 환자에게 발병한 '딱지형 옴(crusted scabie)'의 모습. 최초 가려움이 시작된 이후 단지 6개월이 지난 뒤의 모습이다. [6])

 

 

'군대 가려움증'에 대한 역사적 기술들 : 민간 의사들
(Historical Accounts of Army Itch: Civillian Physicians)

 

 민간인 의사들의 기록을 아래에 인용한다.

 

 의학박사 존 V. 슈메이커,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제퍼슨 의학 학교의 피부학 교수:

 

 미국의 지난 남북전쟁으로 불결함과 밀착 생활의 특징을 갖는 군대 특성상, 옴(scabies)이 남군과 북군 모두에게 대단히 많이 번졌다. 본인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옴의 증상과 그에 따른 심한 고통에 대하여 목격하게 된 것은 이 당시의 일이다. 당시 본인이 거주하고 있던 대형 시골 마을에는 양쪽 군대 모두가 통과하였고, 옴이 창궐하였다. 옴에 걸리지 않은 가족을 찾기가 드물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자 옴은 마을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의학박사 H.B. 윌슨, 메릴랜드주 분스보로:

 

 군대가 원인은 아닐지라도, '군대 가려움증'은 분명 군대의 행군로를 따라 발생했다. 전쟁 기간 안티탐 전투와 기타 소규모 전투를 통해 남군과 북군의 수천명의 병사들이 이 지방을 지나쳤다. 그리고 본인이 확언하건대 미국 내 어느 지방도 이곳만큼 심각하게 '군대 가려움증'으로 영향을 받은 곳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동시에 수천 건의 발병 사례를 겪었으며, 그것도 대단히 악성인 사례들이었다.

 


 의학박사 F.B. 그리너, 피부병 학자, 매사추세츠주 보스톤, 보스톤 의무실:

 

 전시 및 전쟁 종료 직후의 시기,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옴(scabies)은 대단히 창궐하였다. 그리고 우리 육군 및 해군에 연결된 수많은 의학 요원들은 이를 인지하고 치료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이 끝나고 몇년이 지나자 이 병은 대단히 희귀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 병을 보기 힘들어진 원인을 이 병이 제대로 인식되어 치료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중략)
 ...

 

 

 의학박사 D.I. 파레스, 미시시피주 뉴토니아:

 

 '군대 가려움증'의 원인은 명백하다 - 진드기(acarus) 탓이다. 이는 수백가지 사례들에 대한 육안 관찰로 확인되었다... 피부 표면에 있는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일군의 소포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면, 우리는 매우 섬세하고 하얀 약 1/4에서 1/2인치 길이의 줄이 소포로부터 기어다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회랑 내지는 굴의 맨 끝부분에는 항상 검은 얼룩(즉 진드기)이 관찰된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미국 워싱턴 D.C.의 더글라스 병원 뒤에 있는 병원용 텐트들. 비위생적인 환경과 깨끗한 식수 부족, 숙련된 의료인력의 부족 등으로 인한 질병 확산으로 병원과 텐트 내에서 많은 군인들이 죽어갔다. [9])

 

 

 '군대 가려움증'에 대한 처방 (Treatment of Army Itch)

 

 남북전쟁 당시의 의사들은 '군대 가려움증'에 대한 치료법으로 황 기반의 알카라인 연고 또는 세정액을 사용했고, 여기에 종종 냉각 또는 수축성 화합물을 추가하여 사용하였다. 일부 사례에서는 파울러 용액(Fowler's solution; 18세기부터 각종 질병 치료제로 사용된 비소 화합물의 일종)을 구강 투여한 사례도 있었으며, 비소 내지 수은 화합물을 국부적으로 투여할 경우 효과가 있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1864년 당시 남부연합에는 다른 문제를 안게 된다: 황은 화약 제조에도 사용되었으므로 공급이 부족해졌고, 버지니아의 '군대 가려움증' 창궐 치료에 사용할 만큼 대량으로 할당할 수가 없었다. 비소와 수은은 구하기가 더욱 어려웠는데, 이것들은 북부 해군의 해상 봉쇄를 뚫고 밀수해 와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864년 3월 7일, 남부연합 의무부장 윌리엄 A. 캐링턴은 리치먼드 침보라조 병원의 수석 외과의였던 제임스 B. 맥카우 박사에게 "안전하고 신속한 치료법"을 개발하는 의학 연구 프로그램을 개시하라고 지시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의학부는 군대 가려움증에 대한 "모든 합리적이고 추천받은 치료방식"에 대해 평가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즉각 활용 가능한 남부 고유의 식물들을 활용한 치료법들에 관심이 있었다. 침보라조 병원은 이 실험 프로그램을 위하여 선정되었는데, 이는 수많은 종류의 사례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비교할 만한 충분한 병상 숫자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 병원의 "과학적으로 건축된 욕탕"이 국부 요법을 실험하는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침보라조 병원의 의사들과 근방의 ('군대 가려움증'이 창궐한 곳과 가까운) 피터스부르크 병원의 의사들이 내린 결론은, 환자들의 병원 내로의 격리, 채소류 식사 처방, 미국자리공 뿌리(poke root/Phytolacca decandra)나 억쇠풀(broom straw/Andropagon virginicus), 느릅나무(slippery elm/Ulmus rubra)를 끓여 진하게 달인 물의 국부 처방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남부연합군 보조 외과의 S.R. 챔버스는 양딱총나무(elder/Sambucus spp)의 껍질 안쪽과 소합향(sweet gum/Liquidambarstyraciflua), 역청(black pitch), 송진(resin), 황가루(sulphur flour), 라드(lard), 올리브유(olive oil)로 만든 오일이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저명한 약초 전문가였던 프랜시스 페인 포처 박사는 버지니아 백합(Virginia bunchflower lily/Melanthium virginicum)이 군대 가려움증의 특효약이며, 다만 좀 "위험하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는 더 자세히는 적어두지 않았다).

 

 '군대 가려움증'을 즉각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의사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 병이 난치병이라고 주장하였다. 역사적 사례들을 살펴보면 소포를 나타내는(즉 옴으로 볼 수 있는) 사례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쉽게 치유된 반면, 보다 만성적이고 양진 형태를 나타내는 사례들은 통상 치료에 저항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자리공 (pokeweed /Phytolacca Decandra). 북미, 북아프리카, 중국 등에 널리 자생하며 습한 곳에서 자란다. 어린 싹은 끓여서 아스파라거스처럼 먹기도 하며, 열매는 암이나 류마티스 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중독되는 경우 구토, 설사, 두통 등이 발생하는 수도 있다. [8])

 


 토의 (Discussion)

 

 현대적인 피부학 및 미생물학, 기생충학 지식들을 근거로 이러한 언급들을 통하여 '군대 가려움증'이 과연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인가? 트리스와 맨슨은 1966년, J.H. 클레이번과 다른 남부연합 의사들의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들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었다: "증거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군대 가려움증(camp itch)'의 진정한 성격을 가려내기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북부 관찰자들이 언급한 바처럼 옴(scabies)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남부인(true Southerners)으로서 우리는... 이 '군대 가려움증(camp itch)'이 독특하고 비 전염성인 양진성 피부병이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역사적 증언들을 둘러본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1. 중서부 지역과 펜실베니아, 메릴랜드에는 전쟁 전부터 양진성 피부병이 존재하였다. 이 병은 전염성으로 알려져있었다. 전쟁 기간 및 직후 기간에 이 지역 의사들은 '군대 가려움증'과 이 전쟁 전 질환들이 동일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2. '군대 가려움증'은 남북전쟁의 서부 전역(미시시피 계곡)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동쪽 및 북쪽의 다른 전장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1862년 말, 메릴랜드주 포토맥 계곡에서도 양쪽 군대 및 민간인들 사이에 창궐한 것으로 보이므로, 어쩌면 동부에서 동시에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이 질병은 1864년에서 1865년간 버지니아 피터스버그 포위전 당시 남부연합 노스 버지니아 군대에 심각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3. 전쟁 후반부 및 전쟁 직후, 귀환병들 및 전장에서 멀리 거주했던 민간인들 사이에서 많은 발병 사례가 발생하였다.

 

4. 모든 저자들은 '군대 가려움증'의 확산을 전시의 취약한 위생 상태와 연관짓고 있으며, 이는 '군대 가려움증'이 전염성이라는 것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5. 기술된 병변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일부 관찰자들은 작고 단단한 양진성 뾰루지(papules of prurigo)를, 일부는 소포(vesicle) 및 다양한 정도의 혈장액 삼출 현상(serous exudation)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의사(D.I. 파레스)는 옴벌레 굴을 식별하기도 하였다. 여러 저자들은 농포(pustule), 종기(abscesses), 태선화(lichenification), '비늘형 딱지(scaly plaque)' 등의 2차적 발현들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한 관찰자(S.J. 래드클리프)는 교과서 수준의 '딱지형 옴(crusted scabies)'에 대한 기술을 하였으나, 그가 관찰한 환자들은 귀환한 전쟁 포로들로서 이런 상태로 발전할 만한 특별한 환경에 놓인 경우였다.

 

6. 몇몇 관찰자들은 발진의 분포가 전통적인 옴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강조하였다. 즉, 복부의 병변과 기부 말단부 및 팔에 나타난 형태, 손과 손가락 사이부분(webspace)에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7. 4명의 피부학자를 포함한 약 절반 가량의 관찰자가 '군대 가려움증'을 옴(scabies)이라고 주장하였다. 한 민간인 의사(파레스)는 환자 대부분으로부터 현미경적 관찰을 통해 옴으로 판정하였다.

 

8. 군대 가려움증의 원인이 옴이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옴에서 나타나지 않은 특성들 및 분포 형상등을 근거로 제시하였는데, 예를 들어 양진 형태의 뾰루지나 태선, 혈장액 삼출, 그리고 황 치료가 '군대 가려움증'에 별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 등을 들었다.

 

9. 많은 저자들은 군대 가려움증이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여 다양한 피부병 및 2차 피부변형이 동반됨으로써, 이 병의 정확한 특성을 밝혀내기 어렵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10. '군대 가려움증'의 처방은 명확하게 기술되거나 특별히 어렵게 기술되었다. 치료에 성공한 사례들은 통상 황 계열 국부 치료에 반응하였으며, 간단한 항 양진제(antipuritic agent)를 추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부 수은 치료 및 국부 비소 치료 역시 상당수 효과를 발휘하였다. 만성적인 경우 대개 치료에 저항성을 갖고 있었는데, 양진성의 2차 변형과 2차 감염이 치료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군대 가려움증' 현상을 맞닥뜨린 당대 의사들은 오늘날 우리들과 같은 조건에 있지 않았다. 대부분 피부학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이었다. 현미경을 이용한 사람은 드물었고, 조직병리학 내지는 미생물학적 조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병의 양태에 대하여 주의깊게 관찰하여 기록하였으며, 오늘날의 피부학자들은 이들의 기록들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군대 가려움증'은 유행성 옴(epidemic scabies)으로서, 이 기생증이나, 벼룩 물린 자국으로 인한 양진, 땀띠(miliaria rubra), 아토피성 피부염, 만성 단순태선(lichen simplex chronicus), 박테리아성 농피증(bacterial pyodermas) 등이 존재하는 조건에서 발병한다. 전쟁 기간 및 전쟁 종료 직후 국가 전역에 '군대 가려움증'을 빠르게 전염시킨 것은 옴(scabies)이었다. 이러한 모든 관련 요소들이 종합되면서 이 병은 치료는 어려우며 발현되는 양진은 대단히 고통스럽게 되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옴약 처방(scabicidal treatment)과 위생 조건의 개선으로 말미암아 미국에서 '군대 가려움증'은 급속도로 퇴치되었다.

 

 

(오늘날 사용되는 옴 치료 로션의 예. 이 약의 경우에는 옴과 그 알을 죽이는데 쓰이는 바르는 약으로, 과다 사용시 발작 내지 사망을 유발하므로, 적정량 바른 뒤 일정 시간 내에 닦아내야 하며 1회 이상 사용하면 안된다고 한다. [10])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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