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강연] 미국 남북전쟁에서의 보급수송 문제 - 영국 국방대학원 (2009.4) [46분]

박용수 2014. 10. 27. 16:18

< 자료출처 : 영국 국방대학원 (Defense Academy of the United Kingdom)
 * 플래시 파일 : (http://www.da.mod.uk/podcasts/22090402-kirkpatrick-logistics.swf/)
 * 음성 파일 : (http://www.da.mod.uk/podcasts/20090402-kirkpatrick-logistics.mp3/) >

 

첨부파일 20090402-kirkpatrick-logistics.wma

(게시판 용량 제한(5MB) 문제로 음질을 낮게 변환하여 올렸습니다. 매끄러운 강연 내용을 듣기 원하시는 분들은 원문 출처 사이트에 링크된 파일을 이용바랍니다.)


제목

Logistics in the American Civil War (미국 남북전쟁에서의 보급수송 문제)


소개글
 Professor David Kirkpatrick looks at the American Civil War from a logistics point of view. He shows the advantage the North had both in manpower and steel production. He considers the problems associated with transporting troops and supplies over long distances, often over poor terrain, using different modes of transport with various interfaces. He particularly focuses on the inadequacies of the railroad in the South. Duration 46 minutes.
 (데이비드 커크패트릭 교수는 미국 남북전쟁을 보급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는 북부 측이 인력과 철강 생산량 측면에서 우위를 갖고 있었다고 본다. 그는 병력과 물자를 장거리 수송하는 데 따른 문제들을 고찰하였고, 지형 문제와 여러 종류의 수송수단 사용에 따른 환적 문제 등이 관련되어 있다. 그는 특히 남부의 철도 수송망이 부적합했다는 점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강의시간 46분.)

 


강의내용

 

(내용 요약:

 1861-65년간 진행된 미국 남북전쟁(ACW) 자체에 대하여 간단한 배경 설명을 하고, 이어 보급과 관련된 요구사항과 당시 사용된 보급수송 수단들에 대하여 논할 예정이며, 이어 보급수송이 작전에 미친 영향들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이어 미국 남북전쟁 당시 보급수송 문제들에 관한 교훈들이 이후 전쟁들에 미친 영향들에 대하여 논하겠으며,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고자 한다.)

 

(내용 요약:

 미국 남북전쟁은 나폴레옹 식 전쟁 - 밝은 군복을 입고 총검 돌격에 많이 의존하는 집단 대형을 이루며, 장교들은 말 위에서 지휘하는 - 에서 1차 대전식 전쟁 - 참호와 지뢰, 철조망의 사용, 전보를 이용한 병력 지휘 등. 단 이 시기에는 아직 철조망은 발명되지 않았다 - 으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는 19세기 중반의 '촉매적 전쟁(catalytic wars)'이다. 이 시기 기술 발전으로는 강선총과 강선포, 참호, 지뢰, 철갑선과 잠수함, 기뢰, 전보 등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이번 강연에서는 보급 측면에 집중하고자 한다. )

 

( 내용 요약:

 미국은 19세기 중반 무렵 노예 문제로 둘로 갈라졌다. 결국 25개 북부 주와 11개 남부 주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총 인구 측면에서 2:1, 백인 군복무 가능 인원에서는 3:1의 큰 차이가 났지만, 무엇보다도 공장 노동자 수의 비율에서 큰 차이가 났다. 남부는 거의 전적으로 목화와 담배, 염료 등의 농업 생산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가 트웰브 오크에서의 바베큐 파티 중에 한 말처럼, 남부 사람들은 용감하고 거만하긴 하지만, 전쟁에 필요한 물자 생산 능력은 갖고 있지 못했다.

 이 전쟁은 미국인들이 겪은 다른 전쟁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은 미국인 사상자를 낸 전쟁이었다. 이는 전투 살상 능력은 급증한 반면, 부상자 치료 및 질병 관리에 필요한 기술은 별로 향상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남부 젊은이들 중에서의 사망자 비율은 영국의 1차 대전 당시의 3배나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남부에서는 이후에도 장기간 적대감정이 남아있게 된다. 남부에서는 이러한 인명 피해 외에도 노예 해방의 영향으로 경제는 완전히 파탄났고, 사회 간접자본들도 파괴되었으며, 가축들은 이동하는 군대에 의해 잡아먹히거나 병들어 죽었다. 군대가 통과한 지역에서는 각종 질병이 창궐했다. 유명한 아포마톡스에서의 리 장군과 그랜트 장군의 항복 협상에서, 리는 그랜트에게 휘하 포병 및 기병대 병사들이 자신들의 군마들을 가져갈 수 있도록 요청하는데, 이는 원래 이들 말들이 군에서 지급된 것이 아니라 대개 개개 병사들이 집에서 가져온 것들이었고, 또한 이를 통해 군인들이 귀향하여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서 전후 복구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랬던 것이다. 다만 이로 인한 결과는 오히려 좋지 않았는데, 군대에서 질병에 감염된 동물들이 남부 전국으로 흩어짐으로써 오히려 전국의 가축들이 전염되어 죽어나가는 역효과를 일으켰다. 차라리 그랜트가 항복한 남부 군대의 말들을 모두 도살하라고 명령했더라면 오히려 남부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남부 사람들의 이에 대한 트라우마는 굉장히 오래 남았다. 1960년대까지 '망할 양키들(damnyankee)"이라는 단어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미시시피 강변의 빅스버그 시에서는 1863년 7월 4일의 빅스버그 패전의 영향으로 2차대전이 끝난 이후까지는 7월 4일 행사(즉,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이 전쟁은 양쪽 전투원 거의 모두가 글을 깨우친 사람들로 이뤄진 첫번째 전쟁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기록들이 남았으며, 아울러 수많은 사진 자료와 기타 유물들이 이후에 미국 본토가 직접 심각하게 공격당한 일이 없었던 탓에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할리우드나 TV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소재로 삼기도 하였다. )

 

 

(내용 요약:

 이것은 미국 동부 지역 지도이다. 붉은색으로 둘러친 것이 11개의 남부 주들이다. 남부 연합으로서는 다른 노예주들인 미주리, 켄터키, 웨스트 버지니아 등도 동참하기를 바랬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특히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웨스트 버지니아의 경우에는 당시에는 버지니아 주와 합해져 있었지만,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남부 연합에 반대하여 웨스트 버지니아로 갈라져 나간다.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 등의 변경 주의 경우에는 내부 의견이 갈려있긴 했지만 결국에는 북부 연방 내에 남게 되는데, 만약 남부 측에 섰다면 남부로서는 인력 공급 측면에서 엄청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내용 요약:

 전쟁 전개는 북부가 채용한 아나콘다 전략(Anaconda; 정글에 사는 커다란 뱀으로, 먹이를 감아 질식시키는 것으로 유명함)을 특징으로 할 수 있다. 워싱턴에서 리치먼드로의 압박, 테네시 및 조지아 주에 대한 침공, 미시시피 계곡을 따른 공세를 통한 미시시피 주 확보 및 북서부 주들의 바다로의 통상로 확보 등의 진격등이 그 일환이었다. 또한 서부 지역에서는 나중에 제시 제임스 등의 무법자가 탄생하는 원인이 되는 정규 및 비정규 습격작전 등의 활동이 있었고, 아울러 멕시코 만 방면 및 대서양 쪽으로의 해상 봉쇄도 이뤄졌다. 노스 캐롤라이나 해안 및 도서 지역으로의 상륙작전 역시도 남부가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

 

 

(내용 요약:

 북부에서 채용한 아나콘다 전략. (1) 워싱턴에서 리치먼드로의 진격, (2) 테네시 및 조지아 주에 대한 침공, (3) 미시시피 계곡을 따라 진행된 상륙작전, (4) 서부 지역의 정규/비정규전, (5) 상륙작전을 동반한 해상 봉쇄

 육군의 특징. 활강 총열을 갖는 머스킷에서 강선총으로의 변화가 있었고, 북부의 경우 후반부에 리피터(repeater; 연발총)를 도입함. 기병은 세이버와 샷건을 사용하게 되었고, 포병은 나폴레옹 시기의 무강선포 외에도 보다 장거리 포격이 가능한 강선포 역시 사용하였음.

 작전지역의 특징. 14개(비록 3개는 분리독립하지 않았지만)의 노예주들의 총 넓이는 800X1400 마일의 광대한 지역임. 일명 와일드 웨스트라고 불리는 텍사스 지역과 주로 늪지대로 구성된 플로리다를 제외한 심장부 지역만 따지게 되면 500X900 마일의 광대한 넓이임. 이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 13개 주의 해안으로부터의 깊이가 200마일 미만에 불과했으나 당시의 초강대국인 영국이 제대로 침입하지 못했다는 점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에도 출발 기지였던 폴란드에서 모스크바까지의 행군거리가 불과 600마일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부 연합 정치가들로서는 자신들의 광대한 영토를 침략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자부할 만한 것이었다. 적어도 이러한 분리독립이 철도가 보편화되기 전인 2~30년 전에 이뤄졌다면 그 말이 들어맞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 남부 정치가들은 철도 혁명이 가져온 보급상의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남부 지형이 다리가 놓여있지 않은 강이나 고개가 적은 산맥, 황무지 등의 다양한 험악 지형으로 나뉘어져 있어 침략군대가 쉽사리 현장에서 보급품을 확보하며 행군해 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도로 측면에서도 별로 좋지 못하여, 소위 로마인들이 턴파이크(turnpike)라고 불렀던 양호한 형태의 도로는 대단히 드물게 존재했다. 이러한 도로는 마차(웨건)이 지나갈 수 있고, 눈사태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사시사철 통과가 가능했다. 당시 전투 문헌을 보면 거의 항상 이러한 턴파이크를 확보하는 문제가 중요한 소재로 다뤄지고 있다. 그 밖의 도로 형태로는 흙도로가 있는데, 봄이나 가을 등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진흙탕이 되어 통행 불가능한 시기가 많았다. 한 사례에서는 노새가 그 위를 지나다가 빨려들어간 사례도 있었는데, 이런 작은 노새도 지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병력이나 마차가 지나가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가끔씩 널빤지 도로(plank road)같은 것도 만들어졌는데, 도로 위에 통나무나 기타 물건들을 깔아 병력 및 마차가 통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통과 자체는 가능하게 되었지만, 이는 병력 및 말들이 발을 다치거나 마차가 충격으로 망가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

 

 

(내용 요약:

 게티스버그 전투를 기준으로 볼 때, 당시 군대는 병력 80000명과 30000마리의 말 및 노새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병사들은 일일 3파운드(약 1~2kg)의 음식과 8파인트(약 4리터)의 상대적으로 깨끗한 물을 필요로 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물과 질병과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려져 있지가 않았다. 그러나 윌슨스 크릭 전투를 공부해 보면, 북군은 북쪽에서, 남군은 남쪽에서 접근하여 숙영지를 차렸는데, 이때 남군의 기병대가 남군 숙영지 내에서 어디에 숙영했는지를 추정해 보라. 경계 목적으로 북쪽에서 숙영했다고 본다면 틀린 것이다. 말의 배설물 문제로 인하여 이들은 하류 지역인 남쪽에 숙영하였고, 이러한 점이 당시 병력 배치에 있어서의 실질적 문제에 속했다. 음식 소요는 항상 일일 3파운드를 다 채우지는 않았는데, 일단 행군 중에 근처 농장에서 닭이나 돼지 등을 약탈해오는 방법도 있었고, 행군 대열에 가축들을 함께 데려가다가 중간에 도살해서 먹는 방법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탄약이나 신발, 옷가지 등을 보급할 필요가 있긴 했지만 식량에 비하면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말은 병사들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을 소모했다. 일일 12파운드(약 6kg)의 곡물과 14파운드(약 7kg)의 마초, 10갤런(약 5리터)의 물을 소모했으며, 말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상태로 계속 유지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마초 소모량은 이들을 방목하면 감소시킬 수가 있긴 했지만, 이럴 경우 그만큼 행군을 못하는 시간 낭비 요소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남북전쟁 당시 전방에 배치된 군마의 예상 수명은 2~3개월에 불과하여 그리 길지 않았는데, 질병 탓이기도 했지만 과로와 제대로 된 관리 부재 역시 원인이었다. 그 결과 300마리 가량을 매일 교체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 외에 편자나 못, 안장 등의 장비들도 보급 소요에 포함되었다.)

 

 

(내용 요약:

 군대의 보급 수단으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마차(웨건)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표준적인 마차의 경우 6마리의 노새가 끌게 되어 있으며, 날씨나 도로 사정 등의 여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평균 3000파운드(약 1.5톤)의 짐을 실을 수 있고, 하루 20마일(약 30km) 가량을 이동할 수 있다. 노새와 마부가 소모하는 음식의 양은 일일 150파운드 가량이지만, 호위대가 붙게 되는 경우에는 더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보급소로부터 군대간의 거리가 어느 정도 이상 벌어지게 되는 경우, 마차는 자체 식량 소요로 인해 대부분의 화물을 길에서 소비해 버리게 된다.

 앞서 슬라이드에서 소개한 형태의 군대는 하루에 대략 450톤의 물자를 소비하게 되는데, 이 군대가 보급소와 충분히 가까운 경우에는 마차 350대로 충분히 보급이 가능하지만, 만약 기지로부터 100마일 떨어진 경우, 즉 왕복 10일이 걸린다고 가정할 경우 총 마차 소요 대수는 7000대로 급증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마차를 동원할 수 있는 운좋은 지휘관은 드물며, 그 결과 군대의 이동 거리는 보급소에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질 수가 없게 된다. 또한 수송대의 이동 속도가 행군에 미치는 영향도 중요한 문제인데, 병력들은 1~2일치의 식량은 휴대하고 행군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이 지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보급 마차가 도착하여 재보급해 줄 때까지는 멈춰있지 않으면 안된다. )

 

(내용 요약:

 철도. 철도야말로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낸 요소이다. 1861년 당시 북부 주에는 총 22000마일 길이의 철도가, 남부 주에는 9000마일 길이의 철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열차 한대는 120톤의 물자를 수송할 수 있었으며, 날씨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또한 자체적으로 소비하는 물자의 영향도 거의 없었는데, 물과 나무만 있으면 가동이 가능했고, 이는 당시의 미국이라면 지천에 널려있는 물자였다. 제대로 철도 운영만 조직한다면 철도 근처에 이런 물자들을 쉽게 집적해 놓을 수가 있었다. 다만 철도 상태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그리 양호하지 못하여 열차 속도는 제약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차의 시속 20마일은 마차의 일일 20마일에 비하면 훨씬 빠른 속도였다. 앞서 언급한 군대가 보급소에서 100마일 떨어져 있는 경우를 가정하면 단지 4대의 기차 만으로 보급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되는데, 이는 마차에 비해 엄청나게 경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철도는 습격에 취약한 측면이 있긴 했다. 그러나 북부 입장에서는 철로를 보수하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며 남부 기병대가 철로를 파괴하더라도, 북부 엔지니어가 수리하는 데 하루 이상 걸리는 일이 없었다. 다만 남부의 경우 예비 철로가 부족하였기 때문에(남부는 철강 생산력이 거의 없었다) 대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습격자들이 철로를 구부려 놓으면 이걸 도로 펴서 사용하곤 했다. 전쟁 후반부에는 북부에서 이를 눈치채고 방법을 바꿨는데, 철로 위에 모닥불을 피워 가열한 뒤에 꼬아버렸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망가뜨린 철로의 경우 압연 공장으로 가져가지 않는 한 수리가 불가능했다. 어쨌든 이런 수리 문제가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철도는 마차 등에 비해 훨씬 덜 취약한 운송수단이었다.)


 

(내용 요약:

 증기선. 통상적인 증기선은 500톤 가량의 물량을 운반할 수 있었다. 다만 보다 큰 배도 있고 작은 배도 있어 철도쪽이 표준적인 화차를 쓴다는 것과는 대비된다. 증기선은 습격에 매우 안전하였는데, 미시시피 강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배를 습격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안개나 얼음, 갈수기 등의 문제에 제약을 받을 수가 있었고,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 가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또한 하류 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반해 상류 쪽으로 이동하는 속도는 느렸다. 어쨌든 증기선을 이용하면 대량 물자 수송이 가능하고 강안에 대한 상륙작전도 가능했다. 이러한 능력은 나중에 언급할 미시시피 강 지역 작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해상에서 운용된 증기선의 경우 폭풍에 의한 손실 문제가 있긴 하였으나, 어쨌든 대량의 물자를 운반할 수 있었고, 남부 연합의 해안선 지역에 대한 상륙작전을 지원할 수가 있었다.)

 

 

(내용 요약:

 환적문제. 환적문제 역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철도나 증기선, 증기함을 이용하여 수송하는 경우, 결국에는 일선 부대에 보급품을 공급하기 위해 철도종점 혹은 연안에서 마차로 옮겨 실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기차들이 잔뜩 도착하고 나서도 정작 종점에는 옮겨 실을 마차가 부족한 경우도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철도 종점에 내려진 채 방치된 물자들이 비에 젖어 못쓰게 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간혹 지역 지휘관이 도착한 열차를 징발하여 임시 창고 등의 목적으로 전용하는 경우도 있었었는데, 이는 전체 철도 수송에 교란이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탁 트인 연안에 물자를 하역하는 것은 느린 과정일 뿐 아니라 위험한 과정이기도 했다.)

 

(내용 요약:

 먼저 북군에 보급 문제가 작전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남부 연합을 점령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던 북군으로서는, 군사력의 우세 뿐만 아니라 진격하는 병력에 보급할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갖출 필요가 있었다. 즉 리 장군의 입장에서는 마차 문제에 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던 반면 그랜트 장군의 경우에는 심각했다. 1864년 윌더니스 작전 당시에 북군은 보급을 위해 4000대 이상의 마차를 동원해야 했고, 워싱턴에서 리치먼드까지의 65마일 길이의 단일 통로 상에 늘어선 마차들을 관리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이러한 보급행렬이야말로 리가 방어에 유리한 태세를 갖출 때까지 북군의 진격이 지연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보급창에 대한 습격이 전체 작전의 방향을 바꾸는 경우도 많았는데, 좋은 예로 1862년 노스 버지니아를 침공했던 포프 장군은 매나서스 교차로에 대규모 보급창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남부 연합군의 습격을 받아 완전히 약탈당하면서 북군은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못하고 결국 후퇴하여 보급선을 재정비 해야만 했다. 그랜트 장군 역시도 1863년 미시시피 계곡의 홀리 스프링스 지역에서 비슷한 문제를 겪었었다.
 한편 1862년 테네시 주 지역 작전에서 북군(Army of Tennessee)은 300마일을 진격하는 데에 단지 2개월이 걸렸는데, 이는 테네시 강과 컴버랜드 강으로 인하여 군대 행군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증기선을 활용할 수 있어 즉각적인 보급이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반면 그 동일한 부대가 실시한 그 직후의 작전에서는 스톤 강에서 채터누가까지의 80마일을 진군하는 데에 무려 8개월이 소요되었다. 이는 수 마일가량 진군한 뒤에는 멈춰서 후방의 철도가 연장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셔먼이 지휘를 맡게 되면서 상황은 바뀌는데, 그는 철도 부설 조직을 개선하여 거의 연속적으로 최전방까지 철도를 부설하도록 했으며, 이에 따라 남군 후위부대가 퇴각할 때에는 북군이 부설한 철도가 보급품을 하역할 때 내는 기적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

 

 

(내용 요약:

 북군은 철도를 보급품 수송 뿐만이 아니라 병력의 전략적 수송에도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2개 군단 병력을 1주일 만에 버지니아주 컬페퍼에서 1200마일 거리에 있는 테네시주 브리지포트까지 수송한 예를 들 수 있다.

 전쟁 극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북부에서는, 남부 연합을 무찌르기 위해서 클라우제비츠가 언급한 것처럼 반드시 야전의 남부 연합 군대를 격파할 필요가 없고, 단지 후방의 보급원을 파괴하기만 하면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에 따라 셔먼 장군은 남부 연합의 경제 기반을 파괴하기 위하여, 조지아 주로의 행군 과정에서 주변의 모든 작물과 철도, 교량, 기타 경제 관련 시설들을 모조리 파괴하도록 하였다. 비슷한 시기 벌어진 셰리단 장군의 셰난도어 계곡 작전에서도 주변의 모든 작물들과 경제 시설들을 철저히 파괴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후 이 지역을 날아가는 까마귀는 자기가 먹을 식량을 스스로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

 

 

(내용 요약:

 이 그림은 남부 연합 철도망이다. 이 철도망은 완전히 전쟁에 부적합하다. 우선 그림의 플로리다와 서부 미시시피의 철도망을 보자. 본선과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내용 요약:

 또한 그린스버그와 댄빌간의 갭이 중요한 전략적 문제를 갖고 있다. 이 갭은 전쟁 초기부터 인식되어 있긴 했지만 전쟁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 갭으로 인해 남부 후방지역으로부터 최전선인 버지니아 지역으로의 물자 이동에 제약이 발생한다.)

 

(내용 요약:

 이러한 수송을 위해서는 우선 몽고메리에서 녹스빌을 거치는 방법이 있는데, 녹스빌은 대단히 취약한 지역으로서 실제 1863년 9월 북부에 함락당한다.)

 

 

(내용 요약:

 다음으로 가능한 경로는 윌밍턴을 지나는 해안 통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는 북부 군대의 해상으로의 공격에 대단히 취약하다. 이 그린스버그-댄빌 갭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쟁 극초반부부터 이미 인식되고 있었지만 해결에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이곳 철로 부설을 위해서는 (철강 부족으로) 다른 곳의 철로를 뜯어와서 부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

 

 

(내용 요약:

 한편 알라바마에도 또다른 갭이 있었고, 이는 대서양 연안 지역으로부터 미시시피 계곡으로의 수송을 방해했다. 이 방향으로의 유일한 통로는 찰스턴에서 멤피스로 가는 길인데, 원형 부분의 코린스가 1862년 3월 함락당하면서 차단되었다. )

 

 

(내용 요약:
 이후에 가능했던 통로는 일단 몽고메리까지 간 뒤에, 남쪽 모바일까지 멀리 우회한 뒤 잭슨을 거쳐 빅스버그까지 가는 방법이 있었다.)

 

 

(내용 요약:

 다른 방법으로 증기선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일단 소마까지 간 뒤에 톰빅비 강을 배로 건넌 뒤, 다시 열차에 탑승하여 움직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경우 절차가 대단히 힘들어진다. 1863년 빅스버그가 그랜트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만약 남부 철도망이 좀 더 효율적이었다면 남부가 시의적절하게 증원군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고, 결국 빅스버그를 성공적으로 지켜냈을 가능성도 있다. )

 

(내용 요약:

 그 외에 남부 철도망이 갖고 있던 문제점으로는 전반적으로 제대로 투자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철로 마일당 투자비용이 북부에 비하여 훨씬 뒤떨어졌고, 비록 해안 지역의 철도에 한해서는 북부 철도와 비슷한 수준이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남부 철도망은 덜 튼튼하고(lighter rails), 복선화율(less double track)이 낮고 기타 지원 설비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훨씬 적은 물량만을 수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보다 심각했던 문제는 유니언 스테이션(2개 이상의 철도 회사가 공유하는 역)에서의 환승 문제였다. 열차로 한 마을에 도착하여 다음 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서는 마을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위치한 역까지 이동해야 했던 것이다. 병력의 경우 그 과정에서 주변의 술집이나 기타 다른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것을 잘 통제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보다 더 힘든 문제가 말에 대한 것이었다. 말들은 통상적으로 땅 위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화차 안에 갖혀있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갖혀있다가 간신히 땅에 내려 신선한 공기를 맡은 말이 마을을 지나 반대편 역에 가서 다시 다른 화차에 적재되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채는 순간 말은 말 그대로 짐승이 되어버린다. 마을 한가운데에 강이 지나고 있는 경우에는 더 문제가 심각했다. 강 문제가 아니더라도 남부 연합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각각의 철도를 연결시키는 것이 훨씬 효율적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디어는 지역민들의 여론에 반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지역에서는 역 사이에 짐을 운반하는 짐꾼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기타 숙박업자나 술집 주인들처럼 마을에서 하룻밤 자야 하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아, 이런 사람들이 마을 의회와 철도 회사에 압력을 넣어 철로간 연결을 방해했다.

 매우 중요한 교차로였던 버지니아의 피터스버그 교차로(붉은 원 지역)에서는 결국 주민들이 마을을 가로질러 철로를 연결하는 것을 동의하기는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는 즉시 철로 연결을 도로 끊으라는 조건을 달았다. 철도회사들로서는 별로 투자할 이유를 찾지 못할 조건이었다.)

 

(내용 요약:

 남부 연합의 보급 시스템. 이들의 플로리다와 미시시피 서부의 철도망은 주 철도망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댄빌/그린버로, 알라바마 지역의 전략적 갭이 있었다. 대서양 연안에서 미시시피로 가려면 멤피스-찰스턴 시스템에만 의존해야 했다.
 이러한 부적절한 보급수송 시스템이 갖고 있던 문제가 가져온 결과들을 살펴보자. 1861년 제 1차 불런 전투 승리 직후, 남부 연합군은 지리멸렬 패퇴하는 북군을 뒤쫓아 워싱턴까지 갈 수가 없었다. 이는 후방 철도망 및 보급창과의 거리문제 때문에 충분한 보급물자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버지니아 지역의 철도망은 대단히 형편없었고, 그 탓에 1862-63년간의 겨울 동안 프레드릭스버그에 위치했던 리 장군의 노스 버지니아군(ANV)은 사실상 굶어야만 했다. 리치먼드에서 프레드릭스버그까지의 단지 50마일 거를 올려보낼 수 있는 기차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탓에 노스 버지니아군의 2개 사단이 버지니아 남동쪽으로 파견되어 햄과 말 등의 물자들을 징발하는데 동원되었던 것이며, 그 결과 이들은 챈설러스빌 전투에 불참하게 된다. 한편 유명한 게티스버그 전투를 앞두고 리 장군은 최소한 2가지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한가지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군사/정치적 목적에 대한 것이었다면, 또 한가지는 보급상의 목표에 있었다. 그는 비옥한 펜실베니아 지방으로 진군함으로써 가축, 곡물, 말, 기타 입수 가능한 각종 보급물자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갖는 중요성을 살펴보면, 게티스버그 서부에서 적이 출현하였을 당시, 그의 군대가 이러한 목적 탓에 분산되어 있었고, 그 결과 효과적인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내용 요약:
 남부연합 역시도 병력의 전략적 수송을 위해 철도를 활용했다. 전쟁 초반인 1861년에도 마나사스에 소규모 부대를 수송했는데, 비록 적었지만 최초의 승리를 쟁취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후 1862년에도 서부 전장인 미시시피 투플로의 병력을 테네시의 채터누가로 수송하는 데에 활용했다. 보다 유명한 사례로는 버지니아 서부에 위치하고 있던 롱스트리트의 군단을 965마일을 수송하여 조지아 주로 이동시킨 경우인데, 이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남부연합의 수송 속도는 낮은 편이었는데, 이는 부적합한 철도 시스템에 기인하며, 특히 서부에서 심했다. 그 결과 대서양 연안 지역에서부터 미시시피 계곡 지역 전장으로의 증원이 늦어져 결국 1863년의 패전을 겪게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포병대와 수송부대가 보병보다 늦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내용 요약:

 미국 남북전쟁에서의 교훈 중 일부는 이후의 전쟁에서도 반복된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에서의 보어 전쟁(1899-1902) 당시 영국인들은 철도와 우마차에 의존했는데, 우마차는 남북전쟁 당시의 마차들에 비해 보다 느릴 뿐만 아니라 또 소는 말보다 훨씬 잘 죽기 때문에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수단이었다. 결국 철도의 중요성이 더 커졌지만, 이 역시도 남아프리카의 철도가 남북전쟁 당시 미국의 철도보다도 더 드물었다는 문제와, 이곳의 철도는 보어인들이 요새화하기 좋은 곳을 몇군데 통과하게 되어 있어서, 보어인들이 이곳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철도를 공격하였다는 점에서 공격부대가 의존하기에는 좋지 못한 수단이었다. 또한 남아프리카의 하천들의 도섭장들이 갖는 특성도 문제였는데, 오랜 기간동안 물 흐름에 의해 형성된 자갈 도섭장은 대규모 우마차들이 통과하면 금세 교란되어 몇 달간은 통과 불가능 지역으로 변해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남북전쟁 당시의 보급수송 문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사례를 보면, 비록 여러모로 불만족스러운 철도이긴 하더라도 대규모의 병력을 기지에서 엄청난 거리의 장소로 운반하고 지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하여 인도 정부에서는 모스크바에서 만주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군대를 지원할 수 있다면, 모스크바에서 카이버 고개(Khyber Pass)의 실질적인 거리도 그리 멀다고 할 수 없으며, 결국 인도 국경에 위치한 군대 역시 쉽게 지원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1914년 독일 군대의 상황을 살펴보자. 이미 남북전쟁 당시 미국인들은 마차 수송대로는 신속히 전진하는 병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으며, 어떤 이유로 이들이 멈춰섰더라도 열차 종점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할 경우 제대로 보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 바 있다. 독일인들 역시 마찬가지 경험을 하였으며, 충분한 속도로 본토의 철도를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 지역까지 확장할 수가 없었고, 이들의 철도 종점이 보급에 적합한 지점까지 연장된 시점은 1차 마른 전투 당시 독일군이 제대로 보급받지 못해 패퇴한 이후의 일이 된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는 차량 수송이 마차 수송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 역시도 상당한 제약 요소가 있었다. 차량 역시도 적재량이 제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운용을 위해서는 연료를 비롯한 각종 석유 제품을 필요로 했는데 이것은 현장 조달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라 들고가던지 기타 적합한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실제로 독일이 전격전에 성공한 전역은 영국 해협이나 프랑스로의 진격, 폴란드 전역 정도인데, 이곳은 대체로 200마일 미만의 상대적으로 짧은 보급수송 거리를 갖고 있었다. 러시아 전역이나 북아프리카 전역 같이 수송 거리가 긴 곳에서는 차량을 이용한 보급수송은 충분하지 못하게 된다. 러시아 전역에서 퇴각하는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철도망 및 기타 시설들을 파괴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이는 독일군의 진격이 전차 사단이 진격할 수 있는 통로로만 주로 움직였다는 점과도 연관이 있다. 독일인들은 자군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철도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러시아 철도망의 궤간을 변경하는 것을 포함하여(러시아 철도는 광궤 철로로 되어 있어서, 유럽의 표준궤도 열차가 통과하기 곤란하다) 복구에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결국 독일 정권이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결심한 것은 이 철도가 충분히 복구된 뒤의 일이 되었으며, 이는 이미 지나치게 늦은 시점이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이 당시의 대서양을 통한 해상 수송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으며, 단지 남북전쟁 당시와 유사한 문제라고 한다면, 해상에서 육상으로의 환적문제, 제대로 길도 나있지 않은 험한 지형 내에서의 수송 문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

 

(내용 요약:

 결론. 보급지원 문제는 미국 남북전쟁 이후로 점점 심각해졌다. 남북전쟁 시기의 1개 사단은 일일 30톤 가량의 물량으로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91년 걸프전쟁 당시의 1개 사단은 활동정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일 2000-6000톤 가량의 물량을 필요로 했다.
 어떤 전쟁에서든지 이상적인 병사는 강인하고 검약한 병사이다. 즉 별다른 편의(comfort)를 바라지 않고 음식도 적게 먹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적인 장비는 가볍고(운반하기 쉽고), 신뢰성있고(부품 교체 소요가 적고), 소모품 소비(탄약, 연료, 건전지 등의 소모)가 적은 장비이다.
 이상적인 보급수송 방식은 빠르고 유연하며, 경제적이고, 교란에 강한 방식이다. 다만 실제의 경우에는 이러한 요소들을 절충한 형태를 띄게 된다. 필연적으로 군대는 여러가지 종류의 보급수송 방식을 동시에 활용하게  되며, 이는 이들간의 환적 문제를 보다 복잡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한편 보급로의 용량은 병목지점에서의 용량에 의해 결정되게 된다.
 본인은 모든 방위 프로젝트에 있어서의 전주기 능력 관리 개념(Through Life Capacity Management, TLCM)에는 반드시 작전에 관련된 보급상의 요구사항들에 대해서 평가하는 부분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국군이 보유한 장비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전개하기 쉽고 보급지원하기 쉬운 장비들이 있는 반면, 기능상으로는 이것과 대등하지만 전개 및 보급지원에 있어 훨씬 부담을 지우는 장비들 역시 존재한다. 평가에 있어서 장비 자체의 능력 외에도 그 장비를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보급상의 노력 문제도 균형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본인은 이러한 점이 TLCM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직까지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여러분과 함께 남은 평생 이것이 반영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

 

(내용 요약:

 질문 1.
 Q. 미국 남북전쟁에서 다른 수송 수단간의 환적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어떠한 특정 군사 조직이 생겨났는지 알려 주십시오.
 A. 실로 북부 쪽에서는 US. Military Railroad라는 조직이 탄생했다. 이 조직 수장은 가이 홀트라는 기업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담당했는데, 철도 전반에 대한 운영과 환적문제를 관장하는 데 있어서 군인들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과 위치에 있었다. 반면 남부 연합의 경우에는 이에 상당하는 조직을 만들려는 노력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남부에 백여 개의 철도 회사들이 존재했고, 각각의 주들 역시 제각각의 독립성의 훼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별로 반기지 않았던 탓에 있다. 그 결과 남부의 철도 운송은 별로 조율되지 못하였고 효율적이지 못했으며, 일부 지역의 경우 민간인 화물 운송이 군사화물 운송보다 더 우선시되는 지역도 존재하였다. 결론적으로 북부에서는 관련된 조직적 노력이 있어 공세의 효율성이 증대된 반면, 남부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내용 요약:

 질문2.
 Q.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터키인들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비정규전을 수행하였다. 남부 연합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한 적이 있는가?
 A. 실로 남부 연합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런 시도를 하였다. 이들은 기병대를 활용하여 북부 수백마일 지점으로 침투한 뒤 철도나 보급창 등을 습격하였다. 이러한 기병대 습격의 난점은 기병으로는 이러한 습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만한 충분한 양의 공병자재를 운반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반면 북부 측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신속히 수리할 수 있는 충분한 조직과 인력, 물자들을 갖고 있었다. 충분한 공학자, 충분한 인부들, 충분한 예비철로 등.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은 일선 병사들 조차도 쉽게 교각 건설이 가능했으며, 주변에 풍부한 나무들을 베어 조잡하지만 거대한 다리를 만들어 내는 모습은 분명 장관이었다. 이는 남부에서 어떠한 교란 시도를 하더라도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셔먼의 진격로의 터널을 폭파한다고 한들, 그의 조직은 금방 비슷한 터널을 2~3개 만들 것이었다. 반면 남부연합 측에서는 비슷한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남부에서는 무기 생산량이 극히 적었으며, 포함에 장갑을 씌우기 위해서 기존의 철로를 뜯어서 사용해야 할 지경이었다. 물론 함선에 장갑을 씌우는 것은 주조 장갑을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남부에는 그에 필요한 철과 이것을 다시 가공할 주조, 압연, 단조 등의 설비가 없었다. 결국 기존 물자를 가지고 임시 변통(improvise)해야 했으며, 이것은 철로를 뜯어서 가져다 붙이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철 부족 현상은 철도 보수에 있어서도 제약을 불러왔고, 북부 습격자들이 남부 철도를 공격하여 철로를 꼬아버리면 전쟁이 끝날때까지도 수리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을 미뤄볼 때,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의 터키군의 입장에 상당하는 것은 오히려 남부 연합쪽이었다고 볼 수 있다. )

 

 

(내용 요약:

 질문3.
 Q. 북부의 아나콘다 전략이 처음부터 시작된 것인가, 아니면 결정적 전술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할 수 없이 발생한 것인가?
 A. 이러한 개념은 전쟁 극초반부 북부 총사령관인 스콧이 이미 갖고 있던 내용이었다. 다방면으로 남부를 압박함으로써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당시 민간인들의 여론은 남부 연합을 종이 호랑이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으며, 단숨에 리치먼드를 공략하여 끝장내야 한다는 여론의 압박이 심각했다. 한편 정치가들도 민간인들과의 문제나 산업적 중요성 외에도 리치먼드를 일종의 정치적 무기로 간주하였으므로, 빨리 공격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워싱턴에서 리치먼드로의 공격이 잇따른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야 아나콘다 전략에 대한 지지자가 늘어나게 된다. 사실 앞서 말한 것처럼 강이나 기타 제약사항으로 이 방면의 보급은 어려웠으며, 우회 상륙하거나 다른 방안을 강구했어야만 했다. 한편 아나콘다 전략이 지지를 받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정치적 고려가 포함되어 있었다. 미시시피 지역을 공략하면 북서부에서 멕시코만으로 향하는 무역로가 개통됨으로써 북서부 주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해상 봉쇄 및 습격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민간인 화물은 압류가 불가능하고 남부 연합 정부의 화물만 압류할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조금만 꾀를 내면 이를 피할 수가 있었는데, 단지 CSA(남부연합)라는 도장과 '미 해군에 의해 압류됨'이라는 도장만 있으면 되었다. 이를 통해 관련 인사들은 짭짤한 수익을 얻을 수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 아나콘다 전략은 정치적으로도, 개개인의 욕심 측면에 있어서도 지지를 받을 요소가 충분했고, 남부로서는 여기에 대항할 적절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남부가 이로 인해 타격을 입었던 큰 사건으로 본다면 1862년 봄 뉴올리언스에서 벌어진 사건을 들 수 있다. )

 

(내용 요약:

 질문4.
 Q. 남부 철도망의 통일된 정도는 어느 정도였는가?
 A. 남부 철도망은 대단히 복잡했다. 궤도 폭(gauge)이 제각각이었고, 같은 궤도 폭을 가졌더라도 회사가 달라지면 환승이 필요했다. 오늘날처럼 통신이 발달되지 않은 시기에 이러한 복잡한 환승 절차를 극복하고 계획하기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늘날까지의 교훈이라고 한다면 이런 보급수송상의 복잡성은 피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