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아프가니스탄 전역

[스크랩] [번역] 러시아-소련의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비정규전, 1993 - `제 4장, 소련의 아프간 침공` (2)

박용수 2014. 10. 27. 16:32

< 원문출처 : 'Russian-Soviet Unconventional Wars in the Caucasus, Central Asia, and Afghanistan' by Dr. Robert F .Baumann, 1993, Leavenworth Papers Number 20, US ISSN 0195 3451, ISBN 0-16-041953-0, Combat Studies Institute,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투의 성격 (The Nature of Combat in Afghanistan)

 

 붉은 군대 분석가 G. 포흐터(G. Pochter)는 중앙 아시아 등과 같은 "미개발 지역"에서의 작전 수행에 관하여 1933년 저술하면서, 산악과 사막이 병참선(line of communication)과 공격 방향, 측면 기동(lateral maneuver) 옵션을 결정하게 되며, 이는 전후방 공히 적용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통상적인 보병은 대체로 수비대 이상의 역할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자연 조건은 항상 부대 규모를 제약하는데, 이에 따라 중앙 아시아에서의 1개 사단(division)은 유럽 전장에서의 1개 군(army)에 맞먹는 중요성을 갖게 된다. 포흐터는 기술(technology)이야말로 이러한 어려움의 일부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보았다. 공군력의 지원을 동반한 기병 습격이야말로 기동성과 화력을 적절하게 겸비한 해답일 수 있었다. 항공기로 살포된 화학무기는 적의 기동을 차단하거나, 계곡 및 고개의 탈출로를 막아버릴 수 있었다. 포흐터는 또한 당시 아직 극초기에 불과하던 헬리콥터에 대해서도, 산악 지역에서 장차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예견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의 경험은 포흐터의 분석 상당부분을 입증해 주었다. 지형과 제대로 수송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등이 대체적인 전투 환경을 결정하였다. 주요 대도시들과 소련 변경을 잇는 고속도로 하나를 제외하면, 이곳에는 도로 네트워크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북부 및 중부 지역의 거친 산악지대에서 현대적인 기계화 부대가 이동하는 것은 대단히 느렸으며, 소규모 무장세력의 차단이나 지뢰에도 취약했다. 당연하게도 역사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침입자들에 대하여 비우호적인 환경이었다. 1842년과 1872-79년, 1919년에 있었던 영국군의 작전이야말로 엄청나게 먼 지역에 재래식 군대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을 갖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영국군은 병참선을 확보하거나 야전 부대를 제대로 보급하는 측면에 있어 반복적으로 실패한 바 있다. 아프간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싸웠으며, 자신의 군대가 압도적인 영국군의 집중 화력에 노출되어 격파당하는 일은 피했다. 그 결과 영국군은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다 항복하거나 전멸하곤 하였다.

 

 최근의 아프간 전쟁에서, 소련군 규모는 대체로 80000명에서 115000명 사이를 유지하였으며 6개의 군사지역(military zones)으로 조직되었다. 또한 투르케스탄 군구(Turkestan Military District)에 기지를 둔 30000명에서 50000명 가량의 병력들의 지원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DRA) 군대를 합하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유효 전투력은 약 150000명까지로 증가하게 된다. 소련의 역사가 V. G. 사프로노프(V. G. Safronov)에 따르면, 소련군과 DRA 군대의 총 병력은 400000명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모든 종류의 민병대들을 포함한 것으로, 그리 신뢰할만한 수치는 아니다. 소련 개입 초기 단계의 소련군에는 중앙 아시아계 예비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포함된 이유는 아마도 작전 지역과 지리상 근접해 있었다는 점과, 또한 인종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주민들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러 산발적인 보고에 따르면, 이런 부대들의 경우 의외로 능률이 별로 좋지 않았고, 아프간 주민들과의 친목은 오히려 규율해이로 이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사프로노프는 가장 중요한 난관의 원인은 아프간 파슈툰족과 북부 부족들간의 전통적인 적대감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전쟁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소련군 부대는 대체로 슬라브계 및 기타 소련 내 유럽계 사람들로 구성되게 된다. 많은 훈장을 받은 한 소련군 병사의 추산에 의하면, 아프간에 주둔한 병력의 70퍼센트는 슬라브계였다고 한다. 그는 비록 중앙 아시아계의 과업수행 능력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리 대단하게 보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는 타지크인들이 가장 우수한 전사라고 꼽았다. 다른 사람들의 보고에서는 러시아계와 비러시아계 병력간의 심각한 갈등을 보고하고 있는데, 특히 우즈벡인들이 문제였다고 하였다.

 

(한 무자헤딘 병사가 노획한 소련군 전차병 복장을 하고 소련제 대전차무기를 휴대한 모습이다.)

 

 소련군 기계화 보병(motor-rifle units)의 대다수는 점령 임무에 종사하거나, 종종 재래식 대형을 갖추고 저항군 지배지역에 유린공격(sweeps)을 실시하는 데에 투입되곤 하였다. 제 40군 사령관으로서 종전을 맞았던 B. V. 그로모프 중장(Lieutenant General B. V. Gromov)에 의하면, 소련군의 30~35퍼센트가 경비 임무(security missions)에 투입되었다고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오는 전투 지원(combat support)은 사단급 이상 제대에서 통제하였는데, 이에 따라 이 지역에 흔하였던 소부대 활동에 대해서는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정찰 혹은 전방 경계 임무를 수행하는 데 많이 투입되던 부대인 공수부대(Airborne and assault units)들의 경우 대체로 훈련 정도가 보다 우수하였으며, 전장 상황 변화에 보다 잘 반응하였고, 독립 작전시 보다 잘 활약하였다.

 

 

항공전력 (Air Power)

 

 소련의 항공 전력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투에 있어 가장 선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 크리스마스 당시 카불로의 셔틀 수송에는 200여대가 넘는 An-12 및 An-22 수송기가 활용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기갑 차량과 병력 수송차량, 기타 장비들, 약 5000명의 병력들이 수송되었다. 하지만 참호에 숨은 저항군이 존재함이 드러났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전투 항공 부대의 영향력이 진정한 가치를 입증하게 된다. 무자헤딘들이 지상 이동 행렬을 매복 공격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한편 방어 진지의 이점을 잘 활용하는 상황에서, 소련측에서는 공격적인 항공 지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여러 해에 걸쳐 소련군 파일럿들은 기껏해야 소구경 화기나 노획 무기들로 구성된 무자헤딘의 방공망에 별로 신경쓸 필요 없이 반란군 목표들을 박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점차 반군들이 현대적인 대공포나 SAM-7 등을 획득하기 시작하고, 훨씬 나중에는 스팅어(Stingers)나 블로파이프(Blowpipes) 같은 첨단 무기들을 확보하게 되면서 지상 대 항공 전투는 점차 반군측에 유리해지게 된다.

 

 군사 발전의 맥락에서 볼 경우, 소련군이 다양한 전술 임무에 헬리콥터를 투입하게 된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제병 합동전 개념(concepts of combined arms warfare)을 세련화시킨 중요한 단계로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지상군의 접근도 힘들고 고정익 항공기의 착륙장도 얻기 힘든 거친 지형 등에서, 헬리콥터를 공중수송(airlift)을 위해 유연하게 활용한 점은 특히 중요했다. 소련군은 지형 제약을 극복하기 위하여, 병력, 보급품, 장비 등을 수송하는 데에 Mi-6 훅(Hook), Mi-8 힙(Hip), Mi-26 할로(Halo) 등의 헬리콥터를 활용하였다. 물론 대규모 물자를 운반하는 주요 수단은 계속 도로 및 송유관이었다. 전쟁 상당 기간 동안 포위 속에 있었던 코우스트(Khowst)의 정부군 전초기지의 경우, 항공 재보급이 없었다면 생존할 수가 없었다. 소련군은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데에 Mi-6를 상당히 많이 활용하였다. 한편으로,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산악 지대에서의 특징인 희박하고 가열된 대기 조건에서는 상당히 힘들고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다. 소련 군사 간행물에는 종종 중량물 운반에 관한 문제들이 실리곤 하였는데, 특히 좁은 협곡 등에서 이착륙 하는 과정이 문제였고, 이는 조종사 훈련에 관한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물들은 무거운 체인이나 외부 슬링에 매달게 되는데, 어떤 조건에서든지 항상 주의하여 다뤄야만 했다. 종종 화물이나 헬리콥터를 상실하게 되었는데, 바람이나 하강기류, 계곡 벽면에 반사된 헬기 로터 자체가 발생시킨 기류, 화물 조작 과정에서의 항공기의 흔들림 등이 원인이 되었다. 한 소련측 언급에는 반사된 공기 흐름이 헬기의 테일 로터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하여 소개하였는데, 이로 인해 헬기가 공중에서 180도 돌아가게 되고 화물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릴라 대장장이가 쇳조각들을 이용하여 전투용 물품을 만들고 있는 모습.)

 

 소련 헬리콥터들은 지상군 행군대형을 호위하거나, 경계 임무를 띈 소규모 부대를 전방 투입 시키는 등에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계획된 행군로 측면 지점에 부대들을 배치하는 것은 전쟁 대부분 기간 동안 표준 절차였다. 이러한 부대들은 통상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지대에 위치하여 저항군으로부터 행군부대를 차장하거나, 혹은 저항군 부대를 뒤로부터 고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행군부대가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이 부대들은 또 다른 전방 지점으로 다시 공중수송되곤 하였다. 항공기는 또한 지상군을 위하여 연막차장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포병에 대한 전방 통제 임무(forward controllers for artillery)도 잘 수행하였다.

 

 1984년에 이르면 소련군의 항공 작전에서는 분명 지대공 미사일을 염두에 둔 전술 행동들을 취하게 된다. 6기의 항공기로 이뤄진 다음과 같은 특징적 공격 패턴을 살펴보자. 2대의 Mi-4 헬기가 적진을 로켓과 기관총으로 소사한 뒤, 이어 4대의 Mi-24 하인드 헬기가 사격을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전술은 특히 지상군에게 효과가 강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Mi-4는 이 과정에서 공격 목표지점 상공을 선회하면서 기만용 플레어를 살포하게 된다. 또 다른 패턴으로는, 2대의 Mi-24와 4대의 Mi-8이 소위 1-4-1 대형으로 이동하는 것이 있다. 이 사례에서는 후기형인 Mi-24 "D"형 및 "E"형에 4연장 12.7mm 기관포와 57mm 로켓을 장착하였다. 헬리콥터들은 비행장 경계에 있어서도 큰 책임을 맡았다. 헬리콥터들은 카불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모든 항공기들에 대하여 호위를 실시하였고, 혹시나 있을 수 있는 반군의 미사일 공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기만기(decoy)를 발사하였다. Mi-24는 전투 병력(assault troops)을 수송할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전쟁 내내 가장 활용도가 높은 헬기였다. Mi-24 전술은 2대가 짝을 지어 활동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는데, Mi-24 한대가 착륙 혹은 기타 노출되는 활동을 하는 동안, 나머지 한대가 그 뒤를 엄호해 주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취약성을 줄이기 위하여, 조종사들은 아프간에 흔한 높은 지형(prominent terrain features) 따위의 뒤에서 혹은 근접해서 기동하는 기술 등을 익혔다.

 

 이러한 지상 대 공중 전투에서 소련군과 무자헤딘 모두 각각 자신들의 전술들을 발전시켜 갔다. 1982년 8월 3일, 소련 해군 소장 T. 가이다르(Soviet Rear Admiral T. Gaidar)는 프라우다(Pravda)지에 판시르 작전(Panjshir campaigns) 과정에서 소련군 헬리콥터를 공격하는 방법을 다룬 무자헤딘들의 전술 교범을 발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문서는 사실 수채물감(watercolor)으로 그려진 개념도 형태였는데, 좌우간 내용은 소련군의 헬기 1쌍이 계곡으로 들어오면, 우선 첫번째 헬기는 통과시킨 뒤 2번째 헬기가 들어와서 선회를 시작하는 시점에 공격하라고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면 조종사 입장에서는 지상 어디에서 사격이 개시되었는지를 확인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헬기 한대를 목표지점 훨씬 높은 곳에 위치시켜 적의 화력을 유인한 뒤, 나머지 한대로 적 화기의 발사지점을 공격하는 전술을 쓰기 시작했다. 고정익 항공기들의 경우에도 1쌍으로 작전할 경우 동일한 전술을 사용하였다.

 

(고지 정상부의 진지에 위치한 아프간 게릴라들이 소련 헬기가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아프간 전쟁 앞쪽 절반 시기에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헬리콥터의 숫자가 급속도로 증가한 점은 이들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 주는 사항이다. 서방측 추산에 따르면, 1980년 1월에서 9월 동안, 소련군 헬리콥터의 숫자는 15~20대였던 것이 250~300대로 증가하였다. 한 추계에서는 1984년 당시 소련군은 132대의 Mi-24와 105대의 Mi-8 및 Mi-17, 37대의 Mi-6, 기타 소수의 Mi-2 및 Mi-4를 배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아프간 공군 역시도 약 150대의 Mi-8 및 Mi-24 헬리콥터를 보유하였다.

 

 무자헤딘들이 점차 양질의 방공시스템을 획득하게 되면서, 소련군 조종사들 입장에서 전투 환경은 점차 악화되어 갔다. 전쟁 초기, 하인드 "A"형과 "B"형 모델들은 메인 로터와 테일로터, 터빈 흡입구, 동체 하부 연료탱크 등이 지상군 기관총 사격에 취약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어 등장한 "C"형과 "D"형, 기타 이후 모델들의 경우 방탄 유리 및 측면 방호판 등을 도입하여 조종사 방호를 크게 향상시킨다. 이러한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소련 조종사들은 종종 대단히 위험할 정도로 예측 가능한 행동들을 하기도 했다. 한 소련 언론인의 주장에 따르면, 1988년의 한 지역에서는 지상 관측으로 헬리콥터 비행 시간 간격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저항군이 획득한 재래식 대공무기는 매년 대략 20여대의 소련 헬기를 상실케 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 초기에 게릴라들이 갖고 있던 주요 대공무기는 중국에서 복제한 소련식 ZPU-1 14.5mm 방공 중기관총, 12.7mm DSHK 기관총 등이었다. 이 화기들은 예전에 북베트남군에서 미군 항공기에 대응하여 효과적으로 활용한 바가 있다. 1985년이 되면 스위스제 오리콘 20mm 대공포(Oerlikon 20mm antiair cannon)가 등장하는데, 보다 효과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55파운드 패키지로 쉽게 분해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저항군은 저공 표적에는 로켓 박격포(rocket mortars)를 사격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3년이 되면 무자헤딘들이 상당수의 SAM-7을 획득하게 되며, 이는 즉각적으로 결과가 나타난다. 서방측 보고에 따르면, 소련군은 한 작전에서만 8대의 Mi-8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소련군은 재빨리 Mi-24, Mi-8, Mi-4 헬리콥터에 플레어 발사기를 설치하는 한편, 엔진의 열 발산을 차폐하기 위하여 엔진 실드를 장착하게 된다. 또한 보다 직접적인 대책으로 소련군은 헬리본 부대를 투입하여 방공포 진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고정익 항공기들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에 큰 기여를 하였다. MiG-21은 전쟁 초기에 분명 상당수 투입된 것이 확실하지만, 한 관측가의 설명에 따르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이어 MiG-23 전투기, MiG-27, Su-17, Su-25 공격기가 투입되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과를 낸 것은 Su-25 프로그풋(Frogfoot) 공격기였으며, 미국제 A-10 공격기와 비슷한 근접항공지원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항공기는 점표적을 타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선호도가 높았다. 아음속으로 순항이 가능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소련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일명 "그라쉬(grach)"(rook; 띠까마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Su-25는 실전에서 생존성이 엄청나게 우수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조종사들은 지대공 미사일에 대하여 보다 향상된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Su-25는 "포복비행(nap-of-the-earth flight)" 전술을 사용하였으며, 저공에서도 폭탄 투하가 가능케 하는 드롭 슈트(drop chutes)를 활용하여 집속탄(cluster bombs)을 쓸 수가 있었다. 마수드 스스로도 Su-25의 능력이 "환상적(fantastic)"이라고 시인한 바 있다.

 

(Su-25 프로그풋 공격기. 무자헤딘에 대한 공격을 통해 그 유용성을 입증하였다.)

 

 Tu-16 폭격기는 헤랏에 대한 융단폭격 당시 첫 선을 보인다. 이 기체는 다수의 고공 폭격을 실시하였으며, 이후에 벌어질 전폭기, 헬리콥터, 포병에 의한 공격을 위한 준비단계로 실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984년에는 36대의 배저(Badgers) 폭격기가 판시르 계곡에서 매일 30에서 40회의 공습을 실시하였다. 몇몇 보고에 의하면, 소련군 전폭기 조종사들은 고공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일반적으로 전방 항공 통제사 없이 작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또한 항공기가 야간이나 악천후에서 공격작전 수행이 곤란했던 점도 약점이었다.

 

 비록 소련공군의 전술 사령부가 테르메즈에 위치하고 있긴 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모든 소련군 항공기는 카불에 있는 제 40군 사령부로부터 직접적으로 통제받았다. 방호 및 정비 문제 탓으로, 소련군 중형 폭격기들은 지원설비가 있는 테르메즈에 주둔하였다. 아프가니스탄 내에 있던 주요 공군 기지들은 바그람(Bagram), 마리(Mari), 카르쉬-카나바드(Karshi-Khanabad), 헤랏, 신단드, 파라(Farah), 라쉬카르 가(Lashkar Gah), 세르덴 반드(Serden Band), 아스카르그(Askargh), 칸다하르 등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도 11 참조). 아프간 공군에는 대규모 구식 소련제 항공기들이 있었다: Mi-21 약 45대, Su-7 65~70대, 1953년산 MiG-17 90대였다. 아프간 공군에서 갖고 있던 가장 최신 소련제 항공기는 1971년형 Su-22 45대였다. 모든 아프간 조종사들은 소련군의 작전통제를 받았다.

 

 미제 스팅어 대공미사일과 영국제 블로파이프 대공미사일이 출현하면서, 소련 및 아프간군 항공세력은 즉각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Tu-16 중형 폭격기 및 Su-24 공격기의 경우, 전쟁 초반에는 상대적으로 저공인 2000에서 4000피트 상공에서 폭탄 투하를 하였지만, 이제부터는 10000피트 정도 상공에서 비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곧바로 폭탄 명중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Mi-24 및 Mi-25 헬기 조종사들도 직접적인 전투에 참가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감소하였으며, 참가하는 경우라도 목표 지점까지 가능한 빠르고 저공인 통로를 사용하게 된다. 지상 지원팀들은 정기적으로 이착륙 항공기들을 보호할 대책들을 실시하였는데, 예를 들어 박격포로 플레어를 발사한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어쨌든 소련 항공기들의 전투 환경이 급격히 변화한 것은 소련 및 아프간 민주공화국의 지상군에게는 나쁜 징조였고, 이제는 이들에 대한 항공지원이 전무한 경우가 잦아졌다. 한 서방측 설명에 따르면, 1987년 스팅어 미사일로 인하여 코우스트에 포위된 수비대에 공중 재보급이 막히는 바람에, 지상군을 동원한 구출작전이 실행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87년 봄 팍티아 주에서 벌어진 작전에서는, 항공지원 결여로 말미암아 소련군은 적에게 공격 받았을 때 장갑차를 버리고 소규모 부대로 분산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스팅어가 도입되기 전에 일부 전문가들은,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게릴라들로서는 발사에 필요한 18단계 과정이 너무 복잡하여 제대로 쓸 수 없으리라 보았지만, 실전 결과는 그와 달랐다. 1987년 당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군대는 150에서 200대의 항공기를 상실하였고, 이에 따라 주간 비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반면, 무자헤딘의 경우에는 이 비싼 스팅어에 대하여 사격량 통제를 하는 데에 문제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소련 문헌에 따르면, 적어도 한 반군 집단에서는, 스팅어 3발을 쏘고도 항공기 1대도 격추시키지 못할 경우 사형에 처하였다고 하고 있다. 상당히 먼 거리에서 무려 마하 2.2 가량의 속도를 내며 기동하는 스팅어 미사일은 특히 저속의 헬리콥터에 치명적이었다. 또한 게릴라들은 높은 곳에서 발사한다는 이점도 갖고 있었는데, 이로써 보다 적기에 사격하기 좋은 각도를 갖게 된다.

 

 비록 스팅어와 블로파이프가 아프가니스탄 전쟁 자체를 끝장낼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지만 (힘들긴 하지만 회피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어쨌든 이 무기들이 소련군의 공중 작전을 심각하게 감소시킨 것만은 확실하다.

 


지상전 (Ground Combat)

 

 소련군은 특히 공수부대나 항공강습부대(airborne or air assault forces)와 같은 소규모 부대에 의해 벌어지는 아프가니스탄 지상전 과정에 있어서, 산악 전투와 관련된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문제들과 재회하게 되었다. 19세기 코카서스에서 러시아군 전사들이,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붉은 군대 병력들이, 좀 더 최근에는 대조국 전쟁(Great Patriotic War; 제 2차 세계대전, 역주) 당시 코카서스와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소련군이 이미 산악전에 관하여 많은 중요한 원칙들을 배운 바가 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초기 시기를 살펴보면, 야전에 전개된 소련군이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여 제대로 훈련받았다는 증거를 찾아보기 어렵다. 무자헤딘 지휘관이었던 알리 아흐메드 잘랄리(Ali Ahmad Jalali)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 초기 시기, 소련군은 자신들의 기계화 차량들에서 하차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소련군은 필수적인 전술 정찰 및 경계 기술에 결여되어 있어서 쉽사리 매복공격을 당했다고 한다. 마수드가 1983년에 실시한 인터뷰에 따르면, 소련군의 중장비 및 느린 이동속도를 언급하면서 "소련군 병사들은 산악전에 대비해서 그리 효과적으로 훈련되어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마수드는 다만 엘리트 헬리본 부대들의 활약에 대해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내비친다: "저들은 우리들에 대항할 용기와 산을 신속하게 오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저들의 약점은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저들은 강하하여 손실을 보면 즉각 퇴출한다." 직접 교전보다는 매복공격을 선호하는 강인하고 약삭빠른 적에 대처하기 위하여 소련 병사들은 새로운 전기 전술을 배워야만 하였다.

 

 산악 지대에서의 공격 전투는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엄청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방자, 특히 환경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방자의 경우, 공자의 진격에 대비하여 이상적인 진지를 골라 적의 접근로나 사격 방향을 제한시키고, 드러나지 않은 채 기다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카르파티아 지역에서 성공적인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친 소련군 장성 N. N. 비아찌(Soviet General N. N. Biazi)는 전쟁 직후에 발간한 산악 작전 연구서에서, 의지와 수단을 갖고 있는 공자에게도 기회가 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복잡한 지형과 계곡, 끊어진 전선(front line) 등이 가득한 산악 지형에서는 소규모 부대에 의한 공세 작전이 유리하다... 이러한 환경은 소규모의 단호하고 용감한 병사들에게 오히려 힘이 된다... 공세의 성공은 주의를 기울이고, 은밀하게 이동하며, 정보에 앞서고, 대담한 행동 계획을 세우며, 기습 공격을 실시하며, '적을 가차없이 파괴하고 점령한 지점은 즉각적으로 강화하는 것'에 달려 있다.


 1989년 당시 그로모프 중장 스스로도 카르파티아 산맥과 코카서스에서의 전훈이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통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아프간 전쟁 당시, 소련군은 완벽한 준비를 갖춘 사람들만이 이러한 힘든 활동을 수행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되었고, 곧 군사 출판물들의 훈련 관련 기사들에는 산악전에 관련된 교훈들이 중요하게 반영되기 시작한다.

 

 소련의 저술가들은 훈련에 있어서 특정한 개인적 성격을 북돋워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특히 초급장교 및 부사관들에 있어 중요하다고 하였다. 수보로프(Suvorov)의 격언인 "훈련은 힘들게, 전투는 편하게"라는 전통을 따르는 소련군에서는, 육체적 단련(physical fitness)을 강조하였다. 엄선된 육상 종목들, 예를 들어 크로스 컨트리나 강행군(forced marches), 장애물 달리기, 역도 등이 표준 훈련 과목에 포함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지역과 비슷한 고도에 위치한 트란스코카서스 군구나 중앙아시아 군구에서의 훈련 프로그램들도 많은 시사점을 제시해 주었다. 예를 들어 상태 좋은 병사라도 산악 지대의 환경 적응에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관찰에 근거하여, 훈련시에는 병사들이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였다. 목표는 병사들이 거친 지형에서 더 잘 활동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엄혹한 풍토에서의 질병 예방을 위해서는 개인 위생을 강조해야 했는데, 이는 육체단련(fitness)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요소였다.

 

 육체 단련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또한 자주 언급되는 덕목이 기강(discipline)이었다. 비아찌의 언급에 따르면, 전설적인 러시아 장군인 A. V. 수보로프가 알프스를 넘는 위업을 달성할 당시, 휘하 병사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지는 않았으나, 기강은 굉장히 잘 서있었다고 하였다.

 

 전투 기강(combat discipline)에 대하여 소련 특파원 G. 보차로프(G. Bocharov)가 언급한 내용을 소개하면, 신병과 베테랑의 차이는 신병은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을 금방 믿지 못한다 - 따라서 빨리 반응하지 못함 - 는 점에 있다고 하였다. 반면 베테랑은 "산악에서는 반응(reaction)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소련군의 훈련 내용에는 실제 전투 소음을 동반케 함으로써, 병력들이 전투에 직면하였을 때 혼란에 빠질 가능성을 최소화시켰다. 산악전 훈련에 관한 소련 문헌들은 무엇보다도 "주도성(initiative)"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도성은 확실히 초급 장교들과 부사관들에 있어서 항상 부족한 성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산악 지대에서는 병력 및 부대들이 자주 분산된 대형으로 전투에 임하게 되며, 지형과 기상 조건 등으로 인하여 통신이 두절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급 장교 및 부사관들은 반드시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우회 공격이나 포위 기동을 실시하는 경우, 주야를 막론하고, 지상군이거나 헬리본 부대이거나를 막론하고, 자체 의존성(self-reliance)이 대단히 큰 가치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공수부대(airborne) 및 공중강습(air-assault) 부대의 경우 특히 강력한 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저항군이 바라본 이러한 부대들의 약점은, 게릴라 부대들과는 달리, 이러한 소련 엘리트 부대들은 재보급 없이는 3~5일 이상을 전장에서 유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소련측에서는 이러한 부대들을 잘 활용하였고, 아프가니스탄에 최대 5개의 공중강습 여단을 유지하게 된다.

 

(매복작전을 통해 노획한 소련군 장교의 상의자켓을 뽐내고 있는 무자헤딘 게릴라의 모습)

 

 소련측의 훈련 문헌에서 식별되는 또다른 어려움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는 병사들에게 산악전의 운동성(dynamics)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부분이 있었다. 1981년에 발간된, 한 실패한 중대 기동 사례에 관한 서술은 이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알려주는 문헌이다. 이 글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아프가니스탄에 특징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 한 차량화 소총 중대가 산지의 방어진지에 위치한 적과 조우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조우전에서 지휘관은 휘하 3개 소대 중에서 2개 소대를 적의 뒤로부터 포위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보유한 장갑수송차량이 지정된 경로로 기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적군은 자신들의 정면에 단지 1개 소대만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반격을 실시하였다. 저자는 이 사례를 들어 산악전에서의 근본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지휘관은 결심 수립 과정에서 틀에 박힌 방책을 수립하는 것을 피해야 하며, 반드시 예측하지 못한 전개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상황에서는 포위기동 부대의 움직임은 반드시 적으로부터 은폐되어야 한다. 저자는 또한 공수부대는 종종 이러한 포위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소련군 중령 A. 슐긴(Soviet Lieutenant Colonel A. Shulgin)이 쓴 "산악에서의 전투(Battle in the Mountains)"(Voennyi vestnik, 1985)에 따르면, 주공 방향을 반드시 은폐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정면 기동이 아닌 협조된 측면 공격이야말로 산악전을 승리로 이끄는 핵심 요소라고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연막탄 사용이 흔했으며, 소련 공수부대와 공중강습 부대들은 매복과 야간 공격에 특기를 보여주었다.


 

(4장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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