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Russian-Soviet Unconventional Wars in the Caucasus, Central Asia, and Afghanistan' by Dr. Robert F .Baumann, 1993, Leavenworth Papers Number 20, US ISSN 0195 3451, ISBN 0-16-041953-0, Combat Studies Institute,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
(4장 계속)
슐긴은 또한 능숙한 정찰의 중요성과, 공격시 보병과 포병간의 협조에 대해서도 강조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정찰에 관해서는 적지 깊숙한 곳에 전방 선견대(forward detechment)를 활용하거나 혹은 부대를 공중수송하여 주요 고개나 감제 고지를 장악하게 한다고 소개하였다. 정찰부대는 적군을 식별하고 이들의 배치를 분석하여 지형 내의 "사각지대(dead ground)" 혹은 숨겨진 접근로를 찾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동일한 문제를 방자의 입장에서 관찰한 소련 전술관련 문헌들에서는, 유럽 평원에서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감시초소(observation posts)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감제고지를 탈취한 뒤에도 이곳으로 향하는 접근로들을 모두 감제하기는 어렵거나 불가능하며, 따라서 산 정상부 외에도 추가적으로 여러 외곽지점에 초소들을 설치하여야 모든 접근로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다.
비아찌는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 당시의 정찰활동을 설명하면서, 여기에는 통상 공병 몇명이 포함된 15~ 20명이 동원되었고, 3각대형(triangular formation)으로 전진하되 선두와 후미에는 각각 2명씩 한 조를 이룬 인원이 배치되었다고 하였다. 적과의 접촉이 이뤄지게 되면 이들은 접전을 회피하고 퇴각하거나 적의 후방으로 침투하도록 훈련되었다. 산악전 훈련과 관련된 최근의 소련 문헌들은 obkhodiashchie otriady(침투 분견대, infiltration detachments)에 대하여 인용하고 있는데, 이 부대의 목적은 적 후방에서 다양한 임무들을 수행하는 데에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중대급 혹은 대대급의 포위 분견대(enveloping detachment)는 대단히 흔했다. 고갯길이나 기타 전술 목표물에 공중기동부대들이 자주 활용되었다. 포위임무(enveloping missions)를 수행하는 제병협동으로 증강된 1개대대(a combined-arms-reinforced batallion)는 통상 1개 차량화보병대대(motor-rifle battalion), 1개 전차중대, 포병, 1개 박격포대, 1개 방공중대, 1개 대전차중대로 구성되었다. 한세기 반 이전 무렵 코카서스 지방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대들과 마찬가지로, 소련군 또한 매복공격에 대처할 수 있는 행군대형을 발전시켰다. 통상 본대 전방 15~ 20킬로미터 지점에 정찰대(reconnaissance patrol)가 활동하였으며, 본대 전방 2~ 3킬로미터 지점에도 경계부대(security element)가 위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3개의 강화된 대대들은 여단 지휘하의 1개 연대처럼 기능할 수 있었다.
1980년 쿠나르 강 부근에서 벌어진 특정한 사례를 살펴보자. 1개 소련군 차량화보병대대가 산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대규모 무자헤딘들이 정부군 1개 대대를 고착시키고 있던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지뢰와 장애물들이 이들의 이동을 지연시켰다. 공병들이 도로를 개척하고 있는 동안, 대대 일부 병력들이 전방 경계부대 없이 산사면을 따라 전진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금세 적의 사격하에 놓이게 된다. 대대장은 이에 1개 중대를 파견하여 최인접 감제고지를 점령케 한다. 무거운 장구류의 부담과 함께 강력한 화력지원이 부재한 상태에서 소련군은 전진을 계속했다. 반군들이 퇴각하기 시작하여 소련군 중대가 추격하였으나, 적의 살상지대(killing zone)에 빠져들게 된다. 포병 통제관(artillery controller)이나 항공연락관(air liaison)이 없는 상태에서 소련군 중대는 화력지원을 유도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포위분견대가 고지를 후방으로부터 공격하고 나서야 무자헤딘들은 진지에서 퇴각하였다. 중대급에 포병관측요원 및 항공연락요원을 배치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아프가니스탄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된 수많은 문제들 중의 하나였다. 차량화보병중대에는 추가 화력기능이 포함되었으며, 여기에는 AGS-17 고속유탄발사기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분대 및 소대에도 BG-15 유탄발사기가 배치된다. 이 외에도 소부대에 보다 발전된 통신시스템들과 공병지원이 이뤄진다. 이러한 자산 통합에도 불구하고, 소련측 훈련문헌에는 포위지원(supporting envelopment)을 실시하지 않고 산악 거점을 공격하게 될 경우, 5:1의 수적 우세에도 공격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1987년 한 소련 군사분석가가 언급한 바를 살펴보자: "현대의 제병협동 구성부대(combined arms subunits)들은 전차, 포병, 또는 육군항공 등으로 강화되어 있으며, 다양한 방향으로부터의 공격이 가능하고, 사격과 기동을 조합할 수 있으며, 광범위하고 밀접한 포위공격(wide and close envelopment)을 실시 가능하고, 포위분견대를 이용하여 상호 지원이 가능하며, 전술 공중강습(tactical air assault landing)이 가능하다... 이러한 협조된 활동으로 공자는 항상 짧은 시간 내에 최소 피해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아프간 전쟁에서의 포위분견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할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화학무기의 사용에 관련해서는 그렇다고 할 수가 없다. 현재까지 있어서의 아프가스탄에서의 소련측 활동 중에서 가장 논란이 심한 측면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전쟁 초기 광범위하게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측에서 무력화가스 혹은 살상용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주장 - 대체로 난민들의 증언이나 소수 서방 언론인들의 증언들, 방문 의학자들의 부상자 및 사망자 검사 등에 근거하고 있다 -은 확실한 물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문제 때문에 과학계나 언론계에서는 확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소련측에는 이러한 화학작용제의 전술적 사용방식에 관한 기술이라거나 보고서 등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이들은 이러한 사용 주장에 대해서 꾸준히 부인하고 있다. 만약 화학작용제나 생물학독소 등이 실제로 사용되었다면, (막연히 대중에의 공포 조장 측면을 제외한다면) 분명 특정한 전술적 목표, 예를 들어 소련군-DRA군의 측방 방호라거나 게릴라 기동의 차단(이는 반세기 전 포흐터가 제시했던 시나리오와도 일치한다) 따위의 것들을 위하여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관련된 보고들에서는 또한 고엽제(defoliants)의 사용도 암시하고 있다. 진실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전쟁 중반에 이르게 되면 화학작용제 사용으로 보고된 건수는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보다 확실한 요소였던 포병의 경우에는, 무자헤딘을 화력제압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산악지역에서 기동하는 부대에 대해 포병화력지원을 실시하는 데 따른 특수한 어려움들, 예를 들어 고지대에 위치한 적진지로 화력을 유도하는 것 따위 등이 특히 소련 훈련문헌들에 중요하게 다뤄졌다. 소련 국내의 산악 훈련장에서 전차요원들은 기울어진 차체에서 사격하는 방법을 훈련하였으며, 포병요원들은 기울어진 산사면에 화력지향시 적절한 지점이 어디인지에 관하여 배웠다. 고지대에 대한 사격 방안으로써 제시된 해결책 중의 하나는 ZIL-235 등의 화물트럭에 ZU-23 대공포를 장착하는 방안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s) 지역에서 소련군 제 1, 제 4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각각의 포병연대별로 1개 76mm 포대씩을 120mm 박격포로 교체하고, 일부 대전차 대대 무장을 107mm 경량포 (pack howitzer)로 바꿨던 예와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 역시 무기의 휴대성에 많은 중요성을 두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하는 소련군 부대에서는 82mm에서 120mm에 이르는 박격포들이 화력지원의 핵심을 이뤘으며, 특히 지형의 "사각지대(dead ground)"를 타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광받았다. 소련군은 도한 76mm 산악포(mountain howitzers), 240mm 참호박격포(trench mortars), 220mm 다연장로켓포(multiple rocket launchers)등도 활용했다. 소련군은 반군 거점에 대한 공격시 공습과 포병 공격을 조합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기동 감시초소(mobile observation posts)를 활용하여 포병 및 공습시 화력유도를 실시하였다. 지상군 공격(column attack) 혹은 헬리본 병력투입(heliporne insertion) 전에 6~ 18킬로미터 범위의 rolling fire(?)이 이뤄지기도 하였다. 한 저항군측 자료에 의하면, 소련군이 지상전 개시 전에 항상 포격 및 공습을 했다는 점 때문에 예측이 쉬웠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종종 소련군은 탄막사격 중에 길게는 20분까지 사격을 중단했다가 다시 쏘는 방법으로, 진지를 보수하거나 부상자들을 후송하려고 밖으로 나온 저항군을 노리기도 하였다. 통상 화력지향적인 전술은 화려하긴 했지만, 막대한 탄약 소비량에 비하면 그 성과는 종종 보잘것 없는 경우가 잦았다. 한 사례에서는, 16~18문의 소련군 화포에서 3600~ 7200발의 포탄을 6헥타르의 영역에 투사하였지만, 무자헤딘 게릴라들의 광범위한 소산으로 인하여 피해는 매우 적었다고 한다.
정교하게 조율된 화력은 산악지대 뿐만이 아니라 "그린 존(green zones)"이라고 불리는 지역(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산재된 오아시스의 과수지대 및 관개농업지역)에서도 그 가치를 입증했다. (지도 12 참조). 그린 존에서는 지하 통로를 따라 공급되는 복합 관개 네트워크가 존재하며, 이 통로들은 지하 15미터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으며, 근처 산사면 지역까지 연결되었다. 무자헤딘 게릴라들은 특히 이러한 지역을 활용하여 매복공격을 준비하거나 혹은 신속히 은폐하는 등에 활용하였다. 수많은 수로들과 과수원 등으로 복잡하게 나뉘어진 그린 존 지역에서 게릴라들을 추격해 가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다.
(지도 12. 그린 존에서의 전술상황)
산간지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련군은 최하 제대에서 화력을 극대화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칸다하르의 한 그린 존에서의 전투를 살펴보면, 각각의 차량화보병중대별로 1개 82mm 박격포 소대를 보유하였고, 또한 각각의 대대는 122mm 곡사포 소대를 보유하였다.
1984년 5월, 파크자(Fakhdzha) 오아시스 부근의 그린 존에서, 저항군 거점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소련 공수대대(parachute battalion) 일부가 고착되었다. 대대장은 휘하 기갑부대로 하여금 공병, 포병, 공수부대, 육군항공부대 등과 공조하여 진로를 개척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진격에 따르는 위험성은 상당하였는데, 이는 무자헤딘이 전장에 가득한데다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고, 또한 모든 접근로마다 무자헤딘들이 유탄발사수를 배치시킨 사격진지를 형성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샛길과 수로들, 과수원 등을 지나는 과정에는 기갑부대 행렬과 나란히 공병 분견대가 함께 이동했다. 한편 공수중대들은 이들에 앞서 소대 단위로 움직이며 기갑부대 진격로의 측방을 청소하고 후방에 게릴라가 남아있지 않도록 확인하였다. 동시에 포병지휘관은 행렬 전방 200미터 지점에 사격을 지향시켜 적들을 제압하고 이들을 몰아내도록 하였다. 2대의 Su-25로 공습이 실시되었는데, 600미터 전방에 있는 적의 관측소를 파괴할 수 있었다. 행군은 느리지만 무자비하게 이뤄졌으며, 공병의 속도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소련 제병협동부대는 2일간의 전투 기간동안 총 15회의 매복에 걸려들었지만 사실상 아무런 인명피해 없이 그린 존을 소탕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건전한 전투원칙에 따라 싸운다는 것만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이 갖고 있던 심각한 결함을 극복하고 성공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해군소장 T. 가이다르(Rear Admiral T. Gaidar)는 1982년 프라우다(Pravda)지에 무자헤딘에 대항하는 소련군과 아프간 군대에 보안문제(security problem)가 있었음을 솔직히 토로하였다. 판시르 계곡에서의 춘계 공세를 논하는 과정에서 그는 비록 작전계획은 비밀리에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DRA 부대들이 계곡에 진입하자마자 잘 준비된 적들을 맞아야 했다고 하였다. 게다가 주민 대부분이 이미 전투지역에서 빠져나간 상태였고, 무자헤딘들은 접근로를 따라 상호 화망구성이 가능한 위치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전투현장에서 아프간 저항군과 함께하고 있었던 에드워드 지라데 특파원(correspondent Edward Girardet) 또한 당시 무자헤딘들이 공격이 임박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게다가 게릴라들이 이 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바그람의 핵심 공군기지를 타격하려고도 노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1984년의 우르군 작전(Urgun operation)에는 또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맞게 된다. 우르군은 팍티야 계곡(Paktia Valley)에 위치한 정부군 초소로서, 전쟁 대부분 기간동안 무자헤딘에 의해 압도당한 상태로 지내게 된다. 1983년 12월, 약 3000명의 반군들이 파키스탄 접경지대로부터 넘어와 우르군을 유린하고자 시도하였다. 우르군이 포위된 상태에서 소련측의 구원 노력은 상당한 차질을 빚었는데, 이는 이 지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도로가 대량의 지뢰로 차단되어 있었으며, 이로써 재보급을 위해서는 An-26 및 Mi-6 항공기들을 활용한 공중보급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DRA 군대는 결국에는 소련측의 지원에 힘입어 무자헤딘을 몰아내었고, 또한 외국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진 상당량의 군수물자들을 노획하였다. 여기에는 영국제 82mm 탄약과 3383점의 대전차 지뢰, 1839점의 대인지뢰, 기타 다양한 탼약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슷한 경우로 1987년 코우스트(Khowst)에 포위된 수비대를 구원하기 위하여 소련군 및 DRA 군대가 돌파를 시도했던 사례도 있었다. 당시에는 반정부군이 주변의 모든 고지군을 점령하였고, 이로써 접근로 모든 곳을 중기관총 사격으로 차단하였고, 활주로도 봉쇄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방어, 이동보안, 통신 (Defense, Movement Security, and Communications)
종종 소련군은 고립되거나 포위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기 때문에, 산악지대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는 문제는 군사출판물에서 상당한 내용을 차지하게 된다. 한 훈련 시나리오에서는 분명하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공수부대의 경험을 근거로 하고 있었으며, 산악지대에서 소대단위 부대가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먼저, 해당글 저자는 지휘관이 산사태나 붕괴가 이뤄지지 않을 지점을 선택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가장 적합한 방어지점은 통상 고립된 산꼭대기 혹은 고갯길과 인접한 절벽이며, 이곳에서는 상호지원이 가능한 진지들로 구성된 원형방어를 실시하는 한편, 자명한 접근로 모두에는 지뢰를 매설한다. 기초적인 공병기술과 축성도구들을 보유한 숙련된 병사만이 급작스럽게 이러한 방어를 조직할 수 있다.
공세원칙들과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배운 교훈들과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 당시 카르파티아 산지 전투에서의 교훈들과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다. 비아찌는 적의 포위 위협이 임박한 상황에서는 기강과 주도권(discipline and initiative)의 필요성이 특히 절실함을 강조하였다: "적이 우회기동을 시도할 경우, 항상 적들 스스로가 우회공격에 노출되어 포위섬멸당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노려야 할 점이다." 이러한 소련측의 훈련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아프간 저항군 지휘관이었던 압둘 하크(Abdul Haq)는 소련군이 방어전투에 서툴렀다고 주장하였다. 하크의 관점에서 소련군은 지나치게 공격에 집착하였고, 방어하는 방법은 잘 몰랐으며, 따라서 게릴라측이 선공할 경우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송부대를 매복 - 아마 게릴라 입장에서 가장 신성하게 취급되는 전술일 것이다 - 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어려움을 야기하였다. 소련측과 서방측 언급 모두에서 등장하는 표준적인 저항군 전술은 병력 혹은 물자를 수송하는 수송대 행렬의 맨 앞과 맨 뒤의 차량을 공격하여 수송대를 마비시킨 뒤, 여러 조각으로 분할시켜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례의 하나로 1981년 6월의 전투를 들 수 있는데, 당시 판시르에서 온 게릴라들이 살랑 고속도로에서 소련군 수송행렬을 차단하였고, 이에 소련측은 병력과 함께 빠져나갈 수 없었던 보유트럭 120대 대부분을 스스로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1983년 여름에는 우르군을 구원하기 위하여 꼬불꼬불한 계곡길을 따라가다 진창 속에 발이 묶인 DRA 부대 행렬을 게릴라가 전멸시키기도 하였다. 이 작전을 목격했던 저술가 짐 그레이브스(Jim Graves)는 2개 코만도 대대가 자와르(Zhawar) 근방에서 매복공격을 당했다고 보고하였다. 기관총과 AK-47, RPG, 박격포로 무장한 약 3000명의 반군들이 고지대 진지에서부터 행렬 측면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약 800명의 병력과 5대의 T-55전차, 12대의 장갑차, 18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던 해당 DRA 부대는 선두전차가 지뢰로 파괴되면서 멈춰서게 된다. 당시 심한 비로 인하여 적시에 공중지원이 이뤄지지 못했고, 이 교전을 통해 약 300명의 병사가 전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표준적인 소련측 반응은, 전투차량이 수송대열 외곽을 둘러싸게 하여 방패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약 100대에서 250대의 차량으로 구성된 통상적인 보급수송행렬의 경우, 대체로 10대 중 1대가 보병전투차량이었다. 헬리콥터 호위를 붙이는 것 또한 표준적인 절차에 포함되었다. 전차와 포병화력 - 상당히 먼 곳의 포대에서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 의 신속한 협조는 고착된 상당수 부대들을 구해낼 수가 있었다. 따라서 게릴라 저격수들이 통신전문가들을 목표로 삼았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소련군 지휘관들은 무전기들을 가능한 한 안전한 장소에 위치시켜야 함을 배우게 된다. 소련 정찰대가 매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던 한 사례를 살펴보면, 방탄조끼와 기관총, 수류탄등으로 무장한 공격중대(company of assault troops)의 활용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1982년 시점에서 소련군 중대들에는 저격수 제거분대(antisniper squads)를 운용하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도로상에서의 부대들의 취약성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소련군 공병들은 종종 도로 양편 200미터 지역을 청소해버리곤 하였다. 또한 약간의 지연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운전병들은 자기 차량을 부지런히 정비하도록 경고를 받았으며, 라디에이터를 청소하도록 하였고, 또한 고지대에서 전해질(electorlyte; 배터리액을 의미하는 듯함. 역주)이 빨리 증발될 수 있음을 주의하도록 하였다.
한편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세적 이동을 저해하는 데 있어서 매복보다 더욱 심각했던 문제는 게릴라들이 대량으로 살포한 지뢰들이었다. 저항군들은 외국산 지뢰 외에도 자체적으로 생산한 지뢰들을 사용하였으며, 이로써 이미 알려진 길을 통해 이동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답답할 정도로 느린 행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소련군은 특수 이동보안 분견대를 창설하였으며, 그 명칭은 OODs(ostriad obespecheniia dvizheniia)이었다. 이 부대는 정찰부대와 지뢰 및 장애물 개척부대, 도로 및 교량 수리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행군부대의 규모나 요구사항에 따라 보안분견대는 그 규모가 소대규모에서 대대규모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부대들은 전기식 지뢰탐지기와 롤러를 장착한 전차, 잘 훈련된 군견 등을 운용하였다. 그러나 종종 세심하게 매설된 지뢰는 이러한 탐지의 눈길을 벗어나곤 하였다. 실제로 1984년 판시르 작전에 참가했던 한 소련측 저자에 따르면, "전문적인 외국인 교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게릴라들은 종종 특정 형상을 지닌 구멍 위에 지뢰를 매설함으로써, 지뢰제거 롤러의 압력에도 바로 폭발하지 않고 뒤이어 여러 차량들이 더 지나가야만 터지게끔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매설깊이가 깊어질 수록 전자장비에 의한 탐지는 어려워졌고, 개가 맡을 수 있는 냄새도 적어졌다.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에는 또한 가짜지뢰 문제가 있었는데, 이 역시도 진짜 지뢰와 마찬가지로 신중하게 처리해야만 했으며, 따라서 더욱 행군을 늦추는 역할을 하였다. 경험을 통하여 소련군 병사들은 지뢰위험이 있을 경우 차량 내부가 아니라 상부에 탑승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배웠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항시 겪어야 했던 또다른 문제로는, 산악지대에서 전술통신망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VHF/ 마이크로파 대역의 무선통신은 지형조건에 따라서 그 품질이 심하게 차이가 났으며, 고지대에서의 대기조건은 숙련된 통신요원조차 통신에 실패하게끔 만들곤 하였다. 게다가 고지대에서는 엔진(motors)의 효율이 감소하였고, 배터리의 수명도 감소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저항군에게 급습을 당한 소규모 초소들을 자주 위험에 빠지게 하였으며, 특히 원격지의 산 정상부나 카불-카이라톤-살랑 가도 근방 지역에 있는 경우가 심했다. 실전경험과 제대로 된 지형도를 활용하여, 통신전문가들은 신호를 계곡 벽이나 기타 지형지물에 반사되도록 하는 방법을 개발하게 된다. 다른 해결책으로는, 비교적 가까운 영구초소들의 경우 통신선을 까는 방법도 있었다.
전략적 수준에서는, 소련측은 지휘소를 카불에 위치시켰다. 카불, 테르메즈, 기타 주요 기지들 사이에는 위성통신망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특성상 야전에서의 통신부대에의 의존이 대단히 중요했다. 통신중대들은 3개 소대로 구성되었으며, 1개 소대는 건설임무를, 2개 소대는 통신운용 임무를 맡았다. 또한 소련측 통신전문가들이 아프간 부대들에 배속되어 협조를 증진시키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DRA 군대 및 정권의 건설 (Building the DRA Army and Regime)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직면해야 했던 딜레마 중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복잡하고 도덕적으로 진빠지게 만들었던 어려움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Afghanistan) 군대를 신뢰할 수 있고 자주적인 군대로 만들려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아프간 군대의 취약점은 소련의 개입 훨씬 이전부터 명백하게 드러났는데, 1978년 헤랏에서의 폭동 당시 제 17사단은 제대로 된 개입을 포기함으로써 말그대로 의지의 마비(paralysis of will) 현상을 드러낸 바 있다. 1979년 12월에는 지상의 상당수의 소련 고문관들과 풍부한 공중지원을 바탕으로, 아프간 제 3군단(Afghan Army's III Corps)은 팍티야 지역에서 일부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자체적인 힘으로 작전할 능력은 없음을 보여주었다. 1980년부터는 소련군 스스로가 전투임무 상당부분을 감당하게 됨을 발견하게 되었고, 반면 아프간 군대의 경우 심각한 수준의 도망병들로 골머리를 앓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소련 장교들은 대부분의 전투를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프간 군대 내에서의 지휘관 직위의 선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최초 약 8만명 규모였던 것으로 추산되는 아프간 군대는 1979년 12월이 되면 약 5만명 수준으로 녹아내리게 되며, 이듬해에도 다시 50퍼센트까지 감소하게 된다.
1981년-82년 사이 기간 동안, DRA에서는 징병기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분증 발급을 개시하였고, 일련의 징집법령들을 발표하여 최소 징집연령을 조금씩 낮추었으며, 한편으로 군복무 기간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고, 예비역 소집 상한선도 39세까지 연장하게 된다. 여기다가 정부는 팍티야 남성들에 대한 병역 부과를 시도하게 되는데 (결국 실패한다), 이는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국가의 협약에 의해 이들에 대한 병역을 면제해 왔던 것에 대한 파격이었다. 1984년에는 평균적인 군복무 기간이 4년으로 늘어나게 되며, 대학교에 가려는 모든 젊은이들은 반드시 병역을 마치도록 하였다. 1986년 시점에서 아프간 군대의 유효전력은 약 4만명 수준에서 안정화된다.
정부는 또한 저명한 칼크 파벌 대변인들(visible Khalq spokesmen)을 정부 요직, 예컨대 내무부 장관 및 국방장관 등에 기용하여 환심을 삼으로써, 군사지도부와 당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1985년 정부는, 육군의 전 중대들의 86퍼센트에 당세포(party cells)가 설치되었다고 선언하게 된다. 이와 함께 주목할만한 것으로, 1985년부터 육군은 인원 수를 알 수 없는 물라(mullah)들을 고용하여, 병력들에 대한 특수 세뇌코스 종료시 이들에 대한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군내 파벌간의 분쟁은 끊임이 없었고, 사보타지 사건들, 예를 들어 1985년의 신단드 공군기지에서 20대의 항공기가 파괴된 사건 따위가 계속 벌어졌다. 1985년 11월,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4명의 아프간 육군 장성들이 무자헤딘과의 내통을 이유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같은 해, 칸다하르에서는 DRA 부대 하나가 반란을 일으켜 장교들을 죽이고 변절하였다.
불은 불로 끈다는 개념으로, KHAD (DRA의 보안군이며, 약 2만명의 인원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에서는 저항세력 내부에 침투하려는 노력을 가중시켰으며, 반군측의 반응으로 살펴보건대,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둔 것 같다. 저항군 지휘관 아민 와닥(Amin Wardak)이 1984년 3월 인터뷰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그의 그룹은 신분을 입증할 수 있는 와닥 주(Wardak province) 출신의 탈영병만 받는다고 하였다. 한편 KHAD 요원들의 선발 및 훈련은 소련측 전문가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상황은 정부로 하여금 군병력 수급 안정화 노력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전쟁 초기, 제 30 산악여단과 같이 부대 전체가 변절해버리는 사례가 존재했다. 따라서 아프간 교외지역의 분열되고 부족주의적 특성을 반영하여, 군사당국에서는 몇몇 산악지대에서 지역단위로 부대를 조직하는 것을 승인하게 된다. 이는 1920년대 무렵 소련 붉은군대에서 사용했던 책략이며, 정부에서 소위 민족연대(national regiments)를 승인하고 그 인원으로 한때 저항군에 복무했던 인원들도 다수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1987년, 소련 언론인 아르템 보로빅(Artem Borovik)이 청년잡지인 오고넥(Ogonek) 지를 통하여 인정한 바에 따르면, 이들 신생 부대의 지역민 지도자들은 DRA를 위하여 복무하는 댓가로 육군에 몇가지 조건들을 걸었다고 한다. 이러한 거래 조건에 따르면, 제 507 연대(1987년에 창설된 민족연대임)에 소속된 인원은 정규군에 징집될 수 없으며, 무기는 정부에서 지급하고, 부대의 임무는 특정지역 방어에 한정된다는 것이었다. 보로빅은 이러한 거래에 내재된 위험에 대해서도 인정하였으며, 과거 성급하게 만들어진 몇몇 부대의 경우에는 무기를 받은 뒤에 기회를 틈타 곧장 저항군에 합류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정부에서는 부족별 자원부대를 활용하여 게릴라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고 이들의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아프간 언론에서는 낭가하르 주(Nangarhar province), 바다크샨 주(Badakshan province), 팍티야 주에서 이러한 부대들이 창설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예를 들어 팍티야 지방의 아흐마자르 부족(Ahmadzar tribe)의 경우에는 1000명 가량의 전사들을 양성하여 다른 부족과 합하여 총 2500명 규모의 연대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 DRA에서 파키스탄 변경지역의 신와리 부족(Shinwari) 같은 부족들에게 댓가를 지불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부족간의 갈등관계를 활용하여 특정 부족을 고용하여 그와 전통적으로 적대적인 이웃부족의 활동을 방해하는 임무를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일부 성공을 거두며, 특히 북부지방에서 그러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는 부족들을 조직화하려는 노력들을 분명하게 저해하게 된다. 특히 장기간에 걸친 이산으로 인하여 부족장들의 전통적 지위가 손상되게 되었고, 그 자리에는 지하드를 주장하는 이슬람 지도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 외에도 DRA에서는 도시 민병대, 소위 혁명수비대(Defense of the Revolution)를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후한 봉급을 받는 (아프간 기준으로) 10대 소년들로 구성되었다. 도시민병대의 경우 PDPA 및 소비에트식 정부/사회기관 네트워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내무부 경찰은 약 3만명 규모였으며, 역시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
(잘랄라바드의 정부군 초소에 화력을 쏟아붇고 있는 무자헤딘 전사들)
이러한 카불 정권의 모병 및 세뇌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병적인 탈영 패턴은 1987년에도 아프간 군대에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었다. DRA나 소련 언론측에서 종종 제기한 설명에 따르면, DRA 병사들이 비록 민간인들에 비하면 많은 봉급을 받았지만, 저항군 용병들에 비하면 적은 봉급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프간 군대에서의 봉급이 비록 작을지는 몰라도, 진급할 기회는 매력적일 정도로 풍부했다. 소련 언론인 겐나디 보카로프(Gennadii Bocharov)는 무하메드 이브라임 대령(Colonel Muhammed Ibragim)의 경력에 대하여 소개한 바가 있는데, 그는 혁명 전에는 소위로서 소대를 지휘하다 이어 정찰중대를 맡게 된다. 신정부가 들어선 뒤, 그는 전차대대에서 2년간 참모장을 맡게 된다. 이후 이브라임은 대대장으로 올라서게 되고, 사단 작전참모, 종국에는 여단장까지 오르게 되는데, 이는 단지 8년만에 이뤄진 승진이었다.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지(Krasnaia Zvezda)에서는 1983년에 비슷한 사례로, 한 징집병이 아무런 정식 군사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부사관을 거쳐 소위로 진급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이러한 신속한 승진에 대하여 저자는 한탄하면서, "이는 오늘날 아프간 군대에서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승진 기준이 완화되었다는 것은 곧 훈련과 기강 부문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었다. 한 소련 언론인의 보고에 따르면, 1986년 당시 2명의 징집병이 소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들을 협력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대령이 직접 나서야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명에 대한 압력을 받은 대령은 이러한 행동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 다만 "우리는 이제 막 군대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DRA 병사들의 이러한 해이한 태도와 분산된 충성심은 서방 언론인들에게도 뚜렷이 관찰된다. 1983년 경, 윌리엄 브래니건 특파원은 길에서 밤을 보내고 한 DRA 민병대 초소에서 아침대접을 받은 이야기를 보고한 바 있다. 이외에도 서방 저술가들과 인터뷰한 몇몇 소련 군인들이 DRA에 대한 경멸을 드러낸 사례가 있다. 한명은 1984년 칸다하르에서의 싸움에서 DRA 부대의 참여도에 대해 언론이 과장했다고 설명하였으며, 또다른 한명은 아프간 군대가 단지 "멍청한 늙은이들"이며 "소련군이 작전하는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게으름이나 피우고 방해만 되는" 존재라고 묘사하였다.
1985년 시점에서, DRA 군대는 총 12개 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사단은 2000명의 인원을 보유하였으며, 이외에 몇몇 독립여단 및 특수부대를 합쳐 대략 총 43000명을 보유하였다. 이 군대는 정권의 근간이 되는 몇몇 대도시들과 주도로들을 유지하는 데에도 무능함을 잘 보여주었다. 저항군의 규모에 관한 추정치는 상당히 폭이 넓지만, 어쨌든 대략 2만명에서 10만명의 전업 전사들로 이뤄져 있으며, 파트타임 전사들까지 합치면 최대 25만명까지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만약 주민 대다수에게 퍼져있는 심정적 지원까지 고려하게 된다면, 이러한 네트워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확장되게 된다. 전쟁 초기 소련측에서 군사적 개입 규모를 제한하겠다는 결심과정에서 분명히 밝혀진 바와 같이, 전략가들은 공중 기동성과 화력우세, 최첨단 통신시스템 등이 소련군 및 정부군으로 하여금 숫자상의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효율성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낙관론을 용납하지 못했다. 훈련이 형편없던 보병부대와 안쓰럽기 짝이없던 작전보안, 믿을 수 없는 아프간 군대, 그리고 추락해가는 사기가 소련측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좀먹게 된다.
(4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