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철도전략 : 미국 남북전쟁 전략의 근원, 1997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박용수 2014. 10. 27. 16:30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 Railroad Generalship: Foundations of Civil War Strategy (http://www.cgsc.edu/carl/resources/csi/gabel4/gabel4.asp) >

 

 

 이번에 번역한 글은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홈페이지에 있는 논문으로, 남북전쟁 당시의 철도가 전쟁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소개한 글입니다. 서문에 나온 바와 같이 병참 문제는 오늘날 전쟁사 연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성을 띄는 분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이를 쉽게 분석해주는 문헌은 잘 접하기 힘듭니다. 이 글은 현대전과는 물론 관련이 없지만, 보급전쟁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취급되는 미국 남북전쟁의 병참 문제에 대해 다룬 글입니다. 상당히 간명하게 요점과 사례가 혼합되어 있어 재미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읽으면서 많은 즐거움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박용수 드림

 



철도전략 : 미국 남북전쟁 전략의 근원
(Railroad Generalship: Foundations of Civil War Strategy)


저자 : 크리스토퍼 R. 가벨 박사 (Dr. Christopher R. Gabel)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레벤워스 요새, 캔사스주 66027-1352

 

 

 

 

 


서문(Foreword)

 

 옛 속담에 "아마추어는 전술을 공부하고, 프로는 병참을 공부한다"라는 말이 있다. 군을 직업으로 하는 진지한 학생이라면, 병참이야말로 군사 문제들에 계속 영향을 끼치며, 전술과 전략까지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크리스토퍼 가벨 박사가 쓴 이 멋진 논문에는 증기기관 철도의 등장이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의 병참 문제 및 이에 따른 전략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이 잘 드러나 있다. "철도전략(railroad generalship)" 측면, 다른 말로 철도의 군사적 이용 측면에서 우월했던 쪽이 실제로 이 전쟁에서 승리한 쪽이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1997년, 제리 D. 모렐록, 포병 대령, 전투연구소장

 

 

 


 전투연구소(CSI) 출판부에서는 다양한 군사사학(軍事史學) 주제들을 다룹니다. 여기에 소개된 견해들은 각개 저자들의 것이며, 미 육군성과 미 국방부의 의견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서지정보 생략)


(목차 생략)

 

 

 

 

 

본문

 


 역사의 여명기 당시부터, 군사 전략은 병참 계산 - 거리, 시간, 수송 용량, 소비량 등 -이라는 냉혹한 요소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수천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군대는 지상을 가로지르는 데 있어 인간과 동물의 근육 힘에 의존하여 왔다. 1830년대까지도, 전장으로 향하는 데에 있어 모든 병사들은 스스로의 발 혹은 동물의 힘에 의존했다는 점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전쟁터로 향하는 모든 무기, 모든 탄약, 모든 식량, 모든 텐트, 모든 붕대는 모두 근육의 힘에 의존하여 이동하였다. 예외를 들자면 수운(水運)으로 운반되는 물자들과 현지에서 확보하는 물자들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량의 견인 동물들을 이용하여 보급 수송행렬을 운영하는 군대는 매우 어려운 보급상의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즉, 수레를 견인하는 동물들에게도 먹이를 주어야 했기 때문에, 전투 병력에게 보급할 보급품을 나르는 동물들에게 먹일 먹이를 운반하기 위하여 또다른 대량의 수레와 견인 동물들이 추가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다시 이러한 먹이를 운반하는 동물들이 소비할 먹이를 운반해줄 동물들을 추가로 필요로 했다. 이러한 패턴에 따라 군대가 보급 기지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어려움은 급격하게 심해졌다. 군대의 보급 요구량의 반 이상이 동물들을 위한 먹이로 채워지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이상적인 조건 하에서, 전적으로 근육힘으로 수송을 실시하는 군대의 경우 최대 약 10일 치에 해당하는 보급품을 운반할 수가 있었다. 산업혁명 이전 시기의 군대가 왜 그렇게 자주 굶주리고, 헐벗고, 지치고, 또한 적과 싸우는 대신 광야에서 식량을 찾아 돌아다니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소비했는가의 이유는 당연한 것이었다.

 

 북아메리카처럼 이러한 상황이 심각했던 곳은 또 찾기 드물다. 이 신세계는 근육 힘만으로 움직이는 군대의 전쟁터로는 너무 거대한 장소였다. 광대했던 거리 문제에 더하여, 일반적으로 도로 상태도 형편 없었으며, 국토 대부분은 미개발 상태였고, 따라서 군대가 징발에 의존하는 것도 어렵게 만들었다.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들 - 식민지 시기 전쟁들, 미국 독립전쟁, 1812년 전쟁 - 을 가만히 잘 연구하게 되면, 전역을 계획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심각했던 고려사항은 전쟁터까지 굶어죽지 않고 도달하는 부분에 있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적과 싸우는 것은 거의 순전히 우연에 맡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지난 식민지 시절, 단지 십수 명의 병사들과 몇 통의 좀먹은 밀가루가 위치해 있을 뿐인 조그마한 통나무 요새가 수천 평방마일에 달하는 광야를 지배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 어느 누구도 여기까지 와서 온전한 상태로 공격을 개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표 1. 연료 1톤당의 톤-마일 비교. 1톤의 연료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 및 수송 물자의 값을 곱한 값. )

 

 이러한 상황은 1861년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농장들의 수는 보다 증가했고, 황무지의 범위는 줄어들었으며,  형편없기는 했지만 어쨌든 골라 쓸 수 있는 도로의 종류도 증가하였다. 그리고 중요했던 것이 증기 수송수단의 등장이었다.

 

 증기력이 군사 병참학에 있어서 정확히 어떤 기여를 했을까? 증기기관차가 노새가 끄는 수레에 비하면 더 많은 중량의 화물을 운반할 수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는 병참 문제에 이득이 된다는 논리를 이끌어 낼 수 없다. 화물 운반량의 차이는 그냥 노새와 수레를 더 많이 투입하면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냐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증기기관차가 갖고 있는 장점은 사실 '연료당 수송 가능한 보급량 및 거리'에 있어서의 우세에 달려있다 (표 1 참조). 1톤의 먹이를 가지고, 6개의 노새 수레팀은 1.5톤의 보급품을 약 333마일까지 운반할 수 있다. 1.5톤을 333마일에 곱하게 되면, 1톤의 먹이를 통해 약 500 톤-마일의 수송 용량이 나온다는 계산이 된다. 반면, 남북전쟁 시기의 화물 기관차의 경우 1톤의 연료를 가지고 단지 35마일만을 운반할 수 있다. 그러나 화물 기관차의 화물 수송량은 약 150톤에 육박하므로, 1톤의 연료당 약 5250 톤-마일의 수송 용량이 나오게 된다. (한편, 증기선의 경우 이보다 훨씬 우수하다.)

 

(표 2. 이동속도)

 

 게다가 기차는 노새가 끄는 수레에 비하여 거의 5배나 빨리 움직인다. 이는 단지 보급품이 빨리 전달된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운송에 필요한 차량의 숫자도 감소시킨다는 점에도 기여하게 된다. 더 빠른 이동 속도는 곧 주어진 시간 내에 더 많은 왕복 운반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며, 이는 다시 정해진 운송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더 적은 차량만을 유지해도 된다는 의미가 된다 (표 2 참조).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 그 화물이, 즉 사람이든 보급품이든, 더 나은 상태로 전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도보로 이동하는 병사에 비하여 기차로 이동하는 병사는 덜 지치게 되고, 낙오나 탈영 사례도 감소하게 된다. 비록 당시 병력 수송에 주로 화물칸을 사용했고, 이를 그리 안락한 여행이라고 할 수 없었음에도 차이는 분명했다. 철도를 이용하여 운반된 보급품은 운반 속도 및 화물칸이 제공하는 폐쇄된 환경 덕분에, 전장에 보다 좋은 상태로 도착할 수가 있었다.

 

 비록 현대 기준으로 보면 신뢰성이 떨어지는 물건이긴 했지만, 아무튼 미국 남북전쟁 시기의 증기기관차는 견인 동물에 비하면 전쟁에서 보다 신뢰성 있는 수단이었다. 노새를 예로 들면, 이들을 동원하는 데에는 각자의 가치 시스템에 의한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들의 애국심에 항상 의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사용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기관차는 연료를 전혀 소비하지 않는 반면, 짐승들의 경우 일을 하던 말건 먹이는 계속 먹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기관차의 경우 수요에 맞춰서 그 생산 모델을 바꾸거나 생산량을 증감시킬 수가 있었다. 하지만 노새의 경우 단지 1가지 모델만 나왔고, 그 "생산"은 유연성이 떨어지는 '자연의 시간표'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했다.

 

(지도 1. 1864년 아틀란타 전역 당시 셔먼의 철도 보급로)

 

 종합하면, 증기기관차의 출현은 병참상의 효율을 적어도 10배 이상 증가시키게 된다. 이러한 급격한 발전은 미국 남북전쟁의 전략에 있어 엄청난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 철도는 군사 작전의 지리적 규모를 엄청나게 증가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철도에 보급을 의존하는 군대는 주 보급기지로부터 수백 마일이 떨어져 있더라도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전쟁을 대륙 규모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 수레에 의존하는 병참 시스템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종류의 전역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철도로 말미암아 군대의 규모가 더 커질 수가 있었다. 기존의 북아메리카 전쟁에서는, 3만명으로 이뤄진 군대가 수레 및 현지 조달을 활용한 병참을 통한 한계치였다. 하지만 1864년 윌리엄 T. 셔먼 소장(Major General William T. Sherman)이 공세 작전을 펼칠 당시 동원한 군대는 병력 10만명에 동물 3만 5천마리를 갖고 있었다 (지도 1 참조). 그가 의존했던 보급로는 아틀란타(Atlanta)로부터 그의 주 보급소인 루이스빌(Louisville)까지의 473 마일에 이르는 단선 철로였다. 셔먼의 추산에 따르면 이 철도가 수레 36,800대와 노새 220,800마리가 할 일을 해냈다고 하였다!

 

(그림 1. 내선과 외선의 개념)

 

(지도 2. 1863년 9월의 상황. 북군의 철도 효율의 우세로 인하여 남군이 가진 내선의 장점이 상쇄된 모습이다. )

 

 철도는 단지 전쟁 규모만을 확장시킨 것이 아니다. 철도가 결정적인 작전을 벌이기 어렵게 만듦에 따라, 미국 남북전쟁이 장기화되는 데에도 기여한 것으로 본다. 많은 남북전쟁 시기 장군들이 사용하던 나폴레옹식 전쟁 기법들 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으로, 병력 집중 및 적 야전군을 단숨에 격멸하는 목적으로 "내선 (interior lines, 內線)"을 이용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내선"은 만곡된 전선부의 내측에 있는 일련의 협조하는 군대들이 전선부 외곽에 있는 적들보다 더 빨리 뭉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내측에 있는 군대들이 움직여야 하는 거리가 더 짧기 때문이다 (그림 1 참조). 철도는 이러한 지리적인 명제를 어느 정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외선(exterior lines, 外線)에 있는 군대라도 철도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면, 내선에 있는 군대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빨리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1863년 9월, 12000명으로 이뤄진 남군의 제임스 롱스트리트 중장(Lieutenant General James Longstreet)의 군단은 내선의 철도를 이용하여 버지니아 주로부터 조지아 주 북부까지 이동하여 치카마우가 전투(Battle of Chickamauga) 당시 브랙스턴 브랙 장군의 테네시 군(General Braxton Bragg's Army of Tennessee)을 증원하였다. 롱스트리트 군단은 약 12일에 걸쳐 약 800마일 가량을 이동하였다. 치카마우가에서의 남군 승리로부터 2주가 지난 뒤, 약 25000명으로 구성된 2개 북군 군단(제 11군단과 12군단)이 버지니아에서 채터누가 전선(Chattanooga front)에 이르는 1200마일 거리를 이동하여  패전한 컴벌랜드 군(Army of the Cumberland)을 증원하였다 (지도 2 참조). 이러한 외선 이동은 훨씬 먼 거리에 더 많은 병력들이 관련되었음에도, 똑같이 대략 12일이 소요되었다. 이는 보다 효율적인 북부 측의 철도 수송망이 남부연합이 갖고 있던 내선의 장점을 상쇄시킨 사례로 볼 수 있다.

 

(지도 3. 버지니아 주의 북군 주요 철도 종점들.)

 

(표 3. 1863년 초, 아퀴아 크릭 보급로를 통하여 일일 수송한 물자의 양.)

 

 파라독스적인 일이지만, 각개 야전군의 입장에서는 사실 철도가 기동(maneuver)을 제한하였다. 야전군들은 철도 종점(railheads) 근방에 뭉쳐있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이유의 하나로, 철도 종점에서 2가지의 매우 상이한 수송 모드간의 환적(換積)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철도 종점까지는 보급품과 보충병들이 근대적인 수단으로 이동되었다. 철도 종점 이후부터는 근육의 힘으로 수송이 이뤄졌다. 다른 말로 하면, 철도 종점에서 고작 몇 마일 떨어진 곳으로 병력 및 물자를 운반하는 것보다, 고향에서 수백마일 떨어진 철도 종점까지 병력 및 물자를 운반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마치 댐 뒤에 물이 고이듯이 군대는 철도 종점 근방에 대규모로 뭉쳐있게 된다. 북부 포토맥 군(Union Army of the Potomac)의 경우 전쟁 대부분 기간 동안 2개의 철도 종점 중의 한 곳 근처에서 작전한다 - 하나는 오렌지 알렉산드리아 철도(Orange and Alexandria RR)였고, 또 하나는 리치먼드(Richmond), 프레드릭스버그(Fredricksburg), 포토맥(Potomac)을 잇는 (RF&P RR) 아퀴아 크릭 구간(Aquia Creek section; creek은 하천(河川)의 의미가 있음, 역주)이었다 (지도 3 참조). 특히 아퀴아 크릭 선은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철도 화차는 우선 워싱턴 D.C. (Washington D.C.)에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까지 철도로 직행하며, 여기서 화차 8대 단위로 바지선에 선적된다. 증기로 추진되는 터그선이 바지선을 아퀴아 크릭까지 운반한 뒤, 이곳에서 화차들은 다시 열차로 조립되어 프레드릭스버그 건너편에 있는 팔마우스(Falmouth)까지 철도로 이동하게 된다. 16대의 화차로 구성된 열차가 워싱턴에서 팔마우스까지 12시간 내로 도달할 수가 있었다. 이 과정에 환적(transloading) 절차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1863년 당시, 아퀴아 크릭 선은 일일 평균 약 800톤의 보급품(철도 화차 80대에 해당)을 운반하였다 (표 3 참조). 한편, 팔마우스 너머로 진격하게 될 경우, 군대가 매일 400에서 800대의 수레를 통한 수송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버지니아 주에서의 전투 대부분이 프레드릭스버그 근방에서만 벌어진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지도 4. 제 1차 불런 전역.)

 

 다른 측면을 살펴보자. 이러한 병참상의 방정식은 적의 야전군을 섬멸전을 위하여 고립시키는 일이 더 어려워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철도 종점에서 기다리고 있는 군대의 경우, 수레로 보급받는 적군의 공격을 받게 되면, 근육의 힘으로 이동하는 적군에게 괴멸당하기 전에 철도를 통하여 재빨리 증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이는 전쟁 초반 제 1차 불런 전투(Battle of First Bull Run) 당시부터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지도 4 참조). 1861년 7월, 어윈 맥도웰 준장(Brigadier General Irwin McDowell)이 이끄는 북군은 매나사스(Manassas)에 위치한 P. G. T. 뷰로가드 준장(Brigadier General P. G. T. Beauregard)이 이끄는 남군을 격파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도보이동한다. 매나사스 갭 철도(Manassas Gap Railroad)를 활용하여 셰난도어 계곡(Shenandoah valley)에 위치하던 조셉 E. 존스턴 준장(Brigadier General Joseph E. Johnston)의 군대가 적시에 뷰로가드의 군대를 증원함으로써, 맥도웰의 공세를 무산시킨다.  철도는 또한 전투의 승패가 갖는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철도를 통해 보급받는 군대는 패배하더라도, 근육의 힘으로 움직이는 군대가 전과를 확대하기 이전에 더 빨리 증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 결과 전술적 승리가 전략적인 이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제 1차 불런 전투의 사례를 살펴보면, 패배한 맥도웰 군대는 워싱턴으로 퇴각한 뒤, 재보급용 철도 종점에 의존한다. 반면 수레 운송 문제를 겪어야 했던 남부 연합군의 경우 전과 확대를 위한 시도가 모두 무산된다.

 

(지도 5. 남부 연합의 철도망과 북군의 공세 방향)

 

(지도 6. 툴라호마 전역)

 

 보급로를 대체로 철도에 의존하게 되면서 공세 작전들이 특정한 전진축선에 몰리는 경향을 띄게 된다. 전쟁 초기 3년 동안, 남부 연합 측에서는 북군의 공세가 어느 쪽으로 지향될 것인지 예측하는 데 있어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 즉 항행 가능한 하천 아니면 철도선을 따라 지향될 것이었다 (지도 5 참조). 따라서 북부측이 철도에 의존하게 되면서 전략적 기습 요소는 엄청나게 감소하게 되었고, 이는 결정적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칙에 대한 예외는 1863년 여름에 발생하였는데, 당시 윌리엄 S. 로즈크랜 소장(Major General William S. Rosecrans)의 군대가 브래그의 테네시 군을 기습한 사례다. 당시 그는 철도선에서 벗어나 벽지를 거쳐 테네시주 툴라호마(Tullahoma)에 위치한 브래그의 방어 진지를 측면 공격하였다 (지도 6 참조). 하지만 브래그가 퇴각하자 로즈크랜은 신속하게 철도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철도 혹은 수운의 수송 용량을 초과하는 공세 작전은 결국 습격(raids) 작전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군대가 적지 깊숙히 진군할 수는 있었지만, 이곳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남부연합군의 대규모 공세들은 모두 이러한 패턴을 겪었다 - 동부에서는 앤티탬(Antietam) 전투나 게티스버그(Gettysburg) 전투가, 서부에서는 페리빌(Perryville) 전투나 내쉬빌(Nashville) 전투가 이런 사례다. 마찬가지로 셔먼(Sherman)이 수행한 그 유명한 "바다로의 행진(March to the Sea)" 역시도 단지 새로운 보급로를 건설하는 것이 수반된 습격 작전이었던 것이다.

 

(지도 7. 북군의 철도망과 이곳에서 취약한 교차 지점들)

 

 군대가 철도를 따라 진격로를 정하게 되면서, 철도 중심지(rail centers)들이 주요 군사 목표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철도들은 철도 중심지에 모이게 된다. 게다가 철도 중심지들은 통상 경제/정치적으로 중요 지점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적군의 철도 중심지를 점령하게 되면, 적의 수송 시스템을 단절하게 되어 적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저해할 수가 있었다. 코린트(Corinth), 잭슨(Jackson), 채터누가(Chattanooga), 아틀란타(Atlanta), 피터스버그(Petersburg) 등은 모두 다양한 북군 공세 과정에서 목표로 선정되었던 곳이고, 이는 이곳들을 지나는 철도가 미치는 군사적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남군 역시 세인트 루이스(St. Louis), 루이스빌(Louisville), 해리스버그(Harrisburg)와 같은 북부 철도 중심지들을 타격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다 (지도 7 참조). 남군은 하퍼스 페리(Harper's Ferry)를 적어도 한번 이상 장악하였다. 볼티모어(Baltimore) 역시도 먹음직스러운 목표물이었다. 만약 남군이 볼티모어를 장악하였다면, 워싱턴 D.C.와 북부 나머지 지역간을 잇는 유일한 철도를 단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탓에, 북부 입장에서 볼티모어 방어는 워싱턴 자체의 방어에 맞먹는 중요성을 띄고 있었다.

 

 주요 공세 외에도, 철도에 대한 소규모 습격 작전이 양측 공히 자주 이뤄졌다. 이러한 작전들이 결정적이었던 것은 대단히 드물다. 그러나 이는 적의 전쟁 기계(war machine) 내부에 "마찰"을 일으키는 대단히 비용-대-효과가 좋은 수단이었다. 

 

 한편, 철로 차단이 전역 전반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 유명한 사례가 몇몇 존재한다. 1862년 12월, 얼 반 도른 소장(Major General Earl Van Dorn)과 네이탄 베드포드 포레스트 소장(Major General Nathan Bedford Forrest)이 이끄는 부대가 북군의 병참 철도망을 절단함으로써, 율리시스 S. 그랜트 소장(Major General Ulysses S. Grant)이 이끄는 미시시피 지역에 대한 북군의 첫번째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1864년, 셔먼 장군은 존 B. 후드 장군(General John B. Hood)이 이끄는 남군을 아틀란타에서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도시에 보급품을 공급하는 철도를 장악하는 데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1865년, 로버트 E. 리 장군(General Robert E. Lee)이 피터스버그를 포기하고 아포마톡스(Appomattox)로 향하는 길을 택하게 만든 결정적 원인은 사우스 사이드 철도(South Side Railroad)의 피탈에 있었다.

 

 분명 철도는 미국 남북전쟁의 전략적 사고에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하였다. '다른 것들'을 동등하다고 보았을 때, 앞서 말한 요소들 대부분은 남부 측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었다: 남부측은 전략적 수비 입장이었고, 수비측이 공격 측에 비하여 철도 보급망을 보다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다른 것들"이 결코 동등할 수가 없었다. 모든 전쟁 노력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할 수가 없다. 이러한 자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부분이 달라지게 된다.

 

 미국 남북전쟁의 장군들은 야전에서 "철도 전략(railroad generalship)"을 배워야만 했다. 로버트 E. 리 장군은 1829년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 미국 육군사관학교, 역주)를 졸업했다 - 이 해는 미국에 최초로 증기기관차가 소개된 해이기도 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배운 정규 군사교육 과정에는 철도에 관한 내용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10년 뒤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던 당시에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들은 다른 고위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철도 전략이야말로 전쟁의 모든 차원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임을 신속하게 배우게 된다.

 

 전략적 수준에서의 철도 전략(railroad generalship)은 병력과 전쟁 자원의 장거리 수송 차원에서 다뤄졌다. 1860년대의 미국 철도의 대다수는 아직도 소규모 지역 사업체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기 대문에, 이러한 이동에는 통상 수많은 철도 회사들간의 조율을 필요로 하였다. 군대는 당연히 철도에서 최우선권을 갖기를 바랬다. 하지만 철도 매니저들은 아직도 이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민간 수송을 유지했다. 철도 회사들과, 민간 정부, 그리고 군대가 이 미묘한 균형 관계에 모두 연관되어 있었다.

 

 북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군사 수송에 우선권을 보장하는 법령 제정과 함께, 철도 회사들이 전쟁을 지원하면서도 적절한 이윤은 낼 수 있는 비공식적 합의가 동시에 이뤄졌다. 1862년 1월, 미국 의회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President Abraham Lincoln)으로 하여금 군사 목적으로 철도와 전신을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군이 징발한 모든 철도의 운영은 전쟁성의 신설 기관인 미국군사철도국(U.S. Military Rail Roads, USMRR)에게 위탁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USMRR의 권한은 전쟁 과정에서 접수한 남부 연합의 철도에만 국한되었다. 엄청난 긴급 상황을 제외하면, 군대는 북부 철도를 다루는 데 있어서 억압보다는 협조에 의존하였다. 사실 군대에게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군인 중에서는 철도 운송에 대한 전문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전략적 수준에서의 철도 전략에 있어서 진정한 전문가는 평생 직업으로 철도를 운영해 온 민간인 경영자들이었던 것이다.

 

 북부 정부는 한발짝 더 나아가, 민간 철도 관계자들을 임관시켜 이들을 USMRR의 주요 직책에 임명하게 된다. 예를 들어 대니엘 C. 맥칼럼(Daniel C. McCallum)의 경우 전직 이리 철도회사(Erie Railroad)의 총감사(general superintendent)였는데, 준장 계급으로 임관하여 USMRR의 총책임자가 된다. 허먼 하웁트(Herman Haupt)의 경우 과거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의 주 엔지니어(chief engineer of the Pennsylvania)였는데, 이후 버지니아 전구(Virginia theater)의 건설 및 수송 책임자가 된다. 그 역시도 종국에는 준장 계급에 도달하게 된다. 보다 상급 단계에서는,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의 부회장이었던 토마스 A. 스콧(Thomas A. Scott)이 1861년에서 1862년 사이에 국방차관으로 근무하였다. 중요하면서도 취약했던 볼티모어 오하이오 철도사(Baltimore and Ohio Railroad)의 회장이었던 존 W. 가렛(John W. Garrett)의 경우, 국방장관에게 기술적 조언과 행정적 지원을 위한 직접 면담권을 가졌다.

 

(그림 2. USMRR의 조직도, 1863년 무렵.)

 

 의회에 의한 포괄적 권한 보장과, 북부 철도 경영진들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북부 정부는 명확한 지휘 체계와 다양한 전장에 걸친 효율적인 조율이 가능한 진정한 중앙 집권화된 군사 철도 조직을 창설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 남북전쟁이 벌어진 시대는, 연방 정부가 이러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할 의도도, 행정력도 갖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 결과 북부측 군사 철도는 국방장관이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하는 문제를 겪게 되며, 버지니아  군사 철도의 권한과 겹치게 되고, 독자적으로 운영되던 서부 부서(western department)의 권한과도 겹쳤으며, 워싱턴 D.C.로부터 지시를 받기보다는 지역 군사 당국과 직접 협조하는 것이 나은 철도들과도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림 2 참조). 이러한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북부의 철도 시스템은 어떻게 철도를 운영해야 하는 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권한을 위임하였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게 된다.

 

(지도 8. 제 11군단과 12군단의 이동 관리)

 

 아마도 이들 민간 전문가들이 이룬 성과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으로는, 앞서 언급한 1863년 버지니아에서 테네시까지의 제 11군단과 12군단의 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지도 8 참조). 9월 23일, 대통령과 국방장관, 참모총장, USMRR 국장(superintendent)이 모여 25000명의 증원군을 테네시로 보내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계획 수립은 9월 24일 시작된다. 국방부(War Department)가 아닌 볼티모어 오하이오 철도사의 수송 부서가 계획 수립을 수행하였고, 이 계획에 관련된 5개의 다른 민간 철도회사들과의 조율을 담당하였다. 9월 25일, 최초의 병력이 버지니아에서 기차에 탑승하였다. USMRR 국장인 맥칼럼이 병력 탑승을 맡았다. 가렛과 볼티모어 오하이오 사의 운영진들이 루이스빌까지의 이동을 담당하였다. 1년 전에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의 부회장직으로 돌아온 스콧은, 루이스빌에서 앨러배마주 브리지포트(Bridgeport)의 하차장까지의 이동을 담당하였다. 조직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작전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 작전이 최초 제안된지 단 2일만에 개시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분명 북부 측에서는 전략 측면에서 대단히 세련된 철도 전략 능력을 발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전술적 수준에서의 철도 전략은 전방 부대에 보급선을 유지 및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여러 측면에서 이 과업은 전략적 수준의 철도 전략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 전방 부근에서의 문제들은 단지 거물들을 "이어 맞추기(networking)"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가 없었다. 전방에서는 숙련된 전문가와 고된 노동을 필요로 했다. 

 

(그림 3. 이상적인 전술 철도선의 구성)

 

 이상적인 경우, 전술 철도선은 다수의 측선(siding; 대피로)을 만들어 반대편에서 오는 철도가 통과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승하차에 필요한 넓은 승강장을 필요로 하며, 기차가 반대로 돌 수 있도록 Y자 시설(Wye, 흔히 말하는 쓰리포인트 턴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야 하며, 철도 이동을 조율할 전신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했다 (그림 3 참조). 하지만 전선 근방의 철도의 경우 앞서 말한 이런 시설들이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적으로부터 탈취한 철도 상태가 엉망인 경우, 적군이 철도나 철교를 파괴한 경우 등도 고려해야 했다. 더 심각했던 문제로는 철도 운영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군사 장교들이 간섭하는 경우였다. 전방의 군수장교들은 실제 필요한 것보다 많은 보급물자를 청구함으로써 수송 시스템에 과부하를 걸었고, 반면 이 물자들이 적에게 탈취당할 위기에 놓이면 또한 철도를 통해 이 물자들을 후송하도록 요구했다. 전투부대 장교들의 경우에는 자기 부하들을 위하여 종종 화차를 징발하였으며, 이로 인해 단선 철도의 흐름이 엉켜버리곤 했다. (아틀란타에서 남부연합군이 퇴각하던 당시, 한 장교가 부상당한 부하들을 운반하기 위하여 철도 관계자에게 말도 하지 않고 열차를 징발하였다. 이로 인하여 철도 충돌 참사가 벌어진다.) 군 장교들은 부하들에게 열차 하역의 목적을 세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작업이 지연되고 전체 철도운행이 막혀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부대 자체의 용도로 화차를 징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개화차(boxcars)는 사무실이나 창고로 쓰기 제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남용은 이미 심각한 만성 상태인 화차 부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적군이 이러한 전술 철도선을 사보타지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지도 9. 제 2차 불런 전역)

 

 전술 철도 작전에 있어서의 위험요소들에 대해 가장 잘 나타내주는 사례는 아마도 제 2차 불런 전역(Second Bull Run Campaign)일 것이다 (지도 9 참조). 1862년 8월 31일, 존 포프 소장(Major General John Pope)의 고립된 북군은 리 장군이 이끄는 북부 버지니아 군의 타격을 받기 직전이었다. 한편, 조지 B. 맥클레런 소장(Major General George B. McClellan)이 이끄는 포토맥 군은 반도 전역(Peninsula campaign)에서 실패를 맛본 뒤에 수로를 통해 급거 북상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맥클레런 군대는 고립된 포프의 부대를 향해 대략 20마일 가량을 행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면서 철도 화차가 준비되길 기다렸다. 맥클레런 스스로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포프 장군의 철도 책임자인 헤르만 하웁트가 난장판을 정리하도록 허용해 주었다. 하웁트는 병력을 전방으로 신속하게 수송하는 한편, 탈취될 위기의 물자들을 후송하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의 노력을 존중한 것은 아니었다. 증원군을 데리고 온 지휘관들 중 하나였던 사무엘 D. 스터지스 준장(Brigadier General Samuel D. Sturgis)은 알렉산드리아 근방에서 4대의 기차를 세우고, 이들에게 자신의 여단을 태워 전방으로 즉각 수송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부하들은 승차할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전방에 도착해서도 스터지스의 병력들은 하차에 시간을 끌었다. 이 무책임한 단 한명의 지휘관의 행동으로 인해, 하웁트의 업무는 완전히 뒤엉키게 되고, 그날 하루 종일 모든 나머지 운송이 막히게 된다. 하웁트가 위기에 빠진 포프의 군대를 위해 철도 수송을 유지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자, 스터지스 장군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다, "나는 존 포프에 대해서는 새똥 한조각 만큼도 관심이 없다(I don't care for John Pope one pinch of owl dung)".

 

 종국에 동부와 서부 전구 전반에 걸쳐 통용되게 되는 전술 철도 운영 시스템을 확립시킨 것은 군복입은 민간 철도요원이었던 헤르만 하웁트였다. 그의 원칙은 단순하고 직접적이었으며, 국방장관의 찬사를 받게 된다.

 

 1. 어떤 군 장교도 철도 운송에 간섭할 수 없다.
 2. 보급품은 필요한 경우에만 전방으로 보내진다.
 3. 전방에 도착한 열차는 모든 가용 인원을 통하여 즉각 화물을 내린다. 협조를 거부하는 장교는 누구든지 면직된다.
 4. 전신이 불가능한 경우, 열차는 엄격한 시간표에 따라서 운영된다. 모든 열차는 짐을 다 실었든 아니든 간에 정시에 출발한다. 다음 열차가 못 실은 것을 실을 것이다.
 5. 측선(siding, 側線)이 없는 노선이라 양쪽에서 오는 철도가 교차하지 못하는 노선에서는 5~6개의 열차들이 그룹을 지어 운행한다. 각각의 그룹은 화물을 내린 후, 다음 그룹이 출발하기 전까지 출발지로 돌아온다.

 

(그림 4. 하웁트 시스템: 조직 )

 

 1863년까지 하웁트는 버지니아 주의 군사 철도를 운영하는 수송 전문가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휘하 조직을 건설 기능과 운영 기능의 뚜렷이 나눠지는 조직으로 구성하였다 (그림 4 참조). 건설단(Contruction Corps)들은 철도를 군사 용도에 맞게 만드는 임무를 맏았다. 이들은 전문 토목 엔지니어와 숙련공, 육체 노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자재와 도구, 그리고 자체 수송수단이 제공되었다. 제공되는 자재로는 손상된 철로와 철교를 신속하게 수리할 수 있게 사전 조립된 구성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건설단들은 자활적 부서로 기능하게 조직되었는데, 이들 각각은 주어진 구역 내에 벌어진 비상 사태에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으며, 외부 도움이나 상부 지시 없이도 철도를 부설할 수 있었다. 건설단은 건축물의 내구성보다는 신속함을 강조하였다. 전쟁의 끝 무렵, 다양한 전구에 있던 건설단에는 약 1만명의 인원이 고용되어 있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노예 출신이었다.

 

 수송단(Transportation Corps)의 경우 민간 철도의 수송부(Transportation Department)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정비 업무와 운행 업무를 담당했다. 사실 여기에서 근무하는 인원 대부분은 정부에서 고용한 민간 철도 요원들이었다. 수송단 역시도 주어진 철도 구간별로 나눠진 부서로 조직되었다.

 

(지도 10. 게티스버그로 향하는 철도)

 

 하웁트의 업적이 가장 빛을 발휘한 것은 1863년 게티스버그 전역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 10 참조). 이 전역은 북군의 포토맥 군이 아퀴아 크릭의 철도 종점 부근에 있던 시점에 개시되었다. 군대가 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볼티모어 오하이오, 웨스턴 매릴랜드, 게티스버그의 철도 구간이 연속적으로 개통되었다. 볼티모어 오하이오의 경우에는 1급의 철도 구간(first-class railroad)이었지만, 웨스턴 매릴랜드와 게티스버그는 무거운 화차가 통과하기에는 무리인 철도였다. 정부는 이 양개 철도 구간을 징발하였으며, 하웁트는 작업에 들어간다. 건설 팀들이 남군 습격부대가 파괴한 철교와 철로를 교체 및 보수하였다. 수송부 요원들은 버지니아 주에 있는 USMRR 철도에서 기관차와 화차를 가져왔다. 7월 4일이 되면, 하웁트는 낡아 빠진 웨스턴 메릴랜드 철도선의 운송 용량을 5배로 끌어올리게 된다. 이 철도선은 전투 다음날까지 웨스트민스터로부터 일일 1500톤의 보급물자를 수송하게 된다. 게티스버그 철도선은 16000명에 이르는 부상병들을 후송시켜야 하는 시점에 맞춰 개통되었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포토맥 군이 버지니아 주에서 북상을 시작할 무렵에는 군사령관 조차도 이 행군 종점이 어디가 될 것인지를 알지 못했음에도, 하웁트와 USMRR은 이 기동 전역 전체 기간에 걸쳐 사실상 연속적으로 철도 지원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지도 11. 아틀란타 전역)

 

 게티스버그 전역 기간 동안의 하웁트는 이미 아군 통제하에 들어온 기 부설된 철도선을 활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1864년이 되면, 하웁트의 방식대로 조직된 USMRR의 건설 단원들은 (당시 하웁트는 민간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말 그대로 남부 연합의 심장부로 침공해 들어가는 군대의 이동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이들은 전투 부대가 전진하는 속도만큼이나 빨리 철도를 수리하였고, 엄청난 양의 보급을 유지시켜 주었다. 이 해의 봄과 여름에 있었던 셔먼 장군의 채터누가에서 아틀란타까지의 작전은, 철도선이 군대의 전진에 따라 새로 재부설되는, 그리고 적군의 반복된 교란작전에도 유지되는 좋은 사례로 들 수 있다 (지도 11 참조). 건설 요원들은 이 작전기간 동안, 총 75마일의 새 철로를 부설하고, 11개의 주요 철교를 건설하였다. 북군의 보급 철도는 셔먼 군대가 아틀란타에 입성한 바로 다음 날부터 아틀란타에 들어왔다. 그리고 철로 중간 중간에 배치된 보수팀들과 각 철로 종점에 위치한 건설 열차(construction trains)는 끊임없는 남부 군대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철도 운행을 계속 유지시켰다.

  

(지도 12. 1864년 그랜트가 벌인 전역)

 

 1864년, USMRR은 또한 버지니아에서 그랜트의 군대가 래파해낙 리버 방어선(Rappahannock River line)을 돌파하여 리치먼드로 진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윌더니스 전투(Wilderness; 황야, 황무지)와 스포틸바니아 전투(Spotsylvania battles) 당시, 그랜트는 기존의 아퀴아 크릭 보급로에 의존하였다. 이후 그랜트는 기지를 래파해낙의 포트 로얄(Port Royal)로 전환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수운을 이용하여 보급로를 유지하였다. 노스 아나 강(North Anna River)에서 콜드 하버(Cold Harbor)로 남진하는 과정에서, 그랜트는 벤자민 버틀러 소장의 제임스 군(Major General Benjamin Butler's Army of the James)의 일부를 동원하여 적지 깊숙히 위치한 파문키 강(Pamunkey River)(요크 강의 지류임)에 있는 화이트 하우스(White House)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지도 12 참조). USMRR은 화이트 하우스에서 디스패치(Dispatch)에 이르는 리치먼드 - 요크 강(York River) 철도를 개통 및 운영하였다. 그랜트는 이후 이 '새로운 보급소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후, 그랜트가 제임스 강(James River) 남쪽을 통과하는 시점에서, USMRR은 시티 포인트(City Point) - 피터스버그 철도를 운영한다 (지도 13 참조). 이어지는 시기, 그랜트의 군대가 피터스버그 남쪽과 서쪽으로 포위선을 확장하면서, USMRR은 북군 좌익에 대한 보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새 철도를 부설하게 된다. 그랜트의 군대는 날림 공사(jerry-built)로 부설되긴 했지만, 어쨌든 전문가에 의해 운영되는 철도를 통해 보급을 받았으며, 기존 철도를 통해 보급을 받고 있던 피터스버그의 리의 군대에 비해 병참 측면에서 훨씬 양호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지도 13. 1864-65년 당시 피터스버그 작전 당시 양군의 배치)

 

 남부 연합은 어떠하였는가? 이들 역시 전략 및 전술적 수준에서 철도에 엄청나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중요한 병력 이동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남부 측은 조각나있고 제대로 완결되지 않은 철도 시스템을 갖고 전쟁을 시작하였다 (철도가 북부의 20,000마일에 비해 9,000마일에 불과했음). 전쟁이 시작되자, 북부와는 달리 남부는 기존 철도 인프라를 확장하기는 커녕 보수유지할 능력조차 보유하지 못했다. 게다가 남부연합 정부가 철도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한 것은 1865년 2월이 되어서의 일이었다. 전쟁 대부분 기간 동안, 군사 수송은 전적으로 민간 철도 관리자들의 판단 하에서 이뤄졌다. 남부 연합에는 북부의 토마스 A. 스콧이나 존 W. 가렛에 상당하는, 군사적 요구와 철도회사의 능력을 조화시킬 전문성과 권한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남부 연합에는 효과적인 전술 철도 운행을 제도화하고 절차를 확립할 헤르만 A. 하웁트(Herman A. Haupt)와 같은 인물이 없었다. 그리고 남부 연합에는 군을 즉각 지원할 수 있도록 철도를 운영하는 군사 철도 기관이 없었다. 남부 연합이 철도를 군사적으로 활용하려는 과정에 있어서 겪었던 문제점들은 북부에서 겪었던 문제점들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부 연합에는 전문가가 없었으며, 북부 철도에서처럼 일이 돌아갈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중앙 집권화된 통제 기구가 없었다. 한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명확히 볼 수 있을 것이다: 1863-64년의 겨울 당시, 북군의 포토맥 군은 아퀴아 크릭 보급로를 통한 보급품으로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반면 자국 수도에서 단지 30마일 거리의 직통 철도를 보유하고 있던 남부연합 리 장군의 북부 버지니아군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남부연합은 병사들을 위한 보급품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부 연합 관리들은 이것들을 전선으로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철도는 미국 남북전쟁 시기 전략 수립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음이 명백하다. 철도는 수많은 군사 작전의 강도와 방향을 결정지었다. 철도는 아마도 섬멸전을 방해함으로써 전쟁의 기간을 늘린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또한 북부의 철도 전략에서의 우위로 말미암아, 1864년 및 1865년의 병참 상황이 조성되었고, 이것이 남부 연합으로 하여금 패배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철도는 아포마톡스 항복 협정 이후에도 군사 과학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가 시공을 뛰어넘어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시기로 넘어가게 되면, 독일의 슐리펜 계획(Shlieffen Plan)과 프랑스의 제 17 계획이 사실상 병력 재배치와 병력 동원을 위한 대단히 정교한 철도 시간표로 대부분 구성되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실질적으로 철도 운송은 단지 전략의 일부일 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전략이 되어버렸다. 미국 남북전쟁은 철도가 중요한 역할을 발휘한 첫번째 전쟁이며, 세계에 전쟁 양상을 영원히 바꾸는 중요한 군사 수단을 소개한 전쟁이다.


 

 

참고문헌 (Bibliography)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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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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