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 아프리카 반군

[스크랩] [번역] 해적질과의 기나긴 전쟁사 : 역사적 경향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2010년 / 제 2장. 서인도 제도에서의 해적 (1)

박용수 2014. 10. 27. 16:32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9 ~ pp 19 >

 

 


 

제 2장. 서인도 제도에서의 해적
(Piracy in the West Indies)

 


 서인도 제도에서의 해적질은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 사략선장인 장 플러뤼(Jean Fleury)는 1523년, 금은보석과 기타 아즈텍 세공품들을 운반하던 3척의 스페인 보물선을 나포하였다. 그 이전까지의 유럽인들은 신세계의 환상적인 부(富)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소식은 신속하게 퍼졌고, 이어 1530년대가 되면 구세계에 근거를 두고 있던 해적들이 정기적으로 카리브해의 스페인 선박들을 먹이로 삼게 된다. 이 지역의 해적활동은 약 200여년 뒤인 1730년 무렵에 영국 해군의 힘에 의해 제압되기 전까지는 계속 번창하였다. 한편 1820년대 무렵에도 이곳에서 다시 한번 해적 행위가 기승을 부리게 되는데, 이번에는 영국 해군 외에도 미국인들이 이들을 진압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림 1에 카리브해 섬들이 나타나 있다.)

 

(그림 1. 카리브해의 섬들)


 해적이 번성하기 위한 3가지 주요 조건인 '적합한 해양 지형', '우호적 정치 환경', '육상의 안전한 도피처' 등의 상황이 서인도 제도에 해적이 번창하던 양개 시기에 분명하게 존재하였다. 이곳 카리브해의 주요 항로 가까이에는 아직 측량되지 않은 섬들과 골짜기(coves), 강어귀(inlets) 등이 다수 존재했다. 해적들은 이러한 고립된 장소들을 먹잇감들을 기다리며 숨을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해적을은 희생자를 발견하게 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상선을 급습하여, 상선 선원들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배를 탈취해버렸다. 또한 카리브해의 수많은 좁은 수로들은 이들 해적들이 먹잇감을 쉽게 발견하고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정치적 환경 역시도 해적질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정부는 모두 해적들과 사략선들을 활용하여 카리브해의 자국 소유물을 보호하는 한편, 스페인을 경제적으로 약화시키는 데에 활용하였다. 16세기 및 17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스페인 당국에서는 서인도 제도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식민지들을 스페인 영향권(Spain's sphere of influence)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였으며,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들 식민지 주민들과 스페인 간에는 수많은 전투들이 벌어졌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의 해군들은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에, 이들은 카리브해의 신생 식민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국 함대를 상시 주둔시킬 수가 없었다. 공식적인 해군의 보호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들 식민지들은 해적들과 사략선단을 활용하여 스페인에 대한 주요 방어 수단으로 삼았다.

 

 사략선(privateers)은 실질적으로 합법적인 해적이었다. 이들의 사략 허가장(letter of marque)은 동 문서에 기록된 어느 국가의 선박에 대해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사략선들은 전쟁 시기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만, 스페인은 근 200여년에 걸쳐 선포되지도 않은 전쟁을 서반구에서 거의 지속적으로 수행해야만 했다. 식민지 총독들은 비록 정부 훈령에는 반하는 내용이었긴 하지만, 평화시에도 사략 허가장을 발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문서의 보호 아래, 사략선들은 적국의 깃발을 달고 있는 어떠한 선박이든지 마음대로 먹잇감으로 노릴 수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도 많은 사략선들이 평화시의 활동으로 돌아가기가 힘듦을 깨닫고 해적으로 돌변하면서 더욱 복잡하게 돌아갔다. 유럽 국가들은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마침내 사략선 활동을 금지시키게 된다.

 

 사략선과 해적간의 주요한 차이점은 이들의 최종 목적에 있었다. 사략선의 경우 국가의 승인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목표는 적국의 상선단 및 적국 상업을 약화시킴으로써 자국을 보호 및 강화시키는 데에 있었다. 비록 사략선 활동이 부수적으로 이 활동에 연루된 인원들에게 부를 안겨줄 기회도 제공하긴 했지만, 국가의 입장에서의 주 목표란 적국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지, 자국 시민들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는 데에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략선 활동은 중상주의 이론(mercantilist theory)에 부합하는 것으로써, 적국 상선의 파괴는 경쟁을 감소시키며 따라서 자국의 부를 촉진시킨다는 논리였다. 한편 해적들은 모든 국가의 선박들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모든 국가의 선박이 해적의 적이었던 셈이다.

 

 물론 해적행위가 야경꾼의 눈에 걸리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한 국가에서 합법적인 사략선 활동으로 간주되는 것도, 대부분의 경우 희생자 국가의 입장에서는 해적행위로 간주되었다. 스페인 관리들은 적어도 한번 이상 생포한 사략선원들의 목에 사략 허가장(letters of marque)을 건 채로 이들을 교수형에 처한 사례가 존재한다. 비록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활약에 기사 작위를 하사하였지만, 스페인 관리들은 그를 해적으로 간주하였으며 그에게 주어진 작위를 무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비단 스페인의 경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미국인 독자들이라면, 1813년 영국의 작가 찰스 존슨(Charles Johnson)이 '노상강도와 해적의 역사(History of Highwaymen and Pirates)'를 집필하면서, 부록에 미국의 해군 영웅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를 "사악하고 대담한 해적"으로 분류하였다는 사실을 알면 경악할 것이다.

 

 정치적 환경은 세번째 요소인 해방구(sanctuaries) 문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정착민들은 해적들을 자신들의 주요 방어 수단으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들 해적들이 자기 항구들에 오는 것을 환영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가져오는 장물들 또한 환영하였다. 해적들은 해적선을 수리하고, 식량과 음료수를 구매하며, 장물들을 판매할 수 있는 항구들을 필요로 하였다. 이들 해적들이 제공하는 보호 외에도, 식민지 상인들은 이들 해적들이 저렴하게 판매하는 장물들을 통하여 이득을 볼 수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환경도 변화하였고, 이에 따라서 해방구의 위치도 바뀌었다. 최초의 해적들은 유럽을 기지로 하여 카리브해까지 항해 후 먹잇감을 찾았다. 1620년대가 되면 이들은 먹잇감과 보다 가까운 지역에 기지를 세우게 된다. 히스파뇰라 섬(Hispaniola)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토르투가(Tortuga)의 경우 최초의 대규모 해적 해방구였다. 이곳은 향후 거의 100여년간 해적들의 천국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자마이카(Jamaica) 역시도 또다른 해적들의 거점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정치적 환경이 변화하면서 영국은 결국 자마이카를 해적들로부터 격리시키게 된다. 자마이카를 더 이상 활용하지 못하게 된 해적들은, 이제 바하마(Bahamas)를 작전기지로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종종 미국 식민지들도 활용하곤 하였다. 1600년대 당시의 보스톤, 뉴포트, 필라델피아, 뉴욕에는 해적들이 종종 모습을 드러내곤 하였다.

 

 서인도 제도의 해적행위의 원인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초창기 해적행위는 유럽 국가들이 지원하는 상업 전쟁이었다. 교황 알렉산더 6세(Pope Alexander VI)는 1493년 교황 칙령을 통해 전 세계를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분할하였다. 중상주의 이론을 채택하고 있던 스페인은 자국의 영향권 내에 있는 모든 외국 상행위들을 근절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스페인은 자국 식민지들이 오로지 모국하고만 무역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모든 외국 상인들은 이들이 합법적인 상인이더라도 카리브해 지역과 무역을 시도할 경우 밀수꾼이나 해적으로 간주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교황이 보장해 준 이 독과점 체계에 대하여 불만을 품었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무시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이들 국가들은 비록 직접 지원은 하지 않더라도, 개인 사업가들이 스페인 식민지들과 무역할 수 있도록 북돋워주게 된다. 한편 스페인 식민지 사람들은 왕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이들 외국인들과 무역을 하고 싶어했는데, 그 원인은 스페인 상품들은 쉽게 구하기 어렵거나 너무 비쌌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인들이 이들 상인들에게 가혹한 대응을 하면서 스페인과 다른 국가들 사이에는 선포되지 않은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윽고 사략선단을 이용한 국가가 지원하는 해적행위가 카리브해를 뒤덮게 된다. 스페인은 16세기에서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거의 지속적으로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된다. 대규모 국가 함대를 건설하고 유지할 자원이 없었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은 자국 해군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사략선을 활용한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무역이 곤란한 상황에서, 선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배를 사략선 임무에 자주 제공하게 되었다.

 

 1670년대가 되면 마침내 사략선들과 해적들이 입힌 피해가 스페인을 약화시킴으로써, 더 이상 이들이 필요하지 않은 시점에 다다르게 된다. 영국은 은사(pardon)를 실시하여 해적들로 하여금 일을 그만 두도록 유도하였다. 이 정책이 실패하자, 영국은 이번에는 해적 사냥꾼(pirate hunters)을 고용하게 된다. 국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해적들은 이제 모든 국가의 선박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해적질은 이제 바다 위의 모든 자들을 상대로 하는 사업이 된 것이다.

 

 해적질은 항상 주기적 모델을 따랐으며, 시간에 따라 흥하였다 쇠하였다. 최초 해적행위는 소규모였으며, 서인도 제도의 주요 해적 피해자였던 스페인인들은 이를 통상 무시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적들의 공격이 날로 대담해지자, 스페인인들은 무력으로 대응하면서 해적들의 거점들을 소탕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은 해적들의 해방구를 영구적으로 박멸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며, 잠시 동안의 휴지기를 거쳐 해적들은 과거의 행태로 돌아왔으며, 다시금 스페인 선박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서인도 제도의 해적질의 첫번째 시기가 종말을 고한 것은, 해군 최강대국이었던 대영제국이 자국의 자원을 이 문제 해결에 투입하고자 결심하였을 때였다. 1713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War of Spanish Succession)이 끝나면서 영국 해군은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평화를 눈앞에 둔 영국 상선단들은 자신들의 거래선을 전 세계로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해적질은 이러한 해상 교역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측에서는 서인도 제도에서의 해적질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해군 작전을 포함하여 법적, 정치적 개혁을 수반한 영국측의 노력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서인도 제도의 해적질은 거의 100년 동안 근절되게 된다.

 

 서인도 제도에서의 2번째 해적질의 시대가 온 것은 1810년대 후반,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들이 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번에도 해적질을 부추기는 3가지 주 요소들이 작용하였다. 우선 정치적 혼란이 해적행위를 가능케 하였다. 남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의 신생 국가들은 사략선들에게 사략 허가증(letters of marque)을 발행하여 스페인 선박들을 공격하도록 승인하였다. 반면 스페인 또한 사략선들을 파견하여 신생 국가들의 선박들을 공격하였다.

 

 서인도 제도 해적질의 두번째 시기의 해적/사략선들도 카리브해의 수많은 측량되지 않은 섬들과 골짜기들을 이용하여 선박들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스페인 사략선들과 해적들은 대체로 쿠바(Cuba)와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다른 시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사략선들은 항상 노려야 될 국가의 선박만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해방구 위치가 영국 및 미국 상선들이 사용하는 항로와 가까웠기 때문에, 스페인 해적들은 이들 역시도 먹잇감으로 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미 합중국은 스페인과 전쟁 상태가 아니었지만, 스페인 관리들과 상인들은 이들 해적들에 은신처와 보급지원을 제공해 주었다. 스페인 사람들 상당수는, 미국과 영국이 다소간 반란군들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해적들의 장물들을 구입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해적들에게 식량, 무기, 해군물자들을 공급하였다; 해적들이 미국과 영국 해군을 피해 숨을 수 있는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다.

 

 스페인 해적들의 약탈행위는 끝내 미 합중국과 영국의 반응을 촉발시키게 된다. 미국과 영국 해군은 연합하여 몇 년의 짧은 기간 내에 해적을 박멸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스페인과 해적간의 복잡한 관계 때문에 이는 그리 쉬운 업무는 아니었다. 해적들이 완전히 박멸된 것은 미국과 영국 정부가 스페인으로부터 해적들을 육지까지 추격할 수 있는 허가를 얻고 난 뒤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로써 카리브해에서 해적질은 마침내 근절되게 된다.

 

 

 

 카리브해의 해적, 1500-1730 (Caribbean Piracy, 1500-1730)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첫번째 해적질 시기는 다시 2개 단계로 나뉘어진다. 첫번째 단계에서의 해적질은 스페인 제국과의 전쟁의 연장선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국적의 대다수 해적들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국수주의자들이었다. 게다가 이들 국가들의 해군은 소규모였기 때문에, 이들은 해적들을 자국의 미약한 지상 식민지들을 방어하는 데에 활용하였다. 1670년대가 되면 해적들을 지원하던 국가들, 특히 영국의 경우, 더 이상 해외 식민지들을 방어하는 데에 해적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이제는 해적들이 교역을 방해하고 국가간의 관계를 위협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결과 이들은 해적들에게 사면 제안을 함으로써 이들이 해적질을 그만 두도록 유도하게 된다. 하지만 해적들의 대다수는 합법성 여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목표물의 범위를 넓히고 모국 선박들까지도 먹잇감으로 삼게 된다. 이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해적들은 전세계와의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모국 역시도 이들과의 전쟁상태에 놓이게 된다.

 

 첫번째 단계의 해적 및 사략선들의 활동은 일명 "해적형 제국주의(piratical imperialism)"라는 명칭으로 묘사된다. 영국과 프랑스 당국에서는 해적들과 사략선들을 활용하여 스페인에 압력을 가하고, 최종적으로는 스페인이 영국과 프랑스의 신세계 식민지들을 인정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또한 스페인이 자국 식민지들의 외국과의 무역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해적질은 이곳 시장으로부터 상품을 획득하는 유일한 수단이 될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해적질과 사략선 활동은 상업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중상주의 이론에 따르면, 해적질을 지원하는 국가의 경제를 부강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해적질을 활용하였다.

 

 스페인의 어려움은 1519년 코르테즈가 아즈텍을 정복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미 시작되었다. 엄청난 부에 대한 기대로, 섬에 살고 있던 스페인 식민지 주민들이 대륙으로 상당수 이주했던 것이다. 1560년대가 되면, 히스파뇰라 섬(Hispaniola)에는 단지 1,000명 가량의 스페인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반 가량은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지역에 살고 있었다. 200명은 푸에르토리코(Puero Rico)에, 240명은 쿠바에 살고 있었으며, 자마이카(Jamaica)에도 소수가 살고 있었다. 스페인 정부 역시도 대륙쪽 식민지에 점차 중점을 두게 되었으며, 이는 섬들에게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바나(Havana)의 경우 유일하게 계속 성장하였는데, 이곳은 1519년 스페인에서 플로리다 해협(Florida Straits), 구 바하마 해협(Old Bahama Channel)로 이어지는 신항로가 개척되면서, 산토 도밍고를 누르고 가장 중요한 섬지역 항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은 보물선단의 보호 목적으로, 아바나에 새 항구를 건설함으로써 이들이 대서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곳에 집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실현되기 전에 재앙이 찾아들게 된다. 1523년, 옹플뢰(Honfleur)를 기지로 하는 프랑스 사략선장 장 플뢰리(Jean Fleury)가 아조레스(Azores) 근방에서 스페인을 향해 코르테스의 보물을 수송하고 있던 3척의 보물선 중 2척을 나포하였던 것이다. 플뢰리는 황금 62,000 두캇, 진주 600 마르크 (약 140 킬로그램에 해당), 설탕 수 톤을 탈취하였다. 비록 이는 당시 기준으로 합법적인 전쟁행위였지만, 스페인은 이를 해적 행위로 규정하였고, 1527년 플뢰리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비록 이전에도 신세계에 어마어마한 부가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긴 했지만, 플뢰리의 노획물로 말미암아 이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었다. 최초 프랑스 사략선들은 대서양 동부 지역에서 스페인 선박들을 노렸다. 그러나 1530년대가 되면 매년 30척 이상의 프랑스 선박들이 카리브해로 이동하여 스페인 보물선들을 노리게 된다.

 

 16세기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은 가끔 짧은 평화기를 갖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지속적으로 서로 전쟁 상태로 지냈다. 아조레스 군도(Azores) 및 케이프 베르데 군도(Cape Verde Islands) 서쪽 100 리그 지점을 기준으로, 그 서쪽에 있는 모든 땅은 스페인의 지배에 놓인다는 1493년 5월 교황 알렉산더 6세의 결정은 이러한 적개감을 부채질하였다. 프랑스와 영국 모두 교황의 이 선언에 불복하였다. 1559년 샤토-캉브레 협정 (Treaty of Chateau-Cambresis)으로 유럽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프랑스와 스페인 외교관들은 서경 46도선 서쪽에서 일어나는 폭력행위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선 너머에서는 평화가 아님(No peace beyond the line)"이라는 표현은, 프랑스 해적들은 이 지역에서 뭐든지 약탈할 수가 있으며, 반면 스페인인들 역시도 이곳에서는 마음대로 프랑스 침략자들을 처벌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 선 서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게 무엇이던간에 유럽에서의 관계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1684년 라티스본 협정(Treaty of Ratisbon)을 통해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평화 협정 범위를 전세계로 확대하기 전까지 효력을 발휘하였다.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역시 결국 스페인과 비슷한 합의를 하게 된다.

 

 16세기 초반에는 프랑스 해적이야말로 카리브해의 스페인 이익에 관한 주요 위협이었다. 그러나 동세기 중반이 되면서, 스페인 보물은 다른 국가의 침입자들도 끌어들이게 된다. 이는 스페인의 신세계 식민지들로부터의 은 수출이 증가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생산량이 급증한 원인은 기존 폐광된 광산들을 재가동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은 추출 방법이 발명되는 한편, 멕시코에서 새로 2곳의 은광산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인들은 이들 광산들을 운영하기 위해서 노동력 - 주로 노예 -이 필요했으며, 이는 비 스페인인들이 무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 결과 스페인 은에 대한 욕구로 인하여, 16세기 후반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의 선원들과 상인들, 해적들은 자신들의 운을 시험하기 위하여 카리브해로 몰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신세계로 몰려온 사람들 중에는 영국 해적인 존 호킨스(John Hawkins)와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킨스와 드레이크는 해적질 첫단계 시기에 대부분을 차지한 해적 유형의 전형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희생자들에게는 무자비했지만, 반면 영국 선박들은 공격하지 않는 충성스러운 영국 신민이었다.  이들 모두 해적 사업으로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둘 다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중요시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에도 해적질과 사략선단 활동 간의 불명확한 중간범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호킨스와 드레이크 모두 영국 왕실의 승인 하에 항해하였지만, 스페인 관리들은 이들을 해적으로 간주하였고, 만일 이들 중 붙잡히는 자가 있었다면 즉각 처형해 버렸을 것이다.

 

 존 호킨스는 영국 상인이자 노예 상인이었다. 호킨스는 1562년 3척의 노예선을 이끌고 카리브해로 향하였고, 이곳에서 스페인인들에게 300명의 노예를 판매함으로써 돈을 벌었다. 2년 뒤인 1664년 10월부터 1665년 9월의 기간 동안, 호킨스는 보다 대규모의 두번째 신세계로의 항해를 실시한다. 이번 항해에는 여왕 폐하의 함선도 1척 선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호킨스는 약 400명의 노예를 팔아 스페인 은을 획득하였고,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었다. 비록 스페인 대사가 항의하긴 했지만, 호킨스는 자신이 단지 평화로운 상인에 불과하다고 항변하였다.

 

 그의 세번째 항해는 1567년 10월에 시작되었는데, 그리 잘 되지 않았다. 당시 몇몇 스페인 관리들이 호킨스와 거래를 원했다. 한번은 호킨스와 총독이 가짜 전투를 벌임으로써, 총독이 영국인들과 거래하는데 대한 핑계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호킨스가 무력을 동원하여 스페인인들이 노예를 구입하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1568년 9월, 호킨스의 함대는 수리 및 보급을 위하여 베라 크루즈 주(Vera Cruz)의 항구인 산 후안 데 울루아(San Juan de Ulua)에 기항하게 된다. 이때 새로 임명된 스페인 식민지 부왕(new colonial viceroy)이 타고 있던 스페인 함대가 입항하여 호킨스를 항구에 묶어버리게 된다. 결과는 양측이 비기는 것으로 끝난다. 비록 호킨스는 병력과 화포 수에서 열세였지만 항구를 손에 넣고 있었다. 스페인측에서는 보급품 없이 무한정 포위를 지속할 수가 없었으며, 또한 악천후의 위협도 받고 있었다. 결국 호킨스는 부왕과 휴전 협정을 맺고, 스페인인들이 산 후안 데 울루아에 들어와 선박 수리 및 항구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부왕 측에서는 자신이 협상하고 있던 상대가 해적으로 간주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자 마자 협상을 깨뜨린다. 9월 23일 밤, 스페인인들은 경고 없이 공격을 개시, 영국측 선단을 참패시킨다. 호킨스와 드레이크는 2척의 배를 타고 간신히 탈출한다. 비록 드레이크 쪽은 안전하게 탈출하였지만, 호킨스의 배의 경우에는 단지 15명만이 살아남아 무사히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산 후안 데 울루아 전투야말로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날 이후로, 영국인들, 특히 드레이크는 스페인인들의 공격에 대해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드레이크는 1570년, 1571년, 1572년에 서인도 제도로 성공적인 항해를 하게 된다. 1577년 11월에서 1580년 9월까지, 드레이크는 전 세계를 일주하면서 스페인 선박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많은 노획물들을 탈취하게 된다. 그의 후원자들 중 하나였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드레이크의 성공적인 항해에 큰 도움을 받았으며,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게 된다.

 

 드레이크의 사례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전은 이후 더 많은 영국인들이 스페인의 신세계 지역에 침입하도록 자극하게 된다. 1588년에서 160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국 선원들은 매년 100에서 200회 가량의 해적 항해를 감행한다. 정부는 이러한 사업에 대하여 거의 통제하지 않았다. "해적형 제국주의"는 상업의 성장과 선박 건조를 촉진시켰으며, 한편으로 스페인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는 저렴한 수단을 제공하였다. 게다가 이윤도 엄청났다. 동 기간 동안, 영국 모험가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노획물을 통해 매년 150,000에서 300,000파운드 가량을 영국에 안겨다 주었다.

 

 스페인의 어려움은 1568년 네덜란드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심대되었다. 최초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밀수에만 국한시켰으며, 자국 상품들을 소금 및 담배와 교환하였다. 1599년 3월부터 1605년 12월 사이의 기간 동안, 총 768척의 네덜란드 선박들이 베네주엘라(Venezuela) 해안에서 소금 거래를 하였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화물 하역을 하는 짬을 이용하여 무장 슬루프 선(armed sloops)과 피네스 선(pinnaces)을 타고 스페인 연안 선박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606년 무렵이 되면, 네덜란드 해적들이 남아메리카 북부 해안의 거의 모든 스페인 해운활동을 박멸해버리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습격자들의 성공은 스페인의 재정에 타격을 입힌다. 스페인 왕가는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부를 담보로 엄청난 양의 부채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물선이 무사히 도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 결과 1564년부터 스페인으로 향하는 모든 선박은 2개의 중무장 호위선단 중의 한 곳에 포함되어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1개 선단은 4월에 출항하고, 또 한개 선단은 8월에 출항했다.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로부터의 보물선들은 늦봄이나 초여름 무렵에 아바나에 집결한다. 수송선단이 결성되면 2~8척의 전함의 호위 속에 스페인으로 출항한다.

 

 하지만 이 호위선단 시스템은 완전히 성공적인 것이 아니었고, 17세기 초가 되면 스페인은 파산하게 된다. 스페인의 재정문제는 카리브해의 해적행위가 성장하는 데에도 기여하게 된다. 스페인 왕실은 오로지 보물선의 안전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소규모 항구들은 알아서 방어하도록 방치되게 된다. 이들 항구들 중에서 충분한 정도로 자체 요새화를 할 수 있었던 곳은 거의 없었으며, 그 결과 대다수 스페인 정착촌들은 공격에 취약했다. 게다가 스페인에 카리브해 전역을 순찰 활동할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해적들이 스페인 전함을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원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던 해적을은 얼마 안가 서인도 제도 전역의 스페인인들을 공포에 몰아넣게 된다. 외국인들과의 불법 무역 거래를 막는 한편, 섬에 아직도 살고 있는 거주민들을 더 잘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1605년, 스페인 관리들은 여러 섬들에 남아있는 거주민들을 몇몇 인구 중심지로 재이주시키게 된다. 스페인 군인들은 외국 상인들과 거래한 지역에서는 작물을 파괴하고 마을을 불태웠으며,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이 떠난 곳에는 돼지와 소들만이 남았는데, 이들은 온화한 환경 속에서 번성하게 된다.

 

 이 결정은 오히려 스페인인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게 된다. 스페인 거주민들이 재배치되면서 생긴 공백으로 외국인들이 밀려들어왔다. 당시까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모험가들은 유럽 항구에서 출발하여 카리브해로 향했었다. 이제 외국 해적들은 먹잇감과 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카리브해 지역에 기지를 갖기 시작한다. 해적들의 새로운 항구들은 해적이 번성하기 위한 3가지 요소들을 제공하게 된다: 지리적 잇점, 정치적 지원, 육상의 해방구.

 

 처음으로 침입한 사람들 중에는 17세기 초 무렵 히스파뇰라 섬에 정착한 프랑스인 사냥꾼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네덜란드 상인들과 교역함으로써 생존하였으며, 이들 상인들은 가죽과 기름, 건조 육포 등을 사냥꾼들로부터 구입하였다. 이들 사냥꾼들은 부카니에(boucaniers)라고 불렸는데, 이들이 육류를 말리는 데에 사용한 상자가 부캉(boucan)이라고 불리는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원들은 바다에서 거의 전적으로 염장 돼지고기(salt pork)로 연명했기 때문에, 부카니에 건조 육포는 대단히 인기가 많았고, 이의 거래도 대단히 활발했다. (오늘날 영어에서 Buccaneer(버커니어)는 '해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음. 역주)

 

 스페인인들은 카리브해 전역을 배타적 영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영역을 침식해오는 외국인들 모두에 대하여 가혹하게 반응하였다. 1564년, 오늘날 플로리다 주 잭슨빌(Jacksonville, Florida) 지역에 해당하는 곳 근방에 있는 포트 캐롤라인(Fort Caroline)에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이 식민지를 건설하자, 스페인인들은 무자비하게 반응하였다. 1565년, 스페인인들은 정착촌을 공격하여 거주민 전원을 살해하였다. 이어 스페인인들은 세인트 아구스틴(St. Augustine)에 새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추가적인 프랑스인들의 침입을 막고, 플로리다 해협으로 출입하는 스페인의 해운을 보호하였다. 1593년, 스페인 당국은 스페인 정착촌들과 거래하던 10척의 네덜란드 상선들을 체포한다. 밀수에 대한 유죄 판결로, 선장들은 처형되었고 선원들은 갤리선 노예로 보내졌다. 런던 주재 베네치아 대사의 1604년 보고서에 따르면, 스페인 당국에서 스페인인들과 교역하다 붙잡힌 2척의 영국 선박 선원들을 고문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들은 선원들의 손과 귀, 코, 발을 잘랐으며, 여기에 꿀을 발라서 파리나 다른 벌레들이 꼬이게 하였고, 이어 이들을 나무에 묶어 죽을 때까지 방치하였다. 이러한 잔인한 행동은 보복을 부르게 되었으며, 이로써 이 지역의 폭력이 심화되게 된다.

 

 스페인 군인들은 부카니에들만 죽인 것이 아니라, 히스파뇰라 섬에서 이들이 사냥감으로 살아가고 있는 야생 소들과 야생 돼지들도 찾아 죽였다. 살아갈 수단을 잃어버린 많은 부카니에들은 히스파뇰라 섬 북서해안에 위치한 작은 섬 토르투가로 도주하였고, 이어 해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해적의 대명사인 버커니어(buccaneers)라는 단어의 근원이 된 이들 프랑스인 부카니에들은 스페인에 대한 무자비한 적이 된다. 속을 파낸 카누를 타고 해안 가까이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좀더 큰 스페인 선박들에게 몰래 접근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어 탈취한 선박을 이용하여 좀더 큰 배를 탈취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점점 이들의 행동범위가 넓어지면서 카리브해 전역을 활동권으로 두게 된다. 1665년이 되면, 이들 해적들은 대규모 선단을 보유하게 되고 카리브해에서 아무런 보복을 당하지 않고 마음껏 활동하게 된다. 때때로 스페인에서 토르투가를 습격하긴 했지만, 1630년대에서 1710년 무렵까지 이곳은 프랑스 해적들의 거점으로 유지되었다.

 

 카리브해의 다른 섬들 대부분 또한 스페인인들에 의해 무인도가 되었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이러한 공백지들 또한 채워들어가기 시작했다. 해적들, 밀수꾼들, 식민가들이 수많은 카리브해 섬들에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영국은 바베이도스(Barbados)(1621년), 세인트 키츠(St. Kitts)(1623년), 몬세라트(Montserrat)(1632년), 안티구아(Antigua)(1632년) 등을 손에 넣었다. 이어 1655년, 영국 세력은 카리브해의 보석인 자마이카를 손에 넣는다.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마르티니크(Martinique)(1635년), 과달루페(Guadeloupe)(1635년)를 손에 넣었고, 네덜란드도 쿠라카오(Curacao)(1634년)를 손에 넣었다. 비록 스페인은 이들 식민지들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기간 카리브해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식민지가 영구적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림 2. 자마이카 섬과 히스파뇰라 섬)

 

 해적 항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 2곳을 꼽자면 토르투가(Tortuga)와 자마이카의 포트 로얄(Port Royal)을 꼽을 수 있다 (그림 2 참조). 양개 섬 모두 해적질이 번창하기 위한 3개의 조건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이들 모두 중요한 항로 근방에 위치하고 있다. 토르투가는 2개의 중요 해협을 감제하고 있다: 쿠바와 히스파뇰라 사이의 윈드워드 수로(Windward Passage) 및 푸에르토리코와 히스파뇰라 사이의 모나 수로(Mona Passage)였다. 마찬가지로 자마이카 역시 쿠바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간의 항로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양개 지역은 해적들로 하여금 적들에 비해 지리적인 잇점을 갖게 해 주었다. 정치적 상황 역시 해적들에게 유리했다. 영국도 프랑스도 이곳 섬지역을 방어할 만한 충분한 해군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 해적들이 양개 섬의 주요 방어선 역할을 해 주었다. 따라서 지역 관리들은 이들 해적에게 해가되는 행동이라면 뭐든지 꺼릴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들 해적들이 토르투가와 자마이카를 통해 보호 및 보급을 받는 탓에 이들 두개 섬이 경제적인 번영을 누렸다는 점이다. 프랑스인 총독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토르투가는 실상 거의 60여년간 대체로 프랑스 왕실을 무시하고 거의 독립 해적왕국처럼 행동해 왔다. 마찬가지로 자마이카에서도 해적들은 거의 30년 이상 자유롭게 활동하였다.

 

 비록 스페인인들이 토르투가를 여러번 습격하긴 했지만 이들은 해적을 완전히 박멸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최초로 토르투가를 근거지로 한 해적은 피에르 르 그랑(Pierre le Grand)이었다. 그는 1620년 28명의 인원으로 커다란 보물선 한 척을 나포한다. 다른 대다수 해적들과는 달리, 르 그랑은 나포한 배를 끌고 프랑스로 귀항한 뒤, 화물을 모두 팔아 치우고 여생을 편안하고 부유하게 살았다. 프랑스는 1628년 이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다만 1631년과 1635년에는 영국측의 반대 주장을 처리해야만 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스페인은 비록 카리브의 섬들 다다수에 주민들을 두지 않고 있었지만, 반면 다른 사람들이 이들 섬에 거주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 결과 스페인은 1631년, 1635년, 1638년에 일련의 습격전을 벌인다. 1635년의 습격 당시, 스페인인들은 붙잡은 모든 남자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여성과 아이들은 추방하였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이 섬을 떠나면 해적들은 매번 다시 돌아왔다.

 

(2장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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