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20 ~ pp 30 >
< 참고사진 출처:
[1] (http://www.cavazzi.com/morgan/)
[2] (http://en.wikipedia.org/wiki/Fort_de_Rocher)
[3] (http://en.wikipedia.org/wiki/Thomas_Tew)
>
(2장 계속)
(토르투가의 드 로쉐 요새(Fort de Rocher)의 모습. 장 르 바쇠르가 해적들을 이끌고 건축하였다. 오늘날에는 흔적만 남아있다.[2])
스페인인들의 공격에 지친 해적들은 세인트 키츠(St. Kitts)의 프랑스 총독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1642년, 총독은 프랑스인 공학자인 장 르 바쇠르(Jean le Vasseur)를 파견하여 돕도록 한다. 르 바쇠르는 항구를 감제하는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해 주었고, 이어 세인트 키츠와의 연락을 끊은 뒤에 스스로 토르투가의 지배자가 되었다. 요새가 완공되지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인인들은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스페인인들이 완벽한 패배를 맛본다. 향후 12년간, 토르투가는 두말할 것 없는 카리브해 해적질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다. 이곳에는 해적들을 위한 사창가와 술집, 도박장들이 들어섰다. 이곳은 또한 번창하는 상업 중심지이기도 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상인들은 총과 탄약, 화약, 옷, 술 등을 들여와 해적들의 장물과 교환하였다.
토르투가는 1654년에서 1665년 사이에 불안정의 시기를 겪는다. 1654년, 스페인인들은 무력 침공을 통해 섬을 점령한다. 이들은 수비대를 주둔시켜 해적들의 귀환을 막았다. 스페인인들에게 불행한 일이지만, 이듬해 히스파뇰라 섬 해안 쪽으로 영국군이 침공하는 바람에 이 수비대는 철수해야만 했다. 그 직후 한 영국인이 이 섬을 차지했으며, 이어 1659년에는 그가 쫓겨나고 또다른 프랑스 모험가가 이 섬을 지배하게 된다. 1665년이 되면 이 섬은 완벽히 프랑스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토르투가는 1670년 무렵이 되면, 히스파뇰라 섬 서쪽 해안의 오지에 위치한 쁘띠그아브(Petit Goave)에 밀리게 되긴 하지만, 어쨌든 해적들의 안전한 도피처로서의 역할은 계속 유지하게 된다.
자마이카 역시 해적들을 위하여 여러 해 동안 봉사해 왔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은 1654년 12월, 윌리엄 펜 제독(Admiral William Penn)과 로버트 베나블 장군(General Robert Venables) 휘하의 대규모 군대를 서인도 제도로 파병한다. 이들의 임무는 히스파뇰라 섬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산토 도밍고를 함락시키지 못하게 되자, 대신 그보다 적은 인구를 갖고 있던 자마이카 섬에 눈을 돌려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 비록 스페인인들이 이 섬을 탈환하기 위해 몇차례 시도하긴 했지만, 1660년이 되면 자마이카는 완전히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스페인인들로 인한 위협으로 말미암아, 자마이카의 포트 로얄(Port Royal)을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도시(wickedest city in the world)"로 만드는 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적절한 군사적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또다시 스페인인들의 탈환 시도가 재개될 것을 우려한 자마이카 총독은, 1657년, 토르투가에 근거지를 둔 모든 영국 해적들을 불러들여 자마이카로 와서 섬의 방어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1665년 시점이 되면 포트 로얄에는 적어도 2000명의 해적들이 활동하게 된다.
자마이카는 해적들의 해방구로써 이상적인 곳이었다. 이곳은 파나마로부터의 해상 무역로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스페인인들이 아바나로부터 본국으로 남미의 보물들을 보내기 전에 보물들을 쌓아두는 곳이었다. 스페인과 영국 사이에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전쟁들 탓으로 해적들이 사략 허가증(letters of marque)을 얻기란 쉬운 일이었고, 이들의 활동에는 합법적이란 겉포장이 붙게 된다. 마침내 포트 로얄은 해적들을 위한 안전한 해방구가 된다. 영국 상인들은 해적들의 장물을 반겼으며, 해적들에게 술집과 도박장, 사창가를 제공하였고, 해군 물자와 무기, 탄약, 화약 등을 공급하였다. 17세기 후반부 대부분의 시기, 이 섬의 번영은 농업과 상업이 아닌 전적으로 해적질에 의존한 것이었다.
샤토-캉브레 조약으로 말미암아, "선 너머"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활동들이 어느 정도 합법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해적질과 합법적인 군사 활동 사이의 차이를 분간하기란 곤란한 경우가 잦았다. 캡틴 크리스토퍼 밍스(Captain Christopher Myngs)의 경력이 이러한 어려움을 말해주는 좋은 사례다. 밍스는 44포 프리깃인 마르스톤 무어(Marston Moor)호를 지휘하여 1656년 1월 자마이카에 도착한다. 도착하자마자, 밍스는 베네주엘라의 산타 마르타(Santa Marta)에 대한 별 소득없는 습격에 참여한다. 1658년 10월, 자마이카 해군전단장(Jamaican naval squardron) 자격으로 그는 스페인의 보물선단을 나포하고자 시도한다. 이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영국군은 스페인 마을 2곳을 불태우고 2척의 선박을 나포한는 데는 성공한다. 다음해, 밍스는 베네주엘라 촌락인 쿠마나(Cumana), 푸에르토카발로(Puerto Caballo), 코로(Coro)를 성공적으로 약탈한다. 노획물의 총 가치는 200,000 파운드에서 300,000 파운드 가량이었다. 스페인인들은 이에 밍스를 해적으로 간주하고, 사형 선고를 내린다.
밍스가 해결해야 했던 문제는 스페인인들의 사형 선고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마이카에 돌아왔을때, 해사법(Admirality laws)은 자신이 획득한 노획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것들을 당국에 제출하지 않고 임의로 처분하게 된다. 이에 자마이카 총독은 밍스를 체포하여 재판을 위해 1660년 런던으로 송환하게 된다. 그런데, 마침 그의 귀국은 찰스 2세의 복위 시기와 겹치게 되었고, 혼란 속에서 밍스는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을 면하게 된다. 처벌 대신, 계속 스페인인들을 괴롭히라는 찰스 2세의 격려를 받으며 34포 프리깃을 이끌고 1662년 자마이카로 돌아가게 된다.
밍스는 즉시 자신의 준-해적질을 재개한다. 1662년 10월, 밍스는 쿠바의 산티아고(Santiago)를 공격했고, 상당량의 보물 외에도 6척의 선박을 나포한다. 이 성공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지막 카리브해 활극이라 할 수 있는 캄페체만(Bay of Campeche)의 샌프란시스코 마을(town of San Francisco) 공략 당시 상당한 해적들의 도움을 얻을 수가 있었다. 12척에 분승한 1500명에 이르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해적들의 도움을 받아 밍스는 1663년 2월 경 마을을 점령하게 된다. 또한 14척의 스페인 선박을 노획하였으며, 주민들로부터 총 150,000 페소를 강탈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의 잔인성으로 말미암아 스페인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결국 찰스 2세는 스페인령에 대한 더 이상의 공격은 금지시키게 된다.
자마이카 해적 중에 가장 악명 높은 해적 중 하나가 헨리 모건(Henry Morgan)이다. 모건은 영국법에 따르면 단 한번도 해적인 적이 없었는데, 이는 그가 항상 자마이카 총독의 위임장(commission)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위임장의 합법성 여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어쨌든 모건과 그 부하들은 스페인인들과의 여러 교전을 통해 수많은 해적 활동과 잔인한 참극들을 벌여왔다. 모건은 밍스의 1662-1663년 작전 당시에도 참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1663-1664년 당시, 그는 존 모리스(John Morris)의 22개월간의 중앙아메리카 해안 항해에 동참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스페인 도시 3곳을 약탈하였다. 1668년, 모건은 자마이카 사략선단 제독(admiral of the Jamaican privateers)으로 선출된다.
자마이카 총독 토마스 모디포드 경(Sir Thomas Modyford)은 1668년 초, 스페인인들이 자마이카에 대한 또다른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에 대응하기 위해, 모건이 또다른 원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승인해 준다. 이 위임장에서는 지상 작전을 승인하고 있지 않았지만, 1668년 1월, 모간은 12척의 배에 탄 700명의 영국인 및 프랑스인 해적들을 이끌고 쿠바의 푸에르토 프린시페(Puerto Principe)를 공격한다. 모건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쿠바인들은 이 작전 소문을 듣고 보물을 챙겨 도시에서 달아난 상태였다. 해적들은 남아있던 주민들로부터 단지 50,000 페소만을 뜯어낼 수가 있었다. 형편없는 결과에 환멸을 느낀 프랑스 해적들이 모건을 떠나자, 그의 곁에는 단지 500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 병력을 데리고 모건은 포르토벨로(Portobello)를 공격한다. 이곳은 파나마 지협(Isthmus of Panama)에 위치한 스페인 보물 집결소였다. 이 작전에서의 결과는 좀 더 성공적이었다. 모건과 부하들은 도시를 점령하고, 3개의 요새를 점령하고, 100,000 페소를 손에 넣는다. 모건은 엄청난 양의 약탈물을 가지고 자마이카로 복귀하였으며, 이는 쿠바를 공격함으로써 위임장 범위를 초과한 데 대한 총독의 불만을 잠재우는 역할을 하였다.
(헨리 모건과 돈 알론조(Don Alonso)가 격돌한 마라카이보 해전[1])
1669년 4월, 모건은 베네주엘라의 마라카이보(Maracaibo)와 지브랄타(Gibraltar)에 대한 또 한번의 원정을 이끌게 된다. 비록 그가 도착하기 전에 상당수의 주민들이 도주하긴 했지만, 그와 그의 부하들은 붙잡힌 사람들을 고문하여 125,000 페소 가량을 뜯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모간이 자마이카로 돌아가려던 시점에서 스페인 총독이 3척의 전함을 이끌고 나타나 마카라이보 호수(Lake Maracaibo) 입구를 봉쇄한다. 비록 화력에서 열세였지만, 모건은 가장 큰 스페인 전함을 화선(fireship)으로 폭파시키고, 이어 전투를 통해 두번째로 큰 전함을 나포한다; 세번째로 큰 배는 좌초 후에 침몰한다. 모건은 5월 경 자마이카로 돌아왔으며, 엄청난 양의 노획물로 말미암아 당국은 그의 활동에 대하여 그리 면밀히 조사하지 않게 된다.
모건의 활약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671년 파나마를 약탈한 사례이다. 비록 1669년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는 평화 협정이 맺어졌지만, 스페인은 자마이카에 보복 습격을 감행해 왔고, 이는 모디포드 총독으로 하여금 또다른 원정을 승인하는 빌미를 주게 된다. 1670년 8월, 모디포드는 모건으로 하여금, 자마이카에 대한 스페인인들의 기계획된 공격들에 반격하기 위하여 그가 원하는 어느 곳에서건 스페인인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한다. 이 말이 떨어지자, 모건은 다시 한번 항해를 시작하였고, 그의 소집령에 카리브해의 거의 대부분의 해적들이 응하게 된다. 1670년 12월, 모건은 33척의 배에 2000명 이상의 인원을 거느리고 출항한다. 프로비던스 섬(Providence Island)을 탈취한 뒤, 해적들은 샤그레스 강(Chagres River) 입구를 지키고 있던 스페인 요새인 산 로렌조(San Lorenzo)를 점령한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 군인 300명 이상, 해적 100명 이상이 사망한다. 잔여 해적 약 1500에서 2000명의 인원을 가지고, 모건은 카누와 슬루프선을 타고 샤그레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나마로 향한다. 이 여행은 대략 2주가 소요되었고, 대부분의 기간 짙은 정글을 따라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1671년 1월 27일, 반 굶어죽기 직전인 해적들은 마침내 태평양에 도달한다. 다음날, 이들은 파나마 시(city of Panama)를 공격했고, 전투경험이 부족한 수비대를 신속하게 유린한다. 이어진 3주 동안, 해적들은 마을을 약탈하고, 남아있던 주민들을 고문하였으며, 이를 통해 추가적인 노획물의 위치를 알아내었다. 모간이 파나마를 떠났을 때, 그는 약탈물들을 수송하기 위하여 총 200마리의 노새를 필요로 했다.
모건에게 불행한 일이었지만, 이 공격이 벌어진 시기는 마드리드 조약(Treaty of Madrid)(1670년 7월)이 발효된 뒤의 시기였다. 이 조약의 중요한 조항 중의 하나로, 스페인은 영국의 신세계 식민지들을 인정하고, 그 대신 영국 또한 유럽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스페인과 평화 상태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카리브해 지역의 해적질을 합법화시켜주던 "선 너머에서는 평화 아님(no peace beyond the line)" 독트린이 철회됨에 따라, 해적질의 번영에 관한 조건 중 2가지인 정치적 혼란 및 육상 해방구 부분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 시점부터, 해적들은 더 이상 자마이카를 안전한 대피처로 간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조약에는 영국이 스페인 식민지들과 거래할 권리에 대해서는 아직 보장하지 않고 있었고, 따라서 아직도 분쟁이 발생할 여지는 남겨두고 있었다.
비록 모디포드가 1671년 5월까지는 이 조약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가 모건에게 제공한 위임장은 분명 그의 권한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공격에 대한 스페인측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찰스 2세 국왕은 모디포드를 토마스 린치 경(Sir Thomas Lynch)으로 교체한다. 린치는 모디포드를 체포하여 영국으로 송환하였으며, 모디포드는 런던탑(Tower of London)에서 2년간 복역하게 된다. 모건 또한 체포되어 1672년 4월 영국으로 송환된다. 하지만 그는 운이 좋았고 전혀 투옥되지 않았다. 대신 왕은 모건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으며, 1674년 린치가 파면되자 자마이카 부총독(deputy governor)으로 임명되어 자마이카로 돌아가게 된다. 모건은 1682년 린치가 복직되어 자마이카로 돌아와 그를 파면시킬 때까지 부총독 지위를 유지한다.
스페인 선박들을 노리는 것은 단지 영국인들 뿐만이 아니었다. 네덜란드인들과 프랑스인들도 17세기 내내 활약했다. 특히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골치거리였다. 이들은 스페인 식민지들과 불법 무역을 했으며, 신생 영국 및 프랑스 식민지들에 필수적인 물자들을 제공하였고, 카리브해의 스페인 해운에 악영향을 주었다. 가장 눈에 띄는 성공은 1628년 9월, 피에트 하인(Piet Heyn)이 마탄자스 만(Matanzas Bay)에서 스페인 보물선단을 통째로 나포하였던 경우였다. 그는 1200만 길더 (대략 480만 페소)에 해당하는 금은보화를 노획한다. 1630년대 후반, 네덜란드인들의 해적질로 말미암아 카리브해의 스페인 교역은 거의 완벽하게 파괴되며, 이로써 이 지역의 힘의 균형은 영구적으로 바뀌게 된다. 네덜란드 공화국에는 안된 일이었지만, 네덜란드는 이 힘의 균형 변화로 인한 이득을 맛보지 못한다. 대신 영국과 프랑스와의 일련의 전쟁을 겪음으로써, 네덜란드는 카리브해 남부 및 리워드 군도(Leeward Islands) 북부의 몇몇 지역만을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작전 수행시 자국에서부터 출항했던 네덜란드와는 다르게, 프랑스 해적들의 경우 카리브해의 기지들, 특히 토르투가를 활용하는 잇점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해적 중에서 가장 악명높았던 것은 프랑수와 롤로네(Francois l'Olonnais)로서, 그의 첫번째 배는 토르투가 총독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그의 배가 맥시포 캄페체 해안(coast of Campeche)에서 좌초되면서 스페인인들이 손에 휘하 선원 대부분이 살해당하자, 그는 스페인인에 대한 강렬한 적으로 돌변한다. 휘하 선원들에 대한 복수로, 스페인인 포로 87명의 목을 벤 것은 유명한 일이다. 그의 활약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667년 봄에 베네주엘라의 마라카이보와 지브랄타를 약탈한 사건이다. 마카라이보 주민들은 그의 접근을 미리 알고 도시에서 달아났다. 롤로네는 그 대신 지브랄타를 공격한다. 그는 간단히 마을을 점령했으며, 그의 명성을 아는 겁에질린 주민들로부터 10,000 페소를 긁어모았다. 이후, 롤로네는 마라카이보로 돌아가, 롤로네가 떠났으리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온 상당수 주민들을 포로로 잡는다. 롤로네는 마라카이보에서 잡은 사람들로부터 20,000 페소와 소 500마리를 뜯어낸다. 이 작전에 참가한 모험가들은 각각 70 피스오브에잇(piece of eight; 8레알 짜리 스페인 은화로 표면에 8자가 새겨져 있었다, 역주)씩의 은화와 100 피스오브에잇에 상당하는 의류/천을 지급받았다. 롤로네는 1년 뒤에 다시 난파당했는데, 이번에는 인디언들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생을 마친다.
17세기의 3/4분기 시기 동안, 영국 당국은 해적 행위를 잠재우기 위한 활동을 개시하였고, 이로 인해 카리브해 해적활동은 두번째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 단계가 되면, 그동안 "해적질의 황금기(Golden Age of Piracy)"의 특징이라 할 수 있었던 대규모 해적선단의 모습이 사라지게 된다. 안전한 해방구가 줄어들거나 사라진 상황 속에서, 해적들은 이전처럼 대규모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해적들은 단독으로 혹은 소규모 전단을 이뤄 활동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아무 배나 약탈하였다. 이들은 스페인 선박만이 아닌 모든 국가의 선박들을 먹잇감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영국 해군으로 하여금 이들을 영국 상업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박멸하러 나서게끔 만들게 된다.
영국 지도자들이 이들 해적질이 이제는 자국에 도움보다는 방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서, 기존 해적질에 대해 존재하던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은 사라지게 된다. 모건과 다른 해적들로 인해 약해져버린 스페인은 더 이상 자마이카에 대한 위협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자마이카 방어를 위해 해적들 또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영국 관리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도둑질 하는 것에서부터 이제는 제국을 건설하는 쪽으로 관심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들 관리들은 신세계 식민지야말로 고국에서는 확보할 수 없는 원자재와 상품들을 제공함으로써 부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영국 정치가들과 상인들이 건설하고자 추구했던 새로운 질서 정연한 세계에서, 해적들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해적들은 교역을 교란시켰으며, 특히 새로운 식민지에 극도로 필요했던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방해했다. 또한 유럽 국가들간의 관계에도 위협이 되었다. 이 세기 말까지 체결되는 일련의 조약들을 통해, 유럽 국가들은 "선 너머에서는 평화 아님(no peace beyond the line)" 정책을 포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해적질을 북돋워주는 전제조건 중 하나인 정치적 혼란을 감소시키게 된다.
영국은 1670년대 무렵부터 해적질을 제어하려는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자마이카의 신임 총독 토마스 린치 경(Sir Thomas Lynch)은 1671년 모디포드 경을 대신하여 부임하였으며, 해적질을 그만 두는 해적에게는 사면 조치와 함께 35 에이커의 토지를 제공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1688년, 1701년, 1717년에도 영국 해적들에 대한 사면 제안이 있었다. 1717년의 일반사면(general pardon) 당시에는 위협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이 사면조치에 응하지 않는 모든 해적들에 대해서는 현상금을 내건다는 것이었다. 해적 사냥꾼들은 해적선장에 대해서는 100파운드를, 일반 해적에 대해서는 20파운드를 현상금으로 받았는데, 당시 통상적인 상선 선장들이 1년에 65파운드의 봉급을 받았다는 점에 비춰볼 때 상당히 괜찮은 금액이었다. 1680년대가 되면, 농작물, 특히 설탕에 근거한 상업이 자마이카 경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이에 따라 자마이카 여론도 해적질에 불리한 쪽으로 바뀌게 된다. 해적질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게는 자마이카가 점점 비우호적인 장소로 바뀌게 된다. 해적들의 장물을 통해 큰 돈을 벌어왔던 자마이카 상인들도 점점 해적들과 거래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게 되었고, 결국 해적들을 과거 안전했던 해방구로부터 몰아내는 효과를 내게 된다. 영국 선원들이 외국의 사략 허가증(letters of marque)을 발행받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과 1699년의 해적 조례(Piracy Act) 등의 신규 법령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해사 법정(Admiralty Courts)들을 세움으로써 해적질에 대한 처벌을 촉진시키게 되고, 그 결과 해적질의 매력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서인도 제도와 아메리카 식민지들에 영구 주둔하는 영국 해군 선박들의 숫자가 증가하던 것도 해적에게는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1670년대 이전에는 서인도 제도에 주둔하는 영국 해군 선박은 상당히 드물었다. 1670년대가 되자, 자마이카에는 2척의 프리깃 함이 주둔하게 되었고, 바베이도스(Barbados)에는 프리깃 함 1척이, 리워드 군도(Leeward Islands)에는 케치 함(ketch) 1척이 주둔하게 되었다. 영국 해군은 아메리카 식민지에는 군함을 주둔시키지 않았지만, 뉴펀들랜드(Newfoundland) 해역에 2척의 전함을 배치하여 어장 보호임무를 맡겼다. 1680년대에는 또다시 상황이 바뀐다. 자마이카에 주둔하는 군함의 숫자는 4척으로 증가하였고, 리워드 군도에도 2척이 추가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마침내 영구 주둔 해군부대가 들어오게 된다. 체사피크만(Chesapeake Bay)에 1~2척의 군함이, 보스톤(Boston)에도 1척이 주둔하게 된다. 비록 이들 자체로는 해적질을 억누르기에 충분하지 않았지만, 영구 주둔하는 해군 선박은 분명 억제요소 역할은 하였다. 정부가 해적들을 압박함에 따라, 상당수 해적들은 태평양이나 인도양과 같은 보다 안전한 사냥터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나머지들은 바하마나 아메리카 식민지들과 같은 곳에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게 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서인도 제도에서 해적질이 궁극적으로 사라지는 데에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해적 근절이 단 하룻밤 사이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9년전쟁(Nine Years' War)(1688-1697)이나 스페인 계승 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1701-1713)과 같은 국제 분쟁으로 말미암아 해적들은 사략 허가증(letter of marque)을 발급받아 합법성이라는 가면을 쓸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고, 이는 해적 박멸을 늦추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게다가 양개 전쟁 모두 전쟁 직후 실업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많은 선원들과 전직 사략선원들이 해적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양개 전쟁 직후 모두 해적질이 급증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스페인 계승 전쟁 종결 당시를 예로 들면, 영국 해군에서는 약 36,000명의 선원들을 전역시켰는데, 이는 전쟁 당시 총 병력에서 75퍼센트에 해당하는 인원이었다. 게다가 사략선원 수천명 또한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잉여 해사 노동력으로 말미암아 선장들은 남아있는 선원들의 봉급도 50퍼센트 이상 삭감할 수 있게 된다 (공급과 수요의 원칙, 역주). 그 결과 바다의 폭력에 익숙해져있던 많은 뱃사람들에게 해적질은 매력적인 선택지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한편 프랑스는 초기에는 이러한 영국의 정책 변화에 호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 해적(filibustiers)들은 스페인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했다. 마키 데 마인테농(Marquis de Maintenon)은 1676년 마르가리타 섬(Margarita Island)의 진주 교역을 파탄낸다. 2년 뒤, 미셸 드 그라몽(Michel de Grammont)은 700명의 해적들과 함께 마라카이보를 점령한다. 이들은 비록 이 마을을 6개월간이나 점령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주민들로부터 별로 많은 재물을 털어내지 못했는데, 이는 과거 롤로네와 모간이 벌였던 공격 탓이었다. 1683년에는 그라몽과 기타 해적들이 베라 크루즈(Vera Cruz)를 공격한다. 이번 사업은 보다 성과가 있었다; 이 공격에 참가했던 해적 1000명은 각각 800개의 금화를 손에 쥘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공격으로 말미암아 스페인은 격노하여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프랑스는 급히 평화 협상을 개시하였고, 이로써 프랑스는 "선 너머에서는 평화 없음" 정책을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
9년 전쟁 당시 프랑스 해적들은 적극적으로 프랑스 왕실을 지원하였다. 1694년, 프랑스 해적 장 두 카세(Jean du Casse)는 자마이카에 대한 원정작전을 이끈다. 두 카세는 50곳의 설탕 농장을 불태웠으며, 1300명 이상의 노예를 붙잡았다. 1692년의 지진으로 포트 로얄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 이 공격의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1697년에는 프랑스 해적들과 프랑스 왕실 정규군이 바론 드 푸앙티(Baron de Pointis) 제독 지휘 하에 카르타헤나(Cartagena)를 약탈하였다. 잔인한 사업이긴 했지만, 또한 금전적으로는 짭짤한 사업이었다. 프랑스는 카르타헤나 주민들로부터 약 2천만 루브르에 해당하는 재물을 빼앗는다. 한편 드 푸앙티는 약탈물을 빼돌리고 해적들에게 약속된 몫을 속여 단지 4만 루브르만을 지급하게 된다. 화가 난 해적들은 도시로 돌아가 생존자들로부터 다시 5백만 루브르를 쥐어짜게 된다.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공격은 통상적으로 해적질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마이카와 토르투가라는 해적 기지들을 상실한 해적들은 바하마나 아메리카 식민지 등으로 떠돌게 된다. 이곳들은 자마이카나 토르투가와 같은 정도의 이점은 제공하지 못했지만, 자마이카에 영국 해군이 주둔하며 위협하고 있는 이상, 이곳들이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곳들이었다. 세기 말 무렵이 되면, 해적들은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근거지로 하여 서인도 제도나 아프리카 서해안, 또는 홍해 지역에 정기적으로 출몰하게 된다.
바하마 군도(Bahamas)는 해적들이 번창하기 위한 3가지 조건들을 어느 정도 모두 충족시키고 있었다. 이 섬들은 대서양으로 나가는 주요 출구인 플로리다 해협과 윈드워드 수로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적들에게 지리적인 이점을 제공하였다. 이에 더하여 바하마의 섬들은 사유지들이었다. 국왕 찰스 2세(Charles II)는 바하마 군도를 1670년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의 6명의 식민지 경영자(proprietors)에게 매각하였다. 그 직후부터, 자마이카 총독이 해적질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 정반대로, 바하마 총독은 영국 해적 및 사략선장들에게 무분별하게 사략 허가증(letters of marque)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바하마의 정치적 상황은 해적질을 부채질하였다. 그러나 최초 1640년대 청교도들이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이들 섬들은 인구가 상당히 부족했다. 1671년 당시 총 인구가 단지 700명에 불과했다. 그 결과 최초 이곳 섬들은 해적들의 장물들을 팔아치울 시장으로서 규모가 그리 적합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식민지의 밀수꾼들이 바하마 군도에 교역소를 개설하게 되면서부터 해적들의 장물들은 불티나게 팔리게 된다. 비록 제약은 있었지만, 바하마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도피처였으며, 해적들을 붙잡아 처벌하려는 자들과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아메리카 식민지들 역시도 해적들의 온상이 되었다. 북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지방은 서인도 제도의 해상교역로와는 그리 가깝지 않았지만, 대신 번창하던 식민지들이었던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해안 쪽이 괜찮은 사냥터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또한 정치적 상황이 해적질에 호의적이기도 했다. 로드 아일랜드, 매사추세츠, 펜실베니아, 뉴저지, 뉴욕, 델라웨어, 코네티컷, 노스 캐롤라이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모두 해적들을 데리고 있다는 악명을 누리고 있었다. 이곳 식민지 주지사들 상당수는 어느 정도 대부분 해적질과 연루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들 식민지들은 해적들의 장물들을 소비하는 것을 좋아했다. 항해 조례(navigation Acts)로 말미암아 식민지로 수입되는 상품들의 가격이 상승하자, 많은 식민지 주민들은 값싼 장물들을 구매하기를 원하였다. 게다가 현금이 많았던 식민지 주민들 중에는 해적 사업에 돈을 투자하여, 서인도 제도와 홍해 지역에서 활약하는 사략선 및 해적선들을 지원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해적질에 대한 3가지 조건들을 상당히 잘 충족시켜 주었다.
바하마 군도는 해적질의 2번째 단계의 처음 및 끝 시기에 모두 등장한다. 1696년 4월, 46포 사략선인 팬시 호(Fancy)가 나사우(Nassau)에 입항한다. 이 배의 선장은 헨리 브리지만(Henry Bridgeman)이었으며, 총독인 토마스 트롯(Thomas Trott)에게 만약 그가 자신의 화물을 나사우에 내릴 수 있게 허락해 주면 2000파운드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한다. 트롯의 연봉은 고작 300파운드에 불과했으므로, 이 제안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 결과 악명 높은 해적 존 에버리 (John Avery) (다른 이름으로 헨리 에버리 (Henry Every) )는 이곳 바하마 군도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도피처를 얻게 된다.
그 전 해의 여름, 에버리와 다른 두 척의 해적선은 홍해(Red Sea)에서 80포 선박인 간지사와이 호(Ganj-i-sawai) (다른 이름으로 건스웨이 호(Gunsway)로도 불림 )를 나포한다. 이 배는 인도 무굴 황제(Great Mogul of India)의 함대에서 가장 큰 선박으로서, 해적들에게 대략 15만 파운드 가량의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먹음직스런 목표였다. 하지만 이 공격은 무굴 황제를 격노케 하였으며, 이에 황제는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의 교역소를 압류하고 이곳 대리인들을 체포함으로써 보복을 가한다. 인도의 지배자를 기쁘게 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절감한 영국 관리들은 에버리와 그의 선원들을 대상으로 500파운드의 현상금을 걸게 된다. 또한 동인도 회사에서도 에버리 및 그 부하들 중 누구라도 잡으면 그에 상당하는 현상금을 더 지급해 주기로 하였다. 따라서 에버리와 그의 부하들은 안전한 도피처가 시급히 필요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비록 트롯이 에버리와 부하들, 그리고 그의 돈을 환영하긴 했지만, 이들은 나사우에 언제까지나 머무를 수는 없었다. 트롯은 사설 총독(proprietary governor)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는 이들에게 사면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또한 자마이카의 총독은 사면해 달라고 제공한 2만 파운드의 뇌물을 거절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흩어져서 사라지기로 결정하게 된다. 2개 그룹으로 나뉘어져, 약 50명의 선원들은 아메리카 식민지로 향했으며, 한편 나머지 44명은 아일랜드(Ireland)로 떠났다. 아메리카 식민지로 간 해적들 중에서 이후 붙잡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부는 변경 지역으로 사라졌으며, 일부는 부패한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고 보호를 받았다. 아일랜드로 향했던 해적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7명이 체포당했고, 이 중에서 5명은 교수형당했다. 에버리에 대해서는 두번 다시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94명의 해적 중에서 단지 7명만이 체포된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말미암아 많은 뱃사람들은 해적질로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붙잡혀 죽을 위험보다 훨씬 크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로 인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해적질이 다시 급증하게 된다.
17세기의 마지막 수십년의 기간 동안, 아메리카 식민지 전역에는 해적들과 공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해안 지방의 거의 모든 식민지들이 해적질과 어느 정도 연루되어 있었다. 대중들 또한 해적질에 널리 연루되어 있어서, 식민지 지방에서 해적들을 기소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대단히 힘든 일이 되었다. 많은 해적들이 처벌을 벗어난다는 사실에 실망한 윌리엄 3세(William III) 국왕은 해적들을 탈출하게 허용하는 간수 또한 처벌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뉴욕 주지사 플레처에게 자신의 활약상을 설명하고 있는 토마스 튜. [3])
뉴 잉글랜드(New England)의 대부분 식민지들이 특히 해적질과 연루되어 있었다. 로드 아일랜드 주는 식민지 지역에서의 해적 수도(pirate capital of the colonies)로 간주되었다. 홍해 지역의 잘 알려진 해적인 토마스 튜(Thomas Tew)는 이곳에서 저명한 시민이었다. 로드 아일랜드는 영국과는 별로 교역을 하지 않았지만, 뉴포트(Newport)에는 식민지 어느 곳보다도 유럽 상품들이 넘쳐났다. 매사추세츠 주 또한 해적들을 지원하였다. 몇몇 주지사들은 해적들로부터 뇌물을 받는다는 의심을 받았다. 교수형 판결을 받은 해적들은 13파운드의 벌금을 내거나, 버지니아 주에 노예 계약(indentured servitude)을 맺으면 형을 면제받았다. 주지사 윌리엄 핍스 경(Sir William Phips)의 경우 필라델피아 해적들을 보스톤으로 초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 역시도 악명 높은 해적 소굴이었다. 1684년 한 프랑스 해적이 보스톤에 도착하자, 도시 상인들은 도선사를 보내어 그를 항구로 인도하였고, 해적들이 장물들을 처분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코네티컷 주지사는 내부 정치 문제 탓에 해적들을 가만 놔 두었다. 코네티컷 주는 교역 식민지로서, 해적들이 가져다주는 경화(hard currency)가 절실히 필요했다. 코네티컷 주에서는 주지사가 1년 단위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해적들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주지사는 거의 없었으며, 그럴 경우 거의 확실히 다음해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해적들은 중부 대서양 연안 식민지(mid-Atlantic colonies)들의 경제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해적들은 뉴욕 주에 매년 10만 파운드 이상을 기여하였다. 주지사 벤자민 플레처(Benjamin Fletcher)와 그의 비서, 세관 징수관, 뉴욕 수비함 선장 모두 해적들과 친구였다. 플레처는 사략 허가증(letters of marque)을 300파운드에 팔았으며, 사람당 100파운드에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뉴포트 외에도 뉴욕에도 자주 나타난 토마스 튜의 경우 플레처의 마차에 타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였다. 뉴저지 또한 해적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일부 주민들은 해적질을 금하는 국왕의 법률은 이곳이 사유 식민지(proprietary colony)이기 때문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다른 사유 식민지였던 펜실베니아 주의 경우, 몇몇 고위 관리들이 해적들과 결탁하였다. 부 주지사(Lieutenant Governor)였던 윌리엄 마크햄(William Markham)은 자신의 딸을 에버리의 선원들 중 하나였던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결혼시키기도 했다. 나중에 쫓겨나기는 했지만, 브라운은 나중에 펜실베니아 의회(Pennsylvania Assembly)에서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한다. 성공한 해적 선장이었던 로버트 스니드(Robert Snead)는 펜실베니아주 순회 판사(Justice of the Peace in Pennsylvania)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펜실베니아 주와 뉴욕 주의 시장과 가까웠던 델라웨어 주 역시도 해적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였다. 가끔 뉴캐슬(Newcastle)에 있는 영국 왕실 관리들이 지역 해적들을 추적하는 데 너무 열정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경우 오히려 주민들이 관리들에게, 해적들을 가만 놔 두지 않으면 감옥에 쳐넣겠다고 위협하였다.
(2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