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 아프리카 반군

[스크랩] [번역] 해적질과의 기나긴 전쟁사 : 역사적 경향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2010년 / 제 4장. 아시아에서의 해적 (1)

박용수 2014. 10. 27. 16:38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91~ pp 95 >

 

 


 

제 4장. 아시아에서의 해적
(Chapter 4. Asian Piracy)

 


 아시아의 지리적 범위는 광대하며, 그 안에 속한 문화권도 다양하다. 그러나 페르시아 만(Persian Gulf)에서건, 동남아시아의 섬지대에서건, 혹은 중국의 해안가에서건 해적들은 번성하기 위한 3가지 조건 - 지리적 장점, 정치적 불안정, 육상의 해방구 -을 찾아 번성하였다. 이곳의 해적들은 단지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몇몇 시기에만 번성했던 것이 아니라 대단히 장구한 세월동안 번성해 왔다. 1장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페르시아 만의 해적들은 이미 4천여년 전에 수메르인들을 약탈했었고, 함무라비 법전에도 해적질을 금하는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기원전 1122년에서 221년까지 존재했던 중국 주나라(Zhou dynasty, 周)의 기록에도 해적질에 관하여 언급된 내용이 있다. 비록 말레이(Malays)에는 이에 상당하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곳 지역의 해적질 또한 비슷한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리라는 점은 의심할 바가 없다.

 

 아시아에서도 지리적 요건은 해적질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랍과 말레이 지역은 둘 다 중요한 병목지점이다: 아랍 지역의 호르무즈 해협(Strait of Hormuz)과 말레이의 말라카 해협(Strait of Malacca)이 그것이다. 아랍 해적들은 아라비아 반도(Arabian Peninsula)를 근거지로 하여 호르무즈 해협을 쉽사리 장악하였다. 수마트라 섬(Sumatra) 혹은 리아우 군도(Riau Archipelago)를 근거지로 한 동남아시아의 해적들은 말라카 해협을 감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 지역의 수천개의 섬들은 해적들이 먹잇감을 기다리며 숨을 수 있는 훌륭한 장소를 제공했다. 비록 중국 해적들에게는 이에 상당하는 병목지점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들 역시도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중국의 긴 해안선과 이곳에 발달한 수많은 강들은 해적들이 숨을 수 있는 수많은 장소들을 제공하였다. 또한 중국이 너무 광대하다 보니 중앙 정부가 구석구석까지 쉽사리 통제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변경 지역의 해적들은 별다른 걱정 없이 활동할 수가 있었다.

 

 정치적 불안정 역시도 19세기의 아시아 해적들의 발호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아랍 해적들과 이들의 명목상 군주인 오만 술탄(Sultan of Oman)과는 분쟁이 존재했다. 말라카 제국(empire of Malacca)의 붕괴 후에 등장한 지배자들의 경우, 동남아시아 해적들을 규제할 만큼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중앙 집권화된 정부를 갖고 있던 중국의 경우에도, 19세기 말의 청나라 세력(Manchu dynasty, 淸)은 쇠퇴 과정에 있었으며, 자국의 변경지역에 대해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세 지역 모두 육상의 안전한 해방구가 존재하여 해적질을 가능케 하였다. 바다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살던 상당수 아랍인들과 말레이인들에게 있어서 해적질은 삶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해적질은 이들의 수입에 보충효과를 주었다. 해적질이 이들의 삶의 일부로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적질에 연관된 사람들은 휴식과 재보충, 장물 처분을 위한 육상의 해방구를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었다. 다만 중국 해적들은 육상의 농경 위주의 사회와는 그다지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해적들은 장물들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쉽게 찾을 수 있었으며, 이는 종종 부패한 관리들을 통해서도 이뤄졌다.


 

페르시아 만의 해적(Piracy in the Persian Gulf)

 

 근대 시기, 자력으로 페르시아 만에 최초로 입장한 유럽 항해자는 포르투갈 사람이었다. 이들은 16세기 초부터 시작하여 이후 17세기 초반 영국과 네덜란드 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페르시아 만을 지배하였다. 1622년,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의 도움을 얻어 페르시아의 아바스 샤(Shah Abbas of Persia)는  포르투갈 인들을 카르그 섬(Kharg Island)의 거점으로부터 몰아냈다. 이 시점부터 포르투갈 측의 운명은 쇠퇴한 반면, 영국측의 상업적 이익은 점차 중요성을 띄게 된다. 그러나 페르시아 만은 이후 약 200여년간 영국 정책입안가들에게 있어 전략적으로 간과되어 왔다.

 

 18세기 말 시기, 특히 1779년 샤 카림 칸(Shah Karim Khan)의 죽음 이후 시기,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만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된다. 그 결과로 페르시아 만 연안 지역의 다양한 부족들간의 경쟁과 분쟁이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분쟁은 습격전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는 영국인들의 시각에서는 해적질로 간주되었다. 아랍 해적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서해안 지역을 근거지로 하였으며 멀리 인도양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페르시아 만에서 인도양까지의 영국의 해운을 위협하게 된다.

 

 해적질의 증가는 이 지역의 영국측의 무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동인도회사의 경우 페르시아 만 지역에 대한 무역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만 지역의 해적질을 막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명 "지역무역상(country traders)"이라고 불린 독립적 영국 상인들은 해적들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 지역무역상들은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 상당히 큰 규모의 수지맞는 거래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에서 생산된 상품들을 페르시아 비단, 진주, 기타 중국과의 무역에 사용 가능한 정금(specie, 正金; 금화 및 은화를 의미, 역주)과 교역하였다. 비록 아랍인들은 잘 무장된 동인도회사의 상선들은 잘 건드리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소형이고 보다 취약한 지역무역상의 상선들은 종종 공격했다. 영국 상인들은 당연히 이러한 범죄 행위에 분노했으며, 영국 정부와 동인도회사에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19세기 초가 되면 전략적 관점도 바뀌기 시작한다. 페르시아 만은 영국 본토와 영국 사이의 주요 우편 배달경로였기 때문에, 해적들이 영국의 우편배달선(British mail ship)을 공격하게 될 경우 영국 정부요원을 공격하는 셈이 되었다. 보다 중요한 요소로서,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1798-1801년)과 페르시아와의 동맹(1807-1809년) 등으로 말미암아 프랑스가 인도 북서부 지역을 침공하리라는 우려가 높아진 것을 들 수 있다. 영국의 정책입안가들은 이제 페르시아 만 지역을 인도 서측면을 방호하는 완충지대로 보기 시작했다.

 

 1804년 11월 오만 술탄의 사망으로 페르시아 만 지역의 영국 상선들에 대한 공격이 가중된다. 술탄의 사망 당시, 영국은 오만과의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의 지도부는 페르시아 만 입구에 있는 오만의 위치가 프랑스 및 네덜란드의 페르시아 만으로의 접촉을 제한할 수 있는 완벽한 곳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영국과 오만간의 관계는 해적질과 매우 밀접하게 연루된 부족들 중 하나로 말미암아 흔들리게 된다. 알 카와짐 가문(al-Qawasim)은 명목상 오만 술탄의 봉신이었다. 그러나 술탄이 사망하면서, 이들은 충성을 철회하고 오만으로부터 독립해 나간다. 영국은 실질적으로(de facto) 알 카와짐 가문의 적이 된다. 그러나 이 상황은 분명한 호기라고 볼 수 있었는데, 이는 페르시아 만의 해적 소탕은 영국 상인들을 기쁘게 하고 영국의 해운상의 이익을 증대시켜 줄 뿐만 아니라, 영국과 오만간의 전략적 관계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림 7. 페르시아 만과 오만 만 일대의 지리)

 

 페르시아 만을 살펴볼 때, 해적질을 조장하는 3가지 조건들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알 카와짐 가문은 해적질을 수행하는 데 있어 이상적인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부족의 영토는 두바이(Dubai)를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의 25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주요한 항구로 라스 알 카이마(Ras al-Khaymah)가 있었으며, 이곳은 아라비아 반도 북단으로부터 약 50마일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호르무즈 해협은 단지 30마일 폭에 불과했다. 따라서 알 카와짐 가문은 페르시아 만을 출입하는 해상 교통을 쉽사리 장악할 수가 있었다. 페르시아의 쇠퇴와 오만 술탄의 죽음으로 발생한 정치적 혼란은 페르시아 만 지역의 해적질을 촉진시켰다. 게다가 영국 역시도 나폴레옹 전쟁에 말려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만 지역의 해적질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만한 자원을 갖고 있지 못했다. 알 카와짐 가문은 무역이든, 진주 채취든, 해적질이든 간에 바다에서의 활동에 생존을 걸고 었기 때문에, 자국령 내 육지에서는 이들의 해적질에 대단한 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림 7에 페르시아 만(Persian Gulf)과 오만 만(Gulf of Oman)이 나타나 있다.)

 

 이들의 공격은 18세기 4/4분기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1778년 12월, 알 카와짐 가의 선박 6척이 영국 공식 문서들을 운반하고 있던 영국 선박 1척을 공격한다. 3일간에 걸쳐 진행된 전투 끝에 영국 선박은 패배하여 라스 알 카이마로 끌려간다. 이 성공에 고무된 알 카와짐 가문은 다음 해 2척의 영국 선박을 추가로 공격한다.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1797년 10월에 벌어진 사건으로 당시 알 카와짐 가문은 부셰흐르 항구(port in Bushehr)에 정박 중인 동인도회사 순양함인 바이퍼 호(Viper)를 공격한다. 비록 동인도회사의 이 선박은 공격을 격퇴해 내긴 했지만, 바이퍼 호의 승무원 65명 중에서 32명이 사상당한다.

 

 알 카와짐 가문은 오만으로부터 분리독립한 이후, 페르시아 만을 출입하는 선박들로부터 통행료를 걷기 시작한다. 영국이 이 통행료를 지불하기 거불하자, 알 카와짐 가문은 영국 상선들을 습격하는 것으로 보복한다. 알 카와짐 가문은 1804년 2척의 영국 선박을 나포했으며, 1805년 1월에는 동인도회사 소속 24포 순양함을 공격한다. 이후 무스카트(Muscat)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이 이끈 오만인들이 라스 알 카이마에 위치한 알 카와짐 주력 함대를 봉쇄하고, 이어 굴복시키면서 짧은 휴지기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 휴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한편, 알 카와짐 가문은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고 있었다. 1808년, 알 카와짐 가문의 함대는 약 63척의 대형 선박과 810척의 소형 다우 선(dhows), 18000명~ 25000명에 이르는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808년 4월, 2척의 알 카와짐 소속 다우 선이 또 다른 동인도회사 선박인 퓨리 호(Fury)(대포 6문)를 공격하였다. 여름 진주 채취 기간이 종료되자, 알 카와짐 가문은 영국과의 전쟁을 재개하였다. 분쟁은 재빨리 격화되었다. 1808년 10월 동인도회사 소속 스쿠너 선 실프 호(Sylph)(대포 8문)가 나포되었을 때, 해적들은 22명의 선원들을 살해했다. 선장 1명만이 살아남았다. 아랍인들이 배를 빼앗을 당시 부상당한 채였던 선장은 갑판 아래의 창고에 숨어들었고, 이후 HMS 라 네레이드 호(HMS La Nereide)(대포 38문)가 라스 알 카이마로 끌려가던 실프 호를 재탈환하였을 때 구조되었다. 다음 달에는 약 40척의 알 카와짐 가문의 다우 선들이 인도양으로 진입하여 영국의 인도양 해운을 공격하였다. 짧은 시간 내에 이들은 20척의 상선을 나포하였으며, 인도 서부 해안의 물류를 중단시켜버렸다.

 

 이는 동인도회사가 용인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피해였으며, 이에 1809년 9월,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한 육해군 제병연합부대가 페르시아 만으로 파병된다. 이 부대에는 2척의 영국 왕실 프리깃 함과 8척의 동인도회사 순양함, 1척의 동인도회사 폭탄선(bomb ketch), 1300명의 병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1300명 중에서 반 가량이 유럽인이었다. 제 1 목표는 라스 알 카이마였으며, 이곳은 1809년 11월 13일에 함락된다. 동인도회사 소속 병사들은 마을을 약탈하였고, 항구에 묶여있던 60척의 다우 선들을 불태웠다. 이후 영국군은 페르시아에 위치한 알 카와짐의 거점 2곳인 링가(Linga)와 루프트(Luft)를 공격한다.

 

 알 카와짐에 대한 영국측의 작전을 통해, 해군력만으로 해적들을 소탕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영국 측에서 알 카와짐에 대해 심각한 피해를 안겨주기는 했지만, 1809년 작전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일단 영국이 인도로 돌아가자, 알 카와짐 가문은 신속하게 회복되었다. 1813년 가을이 되면 알 카와짐 가문의 다우 선들은 다시금 인도 해안을 따라 먹잇감을 찾아 돌아다니게 된다. 1814년 봄과 가을에도 추가적인 해적 항해가 실시되었다. 알 카와짐 가문은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는 훨씬 공격적으로 활동했으며, 2척의 미국 선박, 1척의 프랑스 선박, 3척의 인도 선박을 공격했다. 1816년, 영국은 해적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추가 원정부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번에는 훨씬 효과가 떨어졌다. 이번에 파견된 해군 부대는 단지 라스 알 카이마에 포격만을 실시했던 것이다. 1817-1818년의 교역 시즌의 상황은 공격 위험을 상쇄하기 위하여 호송선단을 조직해야 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1818년 말에는 해적들에 보다 강력한 대응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다. 이 무렵, 영국은 인도에서 벌어진 2개의 전쟁인 핀다리 전쟁(Pindari)과 마라타 전쟁(Mahratta War)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참이었다. 따라서 알 카와짐 가문에 대해 보다 강력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충분한 가용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윌리엄 그란케어 소장(Major General Sir William Grant-Keir)은 2차례의 원정을 기획 및 주도한다. 휘하 부대는 유럽인 1450명과 세포이 2100명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HMS 리버풀 호(HMS Liverpool)(대포 50문, 프리깃 함), HMS 커류 호(Curlew)(대포 18문, 브리그 선), 동인도회사 14포 순양함 1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페르시아 만에는 이미 HMS 에덴 호(Eden)(대포 24문)와 7척의 동인도회사 군함이 배치되어 있었고, 임무 부대가 페르시아 만에 도착하자 합류하였다.

 

 영국군은 라스 알 카이마아 1819년 12월 4일에 기항한다. 병력들은 마을 남서쪽에 상륙하여 도시 성벽 300야드 지점까지 진출한다. 이곳에서 영국군은 축성진지를 구축하고 요새를 포격할 포대를 설치한다. 포격은 2일간 이뤄진다. 12월 6일이 되면 12파운드 포와 18파운드 포로는 성벽을 무너뜨리기엔 위력이 부족함이 드러난다. 이에 선원들은 2문의 24파운드 포를 육지로 가져온다. 12월 8일 24파운드 포의 포격이 개시되었고, 12월 9일 그란케어 장군의 병력들이 라스 알 카이마를 공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아랍인들은 도시를 포기했기 때문에, 저항 없이 입성이 이뤄진다. 이후 며칠간, 영국군은 마을의 축성시설과 항구의 모든 다우 선들을 파괴하느라 바쁘게 보닌다.

 

(4장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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