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 아프리카 반군

[스크랩] [번역] 해적질과의 기나긴 전쟁사 : 역사적 경향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2010년 / 제 4장. 아시아에서의 해적 (2)

박용수 2014. 10. 27. 16:39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96~ pp 100 >

 

< 역주 및 참고사진 출처:

[1] (http://en.wikipedia.org/wiki/Sultanate_of_Johor)

[2] (http://en.wikipedia.org/wiki/Johor)
>

 



(4장 계속)

 

 주요 족장들(sheiks)은 모두 영국군의 위력을 절감하고, 이후의 수 주일에 걸쳐 라스 알 카이마(Ras al-Khaymah)에 와서 그란케어 장군(General Grant-Keir)에게 항복하게 된다. 1820년 1월 8일, 이들은 총괄적인 평화조약(General Treaty of Peace)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서 가장 중요했던 조항으로는 모든 가맹자들은 해적질을 억제하고 포로 살상을 금하도록 한다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가맹자들이 이를 어길 경우, 다른 가맹자, 즉 대영제국이 개입하여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시점 이후로, 페르시아 만에서의 해적질의 빈도는 급격하게 감소하게 된다. 또한 그럼에도 해적질이 발생하는 경우, 지역 족장(local sheik)들은 영국이 상황에 개입하려 들기 전에 해적들을 신속하게 징벌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만에서의 영국의 해적소탕 작전은 육상 해방구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서 명백하게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초 2차례의 영국측의 원정작전은, 지상군 측면이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한된 효과만을 가질 수가 있었다. 첫번째 원정작전 당시를 살펴보면 라스 알 카이마를 점령하고 이외 몇몇 마을 몇개를 파괴하였음에도 그 효과는 단기간에 그쳤는데, 이는 영국군이 금세 귀국하며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일단 영국군이 떠나게 되자 아랍인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해적질을 재개하게 되었다. 두번째 원정작전 당시에는 아예 지상작전이 시도되지 않았으며, 아예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상당한 규모의 지상군 부대가 포함된 세번째 원정작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공을 거두게 된다. 충분한 수의 병력으로 말미암아 영국 세력이 이곳을 떠나지 않고 영구히 남아있으리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고, 알 카와짐(al-Qawasim)뿐만이 아닌 여러 아랍 부족들이 굴복하여 평화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제할 수가 있었다.


 

동인도 제도에서의 해적질 (East Indies Piracy)

 

 육두구(nutmeg), 후추(pepper), 계피(cinnamon), 생강(ginger), 정향(cloves) 등의 향료들은 수천년간 고가로 거래되어 온 상품들이다. 16세기 이전까지의 유럽인들은, 이러한 상품들을 레판트(Levant) 지역에서 종결되는 육상 캐라반(caravan; 대상) 교역로에 의해서만 얻을 수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6세기 포르투갈이 동인도 제도로 이어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 바뀌게 된다. 포르투갈인들은 희망봉(Cape of Good Hope; 아프리카 남단 지역)을 거치는 해로를 통해 향료를 들여왔다. 이러한 향료 교역에서 한몫 건지려는 열망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동인도 제도 지역에 대한 탐험 및 이에 수반되는 식민지 건설에 대해서 상당한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일단 네덜란드와 영국이 이 경쟁에 참가하게 되자 향료를 찾아 말레이 군도(Malay Archipelago)로 향하는 선박의 수는 급증하게 되었고, 1600년에서 1630년 기간 동안 이러한 숫자는 연간 2척에서 연간 11척으로 증가하게 된다. 18세기 말이 되면 유럽으로 수입되는 향료의 양은 3배로 증가한다. 비록 기대되는 이윤은 대단했지만, 동인도 제도로의 교역은 또한 위험하기도 하였다. 한 영국 상인이 1796년 이러한 위험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에는, 만약 해적질을 없앨 수 있다면 이 교역은 보다 정기적이 되고 보다 수지맞는 일이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동인도 제도에서의 해적질을 소탕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 증명된다. 다른 지역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해적들도 해적질을 가능케 하는 3가지 요인들에 따라 번성하였다. 말레이 군도의 해적들은 유리한 지형조건의 도움을 받았다.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섬들의 숫자는 약 17,500개에 이르르며, 인도네시아의 해안선 총 길이는 약 34,000마일 가량에 이르른다. 이것이야말로 이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 핵심 배경이었다. 각종 첨단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광대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순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동쪽의 향료 제도(Spice Islands)들과 중국으로 통하는 배들이 통과할 수 있는 통로는 몇개의 지역으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고가의 화물들을 선적한 선박들은 이러한 좁은 지역으로 유도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공격에 더욱 취약해진다. 말레이 해적들은 이러한 지형조건들을 잘 활용하였다. 이러한 병목지점들 탓에 해적들은 먹잇감을 찾기가 용이했다. 해적들은 사냥감들을 기다리는 동안 동인도 제도의 수많은 섬들에 산재하는 많은 골짜기들, 만들, 하천 하구들 등에서 숨어있게 된다. 바람이 멎었거나 얕은 연안 해역에 좌초되거나 하는 등으로 선박이 해적들에 취약해지게 되면, 해적들은 쾌속정을 타고 튀어나와 그 배로 승선하여 약탈을 실시했다. (그림 8에는 수마트라 섬과 말라카 해협에 대하여 나타나 있다.)

 

(그림 8. 수마트라 섬과 말라카 해협)

 

 이 지역은 정치적 불안정 또한 안고 있었으며, 해적질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16세기 초반, 포르투갈인들은 말라카 지역에 있는 말라카 제국(Malay Empire of Malacca)를 무너뜨렸다. 이후 상대적으로 약한 군소 왕국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예를 들어 19세기 초반, 조호르 술탄(Sultan of Johor)은 리아우 군도(Riau Archipelago)의 여러 섬들에 대한 명목상의 지배자였다. 리아우 군도는 말라카 해협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의 섬들은 해적질이 번성하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시기, 술탄은 지역 족장들을 충분히 통제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족장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였다. "후추 해안(pepper coast)"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수마트라 북서 해안 지역의 경우에는 아킨 술탄(Sultan of Acheen)의 지배 하에 있었다. 비록 아킨 술탄의 경우 유럽인들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만큼의 힘은 갖고 있었지만, 휘하 신하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통제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이로 인한 정치적인 불안정이 말레이 해적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오늘날 말레이시아 조호르 주의 영역[2])

 

* 역주: 오늘날의 조호르는 말레이시아의 한 지방 행정구역이며, 싱가포르와 인접한 말레이 반도 남쪽 지역을 차지한다. 조호르 술탄국(Sultanate of Johor)은 1528년 알라우딘 리아얏 샤 2세(Alauddin Riayat Shah II)가 창건하였으며, 조호르 지역은 1511년 포르투갈인들이 말라카 제국 수도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말라카 제국의 일부였다. 조호르 술탄국은 여러 식민지 시기를 거친 뒤, 1946년 말레이시아의 일부가 된다. [1,2] 


 말레이 해적들은 또한 육지의 안전한 해방구 또한 이용할 수 있었다. 동인도 제도에서의 삶에 있어서 해적질은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리아우 군도 지역에서는 매년 상업 행위와 해적질이 순환되는 연간주기가 존재했다. 2월에서 4월까지, 섬 주민들은 중국과의 교역에 사용되는 식용 해조류인 우뭇가사리(agar-agar)를 채집하였다. 몬순이 시작되는 초여름이 되면 섬 주민들은 해적질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10월까지는 약탈물을 찾아 동남아시아 전역 및 인도양 지역의 바다 위에서 지냈다. 이후 잠시동안 휴식 기간을 가진 뒤에, 다시 2월부터의 연간주기가 재개된다. 이렇게 섬 주민들의 삶에 해적질이 깊게 엮여있었기 때문에, 해적들은 휴식, 재보급, 장물판매 등을 수행할 수 있는 안전한 해방구를 쉽게 얻을 수가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동인도 제도의 해적들은 중무장한 유럽 선박들의 경우에는 공격을 회피하였다. 하지만 19세기가 되면서 교역량이 증가해 감에 따라서 유럽 또는 미국 상선들을 공격하려는 유혹 또한 증가하게 된다. 후추 해안(pepper coast)에 처음으로 방문한 미국 선박은 1789년 브리그 선인 카뎃 호(Cadet)였다. 카뎃 호가 이 항해로 700퍼센트의 이윤을 남긴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른 미국 상인들도 동인도 제도에 눈을 돌리게 된다. 1812년이 되면 오리엔트 지역(Orient; 동양)으로 향하는 미국 선박은 연간 29척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추세는 1812년 전쟁(War of 1812; 미국과 영국간의 전쟁임)으로 인한 소강상태를 거친 뒤에 다시 빨라진다. 1815년에서 1820년 기간 동안 미국 상인들은 연간 평균 39척의 배를 오리엔트 지역으로 보내게 된다.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특히 이 교역을 중요하게 간주하였으며, 1819년에는 미국 상선들을 해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콩그레스 호(Congress)를 오리엔트 지역에 파견하게 된다.

 

 말레이 해적 중에서 잘 알려진 사람은 라가(Raga)로서, 그는 17년 이상에 걸쳐 마카사르 해협(Makassar Strait)에서 악명을 떨친다. 라가가 처음 주목받게 된 것은 1813년으로, 당시 그는 3척의 영국 선박을 나포하였는데, 3척의 선장들을 모두 직접 처형하였다. 영국은 이 해적을 응징하기 위하여 2척의 슬루프 선을 파견하는 것으로 응수한다. 이들 군함 중 한척인 엘크 호(Elk)가 라가 휘하의 선박 몇척을 격파하고 해적 다수를 살상하게 되자, 라가는 영국에 대한 보복을 결의하게 된다. 당대의 관찰자의 주장에 따르면, 라가는 1830년 한해 동안 40척 이상의 유럽 선박을 나포하였으며, 나포한 모든 선박들의 선장들과 선원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는 라가와 다른 해적들의 해적질에 대하여 미적지근하게 대처하였으며, 해적들에 대처하기 위해 별로 쓸모 없는 잡다한 선박들을 말라카 해협에 파견한다. 이런 선박들에는 스쿠너 선(schooners)도 있었고, 요트(yachts)나 평저 보트(flat-bottomed boats), 기타 소형선박들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해적소탕 작전의 핵심 전력은 6포 브리그(brig) 선과 12포 스쿠너 선이었다. 가용 자원이 부족한 관계로, 영국해군(Royal Navy)과 동인도회사해군의 지휘관들은, 1830년 에드워드 오웬 소장(Rear Admiral Edward Owen)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해적질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웬은 지역 관리들이 해적 문제에 무관심한 이유가 부분적으로는 해적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오웬은 전술 일부를 수정하였으며, 이는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오웬은 해적들의 보트를 파괴하고 해안지역을 장악하는 데에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영국군이 해적들과 교전하게 되면, 해적들은 도주하게 놔 두었다. 하지만 해적들의 선박은 반드시 나포하여 파괴하였다. 선박 없이는 해적들이 상선을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웬은 또한 해적들이 애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몇몇 강 하구 지역에 소규모 요새들을 건설하고 소형 순찰선들을 배치하였다. 해적들의 탈출 지점들을 장악함으로써, 오웬의 부대는 해적들이 바다로 나가 상선들을 공격하는 것을 차단한 것이다. 1830년대 중반에 오웬이 떠나가자, 그의 조직도 쇠퇴하게 되고 다시 해적들이 이 지역에 판치게 된다.

 

 동인도 제도의 해적들은 결국 미 합중국이 군사력을 사용하도록 자극하게 된다. 1831년 2월 7일, 수마트라 섬의 콸라 바투 해안(coast of Quallah Battoo) 부근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상선 프렌드십 호(Friendship)가 말레이 해적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선장과 4명의 선원들이 육상에서 마을 주민들과 교섭을 벌이고 있는 동안, 무장한 말레이 사람들이 프렌드십 호에 승선하여 3명의 선원들을 살해하고 또다른 3명에게 부상을 입힌다. 이 과정에서 4명의 선원들이 학살극에서부터 탈출하여 이웃 마을 추장(Raja)의 힘으로 구조된 찰스 엔디콧(Charles Endicott) 선장의 일행과 합류한다. 이들 미국인들은 약 25마일 떨어진 먹키 지역(Muckie)으로 노를 저어 이동하였으며, 이곳에서 3척의 다른 미국 선박들의 도움을 얻는다. 이들 미국 상선들이 콸라 바투에 도착하였을 때, 이곳 추장(Raja)은 프렌드십 호와 기타 약탈물들의 반환을 거부한다. 미국인들은 상선에 설치된 대포를 이용하여 말레이인들을 쫓아내고 프렌드십 호에 무혈 입성한다. 해적들은 선박에 설치되어 있던 모든 항해 장비들과 상품들, 아편, 4만 달러 상당의 경화(hard specie; 지폐가 아닌 금화나 은화 따위)를 약탈해갔다.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이 1831년 여름에 미 합중국에 도달하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해군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조사하는 한편, 필요한 경우 범법자들을 처벌하고 손해배상이 보장될 수 있도록 조치케 하였다. 1831년 8월 26일, 존 다우네스 준장(Commodore John Downes) 휘하의 44포 프리깃 함 포토맥 호(Potomac)가 미국에서부터 출발한다. 다우네스가 받은 명령서에는, 조사 결과 엔디콧의 이야기가 사실로 판명되는 한편 마을 추장이 협조를 거부하는 경우, 마을을 공격하고 약탈당한 물품들을 회수하며 살인자들을 직접 처벌하도록 승인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2월 5일 다우네스가 콸라 바투에 도착했을 때, 다우네스는 명령서의 앞쪽 부분, 즉 행동하기 전에 사건을 조사하라는 부분을 무시하기로 결심한다. 말레이인들의 잘못이라는 점을 확신한 다우네스는, 1831년 2월 6일 사전경고 없이 콸라 바투를 공격한다. 이날 아침 일찍, 282명의 선원들과 해병대원들은 마을을 수비하고 있던 4개의 요새들을 공격한다. 한시간 만에 추장을 포함한 100여명의 말레이인들이 시체로 변한다. 미국인들의 피해는 사망 2명에 부상 11명이었다. 다음 날, 포토맥 호는 마을에 몇차례의 일제 사격(broadside)을 실시하였고, 이에 말레이인들은 다우네스에게 항복한다. 다우네스는 마을 주민들에게 만약 향후 또다시 미국 선박을 공격할 경우, 미국은 보다 강력한 힘으로 응징하리라는 점을 경고하였다. 며칠 뒤 다우네스는 인근의 또다른 마을로 향하여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콸라 바투의 운명에 대해서 알게 된 이 마을과 인근 마을들의 추장들은 미국 선박들을 친구로 대우할 것을 약속한다.

 

 포토맥 호가 고국으로 돌아오기 훨씬 전부터 다우네스의 행동은 워싱턴에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콸라 바투 작전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해적들을 가혹하게 다룰 경우 맞게 되는 문제점들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잭슨 대통령에 반대하는 신문 중의 하나였던 데일리 내셔널 인텔리겐서(Daily National Intelligencer) 지의 경우, 잭슨 대통령이 의회 승인 없이 전쟁을 벌였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비록 이 신문사에서는 연방정부가 해적들을 처벌할 권한이 있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전쟁을 선포할 권한은 의회에만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콸라 바투에서의 사건은 전쟁에 속한다고 간주하였다. 다우네스이 행동은 잭슨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잭슨 대통령은 다우네스가 명령을 위반한 사실은 공개하지 않고, 단지 이러한 보복 행동은 정당했다고만 주장하였다. 오늘날의 국제법이 갖고 있는 모호성에 비춰보았을 때, 이 사건은 현대 해군력이 현대 해적들에 대해 치명적 무력(lethal force)을 사용했을 때 맞을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 또한 잘 알려주고 있다.

 

 (4장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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