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 아프리카 반군

[스크랩] [번역] 해적질과의 기나긴 전쟁사 : 역사적 경향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2010년 / 제 4장. 아시아에서의 해적 (3)

박용수 2014. 10. 27. 16:39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100~ pp 105 >

 

 


(4장 계속)

 

 비록 다우네스가 해적들에게 엄한 처벌을 안겨주긴 했지만, 이 효과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1837년 8월 또다시 해적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살렘(Salem)에서 출발한 이클립스 호(Eclipse)는 무장 말레이인들이 승선하던 당시 트라방간(Trabangan) 부근에서 후추를 선적하고 있었다. 해적들은 선장과 실습생(apprentice) 한 명을 살해하였다. 다른 선원 몇 명도 부상당했으나, 갑판에서 뛰어내리거나 삭구를 타고 올라가는 등 도주할 수 있었다. 육지로 도주한 사람들은 트라방간 추장(Raja of Tragangan)을 통해 구조되었다. 해적들은 4 박스의 아편과 18 박스의 스페인 달러(Spanish dollars)를 탈취했다.

 

 이 사건의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기 전, 마틴 반 뷰런 대통령(President Martin Van Buren)은 이미 수마트라 및 기타 지역의 상황을 점검하기 위하여 다른 해군부대를 동양으로 파견한 상태였다. 조지 리드 준장(Commodore George Read)은 1838년 5월 6일, 50포 프리깃 함인 콜롬비아 호(Columbia)를 타고 햄턴 로즈 항구(Hampton Roads)에서 출항하였다. 콜롬비아 호와 더불어 슬루프 선인 존 애덤스 호(John Adams)(대포 30문) 또한 동행하였는데, 이 군함은 과거 서인도 제도에서의 해적소탕 작전에서도 활약했던 베테랑이었다. 리드 준장은 12월 초 실론 섬(Ceylon; 오늘날의 스리랑카)의 콜롬보(Colombo)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이클립스 호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리드 준장은 즉각 수마트라로 출발하여 12월 22일 도착한다. 다우네스 사건에서의 교훈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일단 리드 준장은 콸라 바투의 추장과 교섭을 시도했다. 3일간의 협상 끝에, 리드는 추장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행동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 다음날인 1838년 크리스마스 날, 리드는 콸라 바투를 포격한다. 주민들은 반시간 내로 항복하였고, 리드는 추가 공격은 자제한다. 리드는 이어 해적질 주모자 일부가 살고 있던 먹키 마을(village of Muckie)로 항해한다. 이곳에서도 협상은 실패하였고, 리드는 1839년 새해 첫날에 먹키를 공격한다. 잠깐 동안의 포격이 진행되고 나서 320명의 수병 및 해병들이 해안에 상륙하였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어 리드는 세번째로 사건에 연루된 마을인 수수(Susu)로 향한다. 리드는 수수에 도착한 뒤, 마을의 상황이 한심한 것(miserable condition)을 확인하고 공격을 자제한다. 그 대신 수수의 지도자 및 기타 다른 지역 지도자들에게, 향후 절대로 미국 선박을 공격하지 않도록 약속하도록 강요한다.

 

 1830년대 중반까지 말라카 해협에서의 해적행위는 증가추세에 있었다. 1833년 5월, 싱가포르 상인들은 자신들의 무역 규모를 2백만 스페인 달러로 추산하였다. 싱가포르를 거치든 거치지 않든, 이러한 대규모 무역 활동은 해적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이나 마찬가지였다. 싱가포르 관리들은 말라카 해협에서 활동하는 해적선의 숫자를 40~ 50척 가량으로 추산하였다. 1830년대에서 1840년대 사이에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닥쳤을 때, 동인도 제도의 해적 문제는 이들이 교역에 미치는 영향 측면에서 새로운 중요성을 띄게 된다. 해적질에 의한 손실은 가격 하락을 불러왔고, 상인들이 동인도 제도와 무역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다 (역주: 장물이 시장에 풀리게 되면 정당한 상품보다 싸게 팔리므로 가격 하락이 유도됨).

 

 이 지역의 해적질을 소탕하기 위한 시도들은, 대영제국이 다양한 말레이 술탄들과 맺은 조약들 때문에 상당히 복잡한 문제들을 겪어야만 했다. 대다수의 조약들은 영국이 지역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많은 술탄들이 해적들에 은신처 제공 및 각종 지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간섭은 조약 위반이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1830년대 중반까지 말라카 해협에서의 해적질은 대단히 심각해졌기 때문에, 결국 영국은 일방적으로 행동을 개시한다. 해리어 호(Harrier)(대포 18문)는 1834년 당시, 말라카 해협에서 2곳의 해적 마을을 제거한다. 2년 후, 안드로마케 호(Andromache)에서 나온 보트들이 말라카 해협에서 활동하던 3척의 해적 프로아 선(proa)을 포착하여 격파한다. 1836년 5월 30일 한밤중까지 이어진 해전 과정에서, 영국측은 113명의 말레이인들을 살해하고 9명을 생포하였으며, 한편으로 인명피해는 전혀 입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이어 네덜란드 측의 항의를 무시하고 리아우 군도의 가랑 섬(Galang Island)로 향한다. 영국인들은 이번에는 해적들을 단지 몇 명만 죽이긴 했지만, 그 대신 3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10여 척의 프로아 선을 불태웠다. 해적들의 해방구를 강타함으로써, 영국측은 향후 말라카 해협에서의 해적활동이 눈에 띄게 감소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

 

 한편 1840년대에도 영국군은 보르네오 섬(Borneo) 북부 해안에서 활동하는 해적들에 대한 일련의 원정작전을 감행한다. 당시 이를 이끈 것은 헨리 케펠 대령(Captain Henry Keppel)과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었는데, 이들은 책략을 써서 일명 사라왁 추장(Raja of Sarawak)이라고 불리는 토착관료(native official)의 신분을 갖게 된다. 브룩과 케펠은 보르네오 섬의 해적들을 제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의 본거지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데에 합의한다. 첫번째 원정은 1843년 7월에 사리바스 강(Saribas River)을 따라 이뤄진다. 영국인들과 토착민들의 혼성부대가 8척의 보트를 타고 강을 거슬러 이동하였다. 이어진 9일간에 걸쳐, 영국군은 3개의 요새화 촌락을 점령하여 파괴한다. 7월 17일까지 강 주변의 모든 부족들이 브룩에게 복속되게 된다. 그 다음 해인 1844년 8월, 이들 콤비는 또다른 해적 부족에 대한 원정작전을 이끌게 된다. 이번 원정에서는 4개의 요새를 점령하였고, 60문의 청동 대포를 노획하였으며, 다수의 마을들을 불태웠고, 수백 척의 보트들을 파괴하였다. 이 작전의 결과로 해적 지도자 라자 세리프 사힙(Raja Seriff Sahib)이 권력을 잃고 은신하게 된다. 1846년에도 보르네오 섬의 해적들과 몇 차례의 교전이 더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해적들이 더 이상 해적질을 하지 않도록 만들 정도로 충분하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1849년 7월, 디약 해적(Dyak pirate)을 소탕하기 위하여 브룩과 함께 아서 파콰르 중령(Commander Arthur Farquhar)이 이끄는 영국군이 출발하게 된다. 1849년 7월 31일 벌어진 반퉁 마루 전투(Battle of Bantung Maru) 당시, 영국군은 해적들을 덫에 몰아넣고 해적선단을 박살내게 된다. 해적 800여명이 살해되고 해적선 60여 척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산발적인 해적질은 계속 벌어지긴 했지만, 이 패전으로부터 보르네오 섬의 해적들은 두 번 다시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말레이 해적들에 대한 미국과 영국 측의 활동들은 육상의 해적 해방구를 소탕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인들과 영국인들 모두 해적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 - 지상 기지 - 을 타격했던 것이다. 해상에 있는 해적들을 탐지, 확인, 파괴하는 활동은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다. 말레이 군도의 지리 조건은 이러한 임무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그 결과 해적소탕부대는 육상의 해방구를 제거함으로써 해적들을 분쇄하였던 것이다.

 

 비록 첫번째 미국측 원정작전의 효과는 짧았고, 1840년대에도 몇 차례 미국 선박들에 대한 공격시도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2번째 원정작전 이후에는 더 이상 말레이 해적들에게 탈취되는 미국 상선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정치적 환경의 변화 역시도 해적공격의 감소에 기여한 바가 있다. 네덜란드인들은 1846년에 수마트라 섬을 장악했으며, 이어 미국인들이 수마트라 사람들과 자유롭게 교역하는 것을 제한하였다. 1850년대 중반이 되면 한때 왕성했던 후추 교역은 급격히 감소하여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수마트라 섬에 방문할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서, 185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말레이 해적들에 노출되는 미국 상선들 자체가 드물어진다.

 

 말라카 해협과 보르네오 섬에 대한 영국 측의 작전들이 성공한 것 또한 영국 측이 해적 본거지를 타격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만 브룩과 파콰르가 거둔 업적은 그 과정에서 살상한 다수의 원주민 해적들의 숫자 탓에 퇴색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의회와 여론으로부터 이에 대한 심한 질책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후에 발생한 문제를 통하여 해적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데에 대한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이러한 활동들은 해적질을 없애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여론의 역풍은 이를 실제로 행하기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

 

 

중국에서의 해적질 (Chinese Piracy)

 

 어느 한 오후 늦게, 중무장한 정크 선(junk) 한 척이 홍콩(Hong Kong)으로부터 출발하여 180마일 북방의 샨터우(Swatow/Shantou)로 항해 중이었다. 그날 저녁 무렵 바람이 멎자, 이 배는 보다 나은 항해 조건이 될 때를 기다리며 닻을 내렸다. 닻을 내린 상태에서 이 배는 해적들의 방문을 받았고, 신속하게 유린된다. 해적들은 승객들과 선원들을 갑판 아래에 가둔 뒤, 남쪽의 마카오(Macao)를 향해 배를 돌린다. 다음날 아침, 해적들은 83명의 승객 및 선원들 중에서 단 1명을 제외한 전원의 손발을 묶은 뒤에 바다에 내던져 익사하게 만든다. 해적들이 살려둔 1명은 12살짜리 소년으로, 이후 해적들의 하인으로 일하게 된다. 해적들은 마카오 북쪽의 작은 골짜기로 배를 몰고 간 뒤에 정크 선에 실려있던 화물들을 처분한다. 이어 해적들은 정크 선을 불태웠고, 소규모 그룹으로 분산되어 홍콩으로 돌아갔다. 해적들 중 7명은 살아남은 어린 소년과 함께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가는 여객선에 탑승한다. 소년은 기회를 틈타 여객선 선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있었고, 이에 선장은 홍콩 경찰에게 사건을 신고한다. 홍콩 경찰은 7명의 해적을 체포한다. 내던져진 뒤에 간신히 살아남은 승객 한 명에 의해 소년의 이야기가 재확인되면서, 해적들은 재판을 받고 처형된다.

 

 이 이야기는 19세기 무렵 중국 해안을 따라 판치던 해적질에 관한 많은 부분을 함축하고 있다. 중국에서의 해적들은 외국 선박들 보다는 중국 선박들을 주로 노렸다. 이는 사실 피비린내나는 일이었다: 만약 몸값이 기대되지 않는 경우, 중국 해적들은 희생자들을 살해하는 일이 잦았다. 해적질의 상당부분이 홍콩과 마카오 근방에서 이뤄졌다. 또한 이곳의 해적질도 해적질에 관한 3가지 조건과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중국 해안은 수많은 작은 골짜기들과 항구, 하천, 강어귀 등으로 가득하다. 이들은 해적들이 숨기에 안성맞춤이다. 해적들은 이러한 곳에서 튀어나와 연안 선박들을 공격했다. 중국은 19세기 대부분 시기, 청나라 황실이 서서히 몰락하면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 결과 해적들이 활동하기 알맞은 안전한 장소들이 대단히 많이 존재했다. 중국 중앙 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지역 관리들은 종종 해적들을 보호하면서 해적질로부터 이득을 취했다. 그 결과 해적들은 장물들을 안전하게 처분할 수가 있었다; 해적선을 안전하게 보수하고, 붙잡힐 걱정 없이 휴식하고, 휴양하며, 신규 인원들을 모집할 수가 있었다.

 

 중국으로 처음으로 항해한 미국 선박은 엠프레스 오브 차이나 호(Empress of China; 중국의 황후 호)로서, 1784년 8월 28일 중국 광저우(Canton, China)에 도착한다. 미국의 중국과의 교역량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서서히 증가하게 된다. 1804년에서 1812년 기간에는 연평균 29 척의 미국 선박들이 아시아로 향했다. 1815년에서 1820년 사이에는 이 숫자는 39 척으로 불어난다. 1832년에는 30 척의 미국 선박들이 중국만을 목적지로 하여 출항하였다. 1820년이 되면, 미국의 중국과의 무역규모는 영국과의 교역을 제외하면, 다른 어떤 국가와의 무역규모들 보다도 많게 된다. 1832년, 중국에 대한 수출 금액은 150만달러, 수입 금액은 530만달러에 이르르게 된다. 따라서 외국과의 교역 - 중국 해상이든 극동의 다른 해상 지역에서든 - 을 해적질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점차 더욱 중요성을 띄게 된다. (그림 9에는 홍콩, 마카오, 광저우가 나타나 있다.)

 

(그림 9. 홍콩, 마카오, 광저우)

 

 영국의 경우에는 중국과의 교역이 훨씬 더 중요성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이 교역은 처음에는 심각하게 일방적인 문제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경우 1785년 당시 중국으로부터 1500만 파운드 상당의 차(茶)를 수입하였다. 그러나 중국 관리들은 자국의 광대한 내수 시장 탓에, 대영제국과의 교역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믿는 바로는, 필요한 모든 것은 중국 내에서 생산할 수 있엇다. 외국 외교관들에 있어서 더욱 당혹스러웠던 것은, 중국 관리들이 다른 나라들을 동등한 조건에서 대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이었다. 중국인들은 자기 나라를 '가운데 왕국(Middle Kingdom; 中國)'이라고 믿었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중국 황제는 다른 모든 국가 지도자들보다 위에 있으며, 그 결과 중국 관리들은 외국의 고관들을 자신들보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대우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과 대영제국간에 상당한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중국은 자신들보다 열등한 이들 외국들과의 직교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었다. 대신 모든 교역은 광저우의 단 한 개의 항구에 있는 중간자(co-hong; 공행(公行))을 거쳐서 이뤄졌다. 외국인 상인들은 중국인들을 거스르거나 무역 금지조치를 당하는 것 모두 꺼려하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내건 조건에 감히 도전하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사고관이 가져온 결과 중의 하나로, 중국 관리들은 차(茶) 값으로 다른 물건과의 교역 대신 은(銀)만을 받겠다고 주장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물건들은 중국에 다 있으니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곧장 무역 흑자로 이어져 1800~1810년 동안 그 규모는 2600만 달러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얼마 안가 은(銀)에 대한 대체물을 개발하게 된다 - 아편이었다. 비록 청황제는 1773년에 아편 수입을 금하였지만, 아편의 수입량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1773년만 해도 1000 상자 이상의 마약이 중국으로 수입되었다. 1836년에는 아편 수입량이 34,000 상자로 증가한다. 1836년이 되면, 영국과의 교역에 있어서의 중국의 무역 흑자는 3800만 달러 적자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교역량 증가는 곧 해적으로부터 해상 교역로를 보호해야 하는 압력이 증가한다는 것도 의미하게 된다. 19세기 중반에 되면 이 문제는 영국 정부와 영국 해군 모두가 가장 중시하는 문제로 변하게 된다.

 

 세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해안가에 사는 많은 일반 중국 시민들도 잡다한 해적질에 종사하고 있었다. 일시적, 계절적인 해적질이 흔했는데, 해상 조건 탓에 어업행위가 연간 120일에서 150일 가량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름 기간에는 어업행위가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어부들이 저강도 해적(low-level piracy)으로 변하곤 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이들은 북상하여 해안가를 약탈하였고, 가을이 되어 바람이 바뀌면 돌아오곤 했다. 이러한 패턴은 해적질을 해안가 사회의 삶 속에 통합시켜버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해적들은 일단 해적항해가 끝나면 용이하게 사회로 녹아들어갈 수가 있었다.

 

(4장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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