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 아프리카 반군

[스크랩] [번역] 해적질과의 기나긴 전쟁사 : 역사적 경향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2010년 / 제 4장. 아시아에서의 해적 (4)

박용수 2014. 10. 27. 16:39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106~ pp 110 >

 

 


(4장 계속)

 

 중국에서의 해적질은 19세기 초 무렵에 거대한 해적연맹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현상이었다. 이러한 해적연맹이 탄생하게 된 원인은 베트남에서 벌어진 내란, 즉 서산당의 난(Tay-son Rebellion; 西山黨之亂, 떠이선 왕조)에 있었다. 서산당(Tay-son rebels)에서는 전란기간 중국 해적들을 고용하여 자신들의 해군력을 강화하였다. 해적들은 폐립된 베트남 왕조 군대와 싸울 때를 제외하면 통킹 만(Gulf of Tonkin) 지역에 들어온 중국 선박들을 먹잇감으로 삼는 데에 열중했다. 1796년이 되면 해적들이 너무나 번창하여 중국 정부로서도 이들 해적들의 활동을 무시하지 못할 지경이 된다. 이듬해에는 정부군 함대가 해적들을 격파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오히려 격퇴되고 만다. (그림 10에는 해남도(Hainan Island)와 남중국해(South China Sea) 지역이 나타나 있다.)

 

(그림 10. 해남도와 남중국해 일대)

 

 1802년에 서산당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해적들은 중국 해역으로 돌아가 국내 해운을 먹잇감으로 삼기 시작했다. 정부군의 3배에 육박한 해적들은 중국 남부해안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1809년 당시 해적들은 광저우(Canton)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 서산당을 위해 싸우면서 해적들은 많은 교훈들을 배웠다. 이들은 더 이상 잡다하고 엉성한 해적들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은 작전측면 및 보급측면에서 모두 잘 조직된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이들은 진압을 위해 파견된 정부군보다도 훨씬 전투에 능숙하였다. 처음에는 다양한 해적 집단들이 서로 경쟁하였다. 하지만 1805년이 되면 7명의 해적 두목들이 연합하여 해적연맹을 형성하게 되고, 그 규모는 최전성기 기준으로 2000여척에 육박하게 된다.

 

 중국 군대는 조직이 엉성했으며, 해적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가 없었다. 중국 중앙 정부는 제국 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었기 때문에, 해안 지역에 강력한 군사력이 집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해안지역의 해적들에 대비하기 위해서, 이 대신 소규모 부대들을 일련의 해안초소에 배치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게다가 중국 정부는 상비함대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중국 정부는 보유한 해군력을 여러 독립적인 해군구(naval district)에 분산시켰고, 이들은 서로 협조하거나 연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또한 선박의 크기를 정하는 규정들도 존재하고 있어서, 해군 선박들의 크기도 제한이 되었다. 반면 해적들은 이러한 규정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중국 정부군의 선박은 해적선들에 비해 크기도 훨씬 작고 화력도 열세였다. 그 결과 19세기의 최초 10여년간, 중국 정부군은 해적들을 압도할 만한 전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고, 일련의 패배들을 맛보아야만 했다. 정부군은 이제 바다에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된다.

 

 해적들을 격파하지 못하자, 중국의 지방 지도자들은 이제 해적들과 손을 잡고자 하게 된다. 정부 관리들은 "사면 및 귀순(pardon and pacification)" 정책을 추진하는데, 이는 해적들이 해적질을 멈추는 댓가로 사면과 함께 돈을 지불하고, 또한 원하는 경우 군대의 관리로 채용하는 것이었다. 비록 정부군은 바다에서 계속 패배를 맛보긴 했지만, 이러한 사면 및 귀순 정책은 종국에는 효과를 발휘한다. 1810년 6월, 최후의 해적함대가 전직 해적두목이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격파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적의 진압 성공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해적들이 미국과 영국 국적 선박들에 대해 실시한 공격들로 말미암아 외국 해군들이 이 지역에 개입할 구실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스쿠너 선박인 필그림 호(Pilgrim)가 1808년 해적에게 나포되었고 선원들은 인질이 된다. 1809년에도 5척의 미국 선박들이 해적들에게 공격당한다. 이해 여름이 되면, 중국 정부가 해적들을 제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게 되고, 외국인들은 중국과의 무역 전체가 해적들로 인해 막힐 것으로 우려하게 된다. 그 결과 1809년 9월 당시 중국 관리들이 마카오(Macao)에 있는 "야만인들(barbarians)"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을 당시, 유럽인들은 이미 행동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국인들은 해적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영국 선박 머큐리 호(Mercury)를 빌렸는데, 이 배에는 대포 20문과 50명의 미국인 상선 선원들이 배치되었다. 같은 달, 중국인들은 해적들을 상대하기 위하여 6척의 포르투갈 군함을 추가로 대여(lease)한다. 이러한 전력 자체는 해적들을 무찌를 만한 것이 못되었지만, 어쨌든 중국 해상의 해적 문제로 외국이 개입하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중국 해역에서의 해적질 문제는 궁극적으로 미합중국 해군과 대영제국 해군 모두의 관심을 끌게 된다. 중국에 최초로 방문한 미국 군함은 프리깃 함인 콩그레스 호(Congress)(대포 36문)로서, 1819년 11월에 도착한다. 그러나 미국 상인들을 해적들로부터 보호한다는 콩그레스 호의 임무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는데, 이는 미국 상인들이 만약 콩그레스 호의 보호하에 움직이게 될 경우, 중국 관리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어 무역 금지조치를 당하게 될 것으로 두려워하여 콩그레스 호의 호송선단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콩그레스 호는 별다른 성과 없이 1821년 5월 경 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슬루프 함 빈센스 호(Vincennes)(대포 18문)가 도착한 1830년 무렵에는 이미 오랜 기간 해적질이 증가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 상인들의 입장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미국 상인들은 매년마다 군함이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1830년대 중반부터는 최소한 미국 군함 한 척 이상이 항상 극동 해역(Far Eastern waters)에서 미국인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남아있게 되었다. 동인도제도전단(East Indies Squadron)은 1841년에 공식 창설된다.

 

 대영제국 해군 또한 1830년대 동안 중국 해역에서의 해군력 현시(presence)를 증가시켰다. 이러한 결정은 부분적으로는 이 지역에서의 해적질의 증가 추세가 원인이었다. 대영제국 해군(Royal Navy)이 해적소탕 임무를 부여받게 된 것은, 1834년 경, 중국 무역에 대한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의 독점권이 종료되면서부터였다. 1715년부터 1834년까지 영국과 중국과의 관계는 동인도회사의 책임하에 있었다. 강력한 동인도회사 소속의 인력들과 군함들로 말미암아, 대영제국 해군이 중국 해역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중국에 방문한 대영제국 해군 군함은 극소수였다. 미국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동인도회사 역시 무역금지 조치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국 영해에 외국 군함들의 진입을 불허하는 중국의 금지령을 준수하였다. 그러나 영국 군함들은 그러한 규칙을 별로 지키려 하지 않았고, 1834년 영국 왕실이 영국-중국간 관계에 대한 권한을 갖게 되면서 중국과 대영제국간의 분쟁이 발발하게 된다.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이 종료된 후의 최초 몇 년 동안, 영국 정부는 불간섭주의 정책(hands-off approach)을 고수했다. 그러나 1830년대 후반기 기간 동안 해적사건이 계속 증가하면서, 이러한 정책은 변화하게 된다. 1840년대 초가 되면, 중국 해적들은 자국 선박들만 공격할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유럽 선박들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1841년 3월 26일, 이들은 영국 선박인 블렌하임 호(Blemheim)를 공격하여 3명의 영국 시민을 살해한다. 영국 측에서는 주산 군도(Chusan Arhipelago; 舟山群島)로 슬루프 선박인 필라데스 호(Pylades)(대포 18문)를 파견하여 해적 정크선 3척을 나포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결국에는 1척의 전열함(ship-of-the-line), 1척의 프리깃 함, 5척의 슬루프 선, 1척의 증기선으로 구성된 영구적인 전단(permanant squadron)이 창설된다. 1853년에는 여기에 프리깃 1척이 더 추가된다.

 

 해적 사냥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되는데, 이는 이 일이 수지맞을 가망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영국 의회에서는 1825년 6월에 "해적선의 나포 또는 파괴를 고취하는 법령(An Act for Encouraging the Capture or Destruction of Piratical Ships and Vessels)"을 통과시킨다. 이 법령에 따르면, 살해하거나 붙잡은 해적 1명당 20파운드의 현상금을 지불하며, 공격 당시 해적선에 탑승하고 있었지만 놓쳐버린 해적에 대해서도 1명당 5파운드씩의 현상금을 지불한다고 되어 있었다. 따라서 해적들을 찾아 죽이는 데 대한 상당한 금전적 인센티브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는 중국 영해에 숨어있는 해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중국의 정세는 다른 문제들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1840년대와 1850년대 무렵 청나라 왕조(Manchu dynasty)는 정치적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중국과 대영제국과의 마찰은 결국 1839년, 신임 광저우 총독 임칙서(new Governor General of Canton, Lin Tse-hsu)가 아편 수입을 금하는 황명을 강제집행하려 함으로써 전쟁으로 확대되게 된다. 2년 반에 걸친 산발적인 전투 끝에 영국 측은 중국 측을 굴복시키게 된다. 영국측의 입장에서의 전쟁 원인들 중 하나는, 합법적인 무역을 수행하고 보호할 수 있는 권한에 있었다. 전쟁 종결로 체결된 남경조약(The Treaty of Nanking; 南京條約)으로 인하여, 영국과의 무역을 위한 4개의 항구가 추가 개항되었고, 홍콩(Hong Kong)이 대영제국에 할양되었다.

 

 1856년에는 보다 심각한 전쟁이 또다시 발발한다. 이번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한편이 되어 청나라와 대결한다. 인도에서의 반란(Indian Mutiny; 세포이 항쟁)에 따른 잠시의 지연이 끝난 뒤인 1857년 12월,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홍콩에 집결한다. 연합군은 신속하게 광저우를 점령한다. 이들이 북경을 공격한다고 위협하자 중국인들은 협상하는 데에 동의하게 된다. 1858년 6월에 완료된 천진조약(The Treaty of Tientsin; 天津條約)으로 인하여 승전국들과 중국간의 정치적인 동등성이 확인된 것처럼 보였다. 이 조약에서는 북경에 영구적인 외국인 거주지를 설치하고, 5개의 무역항을 추가 개항하며, 여권을 가진 외국인의 중국 여행을 허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애매한 표현으로 피하려고만 하였으며, 이에 연합군은 북경으로 진군한다. 연합군이 강을 이용한 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시가지를 포격하기 시작하자, 중국인들은 마침내 굴복하게 된다.

 

 이 2차례의 전쟁과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지속된 태평천국의 난(Taiping Rebellion; 太平天國)으로 말미암아 중국 전토는 분열되고 청나라 황실은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전쟁들로 발생한 혼란은 중국 영해에서의 해적들이 번성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누가 반란군이고 누가 해적인지 말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중앙 정부가 반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적들은 아무런 응징도 받지 않고 성장할 수가 있었다.

 

 사실 홍콩을 얻은 것은 영국 입장에서는 곤란한 문제였다. 일면으로 홍콩은 대영제국 해군과 영국 상인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하게 개발할 수 있는 훌륭한 항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으로 홍콩 및 홍콩 주변에는 다수의 중국 해적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홍콩 상인들과 상점주들은 이들 해적들에게 상당한 원조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해적들에게 무기와 탄약, 보급품들과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댓가로 상인들과 상점주들은 해적들로부터 염가의 장물들을 구매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이제 홍콩 주변 해역의 해적들을 단속할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비록 홍콩 총독이 해안 3마일 이내에서 붙잡힌 해적들을 기소할 권한이 있었고, 대영제국 해군 또한 공해(high sea)에 있는 해적들을 체포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영해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해적들은 전적으로 중국 법에 의해서만 다룰 수가 있었다. 중국이 자국 영해 내에 있는 해적들을 제압할 능력이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는 영국측에 딜레마를 안겨다 주게 된다. 남경조약에서는 해적들을 추격하기 위해 중국 영해로 영국측이 진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측에 더 이상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중국측의 강력한 입장도 대영제국 해군의 교전규칙을 더욱 제한하게 된다. 영국 무역총감독관(British Superintendent of Trade)의 요청에 따라, 윌리엄 파커 중장(Vice Admiral William Parker)은 휘하 함장들에게 직접적으로 해적 행위를 목격한 경우를 제외하면 해적선에 대한 공격을 금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결과 1842년 이후 해적질은 급증하게 된다.

 

 1846년, 해적질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해사위원회(Admiralty Board)에서는 동인도 및 중국 지역함대 사령관(Commander of the East Indian and China Station)인 사무엘 후드 잉겔필드 소장(Rear Admiral Samuel hood Ingelfield)에게 "복건성(Fukien; 福建) 연안에 만연하고 있는 해적질 시스템을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영국의 무역 이익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목표이다"라고 조언하게 된다. 이 직후 부임한 신임 지휘관 프랜시스 A. 콜리어 소장(Rear Admiral Francis A. Collier)는 기존의 해적질을 직접 목격한 경우에만 공격한다는 기존의 교전수칙을 완화한다. 중국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콜리어는 가능한 한 중국측과 합동으로 행동한다. 이로써 1840년대 후반에서 1850년대까지, 해적들에 대하여 보다 공세적인 반응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작전할 상황은 엄청나게 많았고, 중국 해적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영국과 미국 해군은 자주 합동 작전을 펼쳤다. 1849년, 미국 슬루프 선인 프레블 호(Preble)(대포 16문)는 영국 해군이 57척의 정크선을 나포하고 2곳의 해적 소굴을 파괴하는 것을 돕는다. 영국 슬루프 선인 파일럿 호(Pilot)(대포 16문)은 1849년 여름 내내 중국 동부해안을 따라서 해적들을 찾아다니며 보내게 된다.

 

(4장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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