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세계대전

[스크랩] [번역] 반란의 진화, 1920 (The Evolution of a Revolt - by T. E. Lawrence)

박용수 2014. 10. 27. 16:41

< 원문출처:

[1]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lawrence.pdf)

[2] (http://www.telawrence.net/telawrencenet/works/articles_essays/1920_evolution_of_a_revolt.htm) >

 

< 아마존 서평:

[3] (http://www.amazon.com/evolution-revolt-T-Lawrence/dp/B0008BZ4DY) >

 

 

 이번에 번역하는 글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로 잘 알려진 T. E. 로렌스의 글입니다. 로렌스는 영화에서도 묘사되는 것처럼 1차대전 당시 영국군 장교로서 아랍반란을 이끌어 터키군과 싸운 사람입니다. 로렌스의 저서로는 자서전격인 '지혜의 일곱기둥 (Seven Pillars of Wisdom) (1922)'이 가장 유명한데, 이번에 번역하는 글인 '반란의 진화 (Evolution of a Revolt)'은 아직 '지혜의 일곱기둥'이 출간되기 전인 1920년에 The Army Quartery (London) 10월호에 기고한 요약문이라고 합니다.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홈페이지를 뒤지던 중, 최근 카페에 좋은 글을 올려주시고 계신 김권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 중의 하나인 로렌스의 글이 눈에 띄어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거의 100년 전 글이라서 그런지 문장이 상당히 긴 편이고, 배경지식이 필요한 표현 내지 애매한 표현이 많아서 번역에 애를 먹었습니다. 일부 끝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 오역의 여지가 어느 정도 있습니다. 독자분들께서 읽으시다가 이상한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적합한 해석을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편 글을 읽으시면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내용은 실제 역사를 근거로 하긴 했지만, 또한 극화 과정에서 가상의 인물 혹은 변형된 인물을 넣는 등(예: 셰리프 알리) 실제와는 여러 모로 다르다는 점도 고려하여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반란의 진화 (The Evolution of a Revolt - by T. E. Lawrence)

 

 

저자: T. E. 로렌스, 고(故) 영국 이집트원정군 일반참모부 중령.

 

 아랍 반란(Arab Revolt)이 시작된 것은 1916년 6월로써, 무장도 빈약하고 경험도 부족한 부족민(tribesmen)들이 메디나메카 일대의 터키군 수비대에 기습 공격을 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며칠간의 노력 끝에 요새 포병의 사거리 밖으로 물러나 봉쇄(blockade)를 하기 시작했다. 이 방식은 메카의 조기 항복을 이끌어내었는데, 이곳의 도로망은 너무 길고 거칠어서 터키인들이 도저히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메디나의 경우에는 시리아에 있는 터키군 주력과 철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터키군은 병력 수와 장비 측면에서 우세하였기 때문에, 1주일 간의 전투 끝에 병참선을 복구하고 일시적으로 포위되었던 수비대를 증원할 수가 있었다. 한편 이들을 공격했던 아랍측은 터키인들이 점차 공세적으로 변해감에 따라 조금씩 밀려나게 되었고, 결국에는 남서쪽 50마일 지점의 언덕으로 밀려갔다. 이들은 이곳에서 메카로 향하는 주도로 너머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 시점에서 전투는 여러 주 동안의 정체상태를 맞았고, 양측 모두 숨고르기를 하게 된다. 터키인들의 경우 원정부대를 메카로 파견하여, 반란을 시작된 곳에서부터 분쇄함으로써 주도권을 획득할 준비를 하였다. 터키인들은 철도를 이용하여 군단(army corps)을 메디안(Median; 메디나의 오기인 듯 함. 역주[2])으로 보냈으며, 대포와 차량, 비행기, 기관총, 그리고 다수의 수송용 말과 노새, 낙타 등을 갖춤으로써 이곳 진지를 단순 주둔지 이상으로 강화하였다. 이후 이들은 메디나에서 메카로 향하는 서쪽 주도로를 따라 진격하기 시작한다. 총 노정은 대략 250마일 가량이었다. 최초 50마일은 쉬웠다: 그 다음에는 20마일 폭의 띠 형태의 구릉지대가 맞이했는데, 이곳에서는 파이잘(Feisal)의 부족민들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구릉지대 뒤에는 평평한 평야지대였는데, 라베그(Rabegh)까지 펼쳐지는 약 70마일 길이의 해안평야(coastal plain)로서, 여기까지면 대략 절반 이상을 지나온 것이다. 라베그는 홍해(Red Sea)의 작은 항구로서, 배들이 정박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에는 파이잘의 맏형인 셰리프 알리(Sherif Ali)가 보다 많은 부족민 병력들과 함께 있었고, 또한 초창기의 아랍 정규군(Arab Regular Army)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랍 혈통(Arab Blood)의 장교 및 병사들로부터 모집되었으며, 과거 터키군에 복무하였으나 이제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옛 주인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우리들의 군사 고문관들은 라베그가 메카의 열쇠라고 말해주었다. 이는 어떠한 군대도 이곳을 점령하여 이곳의 야자나무 밑의 우물에서 물을 긷지 않고는 주도로를 따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곳의 방어는 대단히 중요하였다. 해군은 항구로부터 효과적으로 협조할 수 있었으며, 야자나무 숲 일대는 반드시 참호화하여  정규군을 배치시켜야 했다. 그들은 고정 진지에서는 베두인(Beduin) 부족민들이 전혀 가치가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아랍 정규군을 가능한 한 빨리 편성하고 훈련시켜서 이 임무를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신생 군대가 준비되기 전에 터키군이 진격해 온다면, 셰리프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영국인들은 영국군 혹은 연합군(British or Allied troops)에서부터 1개 여단을 차출하여 이 저지선(stop-block)을 방어해야만 했을 것이다.

 

 아랍인들의 진지, 즉 이곳과 파이잘이 있는 구릉지대에 대하여 본인이 직접적으로 정찰해본 뒤, 나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살짝 바꾸도록 만들었다. 파이잘이 데리고 있던 병력은 약 천여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소총(rifles)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다소 어설프고 미심쩍은 인원들(rather casual, distrustful fellows)이었지만, 한편으로 대단히 활발하고 유쾌한 인원(but very active and cheerful)들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천혜의 언덕과 오솔길 등에 배치되어있었기 때문에, 본인이 보기에는 터키인들이 단지 병력 우세만으로는 이들을 몰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언덕들을 9~ 10천명의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9~10명의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것보다도 더 쉬운 일이다. 따라서, 나는 부족민들이 (경기관총 및 고문역의 정규군 장교들로 강화된다면) 아랍 정규군이 창설될 때까지 거의 무한정 터키인들을 묶어놓을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나폴레옹 이래의 군사 사상(military thinking)의 일반적인 흐름을 살펴볼 때 거의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우리 모두는 전쟁을 이기는 데에 있어서 단지 정규군만 바라보았다. 우리는 포쉬의 격언(dictum of Foch), 즉 현대 전쟁의 윤리(the ethics of modern war)는 적의 군대를 찾는 것이고, 적의 힘의 중심을 찾는 것이고, 이를 전투를 통해 분쇄하는 것이라는 데에 집착하고 있었다. 비정규군은 진지들을 공격하지 않기에, 이들은 결정을 강요할 능력이 없는(incapable of forcing a decision) 것 같았다.

 

 우리들이 정규군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동안 (물론 구릉지대를 방어하고 있던 파이잘에게 장교나 경기관총을 제공하지 않은 채로), 터키인들이 갑자기 메카로 진격을 개시함으로써 내 평가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터키인들은 내가 말한 "난공불락"의 구릉지대를 24시간 만에 돌파하였고, 그곳에서부터 라베그를 향하여 서서히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터키인들은 우리에게 비정규전의 2번째 정리(second theorem of irregular war) - 즉, 비정규군은 특정 지점이나 방어선을 공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곳들을 방어할 수도 없다 - 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었는데, 이는 터키인들의 성공이 곧장 우리들을 심각한 곤경에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라베그의 병력은 아직 1개 대대의 공격을 격퇴할 능력도 안되었고, 더구나 군단급 공격이라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시점에서는 이집트에 위치하고 있는 영국군을 파견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나는 1개 영국군 여단이 들어온다 치더라도 라베그의 모든 진지를 방어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라베그 자체는 터키인들에게 그리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셰리프가 영국군을 헤자즈(Hejaz)로 불러들였다면 단 한명의 아랍인도 같이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비정규군에게 겉으로 들어나지 않고 깊숙히 숨어있는 미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게 떠올랐다. 그리고 터키군을 이토록 오랫동안 망설이게 했던 이유는, 비정규군이 터키군 북쪽 측면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위협이었다는 점도 떠올랐다. 터키군의 실제 측면은 저들의 메디나로 향하는 정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약 50마일 가량의 길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메디나 뒤의 헤자즈 철도를 향해 움직인다면, 우리는 우리로 인한 위협을(그리고 이에 따라서 적군의 측면의 길이까지) 길게 늘려줄 수 있었고, 잠재적으로 다마스커스까지로 늘어난다고 치면 대략 북쪽으로 800마일 길이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터키인들로 하여금 수세로 전환하도록 강요할 것이며, 우리는 다시 주도권을 되찾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게 우리의 유일한 기회 같았고, 따라서 1917년 1월, 우리는 파이잘의 부족민 전원을 이끌고 메카와 라베그와 터키인들을 모두 뒤로 한 채 북쪽의 웨즈(Wejh)를 향해 200마일의 행군을 시작했다. 당시 영국 홍해함대(British Red Sea Fleet)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들은 해안을 따라 우리에게 식량과 물을 공급해 주었고, 또한 필요할 때마다 화력(gun-power)을 지원하고 육전대(landing party)를 지원하였다.

 

 이 기괴한 움직임은 마치 마법처럼 작용하였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에 따르면, 후위부대(rearguard)는 적군의 행동을 마치 진자(pendulum)처럼 조정하는데, 이는 이들이 뭘 하느냐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존재 자체를 통하여 조정한다고 하였다. 우리도 뚜렷하게 한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우리의 행군은 터키인들로 하여금 메디나로 되돌아가게 만들었고 (당시 이들은 라베그에 거의 도착한 상태였다), 거기서 터키인들은 병력을 반으로 쪼갰다. 절반은 도시 근방의 참호진지에 배치되었고, 이들은 나중에 휴전(the Armistice)이 이뤄질 때까지 이곳에 남아있게 된다. 나머지 절반은 우리들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철도를 방호하기 위하여 철도를 따라 분산배치되었다. 전쟁 나머지 기간 내내 터키인들은 우리에 대해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우리는 평화가 올 때까지 계속 이득에 이득을 취하게 되었다. 우리는 35,000명의 포로를 잡았고, 그와 비슷한 숫자의 적을 죽이거나 부상시키거나 지쳐빠지게 만들었으며, 적의 영토 수십만 평방 마일을 점령했으며, 반면 우리편의 피해는 대단히 경미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웨즈가 우리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곳에 철도를 절단하기 위해 간다고 생각했고, 나는 또한 이걸 하기 위해 파견되었었다. 요컨대 메디나를 탈취하는 수단으로서, 터키 사령부와 주력 수비대를 무찌르는 수단으로서 말이다. 도중에 나는 병이 들었고, 텐트에서 10일간을 누워 지냈다. 그동안 나는 다른 할 일 없이 오로지 전쟁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또한 지금까지 우리들의 실험적인 경험들이 실제로 어떠한 중요성을 갖는지에 관하여 분석하였다.

 

 나는 내가 내키는 한 최대로 전역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는 점에서 운이 나빴는데, 나는 이제껏 이러한 정도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지휘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군사이론 측면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봐줄만하게 읽었다고 할 수 있는데, 과거 옥스포드 대학 시절의 호기심은 나를 나폴레옹으로부터 클라우제비츠 및 클라우제비츠 학파 사람들, 캐머러(Caemmerer)와 몰트케(Moltke), 골츠(Goltz), 그리고 최근의 프랑스인들(Frenchmen)에게까지 안내하였다. 이것들은 사실 대단히 불완전한 책들(partial books)로 보였고, 내가 조미니(Jomini)와 윌리슨(Willisen)을 보고 나서는, 삭스(Saxe), 기버트(Guibert), 그리고 그 추종자로부터 18세기에 관한 광범위한 원칙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클라우제비츠가 이들 모두에게 대단한 지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의도하지 않게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전술 측면에 있어서 내가 차근차근히 공부한 유일한 전역은 한니발과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그리고 모하메드십자군들간의 고대 전사에 관한 것 뿐이었다! 내 관심은 단지 순수 이론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나는 항상 형이상학적 측면(metaphysical side), 전쟁의 철학(the philosophy of war) 따위를 찾아다녔으며, 나는 몇 년간 여기에 대해서 약간의 생각을 한 바가 있다. 이제 나는 갑자기 실제행동을 하도록 강요받게 되었고, 내가 책에서 읽은 것과 우리의 현재 움직임 사이의 즉각적인 방정식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책들은 내게 전쟁의 목표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제공하였다. 즉 "전투라는 한 과정을 통하여(by the one process battle)", "적의 조직화된 군사력을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organized forces of the enemy)"한다는 것이었다. 승리는 단지 피로써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는 적용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는데, 일단 아랍인들에게는 조직화된 군사력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기에 터키의 포쉬에게는 목표가 없었다: 반면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사상자를 감당해 낼 입장이 못되었기 때문에, 아랍의 클라우제비츠로서는 피로써 승리를 사올 수가 없었다. 이들 현자들은 분명 은유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는데, 우리는 분명 전쟁에서 이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대해서 생각했을 때, 나는 우리가 헤자즈 전쟁(Hejaz war)에서 이미 이겼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헤자즈의 99퍼센트를 점령하고 있었다. 평화가 올때까지, 아니면 지구 종말이 올 때까지 터키인들이 나머지 1퍼센트를 점령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안되었다. 전쟁에서 이 부분은 이미 끝났으니 메디나에 대해서 신경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메디나는 라베그처럼 우리의 기지도 아니었고, 웨즈처럼 터키인들에 대한 위협도 아니었다: 단지 양측 모두에게 무의미한 뒷골목(blind alley)였다. 터키인들은 그곳에 눌러앉아 움직이지 못한 채 방어태세를 유지했으며, 이들을 메카로 옮겨줬어야 할 수송용 동물들에게 먹이나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제 한정된 전선에는 목초지조차 없었다. 저들은 거기에 눌러앉아 있는 한 아무런 해가 되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저들을 포로로 잡는다면, 우리는 이집트에서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경비병을 제공하느라 비용을 소모해햐 했다: 우리가 저들을 북쪽 시리아로 몰아낸다면, 저들은 시나이에서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자기들의 주력부대와 합류할 것이었다. 모든 것을 고려하였을 때 저들이 그냥 그 위치에 있는 것이 우리에게 최선이었던 반면, 저들은 메디나를 높게 평가하여 그걸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놔 둬라!

 

 이건 만약 포쉬(Foch)가 사제였다고 했을 경우 있음직한 전쟁의 제례절차(ritual of war)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 우리 사이에는 일종의 차이점이 있으리라고 희망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현대전쟁을 "절대적(absolute)"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2개의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철학들을 각각 내세우고 있는 국가들이 힘에 의지하여 자웅을 겨루게 된다. 2개의 무형적인 원칙들간의 대결은 한쪽의 지지자 측이 더 이상 저항할 수단을 갖지 못하게 될 때까지는 끝나지 않게 된다. 다만 한가지 주장을 해 볼 수도 있다: 설득이 최고다(a conviction is best shot). 교리간의 전쟁(war of creeds)에 있어서의 논리적 종결은 일방의 최종 파괴에 있으며, 고전적 교과서 사례인 살람보(Salammbo)에서와도 같다. 이것들은 프랑스와 독일간의 투쟁사에는 해당되는 내용이지만, 본인 생각에는 독일과 영국간의 관계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쪽 사람들(our men)이 적을 증오하도록 만드려던 모든 노력은 단지 이들이 전쟁을 증오하게 만들었을 뿐이며, 나중의 휴전(the Armistice)이 이뤄지는 시기가 되면 우리가 1차 세계대전(Great War)을 포쉬의 이상에까지 미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본다. 내게 있어서 이것은 단지 여러가지의 전쟁 중의 하나(a variety of war)인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른 종류들을 볼 수 있었는데, 클라우제비츠가 나열했던 것처럼, 왕조의 이익에 따라 벌어지는 개인적 전쟁(personal wars for dynastic reasons), 당파적 이유로 벌어지는 증오 전쟁(expulsive wars for party reasons), 무역상의 이유로 벌어지는 상업전쟁(commercial wars for trading reasons) 등이 있다.

 

 이제 나는 아랍측의 목표를 생각해 보았고, 이것이 지리적인 것(geographical), 즉 아시아의 모든 아랍인 권역(all Arabic-speaking lands in Asia)를 점령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터키인들을 죽일 수 도 있다: 우리는 저들을 대단히 싫어한다. 하지만 "터키인들을 죽이는 것"은 전혀 핑계나 목적이 될 수 없다. 만약 저들이 조용히 떠나버린다면, 우리 전쟁은 끝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저들을 몰아내고자 시도할 것이다: 마지막 수단으로 우리는 "살인" 전쟁의 격언에 따라서(on the maxim of "murder" war) 필사적인 유혈의 코스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또한 우리 쪽에게는 가능한 한 적은 비용을 들이는 방향으로 실시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아랍인들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고, 자유란 단지 살아있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의 개인 임무는 지휘였고, 나는 지휘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분석하기 시작했는데, 전략 - 그리고 전쟁의 목표, 전체의 기준을 통하여 모든 것을 살펴보는 개괄적인 측면 - 의 관점과 전술 - 즉 전략적 목표로 향하는 수단들, 전략이라는 전체계단(staircase)의 각각의 계단들(steps) - 의 관점에서 모두 살펴보았다. 각각에서 나는 동일한 요소들, 즉 산술적 요소(algebraical), 생물학적 요소(biological), 심리적 요소(psychological)의 세가지가 존재함을 발견하였다. 첫번째 요소는 순수 과학의 영역으로 보이는데, 인문학적 내용이 없는 수학의 법칙에 좌우된다. 이것은 알려진 변수들을 다루며, 고정된 조건 및 시공간, 언덕이나 기후, 철도등과 같은 무생물 요소들, 그리고 개개인의 특성을 따지기에는 너무 대규모인 집단으로서의 정형화된 인간들 등에 관하여 각종 인공적인 수단들 및 그리고 기계적인 발명들을 이용한 우리들의 지성의 확장을 이용하여 다룬다. 이건 실질적으로 공식화가 가능하다.

 

 아랍 사례에서 살펴보면, 산술적 요소는 우선 우리가 정복하고자 하는 영역의 넓이를 고려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먼저 평방마일 단위로 얼마나 되는지 천천히 계산하기 시작했다... 대략 14만 평방마일 정도... 그리고 터키인들이 어떻게 이걸 다 방어할 것인가... 만약 우리가 깃발을 휘날리며 공격하는 군대라면, 의심할 바도 없이 참호선으로 지킬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어떤 영향력(influence)이나 어떤 사상이거나, 어떤 공격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앞이나 뒤도 없는 마치 공기처럼 떠돌아다니는 존재라면? 군대들은 마치 식물과 같아서 전체적으로는 움직일 수가 없으며, 단단한 뿌리로부터 긴 줄기를 따라 꼭대기까지 양분을 공급받았다. 우리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는 마치 증기(vapour)와 같을 것이다. 우리의 왕국은 각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며,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물질적인 것은 전혀 바라지 않기 때문에, 아마 살해에 전혀 큰 가치를 두지 않았는지도 모른다(so perhaps we offered nothing material to the killing). 정규 병사는 공격목표(target)가 없으면 난감해할(helpless) 것이다. 그는 그가 앉아있는 땅과 가지고 있는 소총으로 찔러볼 수 있는 범위까지의 땅을 소유할 것이다.

 

 이번에는 저들이 이 공격을, 즉 이 수십만 평방마일의 영역 중에서 지켜지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벌어질 폭동을 종심깊게 저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초소를 준비해야 하는 지를 추산하였다. 나는 터키군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고, 또한 최근의 대포와 항공기, 무장열차 등으로 그 능력을 확장했다는 것까지 고려하더라도, 최소한 4 평방마일 당 1개씩의 요새화된 초소는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또한 각 초소에는 최소한 20명은 있어야 할 것이었다. 결국 터키인들은 지역 아랍인들의 통합적인 악의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적어도 60만명의 병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터키인들에게 가용한 병력은 10만명이다. 지휘의 이러한 부분의 자산(the assets in this part of command)은 우리 것으로 보이며, 기후, 철도, 사막, 기술무기 등등 또한 우리가 이들 원재료들(raw materials)을 잘 이해하고 이에 적응한다면 우리 쪽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터키인들은 어리석었으며, 이 반란도 전쟁과 마찬가지로 절대적(absolute)이었다고 믿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를 절대전(absolute war)과 마찬가지로 다룰 것이다. 어쨌든 이는 사실상 말도 안되는 것이며, 반란에 대하여 전쟁을 벌이는 것은 성가시고 느린 것이다. 이는 마치 나이프로 수프를 떠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가 수학적 요소들, 즉 본인이 다른사람들에게 소위 헤카스틱스(hecastics; 사전에는 없는 단어로, 지리/기후/철도 등의 요소를 지칭하기 위해 로렌스가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인 듯 함. 역주)라고 소개하는 부분이었다. 두번째 요소는 생물학적인 요소이며, 무너지는 시점(breaking-point), 삶과 죽음(life and death), 또는 더 좋은 표현으로 마모와 파괴(wear and tear)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이오노믹스(bionomics)라는 명칭이 어울릴 것이다. 전쟁 철학자(war-philosophers)들은 이를 예술로 간주하였으며, 그 안의 한 요소인 "피의 분출(effusion of blood)"을 일종의 원칙(principle)의 높이에 올려놓았다. 이는 전투에서의 휴머니티(humanity in battle)가 되었으며, 이는 우리의 육신적 요소(corporal being)의 모든 측면과 전쟁 그 자체를 어루만지는 예술이다. 이들 추산 전부에는 한가지 변동가능요소(사람)(a line of variability (man))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 구성체들은 민감하고 비논리적이며, 장군들은 이 부분을 대비하기 위하여 예비대(reserve)라는, 이 예술에 있어서의 중요한 매개체를 사용한다. 골츠(Goltz)는 만약 당신이 적의 전투력을 잘 알고 있고 또한 적이 전병력을 모두 전개한 뒤라면, 더 이상 예비대를 유지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절대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항상 우연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 재료에 어떤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존재하며, 이는 항상 장군들의 염두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를 대비하기 위해 예비대가 유지된다. 병력(troops)에 있어서도 "느껴지는(felt)" 요소, 즉 숫자로 표현 불가능한 요소가 존재하는데, 요컨대 플라톤이 δοξα (doxa (opinion); empirical knowledge of everyday facts and events, or of philosophical reality.역주[2])라고 불렀던 것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지휘관은 스스로의 직관이 거의 대부분 적중하는 자이다. 전술의 90퍼센트는 자명하며, 책을 통해서 교육된다: 하지만 비합리성을 갖는 나머지 10퍼센트는 마치 물총새(kingfisher)가 웅덩이 위를 번쩍이며 지나가는 것과 같으며, 이것이야말로 장군들에 대한 테스트가 된다. 이는 단지 본능에 의해서만 확보할 수 있으며, 위기시에는 이것이 마치 조건반사처럼 자연스럽게 나오게 될 정도로 상황들을 자주 연습하는 판단력을 통하여(by thought practising the stroke so often that at crisis it is as natural as a reflex) 예리해 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예술을 휴머니티로 한정시키는 것은 내게 있어 지나치게 편협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유기체(organism)만큼이나 물자(materials)에 대해서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터키군에 있어서 물자는 드물고 귀한 반면, 인간은 장비에 비해 풍족하다. 따라서 우리는 군대(Army)가 아닌 물자를 파괴해야만 한다. 터키인들의 교량이나 철도, 기계나 대포, 혹은 폭약 등을 하나 파괴하는 것은 터키인 한 명을 죽이는 것보다 우리에게 훨씬 이득이다. 현 시점에서의 아랍 군대의 경우, 인력과 물자 측면에서 각각 똑같이 까다롭다: 인력에 있어서 이들은 비정규군이라 부대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작동하기 때문에, 이들 개개인의 인명손실은 마치 물에 던져진 조약돌과 같이 작용한다: 각각은 단지 조그마한 구멍을 잠깐 만들 뿐이지만, 슬픔이라는 파문이 그 주변으로 확산된다. 우리로서는 인명손실을 감당할 수가 없다. 물자는 차라리 다루기 용이하며, 또한 단순하다. 우리가 어느 특정 부문에 있어서는 반드시 우세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은 명백했다. 면화약(gun-cotton)이라던가, 기관총이라던가, 뭔가 매우 결정적인 것이 필요했다. 포쉬는 격언을 제시했고, 이를 인력에 대해 적용하였으며, 인력이 공격의 결정적 지점과 시점에 우세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물자에 대해 적용해야 하며, 장비에 있어서 한 주된 순간 내지 측면에 있어서 우세하여야 한다.

 

 인력과 물자 양측 모두에 있어서 우리는 포쉬의 독트린(doctrine)에 반대로 꼬아본 측면(a negative twisted side)을 부여해 볼 수도 있는데, 즉 싸구려라는 측면에서(for cheapness' sake), 1가지 지점 혹은 사안 외에는(except in one point or matter) 모든 곳에서 적보다 약하게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대부분의 전쟁은 접촉의 전쟁(wars of contact)이며, 양측 군대는 전술적 기습을 피할 목적으로 접촉을 유지하려 애쓴다. 우리의 전쟁은 이탈의 전쟁(war of detachment)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적을 알 수 없는 광활한 사막이라는 조용한 위협 속에 붙잡아 두어야 하며, 공격 시점까지는 우리 스스로를 폭로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공격은 단지 명목상이기만 하면 충분하며, 적의 인력에 지향되는 것이 아니라 적의 물자에 지향된다: 따라서 적의 강점 혹은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가장 접근하기 쉬운 물자(most accessible material)를 공격한다. 철도 단절(railway cutting)로 살펴보면, 이는 보통 텅 빈 철로가 될 것이다. 이것은 전술적인 성공이었다. 우리는 이 보통을 규칙으로 만들고(turned the average into a rule) (단, 법칙(law)은 아니다. 콜린(Colin)이 말한 바대로, 전쟁은 법칙을 거부한다(war is antinomian)), 결국에는 적과는 절대로 교전하지 않는다는 무의식적인 습관을 기르게 되었다. 이것은 적병에게 절대로 타겟을 제공하지 말라는 산술적인 요구(numerical plea)와도 일치한다. 우리 전선에 있는 많은 터키인들은 전쟁 내내 우리에게 총탄 한발 쏠 기회도 갖지 못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우리는 대단히 희귀한 경우를 제외하면 절대 수세에 몰린 적이 없었다. 이러한 규칙에서 나오는 공리(corollary)는 완벽한 "정보(intelligence)"이며, 이로써 우리는 완벽한 확신을 갖고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활동원(chief agent)은 장군의 머리여야 하며 (드 푸퀴에(de Feuquiere)가 이걸 최초로 말했다), 그의 지식은 오류가 없어야 하며, 우연의 여지를 남겨둬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내가 본 다른 모든 참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였다 (We took more pains in this service than any other staff I saw).

 

 지휘의 3번째 요소는 심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선전(propaganda)이 더럽고 저열한 역할을 차지하는 과학(크세노폰(Xenophon)은 이를 다이아세틱(diathetic)이라고 불렀다)이다. 이것은 일부 측면에 있어서 군중(crowd)과 관련이 있는데,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데 적합한 수준으로 정신을 조절하는 것, 특정 목표를 위하여 여론이 바뀌도록 사전작업을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의 일부는 또한 개인(individuals)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곧 인간의 친절함에 관한 희귀한 예술이 되며, 의도적인 감동을 통하여(by purposeful emotion) 우리 마음 속의 논리적 순서를 점진적으로 승화시킨다. 여기서는 우리편 사람들의 기분에 대하여(capacity for mood), 복잡성과 변덕(complexities and mutability)에 대하여, 그리고 의도하는 방향으로 유도해주는 주위환경(cultivation of what in them profits intention) 등에 대해서 고려하게 된다. 우리는 이들의 마음을 전투에 알맞게 정열하며, 이는 다른 장교들이 이들의 신체를 정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의깊고 격식있게 실시한다: 그리고 우리편 사람들의 마음이 우선이긴 하지만, 이것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적의 마음 또한 가능한 한 다루게 된다: 세번째로, 사선 뒤에 있는 우리들을 지지하는 국가의 마음과,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적국의 마음, 그리고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는 중립국들의 마음 역시 대상이 된다.

 

 이는 전쟁의 윤리학(the ethical in war)이었고, 또한 우리가 아랍 전선에서의 승리를 위해 주로 의존하였던 과정들이었다. 언론매체(printing press)야말로 현대 지휘관의 무기고에서 가장 훌륭한 무기인데, 지휘의 기술에 있어서 아마추어인 우리들은, 20세기라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 전쟁을 시작하였고, 또한 우리의 무기들을 사회적으로 서로 차별하지 않고 편견없이 생각하였다. 정규 장교의 경우, 그 뒤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이라는 40세대의 전통(tradition of forty generations of serving soldiers)을 갖고 있으므로, 그로서는 옛 무기들을 가장 존중하게 된다. 우리의 경우 우리편 사람들이 뭘 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쓴 일이 별로 없었고, 대신 이들이 뭘 생각하는지가 중요했으며, 우리에게는 그 다이아세틱이 거의 반 지시(half command) 이상이었다. 유럽에서는 이건 다소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어, 일반참모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진다.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물질적으로(physically) 대단히 취약했기 때문에, 비물질적인(metaphysical)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녹슬게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우리는 민간인들에게 우리의 자유라는 이념을 위해 죽도록(to die for our ideal of freedom)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속한 지방을 쟁취할 수가 있었다: 적이 이곳에 있느냐 없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추론에 따라, 메디나를 공격하거나 혹은 메디나가 빨리 항복하도록 굶기는 것 등은 우리에게 있어서 최상의 전략이 될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적이 메디나, 혹은 기타 다른 무해한 장소에 최대한 대규모로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식량이라는 요소는 궁극적으로 적들을 철도에 묶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아랍 세계의 나머지 99.9퍼센트의 지역을 우리에게 내어주고 있는 한, 이들이 헤자즈 철도, 트랜스-요르단 철도, 팔레스타인 다마스커스 알레포 철도를 전쟁 내내 갖고 있는 것은 오히려 환영이다. 만약 적들이 특정 지역으로 병력을 집중하여 이곳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병력을 모으려는 전단계로서, 너무 빨리 퇴각하려는 조짐을 보이게 되면, 우리는 적들의 확신을 회복시켜줘야 하되, 지나치게 가혹해서는 안되고(not harshly), 우리의 적대적 사업은 축소해야 한다(but by reducing our enterprises against him). 우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것은, 터키인들이 최대한의 손실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철도를 계속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나는 철도에 소량의 손실만을 가하였고, 이는 적들이 귀찮아할 정도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완전 파괴를 걱정하지는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후 웨즈(Wejh)로 귀환하여 내 상관들(chiefs)에게 아랍 전쟁은 지리적(geographical)이며, 또한 터키 군대는 우리에게 있어 우연히 만나면 해결할 대상이지 공격목표는 아니라고(for us an accident, not a target) 설명하였다. 우리의 목표는 그들의 가장 취약한 연계점을 찾는 것이며, 저들의 전체가 쓰러질 시기가 올 때까지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가장 쉽게 가용한 자원은 부족민들(tribemen)인데, 이들은 정규 전투(formal warfare)에는 전혀 익숙하지 못하며, 이들의 자산이라고 하면 기동력과 참을성, 개인적인 정보(individual intelligence), 지역에 대한 지식, 용기 등을 들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전선(front)을 최대한으로 확장시킴으로써, 터키인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최대기간 오랫동안 수동적 방어를 실시하도록 만들어야 한다(이는 물질적으로 가장 비싼 전쟁 형태이다). 전술적으로, 우리는 반드시 대단히 기동성있고 잘 장비된 매우 작은 규모의 군대를 발전시켜야 하며, 이를 분산된 터키군 전선에 차례차례로 사용함으로써, 터키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초소들을 경제적 최소한도인 20명 이상으로 증강시키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이러한 타격부대의 힘은 단지 그 자체의 전투력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숫자와 면적간의 비율(ratio between number and area)은 전쟁의 성격을 결정지었으며, 터키인들보다 5배의 기동성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저들보다 1/5의 인원으로 대등한 상황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의 성공은 분명했으며, 공간과 숫자간의 비율만 안다면 연필과 종이로 즉각 증명할 수 있었다. 이 경쟁은 힘에 대한 것(physical)이 아니라 자원 측면(mineral)에 있었으며, 따라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실책이었다. 전투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라곤 적들이 쏴제낀 탄약 외엔 없었다. 우리의 승리는 전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국토를 차지하느냐에 달려있었다. 나폴레옹은 장군들이 전투를 하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고 말하였다(it was rare to find generals willing to fight battles). 이 전쟁에서의 저주는 그 외의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사람들이 전쟁이 살인 면허(licence to murder)를 제공해줬다는 사실을 거의 잊어먹었을 때, 18세기의 과도한 책략(excessive finesse)에 대한 성난 반발로써 말한 것이다. 우리는 거의 백여년간 이 격언에 매달려왔고, 이제 약간 뒤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었다. 전투는 스스로를 약체라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부담이며, (퇴각할) 지상 공간이 부족하거나, 혹은 병사들의 생명보다도 귀중한 어떤 물질적인 자산을 방어할 필요가 있는 경우 등에만 어쩔 수 없이 실시하게 된다. 우리 군대의 고가치 요소는 베두인 비정규군들이며, 정규군이 아니다. 정규군은 비정규군들이 먼저 확보한 장소들을 점령하는 역할 외에는 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카드는 속도와 시간이지, 타격력이 아니다. 이러한 카드들은 우리에게 전술적 힘보다는 전략적 힘을 제공한다. 거리(range)는 힘(force)보다 훨씬 더 전략에 기여한다. 캔 가공육(bully-beef; 스팸 등과 같이 깡통에 든 가공육. 역주)의 발명은 화약의 발명보다도 지상전의 양상에 더욱 심오한 영향을 끼쳐왔다.

 

 나의 상관들은 이러한 설명들을 제대로 모두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내 방식대로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우리는 먼저 아카바(Akaba)로 향했고, 이곳을 쉽게 점령했다. 이후 우리는 타필레(Tafileh)와 사해(Dead Sea)를 점령했다: 이어 아즈락(Azrak)과 데라(Deraa), 마지막으로 다마스커스(Damascus)를 점령했는데, 이들 모두 병상에서 만든 이론들에 근거하여 의식적으로 수행된 것들이었다. 순서는 부족들간의 연줄을 형성한 뒤에, 우리의 해상 기지들(옌보(Yenbo), 웨즈(Wejh), 아카바(Akaba) 등)로부터 전진 작전기지까지의 안전하고 편안한 통로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종종 300마일 길이를 갖는 경우도 있었으며, 철도나 도로가 없는 긴 거리였다. 하지만 이는 사막의 힘을 면밀하게 활용함으로써 짧아졌는데, 메카에서 알레포, 바그다드에 이르는 모든 아라비아의 중심지들 사이를 채우고 있는 황량하고 측지되지 않은 황야의 낙타부대(camel parties)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

 

 이들 작전들은 그 성격상 일반적인 지상 작전들보다는 해군 작전에 가까웠는데, 이들의 기동성이나, 편재성(ubiquity), 기지와 병참선으로부터의 독립성, 저명한 지형지물의 부재, 전략적 지역의 부재, 고정 방향 혹은 고정 지점의 부재 등을 들 수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는 엄청난 자유를 가지며, 그가 원하는 만큼 전쟁에서 많이 혹은 적게 참가할 수 있다": 사막을 지배하는 자도 동일한 행운을 갖는다. 낙타 습격부대는 배와 마찬가지로 독립적(self-contained)이며, 아무 위험 없이 적의 지상 변경지대 어느 곳으로든 순항해 갈 수 있으며, 적의 병참선에서 가장 적합하거나 가장 쉽거나 혹은 가장 수지맞은 곳을 골라 빨아먹거나 습격을 가할 수(tap or raid into) 있고, 터키인들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으로 항상 확실하게 퇴각이 가능하다. 우리는 시리아의 사막 전선에 관한 면밀한 지식을 통하여 이동의 자유라는 강점으로 무장되어 있다. 한편 시리아는 역사적으로 특이하게 동쪽으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한 고장이다. 나는 전쟁 전에 여러 차례 도보로 이곳 대부분을 횡단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살라딘(Saladin)이나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의 이동을 연구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의 전쟁 경험이 깊어지면서 이러한 형태의 지리적인 직관에 능숙해졌는데, 이는 부르셰(Bourcet)가 두뇌 지도(mental map)에서 미지의 땅을 기지의 땅과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묘사했던 바와 같다.

 

 우리 전술은 항상 건드리고 빠지기(tip and run)이었으며, 밀어붙이는 정도는 아니지만 타격하는 것(not pushes, but strokes)이었다. 우리는 절대로 잇점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퇴각하여 어딘가 다른 곳을 재차 타격하였다. 우리는 최소한의 병력을, 최소한의 시간으로, 가장 먼 곳에 사용하였다. 만약 적이 저항할 마음을 먹게 될 정도로 작전이 길어지게 된다면, 이는 우리가 적에게 공격대상을 주지 않는다는 우리의 근본적인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필요한 속도와 거리는 사막 사람들의 극단적인 검소함과, 이들이 암낙타(she-riding-camels) 위에 탑승했을 때의 높은 효율성에 의해 얻어졌다. 낙타는 난해한 동물이며, 다루는 데에 있어서 능숙한 솜씨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가치는 대단하다. 우리는 보급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각자 인원들은 독립적이며 습격작전이 시작되는 해안 기지에서부터 안장에 올라 6주간의 스스로를 위한 음식을 소지한 채 움직인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 6주간의 식량이란 밀가루 반자루 정도로, 무게로는 45파운드에 해당한다. 좀 더 사치스러운 입맛을 가진 이들의 경우에는 변화를 위해 약간의 쌀을 더 가져간다. 각자는 스스로의 빵을 굽는데, 스스로의 밀가루를 반죽하여 부풀리지 않은 케익을 만들고, 모닥불 재 안에 넣어 데운다. 우리는 각자 1파인트 가량의 음료수를 가져갔는데, 이는 낙타들이 평균 3일에 한번씩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또한 그 이상 가져가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 일부는 우물 사이를 오가는 사이에 단 한번도 물을 마시지 않는 이도 있었지만, 이들은 단지 상당히 강인한 사람인 경우였다: 우리 대부분은 매 우물에 도착할 때마다 물을 많이 마셨으며, 중간의 물 없는 기간에도 물을 마셨다. 여름 더위 속에서 아라비아 낙타들은 한번 물마실 때마다 250마일 가량을 무리없이 버틸 수 있었다: 이는 대략 3일간의 부지런한 행군에 해당되었다. 이 고장은 흔히 묘사되는 것만큼 건조하지는 않으며, 이 정도 반경이면 항상 우리가 원하는 정도를 충족시켜줄 수 있었다. 우물들이 100마일 이상 벌어져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50마일 정도는 하루에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급속행군인 경우에는 하루에 110마일까지도 갈 수 있었다.

 

 6주 분량의 식량은 우리가 1000마일 가량을 왕복할 수 있는 분량이며, 이는 (물 1파인트와 마찬가지로) 아라비아와 같은 큰 지역에서도 우리에게는 항상 충분한 양 이상이었다. 식량 재보급 없이도 1개월간 1500마일을 타고가는 것도 가능한(낙타 초보자인 나로서는 "고통스러운"이란 표현이 적당하지만) 일이었으며, 또한 기아에 대한 걱정도 전혀 없었는데, 이는 우리 각자가 200파운드 짜리 잠재적 식재료 위에 올라타고 있었기에, 만약 정말로 식량이 부족해지면 우리가 타고 있는 낙타 중에서 가장 허약한 놈을 잡아먹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진이 빠진 낙타는 음식으로써 그리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통통한 놈을 죽이는 것보다는 값싼 것이었다. 우리는 수중에 좋은 낙타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장차 효율성이 결정된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했다. 낙타들은 우리의 행군 과정에서 풀을 뜯는 것(grazing)으로 연명했고 (우리는 이들에게 절대로 곡물이나 마초를 제공하지 않았다), 6주간의 행군이 끝나게 되면 통상 빼빼 말라버리기 때문에, 방목지로 돌려보내어 몇달간 휴식하게 해 줘야 했다. 그 동안에는 우리는 다른 부족을 대신 불러쓰거나, 혹은 새로운 싱싱한 탈 동물을 찾아야 했다.

 

 우리는 끌려오는 낙타(led-camels)를 통해 우리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탄약 100여발과 소총 1정을 휴대하거나, 혹은 2사람이 "자동화기" 팀이 되어 총과 드럼탄창을 나눠 휴대하였다. 이들은 승마용 망토(riding cloak) 속에서 언제나처럼 수면을 취했고, 1917-1918년 겨울이 올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당시 우리는 사해 뒤에 있는 4500피트 높이의 에돔(Edom) 산지에 갖혀있었다. 당시 우리의 수많은 사람들과 낙타가 동사하거나 눈 속에 갖혀버렸는데, 눈이 몇 주에 걸쳐 고원지대 전역에 쌓여있었다. 당시 우리는 이집트에 텐트와 장화와 담요를 달라고 요청했었다. 돌아온 대답은 아라비아는 열대 지방이라는 것이었다!

 

 습격부대의 장비는 단순성을 목표로 했으며, 그럼에도 가장 강력한 터키군에 대해서도 기술적인 우위를 갖도록 지향하였다. 우리는 대량의 경기관총을 휴대했는데, 이는 기관총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동소총이나 저격총으로써 사용하였고, 또한 인원들에게는 의도적으로 그 매카니즘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이로써 이걸 고치려고 하느라 행동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막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총에 기능고장(jammed)이 발생하면, 사수는 그 총을 버리고 대신 소총으로 사격해야 했다. 우리는 고폭탄의 또다른 특별한 특성을 활용하였는데, 반란에 참가한 거의 모든 이는 폭파작업에 대해 대략적인 경험(rule of thumb experience)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사격 속에서 신속하게 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특별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수개월간의 연습 끝에 고안하였으며, 어떠한 양의 길이나 교량이라도 경제적이고 안전하게 다룰 수가 있었다.

 

 몇몇 경우, 우리는 부족병력에 의한 습격에 영국인이 탑승한 장갑차(armoured car)를 투입하여 강화하기도 하였다. 장갑차는 일단 적절한 도로만 찾을 수 있다면 낙타부대를 따라다닐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루기 힘들고 단거리였는데, 이는 석유를 갖고다니는 데 따른 어려움 탓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기지에서 1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는 거의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행군 당시, 기지에서 400마일 정도 지점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걸 석유를 운반하는 낙타 수송대를 통해 정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후 공군의 도움으로 핸들리 페이지(Handley-Page) 항공기를 통해 추가 보급품을 제공할 수가 있었다. 자동차는 굉장한 전투기계이며, 제 상태로 작전에 투입된다면 언제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동간 사격"이라는 주원칙에 부합하지만, 자동차와 낙타군단의 전술적 투입조건은 매우 다르기 때문에, 나는 대단히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들을 함께 작전시키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우리는 장갑기병과 비장갑의 기병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서로의 사기를 모두 저하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습격부대의 분포는 정규적이지 않았다(unorthodox). 부족들을 섞거나 연합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이는 이들이 서로를 싫어하거나 불신하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한 부족의 사람을 다른 부족의 영역 내에서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결과 우리는 동시에 최대 숫자의 습격을 이루기 위하여 최대한 넓은 병력 분포를 추구하게 되었으며, 또한 한지역을 월요일에, 다른 지역을 화요일에, 또다른 지역을 수요일에 사용하는 식으로 이들의 통상적인 속도에 더하여 유동성을 추가하였다. 이는 저들의 천연의 기동성을 훨씬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는 추격에 있어 값을 따질 수 없는 이점을 주었는데, 부대가 매 새로운 부족 지역으로 갈 때마다 새로운 병력으로 탈바꿈하게 되므로 우리는 항상 싱싱한 에너지를 갖는 상태가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의 불규칙이야말로 정말로 우리에게는 평형상태였다(Maximum disorder was in a real sense our equilibrium).

 

 습격부대 내부의 경제 또한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우리는 최대한의 분절성을 추구했다. 우리는 부족간 경쟁 없이 공통의 이상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러한 동기를 강화하기 위한 단체정신(esprit de corps)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은 큰 봉급이나 금전적 보상, 유니폼 혹은 정치적 특권등을 받는 대가로 병사 계층이 되었다: 혹은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료들로부터 경멸 등으로 단절되어 방랑자(outcast)가 됨으로써 병사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줄 수가 없었는데, 이는 우리 부족민들이 설득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자발적으로 참가한 군대가 많이 존재해 왔다: 하지만 우리의 전쟁처럼 긴 전쟁이 갖는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자발적으로 복무한 군대는 그리 많지 않다. 아랍인 누구라도 설득이 실패하면 언제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들의 유일한 계약은 명예(honour)였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규율(discipline), 즉 제약적이고, 개체에 스며들며, 사람들간의 최소 공통분모가 되는 측면에서의 규율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시 정규 군대에서의 규율은 존재하는 모든이가 가질 수 있는 에너지의 한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평균을 위한 추구가 아니라, 절대값의, 100퍼센트 표준을 위한 추구가 되며, 여기서는 99명의 강한 사람이 가장 약한 사람의 수준으로 하항평준화하게 된다. 목적은 부대를 단위로 만들고, 사람을 정형화하며, 이로써 이들의 노력이 계산 가능하게 하여 이들의 집단적 결과물이 적든 크든 간에 동일하게 나오도록 하는 데에 있다. 규율이 강화될 수록 개인별 효율성은 감소하지만, 결과값 예측은 더욱 확실해진다.  이것은 불확실성 요소, 즉 병사들의 휴머니티 내에 존재하는 바이오노믹 요소를 감소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능력을 희생하는 것으로써, 이는 복합전쟁 혹은 사회전쟁(compound or social war)을 수반하며, 이것은 전쟁터에 있는 사람이, 이들을 유지시켜주는 공장에서 보급부대까지의 긴 계급체계(hierarchy)의 복합적 노력들의 결과물이 되도록 하는 형태를 띄게 된다.

 

 아랍 전쟁은 단순하고 개인적이다. 모든 등록인원들은 전선에서 근무하며, 각자 독립적(self-contained)이다. 우리에게는 병참선도 없고 노무부대도 없다. 각개 인원의 효율은 각자 개인의 효율과 동일하다. 우리의 전쟁 조건에서는 각 개인들이 내는 성과의 합이 전체 시스템 전체가 내는 결과와 적어도 동일하다고 보며, 이는 지휘장교측에 탄력성과 이해력만 있다면 부족적 생활이나 방식에 적용시키기가 확실히 더 쉽다. 다행스럽게도 우연히 거의 모든 젊은 영국인들에게 일종의 괴짜기질의 뿌리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히 잘 해낼 수가 있었다. 물론 우리는 대단히 소수의 영국인들을 전장에 사용하였으며, 이는 아랍 병력의 1000분의 1 이상을 넘지 않았다. 더 많은 비율이였다면 아마도 마찰이 빚어졌을 것인데, 이는 이들이 굴(oyster) 속의 이물질(혹은 좋게 말해서 진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영향력과 조언, 우수한 지식으로 통제하였고, 외부 권위를 가지고 통제하지는 않았다.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전투시에(in the firing line)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단순한" 시스템으로 다룰 수 있는 인원 이상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릴레이 식으로 활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공격 소요시간이 너무 오래걸릴(too extended) 것이다. 각자 인원은 자유로운 작업공간을 필요로 했다. 비정규전에서 2명이 합쳐칠 경우, 한명은 낭비되게 된다. 고립된 활동에 따른 도덕적 긴장감(moral strain)은 이 단순한 형태의 전쟁을 각개 병사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힘들게(very exacting) 만들며, 각개 병사로 하여금 특별한 자발성과 인내, 열의를 요구하게 된다. 우리에게 이상적인 것은 작전을 일련의 별도 전투들(series of single combat)로 만드는 것이다. 맘루크(Mamelukes)들을 프랑스 병사들에 비교하여 본 나폴레옹의 함축적인 평가가 내게 처음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아르당 두 픽(Ardant du Picq)은 그 활용범위를 확대시켰다: 역사가들의 편견들이 보통 그들의 역사들의 가장 풍부한 부분(richest part)이다. 우리의 가치는 전적으로 우리의 질에 달려있지, 양에 달려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침착을 유지해야 했는데, 유혈의 흥분(excitement of blood-lust)은 우리 전투원들의 과학력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며, 우리의 승리는 바로 우리의 속도, 은밀성, 사격 정확성에 달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정규 전쟁은 총검돌격에 비하여 훨씬 지능적(intellectual)인 것이다.

 

 우리 병력들의 문맹문제는 전혀 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소규모 인원으로 활동하였고, 또한 모든 인원들에게 구두로 계획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문맹이라는 점은 오히려 이들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뉴스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듣게 하는 버릇을 길러주었다. 또한 우리의 전술도 지나치게 미묘한 것이 아니라서, 우리 추종자들이 머리를 통하여 별도의 활동들을 하나하나 해석할 필요가 없었으며, 또한 우리의 기본개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실행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도덕적 혹은 물질적 사건들에 대하여 우리 대부분이 각자의 판단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성공이란 기대할 수 없었다. 최하 단계의 해석자에게 전술적 능력을 넘겨주는 희석행위는 유감스러운 것긴 했지만, 나쁜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일한 대안은 독립적인 사업(enterprise)이고, 평범하고 끈질긴 디자인으로, 일련의 훌륭한 임시방편들보다는 멋있으며, 언젠가는 이들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알렌비 장군이 팔레스타인에서 강력한 타격으로 적의 주력을 가망없는 혼란으로 몰고가고 터키 전쟁에 즉각적인 종결을 가져다 주었을 당시, 우리는 그동안 엄격하게 전력 범위 내에서만 활동하고 우리 이론들의 정신에만 부합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이러한 주의깊은 끈질김이 터키인들을 무력하게 만든 상태였고 완전한 승리가 거의 눈앞에 다가온 상태였다. 우리는 그동안이 고생이 모두 완료되어 매우 기뻤으나,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지나치게 위대한 분(his too-greatness; 알렌비 장군을 말하는 듯 함, 역주)께서 전쟁을 전투 없이도 끝낼 수 있다는 삭스의 명제(dictum of Saxe)를 끝까지 따를 기회를 박탈하였다는 개인적인 유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간막극 중의 간막극(side-show of a side-show) - 이는 이 이론을 증명 혹은 반증할 수 있는 기회였다 - 이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나같은 아웃사이더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겠다. 내게는 삭스가 자기 방식의 전쟁에 있어서는 최고의 장인이었다고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의 방식대로 2년간 일해왔고, 그 일은 중단되었다는 것이 전부다. 이건 전적으로 비웃기엔 곤란한 실용적인 이야기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전역에는 실행자 못지않게 역사가도 부족했다. 이제 나는 우리가 했던 일들을 서술하려하니, 이런, 우리 원칙들 중에서 일부는 뻔한 것(truism)(인류는 오히려 궤변(sophism)을 더 믿을 것이다)처럼 보이고 일부는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오류는 분명 내 설명에 있거나 내 관찰에 있을 것이다. 야만적인 전쟁은 이제껏 야만의 사각에서 영어로 펼쳐진 바가 없었던 듯 하며, 아랍 혁명의 경우 사상가로 하여금 그러한 가능성을 대규모로 시험해 볼 훌륭한 기회였다. 우리 전쟁은 대단히 기묘하고 또 대단히 멀리 있어서, 수줍은 당국(coy Authority) 측에서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우리에게는 기지설비(base machinery)도 없었고, 정식 참모도 없었고, 행정원도 없었고, 정부도 없었고, 전신도 없었고, 여론도 없었고, 영국 국적의 병력도 없었고, 명예도 없었고, 협약도 없었다. 이 실험은 스릴 넘치는 것으로, 우리들을 완전히 빠져들게 하였다. 우리는 비정규 전쟁 혹은 반란을 정확한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몇몇 요소들이 존재하고 우리가 특정한 노선을 따른다면 성공이 필연적이라고 믿었다. 전쟁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증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 논문은 있다: -

 

 반란에는 반드시 난공불락의 기지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이 기지는 단지 공격으로부터 지켜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공포로부터도 지켜져야 한다: 우리가 홍해 항구들에, 사막에, 혹은 우리의 교리를 따르도록 개종시킨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기지들처럼. 여기에는 세련된 외부의 적(alien enemy)이 있어야 하며, 이들은 면적의 교리(doctrine of acreage)를 충족시키기엔 너무 소수인 잘 규율된 점령군이어야 한다: 요새화된 초소들로부터 전체 영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숫자와 공간을 조절하기에는 너무 적은 숫자여야 한다. 또한 우호적인 주민들이 있어야 하는데, 적극적으로 우호적일 필요는 없으며, 단지 반란군의 움직임을 적에게 폭로하지 않을 정도 수준으로 호의적이면 된다. 반란은 타격부대에 참가하는 2퍼센트와 수동적으로 호의적인 98퍼센트면 수행할 수 있다. 소수의 적극적인 반군은 반드시 속도와 참을성, 편재성(ubiquity), 그리고 보급선에 대한 독립성이라는 품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들은 반드시 적의 조직화된 통신을 파괴 혹은 마비시킬 수 있는 기술적 장비들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비정규전쟁은 실로 윌리슨(Willisen)의 전략의 정의인, "통신에 관한 연구"의 극단적인 수준, 적이 없는 곳을 공격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50자로 요약하면: 기동성과 안전(적에게 공격목표를 제공하지 않는 것), 시간, 교리(모든 주민들을 우호적으로 만드는 사상)가 보장된 상황이라면 승리는 반란군측에게 있는데, 이는 산술적 요소가 결국에는 결정적이 되기 때문이며,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단과 정신을 완벽화하는 것은 매우 공허한 몸부림이다. (In fifty words: Granted mobility, security (in the form of denying targets to the enemy), time, and doctrine (the idea to convert every subject to friendliness), victory will rest with the insurgents, for the algebraical factors are in the end decisive, and against them perfections of means and spirit struggle quite in vain.)

 

 

 


* 아마존 서평 [3]

Editorial Reviews
Product Description

 This short (22 page) article by T.E. Lawrence (a.k.a. Lawrence of Arabia) was first published in the Army Quarterly in 1920. It is incredibly concise and well written. It contains all of the major analysis and conclusions of Seven Pillars of Wisdom (his book and most famous work) without the narrative of his war experiences. It is the "cliff notes" to Lawrence, written by Lawrence himself. It is essential reading for anyone with an interest in World War I, the Arab world, military history, unconventional, irregular, or guerrilla warfare.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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