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세계대전

[스크랩] [번역] Maori and First World War

박용수 2014. 10. 27. 14:35

< 원본 : (http://www.nzhistory.net.nz/war/maori-in-first-world-war/introduction) (Ministry for Culture and Heritage) >

 

  마오리족과 1차 세계대전 (1/7)

 

  대영 제국을 위해 싸운다는 것

 

  마오리족의 1차 세계 대전에 대한 견해는 다소 복잡하다. 일부는 전쟁 목적에 공감하고 함께 참여하고자 하였다. 다른 일부는 영국 왕실이 19세기에 마오리 사회에 끼친 해악에 대하여 상기하며, 영국을 위해 싸운다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한 다양한 반응은 19세기에 영국이 iwi(부족)들에 행한 것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오리 전투공병대대의 기)

 

  군사적으로 참가하려는 마오리족들이 할 수 있는 길은 비교적 적었다. 대영 제국의 정책은 초기에는 원주민들이 유럽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전투에 참가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전상자가 증가하고 증원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이러한 견해는 바뀔 수 밖에 없었다. 1915년 초에 원주민 분견대가 뉴질랜드를 출발했다. 이 부대는 갈리폴리에서는 전투 임무를 부여받았었고, 이후 서부 전선에서는 전투 공병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재편되었다.

 

  전쟁이 끝날때까지, 2227명의 마오리족과 458명의 기타 태평양 섬지역 사람들이 마오리 전투 공병대대(Maori Pioneer Battalion)에서 복무했다. 이 중에서 336명이 전사했고, 734명이 부상당했다. 물론 다른 대대에도 마오리족 복무자가 있었다(전사자도 있음).

 

  많은 마오리족은 전쟁에 기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1860년대에 영국 왕실에 대한 반란에 대한 처벌로 토지를 압류당한 씨족(iwi)들의 경우, 1917년 마오리족에 대한 징병제가 도입되었을 때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Te Puea Herangi와 같은 지도자들의 경우, 이 사람들을 부추기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징병 거부로 인하여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백인들의 전쟁? - 마오리족과 1차 세계대전 (2/7)

 

  백인들의 전쟁?

 

  대영 제국의 정책은 원주민들이 유럽인들과 동등하게 전쟁에서 싸우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나중에 이들이 돌아갔을 때 식민지 관리들에 대한 공격이 이뤄질 수도 있었고, 유럽 병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경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일령 사모아를 점령했을 때 마오리족 부대를 수비대로 보내자는 아이디어가 제안된 적이 있었는데, 뉴질랜드 행정관(Administrator)이었던 Robert Logan은 정부에 전보를 보내어, 이 행동은 사모아 원주민들에 대한 도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약 500명의 원주민 분견대는 사모아 수비대가 되는 대신, 1915년 2월 14일 Wellington을 떠나 이집트로 떠나게 된다.

 

(1915년 2월, 원주민 분견대원들이 배에 올라 출항을 기다리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초기 단계에서 '마오리족 분견대(Maori Contingent)'에 대한 언급이 여러 곳에서 관찰되곤 한다. 공식적인 명칭은 원주민 분견대(Native Contingent)였다. 1947년까지는 공식적인 문서에서 마오리족에 대하여 원주민(native)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이 상황이 바뀌게 된 것은 원주민 문제 장관(Minister of Native Affairs)을 겸임하고 있던 Peter Fraser 총리가  제안한 데에서 비롯된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 전투야말로 뉴질랜드인들 상당수가 마오리족을 단지 병사가 아닌 인간으로 보기 시작한 계기라고 주장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수십년간 마오리족과 비 마오리족간 럭비 경기가 있었다는 점에 더 주목한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스스로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갈리폴리와 프랑스 전선으로 가야 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복무할 것인가 말것인가?


  마오리족 국회의원 4명은 마오리족의 전쟁 참여가 옳다고 믿고 단합하였다. 북부 마오리족 국회의원인 Te Rangi Hiroa (일명 Peter Buck)은 솔선수범하여 지원 입대하였다. 그는 1915년 2월 최초 분견대와 함께 바다를 건넜다. 그는 넓은 의미에서의 애국심이야말로, 그가 마오리족 발전의 걸림돌로 믿어왔던 부족주의가 갖는 부정적인 면모를 혁파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동부 마오리족 국회의원인 Apirana Ngata는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야말로 마오리족이 Pakeha(유럽 혈통의 뉴질랜드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는 근거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갈리폴리의 원주민 분견대 - 마오리족과 1차 세계대전 (3/7)

 

  Te Hokowhitu a Tu (전쟁의 신의 72번째 전사)

 

  최초의 원주민 분견대는 웰링턴에서 1915년 2월 SS Warrimoo호에 탑승하였다. 이들의 모토는 'Te Hokowhitu a Tu(전쟁의 신의 72번째 전사)'였으며, 이것은 전쟁의 신인 Tu-mata-uenga의 140명의 전사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명칭은 동부 해안의 추장인 Wi Pere가 제안한 것이다. 분견대의 기장(crest)에는 2종의 마오리족 전통 무기인 taiaha와 tewhatewha가 왕관을 가로지르는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현역 복무를 위한 청원

 

  원주민 분견대 위원회 (The Native Contingent Commitee)는 분견대 병력을 모집하고 보충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위원회에는 4명의 마오리족 국회의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중에는 Apirana Ngata와 서부 마오리족의 Maui Pomare가 중심 인물이었다.

 

(1915년 12월 크리스마스에 New Zealand Observer에 실린 삽화. 마오리족 병사가 마오리족 유령을 뒤로 한 채 2명의 터키 병사에게 돌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마오리족 전쟁의 신 Tu-mata-uenga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선전으로서, 마오리족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이다.)

 

  위원회와 분견대의 구성원들은, 제국 정부가 마오리족이 유럽 군대에 무기 사용을 한다는 데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마오리족이 실제 전투에 참가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함께했다. 일부 뉴질랜드인들은, 마오리족에 대해서는 예외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방부 장관인 James Allen은 뉴질랜드 원정군 사령관인 Sir Alexander Godley 소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비록 이들이 유색인종이긴 하지만, 일단 도착만 하면 다른 보통 유색인종과는 다르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언급한다.

 

  Godley는 원주민 분견대가 말타 섬으로 가서 추가적인 훈련을 받고 수비대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그곳의 유럽인종 부대가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견대가 이집트에 도착하자, Te Rangi Hiroa (Peter Buck)은 다음과 같은 열정적인 청원을 하게 된다:

 

  "우리의 조상들은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전쟁터에서 우리들의 용기를 시험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단지 수비대 임무만을 수행하고 끝난다면,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갔을 때 우리들은 동족들을 볼 낯이 없습니다."

 

  Godley는 이에 감동하기는 했지만, 설득당하지는 않았다. 원주민 분견대는 말타로 가게 된다.

 

  심정 변화 : 갈리폴리

 

  갈리폴리 반도에서의 사상자의 증가와 절실한 증원 요청은 대영 제국으로 하여금 '원주민'의 전투 참여에 대한 정책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원주민 분견대는 1915년 6월 3일 Anzac Cove에 상륙한다. 여기서 이들은 뉴질랜드 기마 소총대(New Zealand Mounted Rifles)에 편입되어 주로 전투 공병으로서 임무수행을 하게 된다.

 

(Henare Wepiha Te Wainohu (1882–1920): 군목)

(그가 갈리폴리 상륙 직전에 한 연설은 유명하다 : '이 밤의 공격에서 마오리족 사람들의 마나(mana)와 명예와 명성이 여러분과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일부 마오리족의 경우 이미 처음부터 갈리폴리에 있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지방 보병 대대(provincial infantry battalion)에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Wellington 대대의 Thomas(Hami) Grace 소위였다.

 

  웰링턴 대학 졸업생으로서, Grace는 뛰어난 운동선수였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1911년에, 호주에서 1914년에 순회 경기를 한 뉴질랜드 마오리족 럭비팀 멤버였다. 또한 뛰어난 사격선수로서, 갈리폴리 전역에서 유능한 저격수로 활동한다. 그는 Wellington 대대가 요충지인 Chunuk Bair 고지를 탈취하는 과정에서 8월 8일 전사한다.

 

  Chunuk Bair에 대한 8월 초의 공세에서, 원주민 분견대원 중 17명이 전사하고 89명이 부상을 당했다. 원주민 분견대는 8월 말에는 60고지에 대한 공세에 참가했으며, 9월에 이르러서는 6월에 도착한 16명의 장교와 461명의 기타 병력들 중에서 60명만이 갈리폴리 반도에 남아있었다. 병상자와 부상자가 일부 귀환하기는 했지만, 1915년 12월에 분견대가 뉴질랜드 원정군의 잔여부대와 함께 반도를 빠져나갈 무렵에는 단지 2명의 장교와 132명의 기타 병력들만이 분견대에 남아있었다. 전역을 거치면서 50명의 마오리족이 목숨을 잃었다.

 

  Te Rangi Hiroa는 그의 일기에 기록하길, '갈리폴리에서 보여준 마오리족의 용기가 영국 군인들로 하여금 우리들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게 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무공 훈장 (Distinguished Service Order)를 수여받았고, 9명의 다른 분견대원들도 무공 훈장(military awards)을 수여받았다.

  

  전투 공병 (Pioneers)


  전투 공병은 전투 부대는 아니지만, 토목 임무에 특화되어 훈련/조직된 군사 노동 부대로서, 참호 굴착, 도로 건설, 철도 건설 기타 필요한 군수 업무를 수행한다. 이것은 종종 적의 화력 앞에서 이뤄지며, 중요하고 위험한 임무이기도 하다.

 

 

  전투공병 대대 - 마오리족과 1차 세계대전 (4/7)

 

  1915년 후반과 1916년 초에는 마오리족의 군사 복무에 대한 성격이 크게 바뀌게 된다. 원주민 분견대가 해체되고 오늘날 종종 마오리족 전투공병대대(Pioneer Maori Battalion)이라고도 불리우는 뉴질랜드 전투공병대대(New Zealand Pioneer Battalion)이 창설되게 되는 것이다.

 

  'Kua wehewehe matou' (우리는 흩어졌다)

 

  원주민 분견대는 갈리폴리에서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1915년 8월, Godley 장군이 3명의 장교를 체포하여 적전 투항에 대한 혐의로 기소함에 따라 또다시 충격을 받는다. 이 세 명은 오점 없는 기록에다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복무해온 사람들이었지만, 분견대 지휘관인 A.H.Herbert 소령과 불화를 겪고 있었다.

 

  Te Rangi Hiroa (Peter Buck)를 포함한 8명의 장교가 사문회로 소환되었다. 이들은 이 혐의가 전 마오리족의 명예에 대한 도전이라고 보았다. 기소된 사람 중의 한명인 Roger Dansey 대위의 경우, 총검 돌격을 이끌어 3명의 터키군을 직접 찔러죽이는 것이 목격된 적도 있었다. 장교들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Godley는 3명에 대해서 '만족스럽지 못한 임무 수행'을 사유로 하여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고, 분견대도 뉴질랜드 보병 여단의 다른 소대들로 분산시킬 것을 지시했다. 그는 이 결정이 다른 부대들을 보강하고 마오리족이 다른 고향 사람들과 함께 싸울 수 있도록 배려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으로서와 함께 원주민 분견대 위원회의 지도자로서, Ngata는 수많은 마오리족 병사들로부터 정체성 상실이라고 하는 불만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몇몇이 말한 것이 'Kua wehewehe matou'(우리는 흩어졌다)라는 것이다. 그는 상황이 개선되기

전까지는 동쪽 해안에서 절대로 추가 병력을 모집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뉴질랜드 전투공병대대

 

  1916년 2월, Godley는 뉴질랜드 원정군을 뉴질랜드 사단으로 재편성하였고, 마오리족 부대도 뉴질랜드 전투공병대대로 재조직하였다. 대대는 4개의 중대로 구성되었는데, 각 중대는 다시 2개의 마오리족 소대와 2개의 Pakeha(유럽계) 소대로 구성되었다. 이 Pakeha 소대들은 Otago 기마 소총대(Mounted Rifles)의 잔여 병력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다른 대대에 있는 마오리족 병사들은 뉴질랜드 전투공병대대로 올 것을 권유받았지만, 대부분은 현재 있는 부대에 남아있기를 선택했다.

 

  뉴질랜드 기마 소총 여단에서 상급 대위(staff captain)으로 복무했던 George King 소령이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Te Ranhi Hiroa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부대대장이 되었다. 두명 모두 함께 대대를 이끌어나가는 데에 결격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Otago 기마소총대 출신들이나 마오리족들이나 마찬가지로 이러한 재편성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Otago 출신들은 전투공병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특히 기분 나빠했다.

  

  'Te ope tuatahi'


  Apirana Ngata는 갈리폴리 전역에서의 원주민 분견대의 활약에 고무되고, 모병 대한 필요성을 자각하여 전통 음악인 waiata로 'Te ope tuatahi'라는 모병의 노래를 작곡했다. Paheha(유럽계) 사회에서의 경향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날수록 전상자를 보충할 장정들을 모집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많은 마오리족 사람들은 마오리족 부대가 단지 전투공병 이상의 임무를 수행하길 원했지만, 실상 마오리족에서의 인원 보충 숫자로는 보병 대대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이것은 James Cowan이 1926년에 쓴 '세계 대전에서의 마오리족들(The Maoris in the Great War)'에서 발췌한 'Te ope tuatahi' 이다. 첫번째 소절에 대해서는 Ranginui Walker가 쓴 'He Tipua: the life and times of Sir Apirana Ngata'에 다른 해석이 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첫번째 전투 부대를 환영하네
  Aotearoa로부터,
  Greenstone 섬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전사들을 노래하네
  우리의 용맹한 5백명이여
  화난 눈의 전쟁의 신 Tu-mata-uenga에게 선택받은 영웅들이여,
  몇몇은 이집트에서 산화했고
  몇몇은 갈리폴리에서 산화했지;
  날카로운 슬픔의 독이빨이여
  우리의 슬픈 심장을 꿰뚫는구나.

 

  해가 떠오르는 해안으로부터,
  우리의 두번째 분견대가 오고있다,
  Mahaki의 사람들,
  Tolago Bay의 사람들,
  Ngati-Porou의 전사들,
  잘 있거라, O Henare여
  누가 당신의 중대를 이끌었고,
  프랑스에서 고귀하게 싸우다 전쟁의 천둥 속에 쓰러졌는가!
  그리고 누가 그곳에서 살아남아
  마지막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의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전해주어
  검은 슬픔 속에서 고개숙이게 하였는가?

 

  우리의 9번째 전투 분견대가
  Te Arawa에서 오고있다,
  해가 떠오르는 해안으로부터,
  Kahungunu의 땅으로부터,
  이제 나는 떠난다
  프랑스의 붉은 전쟁터를 향하여
  그곳에서 나는 기억하리,
  내 심장은 인사말을 보내리
  저 먼 땅과 대양을 건너
  나의 영원한 사랑을 향하여.

 

 

   Henare Kohere

 

  'Te ope tuatahi'에서 언급되고 있는 Henare는 36세의 중위로서, 동부 해안 출신이며, 엄청난 마나(mana)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1916년 9월 15일, 솜 전선에서의 뉴질랜드군의 첫 공격에서, 전투공병 12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 중상자 중 한명이 Kohere였고, 그는 'Ka nui te kino'(일이 참 안풀리는군)이라는 말을 뒤따라온 사람들에게 한다. 그는 그의 사촌인 Pekama Kaa 중위가 Ngati Porou 소대를 지휘하도록 지시한다. 그는 다음날 사망했고, Heilly에 묻히게 된다.

 

  Kaa가 소대의 지휘를 맡았으나, 그도 1917년 8월에 전사하게 된다.

 


  징집에 대한 저항 - 마오리족과 1차 세계대전 (5/7)

 

  누구의 '왕과 국가'를 위한 것인가?

 

  모병의 노래인 'Te ope tuatahi'에서 Ngata는 Te Arawa와 동부 해안 부족들인 Te Aitanga-a-Mahaki, Te Aitanga-a-Hauiti, Ngati Porou, Ngati Kahungunu으로부터 그와 그의 동료들이 보충병을 모집하고 있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들은 왕실에 대한 충성을 약속한 부족들이다. 이 부족들의 부족 원로들은 애국적인 복무에 대한 이상과 선조들이 서명한 Waitangi 조약의 이행으로부터 기인한 시민으로서의 의무에 동감하고 있었다. 노래에서 이들을 언급하는 것으로써 이들을 명예롭게 함과 동시에,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부족에 대해서는 암묵적인 비난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왕과 국가'를 위하여 싸우자는 부름에 응하지 않은 마오리족은 크게 Taranaki, Ngati Maniapoto, Tainui–Waikato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1860년대 당시 영국 왕실에 대한 반란에 대한 징벌로써 그들의 토지가 압류당한 사건으로부터 기인한다. Waikato족의 지도자 Te Puea Herangi는 그녀의 할아버지인 Tawhiao 왕의 유언을 따르고 있었다. 왕이 영국 왕실과의 싸움을 마침내 중단한 1881년, 그는 Waikato족에게 두 번 다시 무기를 드는 것을 금지한다고 명한다:

 

  "들으시오, 들으시오, 저 위의 하늘이여, 저 밑의 땅이여, 그리고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여. 사람을 죽이는 일은 반드시 멈춰져야 하오. 대지의 파괴는 반드시 멈춰져야 하오. 나는 내 곤봉(patu)를 땅에 묻을 것이고, 이것은 두 번 다시 땅 위로 나오지 않을 것이오... Waikato족이여, 앉으시오. 지금부터 두 번 다시 피를 흘려서는 아니되오."

  

(1938년에 촬영된  Tainui–Waikato의 지도자 Te Kirihaehae Te Puea Herangi 의 사진)

 

  Te Puea와 Waikato족의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두 번다시 싸우면 안된다는 명령으로 간주했다. 또한, Te Puea는 Waikato족은 그들만의 왕이 있기 때문에 '영국의 왕'을 위해 싸우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 1860년대에 Waikato인들이 자신들의 왕을 위하여 싸우다가 빼앗긴 땅을 돌려준다는 조건이라면, Waikato인도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1917년, 마오리족 왕인 Te Rata는 마오리족의 전쟁 참여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마오리족의 전쟁 참가는 개개인의 선택이며, 어느 누구도 이를 강제해서는 안된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성향은 서부 마오리족의 국회의원이자 원주민 분견대 위원회의 의장인 Maui Pomare를 당혹스럽게 했는데, 이 부족(iwi)들이 그의 선거구에 해당되었기 때문이었다.

 

  1916년 2월의 세번째 원주민 분견대가 유럽을 향해 출발했을 때, 314명의 모집인원 중에서 단지 111명만이 마오리족이었다.

나머지 자원자들은 Niue, Rarotonga, the Gilbert and Ellice Islands에서 온 인원들이었다. Pomare는 마오리족의 자원 입대를 부추기기 위하여 전쟁의 신의 뜻이라는 것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1916년, 뉴질랜드의 증원 병력 보충을 보장하기 위하여 징병제가 도입되었다. 1916년의 군사 복무 법령(Military Service Act)는 처음에는 Pakeha(유럽계)에만 한정되어 적용되었다. Pomare는 이것이 마오리족에도 적용되기를 바랬다. 그의 바램은 1917년 6월, 원주민 분견대 위원회가 4주에 150명씩이던 증원 병력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게 됨에 따라, 징병제가 마오리족으로 확대 적용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징병제 문제는 마오리족의 전쟁 참가 반대 여론에 불을 붙였다.

 

  Waikato 족의 저항

 

  Waikato족이 마오리족 전쟁 참가 반대에 대한 중심에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징병제 역시도 Tainui–Waikato 출신의 마오리족에게만 적용되었다. 여기에는 다른 부족(iwi)들은 이미 그들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는 주장도 작용했다. Waikato족 지도자인 Te Puea Herangi는 Mangatawhiri에 재건한 Te Paina에 징집을 거부한 사람들을 불러모아 도와주었다. 그녀의 입장에 대해서 수많은 다른 마오리족들과 Pakeha들은 그녀가 독일 지지자라며 증오심을 나타냈다.

 

  1918년, 제비뽑기로 선발되었으나 훈련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Waikato 사람들은 체포되어 Auckland에 있는 Narrow Neck의 훈련소로 보내졌다. 군복을 입기를 거절한 자는 가혹한 군사 징벌을 당했으며, 여기에는 '식사 처벌(빵과 물만 먹이는 것)'과 최소한의 침구류만 제공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소수의 Tainui 징집병들만이 제복을 입었으며, 그나마 해외로 가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19년까지 552명의 마오리족 소집 인원 중에 단지 74명만이 훈련소로 갔다. Waikato족과 Ngati Maniapoto 사람들에 대한 징병제 실시는 이후 긴 앙금을 남겼으며, 이는 1995년의 Tainui 조약이 체결 되고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서부 전선에서 - 마오리족과 1차 세계대전 (6/7)

 

  서부 전선의 뉴질랜드 전투공병대대

 

  솜에서의 첫 발자국

 

  새로 편성된 뉴질랜드 전투공병대대는 1916년 4월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8월 말에는, 동 부대는 솜 전장으로 이동한 첫번째 뉴질랜드 부대가 되었다. 이 괴로운 전역은 1916년 7월 1일에 시작되어 가공할 피해를 영국군에 입히고 있었다.

 

(New Zealand High Commissioner in London인 Thomas Mackenzie와 Peter Buck(우측)이 프랑스 전선의 뉴질랜드 부대를 방문하고 있다.)

 

  뉴질랜드 부대의 잔여 병력의 도착을 준비하기 위해 선발대로 보내진 전투공병대는, '터키 도로(Turk Lane)'라고 불리는 전방까지 통하는 8km 길이의 통신 참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보병대의 몇 사람들은 이 참호를 걸작이라고 불렀지만, 이것의 대가는 참으로 컸다. 지속적이고 강력한 포병 화력 아래에서 전투 공병대는 곡괭이와 삽으로 9월 16일 한밤중에 임무를 완수했다. '어물 골목(Fish Alley)'라고 불린 또 하나의 교통호와 함께, 터키 도로는 전선에서 안전하게 병력이 들어가고 나올 수 있게 하는 2미터 깊이의 동맥이 되어 주었다.

 

  처형 부대


  참호 구축뿐만 아니라, 전투공병대는 여러 종류의 임무, 개중에는 별로 기분 좋지 못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1916년 8월 25일에는 전투공병대대의 일부 병력이 캔터베리 대대의 Frank Hughes 이병의 처형을 위한 사격 부대로서 동원되었다. Hughes는 탈주 및 복무 회피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처형당한 5명의 뉴질랜드인 중에서 첫번째였다.

  

  Messines

 

  1917년의 Messines 공세에서, 전투공병은 새로 점령한 Messines 능선과 전선을 통신 참호를 파서 연결하는 명령을 받았다. 다시 한번 전투공병대는 막대한 포탄 세례와 가스 세례를 받았다. 대대는 17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155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1917년 6월 7일~9일의 공세 직후, 벨기에의 메시네에서 뉴질랜드 전투공병대대 인원들이 도로를 부설하고 있다.)

 

  7월에는 전투공병대와 제 3 뉴질랜드 소총 여단이 프랑스 제 1군에 배속되어 진지 구축 및 전화선 구축을 도와주게 되었다. C.T.Richards와 Puia Tamihan의 두 공병은 프랑스로부터 무공훈장인 Croix de Guerre를 수여받았다. 전투공병은 프랑스의 농장 노동자들과도 일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농장 일을 통해 고향에서의 삶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사단장인 Sir Andrew Russell 소장은 대대를 다른 보병 대대와 똑같은 지위로 대우해 주었다. 그는 전투공병에 2개의 Distinguished Conduct Medals과 10개의 Military Medals을 상신한 바 있다. Godley 시절에는 5개 뿐이었다.

 

  1917년 8월까지, 대대의 모든 중대들을 완편할 수 있는 충분한 마오리족 병력이 증원되었다. 9월 1일부로 대대는 완전한 마오리족 부대 - 뉴질랜드 (마오리) 전투공병 대대 - 가 되었고, 최초의 뱃지도 복원되었다. King 중령은 캔터베리 연대 1대대로 전출되었는데, 그는 다음 달에 있었던 파샹달의 Bellevue Spur 공세에 참가하여 전사하고 만다.

 

(좌측: 원주민 분견대의 배지, 우측: 뉴질랜드 (마오리) 전투공병대대의 배지)

 

  Le Quesnoy와 그 너머

 

  전쟁 종료 1주일 전에 벌어진 프랑스 마을인 Le Quesnoy의 해방은 뉴질랜드 병력이 서부 전선에서 실시한 모든 전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일로 평가되고 있다.

 

(1918년 6월 30일, 내각 장관 Joseph Ward를 위하여 뉴질랜드 (마오리) 전투공병대대가 haka를 시연하고 있다.)

 

  1918년 11월 4일 뉴질랜드인들이 독일군으로부터 Le Quesnoy를 탈취했을 때, 마을 회당에 나부끼고 있던 영국 깃발(Union Jack)은 마오리족 어린이인 Otaki와 Levin에 의하여 봉헌되어 뉴질랜드 (마오리) 전투공병대대에 증정되었다.

 

  전투공병대는 라인 수비대에 배속되었고, 독일 국경선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12월 20일, 이들의 진격은 덩케르크로 향하라는 명령과 함께 멈춰졌고, 그곳에서 고향으로 가는 배에 탑승하게 되었다. 휴전 협상이 조인된 가운데, 영국 최고 사령부는 옛날 규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원주민 병력'은 독일을 점령하는 데에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전투공병은 이러한 태도에 분개했지만, 많은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기뻐했다. 1919년 3월, Westmoreland호를 타고 대대는 뉴질랜드로 향했다.

 

  뉴질랜드 (마오리) 전투공병대대는 뉴질랜드 원정군 중, 뉴질랜드로 완전한 부대로서 돌아온 유일한 대대였다. 따라서 전국에 걸쳐 열렬한 환영과 퍼레이드, 리셉션을 받게 되었다. 마오리 전투공병대 럭비팀은 전국을 순회하며 시합을 벌였다.

 

(이 사진은 1918년 마오리족 전투공병대대가 Putiki pa, Wanganui에 도착했을 때의 사진이다. 중앙에 Moutoa 깃발이 보인다. 이 깃발은 1865년, 1년 전 정착지를 위협했던 Pai Marire족 전사들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Wanganui족의 숙녀들이 Wanganui 부족에게 증정한 것이다. ) 


  추가 정보 - 마오리족과 1차 세계대전 (7/7)

 

  이 웹 문서(=마오리족과 1차 세계대전)는 Steve Watters와 Monty Soutar에 의해 저술되고, NZHistory.net.nz 팀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