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프린스턴 전투 1777 (The Battle of Princeton)

박용수 2014. 10. 27. 15:12

< 원문 출처 : The Battle of Princeton (http://www.britishbattles.com/battle-princeton.htm) >

< 사진 출처 :

 [1] 미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The Battle of Princeton 2-3 January (http://www.dean.usma.edu/history/web03/atlases/american%20revolution/ARGIFS/PrincetonBattle.gif)

 [2] 미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The Christmas Campaign 25 December 1776 - 6 January 1777 (http://www.dean.usma.edu/history/web03/atlases/american%20revolution/ARGIFS/ChristmasCampaign.gif)

※ 이 외 별도 설명이 없는 경우 원문 사이트의 사진임 >

 


 

프린스턴 전투 1777 (The Battle of Princeton)

 


전쟁 : 미국 독립전쟁

 

시기 : 1777년 1월 3일

 

(모후드 휘하의 영국 제 17 보병연대가 프린스턴에서 미군을 공격하는 모습 ) 

 

장소 :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Princeton in New Jersey)

 

교전자 : 미군 vs. 영국군

 

병력 규모 : 미군 7,000명 가량 vs. 영국군 및 독일군(Hessian) 8,000명 가량. 단 영국측에서 주로 교전에 참가한 병력은 1,200명 가량 뿐임.

 

(프린스턴 전투도)

 

승자 : 미군이 기동 측면에서 영국군을 따돌리고 콘월리스(Cornwallis)의 포위기동을 탈출함. 단, 영국군은 모후드(Mawhood) 휘하의 제 17, 55 보병 연대가 이번 전투의 영웅으로 볼 수 있음.

 

참가 영국 연대:
실제 교전에 참가한 연대들만을 들면 다음과 같다.
제 16 경-용기병대, 이후의 제 16, 제 5 여왕 폐하 왕실 창기병대, 오늘날의 여왕 폐하 왕실 창기병대 (16th light dragoons, later the 16th/5th Queen's Royal Lancers and now the Queen's Royal Lancers)
제 17 보병연대, 이후의 왕실 레이체스터셔 연대, 오늘날의 왕실 앵글리안 연대 (17th Foot, later the Royal Leicestershire Regiment and now the Royal Anglian Regiment)
제 40 보병연대, 이후의 사우스 랭커셔 연대, 오늘날의 여왕 폐하 랭커셔 연대 (40th Foot, the South Lancashire Regiment and now the Queen's Lancashire Regiment)
제 55 보병연대, 이후의 변경 연대, 오늘날의 국왕 폐하 직속 왕실 변경 연대 (55th Foot, later the Border Regiment and now the King's Own Royal Border Regiment)

 

(영국 제 17 보병연대)


 

전말:
 1776년 12월 26일 트렌톤에서 랄 대령 휘하의 독일인들을 기습 공격한 뒤, 워싱턴 장군은 휘하 병력을 델라웨어강 서쪽 제방으로 퇴각시켰다. 그는 며칠 내로 돌아와 영국군의 손아귀로부터 뉴 저지를 되찾으려는 생각이었다. 한편, 트렌톤에서의 성공에 대한 소식을 들은 캐드월라더(Cadwalader) 준장은 도하하여 강 동쪽 제방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미 그곳에는 아무 아군도 없었다.

 

 1776년 12월 29일~31일간 워싱턴은 휘하 병력을 도하시켜 트렌톤으로 복귀했다. 여기서 워싱턴은 콘왈리스 경(Lord Cornwallis)과 그랜트(Grant) 소장 휘하의 8,000명의 영국군이 포병과 함께 프린스턴에 주둔해 있고 곧 그와 싸우기 위해 진군할 예정이란 것을 알게 된다. 워싱턴 휘하의 병력은 도합 약 1,500명 가량이었다. 트렌톤 남쪽에 있던 캐드월라더의 병력은 2,100명 정도였고, 보덴턴(Bordenton)에 있는 미플린(Mifflin) 장군의 펜실바니아 민병대가 1,600명 가량이었다.

 

 워싱턴은 이 전쟁 간 여러 차례 있었던 일종의 희한한 위기에 빠진 상태였다. 요컨대 그의 상당수 병사들이 "유통기한"이 도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1776년 12월 31일 자정을 기점으로 집단 제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온갖 방식의 설득과 협상을 통해 이들 중 상당수가 6주간 더 근무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영국 척탄병(Grenadiers)) 

 

 워싱턴의 병력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졌는데, 하나는 아주 최근에 충원된 민병대 병사들로 옷도 멀쩡하고 영양상태도 좋았던 반면 훈련 및 경험이 거의 없었고, 또 하나는 대륙군 병사들로 경험도 많고 강인했으나 거지꼴을 하고 있었고 탈진된 상태였다.

 

(프린스턴 전투에서 워싱턴 장군이 공격을 선도하고 있다) 

 

 1777년 1월 2일, 콘왈리스는 영국군 주력을 이끌고 프린스턴에서 트렌톤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프린스턴에는 모후드 중령 지휘하에 제 40, 17, 55 보병연대를 잔류시켰고, 트렌톤으로 향하는 길의 메이든헤드(Maidenhead)에는 레슬리(Leslie) 장군 지휘하에 제 2 여단을 잔류시켰다. 콘왈리스는 나머지 5,500명의 병력과 12파운드 포를 포함하는 28문의 대포를 이끌고 전진을 지속했다.

 

 트렌톤 도상의 메이든헤드의 남서쪽 진지에는 페르모이(Fermoy's) 여단, 핸드(Hand) 대령의 펜실베니아 소총병대(riflemen), 한 독일인(German) 대대와 스콧(Scott) 휘하의 버지니아 대륙군과 대포 2문이 위치했다.

 

 날씨는 습하고 도로는 진창 투성이었다. 콘왈리스는 미군을 트렌톤으로 밀어붙이며 전진했다. 강력한 저항을 펼치면서도 미군은 진지에서 밀려나 마을을 거쳐 아순핑크(Assunpink)의 남쪽 제방 진지까지 밀려났다. 영국군은 하천을 건너 미군 방어선을 압박하고자 했으나, 미군의 저항이 심하자 아침까지 이를 연기하게 된다.

 

 작전 회의 결과에 따라 워싱턴은, 다음날 적에게 공격 당해 제압당하기 전에 먼저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한밤중에 미군은 진지에 불을 켜둔 채 이탈하여 동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프린스턴을 향해 진군했다.

 

 경보병이 종대를 선도했고, 그 뒤로 머서(Mercer) 준장 휘하의 여단이 따라갔다. 길은 새 것이었고, 강 주변을 돌아 짙은 숲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나 있었다. 병력들이 진군하는 동안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진창길이 얼어붙으면서 쉽게 이동할 수가 있었다.

 

 미군이 프린스턴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종대에 독일군들(Hessians)이 공격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일부 경험 없는 민병대원들이 남쪽으로 도주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종대는 둘로 나뉘어져서, 머서의 부대와 캐드왈러스의 부대는 트렌톤으로 돌아가 콘왈리스의 공격에 대비하기로 하였고, 그 나머지 병력들이 프린스턴으로 계속 진군하기로 하였다.

 

 당일 새벽, 일군의 영국군이 프린스턴에서 출발하여 메이든헤드로 행군하여 레슬리 장군과 합세했다. 이 병력은 모후드 중령 휘하의 제 17 보병연대, 제 55 보병연대, 제 16 경-용기병대였다. 이른 아침의 안개로 영국군은 머서 휘하의 미군을 독일군(Hessian)으로 착각했고, 소규모 미군 병력을 마주쳤을 때에는 콘왈리스로부터 도주 중인 미국인들이라고 생각해버렸다. 모후드는 이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눈치챈 뒤에는 휘하 병력을 과수원으로 이동시키고자 했고, 이미 과수원을 장악하고 있던 미군과 곧이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양측 모두 대포 2문을 전투에 동원했다.

 

(프린스턴 전투에서의 머서 장군의 전사) 

 

 일제 사격을 교환하고 나서 모후드는 병사들에게 돌격을 지시했고, 미군은 대체로 총검이 없었던 탓에 퇴각하게 된다. 머서는 휘하 여단 병력을 집결시키고자 했으나, 공격 당해 여러 부하 장교들과 함께 치명상을 입고 만다.

 

 캐드월라더의 병력들이 접근하는 것을 본 모후드는 포병 지원 범위까지 후퇴하였고, 포병의 포도탄(grape shot) 공격으로써 접근하던 미군을 분산시켰다.

 

 워싱턴 장군이 현장으로 이동하여 양개 여단의 생존자들을 불러모으려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상황은 설리반 사단이 도착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설리반 사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로드 아일랜드 대륙군, 펜실베니아 소총병대, 제 7 버지니아 대륙군. 미군은 격전 중인 모후드 부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다.

 

 머서 부대에 딸려있던 2문의 대포는 퇴각하지 않고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다. 새로운 공격 제대가 도착하고 영국 보병에 대한 포격은 거세졌다. 압도적인 병력에 의해 공격당한 모후드는, 휘하 병력들에게 돌격을 지시했고, 제 17 및 55 보병연대는 경-용기병대의 도움을 받아 총검으로 메이든헤드로 향하는 도로를 향한 돌파구를 열었다.

 

 55연대 일부 병력은 낙오하여 다른 방향으 향했으며, 프린스턴에서 40연대와 합류하게 된다. 양개 연대의 대부분 병력은 북쪽의 뉴 브런스윅(New Brunswick)을 향해 서둘러 탈출하지만, 일부 병력들은 프린스턴의 나사우 홀 (Nassau Hall)로 숨어들어갔다가 나중에 알렉산더 해밀턴 대위에게 항복한다; 총 194명이었다.

 

 워싱턴은 돌아오는 콘월리스의 주력부대와 직접 마주칠 때까지 트렌톤 도로를 따라 모후드를 추격했다. 워싱턴은 뒤돌아 프린스톤으로 이동했으며, 전투에서 노획한 2문의 영국 대포는 방기했다. 콘월리스의 전진이 신속했기에 미군은 프린스턴 마을에 저장된 영국군의 보급품을 탈취하지 못한 채 빠져나와야 했다. 미군은 뉴 브런스윅으로 향하는 도로까지 진군했으나, 모리스타운(Morristown)으로 방향을 돌린다. 영국군은 이제 뉴저지에서 유일하게 남은 거점인 뉴 브런스윅으로 향한다.

 


사상자 : 사상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영국군 전사자는 40명, 부상자는 58명, 행불자가 187명이었다. 미군은 유능한 장교 여럿을 잃었다: 머서 장군, 하슬렛 대령, 그리고 여러 장교들. 미군 병사 전상자도 40명 가량 된다.

 

 

이후의 영향 :
 트렌톤과 프린스턴 전투 결과, 뉴 저지의 영국군 세력 대부분이 일소되게 된다. 이 전투들로 유럽 열강들에게 미국이 영국을 상대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독립 전쟁에 참가하는 날이 가까워지게 된다.

 워싱턴 장군의 지략과 용감성이 발휘된 전투이다.

 

 

부대 전통 및 일화 :
 휘하 여단을 선도하다 전사한 휴 머서 준장은, 네세시티 요새에서 조지 워싱턴과 함께 복무한 적이 있으며, 당시 1755년에는 브래덕 장군의 군대에서 버지니아 공병대의 대위로 재직했었다.

 

[1] 

 

 

[2]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