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타이콘데로가 전투 1777 (The Battle of Ticonderoga 1777)

박용수 2014. 10. 27. 15:16

< 원문 출처 : The Battle of Ticonderoga 1777 (http://www.britishbattles.com/battle-ticonderoga-1777.htm) >

 

< 사진 출처 :

 [1] 미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The Capture of Fort Ticonderoga, 6 July 1777 (http://www.dean.usma.edu/history/web03/atlases/american%20revolution/ARGIFS/TiconderogaCapture.gif)

 [2] 미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Burgoyne's Expedition, June - October 1777 (http://www.dean.usma.edu/history/web03/atlases/american%20revolution/ARGIFS/BurgoyneExpedition.gif)


※ 이 외 별도 설명이 없는 경우 원문 사이트의 사진임 >

 


 타이콘데로가 전투 1777 (The Battle of Ticonderoga 1777)


전쟁 : 미국 독립전쟁

 

시기 : 1777년 7월 6일

 

장소 : 미국 뉴욕주 샴플레인 호수에 있는 타이콘데로가 요새 (Fort Ticonderoga on Lake Champlain, New York State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교전자 : 영국 및 독일군 (British, Hessians and Brunswickers) vs. 미국인들

 

지휘관 : 영국 측은 존 부르고인 소장(Major General John Burgoyne), 미국 측은 아서 생 클레어 소장(Major General Arthur St Clair)

 

병력 규모 : 영국 측은 영국 정규군 7,213명 및 독일용병대(Hessian and Brunswick troops), 상당 규모의 미국 원주민 부대, 캐나다인 150명으로 구성. 미국 측은 3,000명 규모.

 

승자 : 미군이 황급히 철수함에 따라 영국군이 타이콘데로가를 손에 넣음

 

참가 영국 연대 :
제 9 보병연대 (9th Foot)
제 20 보병연대 (20th Foot)
제 21 왕실 스코틀랜드 수발총병대 (21st Royal Scots Fusiliers)
제 24 보병연대 (24th Foot)
제 47 보병연대 (47th Foot)
제 53 보병연대 (53rd Foot)
제 62 보병연대 (62nd Foot)
국왕 폐하 신민 미국인대 (King's Loyal Americans)
여왕 폐하 신민 레인저대 (Queen's Loyal Rangers)

 

(영국 제 9 보병연대) 

 

참가 독일 연대 :
프린쯔 루드비히 용기병대 (Prinz Ludwig Dragoons)
스페트 연대 (Specht's Regiment)
폰 레트 연대 (Von Rhetz's Regiment)
폰 리더젤 연대 (Von Riedesel's Regiment)
프린쯔 프레드리히 연대 (Prinz Frederich's Regiment)
엘브프린쯔 연대 (Erbprinz Regiment)
브레이먼 엽병대 (Breyman's Jaggers)

 

참가 미군 연대 :
프랜시스의 매사추세츠 연대 (Francis' Massachusetts Regiment)
마샬의 매사추세츠 연대 (Marshall's Massachusetts Regiment)
헤일의 뉴 햄프셔 대륙군 연대 (Hale's New Hampshire Continentals)
실리의 뉴 햄프셔 대륙군 연대 (Ciley's New Hampshire Continentals)
스캐멀의 뉴 햄프셔 대륙군 연대 (Scammell's New Hampshire Continentals)
그 외의 심하게 정원 미달이었던 부대들 여럿.


 

전말 :
 타이콘데로가 요새는 당초 프랑스인들에 의해 지어진 카릴롱 요새 (Fort Carillon)로서, 당시에는 프랑스인들이 캐나다와 샴플레인 호수 남쪽으로의 길을 장악하고 있었다. 1758년의 7년 전쟁 (French and Indian War) 당시, 이 요새에서 몽칼름 후작(Marquis de Montcalm)의 프랑스군과 영국 및 미국인들의 군대가 격전을 벌인 바가 있다. 이듬해에 이 요새는 암허스트(Amherst) 휘하의 영국인들이 지배하게 된다.

 

 파리 조약과 함께 7년 전쟁이 끝나면서 캐나다 전역이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고, 이 요새의 전략적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전쟁 발발 시점에 이 요새는 황폐화된 상태였고, 수비대라고는 영국 연금 생활자 70명에 불과했다.

 

(타이콘데로가 요새 전투도) 

 

 1775년, 에이탄 알렌(Ethan Allen)과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가 이끄는 미군에 의하여 타이콘데로가 요새는 기습 점령당한다. 이 요새에는 보스톤 포위전에서 영국의 게이지(Gage) 장군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중포(heavy Artillery)가 있었다. 타이콘데로가 요새는 허드슨 강으로부터 캐나다를 잇는 요충지로서, 이제 미군이 북쪽으로부터의 영국군의 침공을 방어하는 전략거점이 된다.

 

 1776년의 전투 시즌(campaigning season)이 끝날 무렵, 캐나다 총독 거이 칼튼(Guy Carleton)과 "신사 조니" 부르고인("Gentleman Johnnie" Burgoyne) 소장 휘하의 영국군이 챔플레인 호수까지 남진하여 타이콘데로가 요새를 위협한다. 거이 칼튼은 북아메리카에서 잔뼈가 굵은 탓에, 이미 겨울이 지나치게 다가왔기에, 타이콘데로가 요새 수비대에게 보급 물자를 공급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들어, 금년 내로 요새를 손에 넣고 싶어하던 부르고인과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병력을 캐나다로 퇴각시킨다.

 

(생 클레어 장군) 

 

 겨울 동안, 북부 문제 국무 참모(the Secretary of State for the Northern Department)이자 미국 독립전쟁 문제 담당장관이던 저메인 경(Lord Germaine)은, 조지 3세 국왕에게 부르고인 장군을 1777년 챔플레인 호수 루트를 통한 미국 식민지 공략부대 지휘관으로 추천한다.

 

 1777년 6월 20일, 남진할 군대가 세인트 로렌스 강(St Lawrence River)에 집결한다.

 

 1776년에서 7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미 의회로부터 타이콘데로가 요새 수비대장으로 임명된 아서 생 클레어 소장과 휘하 수비대는, 요새의 방어 능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생 클레어와 휘하 부대는 이 과정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본래 카리용 요새였던 타이콘데로가 요새는, 본래 프랑스인들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영국인들을 막기 위해 지은 탓에 북쪽에서 접근하는 영국인들을 막기에는 적합치가 않았다. 게다가 7년 전쟁이 끝난 이후로, 요새의 사용처를 잃은 탓에 오랜 동안 방치되어 관리 상태도 엉망이었다.

 

 1776년 여름, 미군 장교인 존 트럼블(John Trumbull) 중령이 타이콘데로가 요새의 방어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바가 있다. 당시 중령의 보고서에서는, 방어 중심이 현재의 요새 위치에서 호수 반대편의 산, 즉 당시 이름으로 래틀스네이크 산(Mount Rattlesnake; 방울뱀 산)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제안은 채택되었고, 당대의 시대 정신에 걸맞게 래틀스네이크 산은 인디펜던스 산(Mount Independence; 독립 산)으로 개명되었다. 그러나 트럼블이 제안한 것 또 한가지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는데, 당시 슈거 힐(Sugar hill; 설탕 고지)이라고 불리고 있던 지역 전체를 감제하고 있는 고지에 대해서도 요새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실행되지 않았고, 다만 명칭만이 디파이언스 산(Mount Defiance; 저항 산)으로 바뀌었다.

 

 생 클레어의 공병장교였던 예두산 볼드윈(Jeduthan Baldwin) 대령은 물자 부족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타이콘데로가의 방어태세를 갖추는 데 최선을 다했다. 1777년 7월까지 볼드윈은 포대와 말뚝방벽(stockades), 특화점(blockhouse)들을 설치했고, 구 타이콘데로가 요새와 인디펜던스 산 축성진지간을 연결시켜주기 위한 교량과 붐(boom; 방재선, 강에 흘러내려오는 목재 등을 유도하는 밧줄 따위)을 설치했다. 인디펜던스 산에서는 폴란드 출신 건축가 태디우스 코스추스코(Thaddeus Kosciuszko)가 포대와 축성진지를 건설했다. 미국 수비대의 사기는 양호했다. 병력이 지나치게 적긴 했지만 전투 준비는 되어 있었다. 일군의 뉴 잉글랜드 민병대가 잠시 주둔하러 왔었지만, 수비대 물자만 소진시킨채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1777년 7월 1일, 부르고인 군대가 일부는 배로, 일부는 호수가를 따라 행군하여 타이콘데로가 북부에 도착했다. 사이먼 프레이저(Simon Fraser) 준장 휘하의 경보병들이 요새 서쪽 측면을 돌아 호프 힐(Hope hill)로 침투해 들어갔다. 프레이저의 병력들은 조지 호수(Lake George)로 이어지는 강을 도하하여 타이콘데로가의 남쪽을 포위했다. 그들은 슈거 힐에 기어올라갔고, 트럼블이 보았던 바와 같이 타이콘데로가와 인디펜던스 산의 미군 진지를 감제하게 되었다. 영국군은 고지 정상으로 대포를 끌어들였고, 포격을 개시했다.

 

 이에 생 클레어는 형식적인 작전회의를 소집한 뒤, 타이콘데로가를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1777년 7월 5일-6일 밤, 미군은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보급 물자만을 가지고 요새를 떠나 인디펜던스 산 아래의 선착장으로 배를 저어갔다. 그러나 프랑스 장교인 로세 드 페르모이(Roche de Fermoy) 대령이 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의 집에서 불을 환하게 켜두고 있던 탓에, 강을 건너고 있던 미군 선박들은 노출되게 된다.

 

 퇴각 작전을 눈치챈 영국군이 추격해 들어왔고, 보트를 타거나 구 프랑스 요새의 붐(boom)을 통해 건너갔다. 그러나 미군은 잘 빠져나갔고, 숲속으로 사라지거나 남쪽의 스케네스버러(Skenesborough)로 향하는 사우스 베이(South Bay)를 향해 배를 저어갔다.

 

 미군 후발대는 영국군 선발대와 교전하면서 생 클레어의 퇴각을 엄호했다. 후발대는 퇴각했으며, 최후로 4명의 결사대가 중포 곁에 남아, 영국군이 붐(boom)을 건널 때 발포하는 임무를 갖고 남았다. 영국군이 중포를 접수하였을 때, 이 4명이 고주망태로 취한 채로 대포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텅 빈 마데이라(Madeira; 포도주의 일종) 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호기심 많은 이로쿼이 인디언 한명이 실수로 대포를 발사했지만, 포탄은 하늘만 가르고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다. 타이콘데로가는 다시 영국군 손아귀로 넘어가고 알바니(Albany)를 향한 남진 작전을 위한 본부가 되었다.

 

 

사상자 : 양측 모두 수십명 가량의 사상자가 있었다.

 

이후의 영향:
 타이콘데로가는 미국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는데, 미국인들 생각에 겨울 내 요새를 강화했기 때문에 북쪽으로부터의 영국의 위협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생 클레어의 급작스런 퇴각으로 말미암어 미국인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대의 개신교 군목이었던 토마스 알렌 목사(the Reverend Thomas Allen)은 다음과 같이 썼다. "아군은 전투 의지가 충만했고, 탄약은 가득했으며, 진영에는 보급물자가 넘쳐나고, 군기는 펄럭였다. 역사상 타이콘데로가 요새를 포기한 것처럼 치욕적인 일은 또 없을 것이다." 미 식민지 전체에 이런 식의 감정이 가득했다.

 

 생 클레어는 후퇴로 인하여 미군의 소중한 병력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을 의식하여 그는 군사 재판을 요청했고, 여기서 그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생 클레어가 맞았는지도 모른다. 타이콘데로가 요새를 수비했다고 하더라도, 부르고인은 함락시켰을 지도 모르며, 그 경우 많은 미군 병력들이 손실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후의 부르고인의 작전이 영국군의 병참선을 신장시키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사라토가(Saratoga)에서 영국군이 항복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군이 미군 진지들을 감제하는 슈가 힐에 포대를 설치하였다는 사실 하나가 그토록 많은 노력을 쏟아붇고 많은 기대를 받고 있던 요새지를 버리고 급박하고 정신없이 퇴각해야 했던 정당한 이유였는지는 과연 알 수 없는 일이다.

 

 슐러(Schuyler) 장군이나 미 의회의 직접 퇴각 명령이 없는 상태에서 생 클레어는 아마도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한다. 만약 그랬다면, 결과는 어쨌던 간에, 생 클레어는 남은 인생 동안 자신의 행동이 겁쟁이 짓이 아니라는 변명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대접을 받으며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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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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