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출처 : The Battle of Hubbardton 1777 (http://www.britishbattles.com/battle-hubbardton.htm) >
< 참조 문헌 :
[1] Green Mountain Boys (http://en.wikipedia.org/wiki/Green_Mountain_Boys) >
허바톤 전투 1777 (The Battle of Hubbardton 1777)
전쟁 : 미국 독립전쟁
시기 : 1777년 7월 7일
장소 : 타이콘데로가 동남쪽으로 이어진 뉴욕 주의 한 도로
교전자 : 영국군 vs. 미군
지휘관 : 영국 측은 사이먼 프레이져 준장(Brigadier Simon Fraser)이 영국군을 지휘하고, 리더젤 남작(Baron Riedesel)이 독일군을, 미군 측은 프랜시스 대령(Colonels Francis)과 워너(Warner)가 지휘.
병력 규모 : 영국군과 독일군 도합 약 1000명 vs. 미군 약 1000명.
승자 : 영국군 및 독일군
(영국 척탄병)
전말 :
생 클레어 장군(general St Clair)의 병력은 1777년 7월 6일 타이콘데로가 요새를 떠났으며, 이들을 따라 남쪽으로 추격하고 있던 부르고인 장군(General Burgoyne)의 군대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급히 서두르고 있었다. 날씨는 무더웠고, 숲속에 난 원시적인 길을 따라 행군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26마일을 행군한 뒤 미군은 마침내 작은 부락인 허바톤(Hubbardton)에 도착했다. 생 클레어 장군은 후위를 맡아 아직 도착하지 않은 프랜시스 대령 휘하의 제 11 메사추세츠 부대와 헤일(Hale) 휘하의 제 2 뉴햄프셔 연대를 기다리기 위하여 세스 워너 대령(Colonel Seth Warner)과 휘하 버몬트 공화국군(Green Mountain Boys; 뉴욕 주의 영유권 주장에 저항하기 위해 에탄 엘런(Ethan Allen) 주도로 지역 주민들이 1760년대 무렵 만든 민병대. 1777년 7월 해당 지역 28개 마을이 버몬트 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동 공화국의 군대가 됨. 1791년 버몬트 공화국이 미국에 합병되면서 해산[1])을 잔류시킨 채 행군을 계속했다.
후위 부대가 허바톤에 도착하자, 프랜시스와 헤일은 타이콘데로가를 탈출하여 긴 행군을 한 부하들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하여 이 마을에서 숙영하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영국군과 독일군의 추격을 충분히 따돌렸다고 판단하고 별다른 경계병을 세우지 않았다.
사실 사이먼 프레이저 준장이 추격을 독려함에 따라 영국군은 그날 밤 허바톤 가까이까지 와서 숙영하게 되었다. 영국인들과 브룬스윅 척탄병대(Brunswick Grenadiers), 경보병대(Light Infantry)로 구성된 영국 제 24연대는 새벽 3시에 추격을 재개했고, 미국인들이 아침을 준비할 무렵 미군과 맞닥뜨려 공격을 개시했다. 최초로 공격에 직면한 미군 부대는 헤일 휘하의 뉴햄프셔 연대로서, 이들은 무질서하게 도망간다. 워너와 프랜시스의 연대들은 신속하게 전투 대형을 갖추고 강력하게 저항했다. 전투는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이 와중에서 영국 24연대를 지휘하던 그랜트 소령(Major Grant)이 전사한다.
미군은 양 측면에 언덕을 두고 숲이 우거진 지형을 따라 선형으로 진형을 짰다. 프레이저 준장은 휘하 척탄병들을 미군 좌측면의 언덕으로 올려보내 이들을 측면 공격하고자 했다. 언덕은 가팔랐고, 포위 기동에 걸린 시간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한편, 프랜시스 대령은 프레이저 준장 부대 좌측의 돌출한 부대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고, 여기에는 도망쳤다가 되돌아온 헤일 부대 소속 일부 병력들도 참가했다. 프레이져 준장은 미군보다 병력이 열세였기 때문에 위기에 직면한다.
전투 소음은 남쪽에 있던 미군 지휘관 생클레어 장군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2개 민병대 연대에게 뒤돌아가 프랜시스 부대를 증원하도록 지시했지만, 이들은 증원하러 가기를 거부한다.
(허바톤 전투도)
한편 북서쪽에 있던 리더젤 남작 역시 총성을 듣게 되고, 그는 최대한 빨리 프레이져 준장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인다. 리더젤은 선두에 브룬스윅 엽병대(Brunswick Jaegers)을 내세웠고, 이들은 전장에 도착하는 즉시 미군의 우측면을 공격한다. 총격전은 치열했다. 전투의 시계추는 다시금 영국 측으로 넘어갔고, 영국군 척탄병들이 미군 좌측의 언덕을 마침내 점령함에 따라 프레이저 준장은 미군 중앙부를 공격하게 된다. 프란시스 대령은 전사하고 미군 전열은 붕괴하기 시작한다.
전투 결과, 수많은 미군 병사들과 12문의 대포가 사로잡힌다.
사상자 : 영국군의 독일군의 사상자는 장교 14명과 병사 195명이다. 미군 사상자는 장교 12명에 병사 300명이다. 영국군이 전장을 장악함에 따라 남겨진 미군 부상자들은 대부분 체포당한다.
이후의 영향 :
미군은 계속 남쪽으로 달아나고, 영국군은 추격을 계속한다. 참가 병력 규모에 비하여 이 전투의 사상율은 높았는데, 이는 미국 대륙군 연대 병력의 굳은 전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부대의 전통, 비화 :
포테스큐(Fortescues)가 이 전쟁에 대해 언급한 바에 따르면, 일군의 미군 병사들이 항복의 표시로 총구를 돌린 채 영국군에게 접근했었다고 한다. 이에 영국군은 사격을 중단한다. 그 순간 미군은 일제 사격을 실시하여 영국군에게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케 하고 후퇴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전략"("ruse de guerre")은 전사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포테스큐가 제시한 것처럼 대규모로 이런 일이 있었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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