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출처 : The Battle of Bennington 1777 (http://www.britishbattles.com/battle-bennington.htm) >
베닝턴 전투 1777 (The Battle of Bennington 1777)
전쟁 : 미국 독립전쟁
시기 : 1777년 8월 16일
장소 : 뉴욕 주에 있는 버몬트(Vermont)로 향해 허드슨 강(Hudson River) 동쪽에 난 도로
교전자 : 존 부르고인 소장 (Major General John Burgoyne) 휘하의 독일인들, 영국인들, 캐나다인들, 인디안들, 왕당파 미국인들로 구성된 영국군 vs. 뉴 잉글랜드 민병대가 주축인 미군
군대 규모 : 바움(Baum)의 부대는 650명, 스타크(Stark)는 2000명 가량의 미군을 인솔. 브레이만(Breyman)은 600명을 데리고 옴. 바움과 브레이만은 각각 2문씩의 3파운드 포를 보유.
승자 : 미군의 완벽한 승리
(베닝턴 전투도)
전말 :
1777년 8월에 이르러, 존 부르고인 소장의 군대는 캐나다로부터 챔플레인 호수(Lake Champlain)까지 남진하였으며 허드슨 강가에 있는 에드워드 요새(Fort Edward)로 향하기 시작했다. 슐러 장군(General Schuyler)은 뉴욕 주도인 알바니(Albany)를 방어하기 위하여 허드슨 강과 모호크 강(Mohawk River)의 교차점 남쪽에 미군을 배치하였다. 북부의 미국 독립주의자들의 사기는 타이콘데로가 요새의 포기와 이어진 급박한 퇴각으로 인하여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부르고인의 상태도 그다지 나은 편은 아니었다. 그의 군대는 타이콘데로가에서부터 무성한 삼림지대를 돌파하면서 대포와 수레를 수송하기 위한 길을 내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슐러는 조직적으로 청야 전술을 폄으로써 부르고인의 보급과 수송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영국군에는 말이 부족하여 브룬스윅 용기병(Brunswick dragoons)들이 아직도 도보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은 1755년 브래덕 장군(general Braddock)이 겪은 이래 북아메리카 삼림지대에서 작전하는 모든 영국 장군들이 겪은 문제들이었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뉴욕에 있었던 하웨 장군(General Howe)이 보낸 편지였다. 하웨는 영국군 주력을 이끌고 허드슨 강에서 부르고인과 합류하는 대신 펜실베니아를 침공하러 갈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최초 부르고인이 계획했던 바를 어긋나게 하는 것이었다.
(스타크 준장)
부르고인은 바움 대령에게 병력을 이끌고 에드워드 요새 동쪽의 버몬트 주 맨체스터(Manchester) 지역으로 이동하여 용기병들과 수송대에 지급할 말을 찾는 것과 함께, 식량과 보급 물자를 수집하고 아울러 반란을 꾀하는 지역민들을 겁주라고 지시했다. 마지막 순간에 바움의 목적지는 베닝턴 마을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상당량의 보급물자가 이곳에 집적되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대륙군이 타이콘데로가에서 퇴각하고 아울러 영국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사실은 버몬트 주와 뉴 햄프셔 주 사람들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갖게 했다. 뉴 햄프셔 주의회(New Hampshire Council)는 귀족적인 뉴욕 주 사람이자 생 클레어 장군과 함께 타이콘데로가 요새를 포기한 배신자라고 생각되는 슐러 장군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존 스타크 준장(Brigadier John Stark) 휘하의 새로운 민병대 여단을 창설하게 된다. 스타크는 7년 전쟁(French and Indian War)과 뉴 저지 전역(New Jersey campaign)에 참가했던 참전 용사로서 그 지역에서 무명이 높았으며, 지역민들은 그 휘하에서 참전하기 위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의 여단은 베닝턴에서 숙영하게 된다. 워너(Warner)의 버몬트 공화국군(Green Mountain Boys) 역시 허바톤에서의 패배를 곱씹으며 맨체스터에 위치하고 있었다.
(베닝턴 전투)
바움이 베닝톤으로 진격하면서 휘하의 인디언들이 지역을 약탈하였다. 그레그 대령(Colonel Gregg) 휘하의 소규모 부대로 전초전을 벌인 후, 바움은 베닝턴 외곽의 울룸색 강(Wolloomsac River)으로 전진한다. 이곳에서 바움은 부르고인에게 전갈을 보내 미군과의 전투를 벌일 예정이라고 보고한다. 바움 군이 스타크 군에 비해 심각한 숫적 열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바움은 부르고인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급박한 전갈을 보냈고 부르고인은 브레이만 대령에게 휘하 연대를 이끌고 바움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전투는 느릿느릿 걸어오던 브레이만 부대가 미처 전장에 도착하기 전인 1777년 8월 16일에 벌어졌다.
(보루를 향한 돌격을 지휘하는 스타크)
바움의 부대는 울룸색 강 위에 놓여있던 다리 주변에 진지를 구축했다. 휘하 병력 일부는 강의 남쪽 편에 있던 급조 축성진지에 있었고, 나머지는 북쪽에 있었다. 주 진지는 브룬스윅 용기병과 영국 라이플병들이 다리 반마일 뒤의 언덕에 건설한 보루에 있었다.
그날의 양군의 이동은 심한 비로 인해 대체로 지체되었다. 오후 중간 쯤이 되자 미군은 용기병 보루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니콜스 대령(Colonel Nichols)과 헤릭 대령(Colonel Herrick)이 뒤와 측면에서 공격했다. 총성을 들은 호바트 대령(Colonel Hobart)은 강 가까운 쪽 참호를 지키고 있던 왕당파 민병대(Tory militia)를 공격했고, 스타크 준장은 돌출된 주력 부대에 돌격을 감행했다.
(베닝턴 전투에서 미군의 돌격을 지휘하는 스타크)
바움 부대의 진지는 격전의 중심지가 된 용기병 보루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붕괴되었고, 대부분의 병사들과 인디언들은 숲속으로 달아났다. 마침내 탄약이 바닥나자 중상을 입은 바움과 살아남은 용기병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바움의 부대는 전멸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브레이만의 부대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타크는 새롭게 도착한 워너의 부대와 함께 이들을 공격하였고, 최초에는 고전하였으나 마침내는 이 독일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브레이만 부대는 밤의 어둠이 숨겨줄 때까지 추격하는 미군의 지속적인 사격을 받아가며 달아나야 했다.
사상자 :
독일군은 900명이 부상, 전사, 생포되었다. 미군 사상자는 70명이다. 미군은 4문의 대포와 많은 소구경 화기를 노획했다.
이후의 영향:
전투 전, 대륙 의회(Congress)와 뉴 햄프셔 주의회 사이에서는 스타크가 슐러의 지시를 무시하고 휘하 여단을 허드슨 강으로 이동시키지 않은 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마찰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전투가 있은 후, 스타크는 대륙군 준장으로 임명되게 된다.
베닝턴 전투는 미국인들이 유럽 정규군에 대항하여 스스로 싸울 능력을 배양한 대전투였다. 또한 베닝턴 전투를 통해 스타크가 미국독립전쟁에서의 중요한 군인으로 부각되는 계기가 된다.
다른 미군의 승리들과 마찬가지로 이 전투로 인해 미국인들의 사기는 다시금 충천하게 된다.
부르고인 군대는 베닝턴 전투로 인하여 보충할 수 없는 큰 병력 손실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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