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 관련

[스크랩] [번역] 할크 강 전투 1223 (The Kalka River 1223) - 몽고의 군대(2)

박용수 2014. 10. 27. 15:17

 

  다음은 Osprey Publishing 사의 Campaign 시리즈 중의 하나인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를 (무단으로 ^^;) 번역한 일부입니다. 총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양이 많아 챕터별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몽고의 군대 부분부터는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점점 많아지는군요 TT;) 

 


 

 

 각각의 전사들은 2~3개의 활을 들고 다녔으며, 각각 다른 길이의 화살이 들어있는 총 3개의 화살 보관대를 가지고 다녔고, 보관대마다 화살은 30개씩 있었다. 당기지 않았을 때의 활의 길이는 120cm을 넘지 않았다. 당겼을 때, 활은 평평해지고, M 형태로 휘어졌다. 이런 활들은 오논 강(Onon River) 근처의 말라야 쿨린다(Malaya Kulinda)의 두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런 종류의 활은 노모노이 우헤르(nomonoi ooher)라고 불리는 활줄을 사용했으며, 얇게 가죽을 꼰 것이나(thin twisted strands of leather, ox-skin), 양의 내장을 엮은 것(wattled sheep's intestine)을 사용했다. 기록에서 설명하고 있는 활에 대한 묘사로 보자면, 고고학자들이 찾은 이 활들은 몽고 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 활이 다른 여러 민족들도 사용하긴 했지만, 그 출현과 전파 시기가 타타르-몽고인들의 세계 석권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몽고 활은 편의성과 성능 측면에서 스텝 지역의 유목민 관점에서는 대단히 유리했기 때문에 널리 퍼지게 된다.

 

 (페르시아의 서사시 샤흐나마(Shahnamah)에 대하여 서기 1300년 무렵 시라즈 혹은 바그다드에서 만들어진 이 초기 필사본에는 몽고식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13세기 문서들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동일하며,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조각들과도 매우 유사하다. 좌측에서 두번째 있는 남자와, 가장 우측에 있는 남자는 찰갑형 흉갑을 입고 있다. 나머지 3명은 펠트 등으로 만든 연질 갑옷(soft armour)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테헤란 레자 아바시 박물관 소장))

 

 13세기 이후로, 지리적, 기후적으로 특별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이런 스타일의 활이 기존의 초기 형식의 복합궁들을 대체하게 된다. 동부 트랜스-바이칼 지역의 삼림-스텝 지역과, 아무르 강 일대에는 몽고 활의 출현 이후에도 다른 형식의 활이 계속 사용된다. 이것은 소위 퉁구스 형(Tungus-type) 활로 알려져 있다. 이것의 특징으로는 어교(fish glue)가 사용되어 2년간 건조된다는 점이다. 퉁구스 활은 나무로된 부품이 2군데 있었는데, 통상 전나무(fir)나 가문비나무(spruce), 자작나무(birch), 낙엽송(larch), 시베리아 소나무(Siberian pine), 삼나무(cedar) 등이 쓰였다. 활의 중앙부에는 방형 혹은 타원형의 쐐기가 삽입되었다. 그리고 활은 자작나무 껍질로 덮이고, 자작나무로 된 활의 끝부분은 부분적으로 힘줄 등으로 감쌌다. 가끔은 활을 구룡목(bird-cherry (padus) tree) 띠로 감쌌고, 활 양끝의 활줄을 거는 부분에도 구룡목을 사용했다. 퉁구스 활의 활줄은 대마 섬유(hemp fibre)와 가죽 끈으로 만들었고, 가끔씩은 얇은 자작나무 껍질로 감싸기도 했다. 활은 2번 휘는(double-curved) 형상으로 만들었다.

 

 중장갑의 타타르-몽고 군대에서 퉁구스 타입과 몽고 타입의 활을 동시에 썼을 가능성도 그리 낮지는 않다. 분명 징기스칸의 군대는 다인종, 다국가 출신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는 몽고어족, 터키어족, 퉁구스계 부족 출신 등등이 포함되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또한 퉁구스계 부족 사람들이 몽고의 장거리 원정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여진족의 경우 1213년에 46개 여단(brigades)이 있었고, 모두 각자의 전통적인 무기를 소지했다. 몽고 전사들은 두 가지 종류의 활 모두 특수한 가죽 혹은 천으로 된 활가방(bowcase)에 넣고 다녔고, 활가방은 허리에 끈으로 고정되었다.

 

 활에는 당연히 화살이 필요하다. 비록 12~14세기의 동부 트랜스-바이칼 지역의 고고학 유물 중에는 뼈화살촉과 철화살촉이 모두 출토되기는 하지만, 뼈화살촉으로는 갑옷 입은 적을 해치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경장갑의 기마사수들에게 혹은 의하여 사용되기는 했을 것이다. 평평한 화살촉(flat arrowheads)은 타타르-몽고 전사들에게 매우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아마도 단거리용이자 속사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평 날이 달린 평평한 화살촉(flat arrowhead with a horizontal blade)의 경우 방호되지 않은 인간 및 동물에게 넓고 심각한 부상을 안겨주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활들은 사실 기병의 말을 목표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중장갑 기병만이 말에 갑주를 입힌다. 그 외의 경우에는 말은 궁수의 좋은 목표가 되며, 이러한 넓은 상처야말로 이들이 빨리 무력화되는 원인이 된다. 

 

(남부 러시아에서 발견된 호벅(hauberk)의 종류는 기본적으로 두가지로 나뉜다. 두가지 모두 소매는 짧다. 한 종류에서는 앞단이 뒤에 비해 짧기에 승마 시에 편리한 반면, 또 한 종류는 서부 유럽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앞뒤의 끝단(hem)이 갈라져 있다. 비록 이것들이 러시아 전사들의 것이 아닌 유목 터키인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이지만, 일부는 러시아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어쨌든 러시아인과 폴롭티인 모두 거의 동일한 형태의 갑옷을 입었을 것으로 본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타타르-몽고인들은 가능한 한 근접격투(hand-to-hand combat)는 피했고, 적이나 적의 말을 활로 원거리에서 무력화시키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적의 말이 약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몽고인들은 근접전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넓고 평평한 화살촉은 동부 유럽의 마을 뿐만이 아닌 동부 트란스 바이칼의 마을이나 몽고(Mongolia) 내에 있는 유적층에서 발굴되곤 한다. 몽고 군의 포위 공격에 함락된 것으로 알려진 장소에도 이런 것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도보로 전투하였을 때에도 이러한 화살촉을 널리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고 화살의 또다른 특색으로 명향(hollow bone container;鳴響)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화살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계란형의 2개의 구멍에 의해 호각 역할을 했다. 명향은 원통형 혹은 반 원뿔형으로 통상 2.8~7.5cm 가량의 크기였으며, 화살촉의 크기에 비례했다. 명향의 주 목적은 공포스러운 소리를 발생시키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용도로도 쓰일 수가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명적(whistling arrows;鳴鏑)은 몽고인들 사이의 사치품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사실 12~14세기의 고분들을 살펴보면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명향을 사용한 화살(=명적)을 대단히 흔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타르-몽고인들은 화살대를 관목으로 만들거나, 버드나무, 자작나무, 노간주나무(juniper) 등의 강가나 호숫가에 자라는 나무들로 만들었다. 이는 기원후 10세기 이후의 중앙아시아 민족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오논 강(River Onon) 계곡에 있는 쿤쿠르(Kunkur) 마을과 말라야 쿠린다(Malaya Kulinda) 같은 동부 트란스-바이칼 지역의 여러 고분 및 유적에서 나오는 화살대 조각들을 살펴보면, 화살의 오늬(notch) 부분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원통형 나무 막대로 되어 있고 평균 지름이 0.8cm 정도 된다. 화살대의 길이는 통상 70~80cm을 넘지 않았다고 보는데, 이는 몽고 화살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추정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에는 몽고 화살들이 '두 발, 한 손, 두 손가락(two feet, one hand and two fingers)' 길이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수즈달(Suzdal)의 12세기 로즈데스벤스키 수도원 교회(Rozhdestvensky Monastery Church)에는 소위 말하는 황금의 문(Golden Doors) 두 쌍이 남아있다. 여기 나타난 그림에는 더 오래된 것(the older)이 나타나 있으며 왕공이 대천사 앞에서 무릎꿇고 있다. 그림의 대천사는 비잔틴 예술의 영향을 받아 소매가 짧은 쇄갑 내지는 찰갑형 흉갑을 입고 있다. 반면 왕공은 정강이받이(leggings)가 있는 전신 갑옷(full-lenghth armour)을 하고 있다. 그 재질은 쇄갑형일 것으로 보인다. 왕공 뒤에 있는 카이트형 방패에 서유럽 방식의 문장이 들어가 있는 것이 이채롭다.)

 

 슴베가 있는(tanged) 철 화살촉들을 화살대에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화살대가 뽀개지지 않을 정도로 망치로 화살촉의 슴베를 화살대에 박아넣고, 화살대 끝을 강한 실로 묶는 방법을 썼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먼저 화살대를 쪼갠 다음 슴베를 삽입하고 줄로 묶는 방법도 있다. 가끔은 고정부에 추가로 자작나무 껍질층을 접착시켜서 보강하였다. 이 특정한 화살촉 고정 방식은 말라야 쿨린다의 고분에서 발견되었지만, 몽고 이전 시기의 유적들에서도 발견되는 방식이다. 화살에 깃을 다는 것을 몽고에서는 우데 코몬(ude khomon)이라고 불렀다. 12~14세기 동안, 몽고인들은 수리(eagle)의 깃털을 사용했다. 물론 중앙 및 북부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이 했던 것처럼 거위(geese), 솔개(kite), 멧닭(blackcock), 딱따구리(woodpecker) 등의 깃털도 사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적시하자면, 새의 오른편 날개에서 딴 깃털을 쓴 화살은 비행중에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경향이 있고, 왼쪽 날개에서 딴 깃털을 쓴 화살은 반대 편으로 회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폴롭티의 칸이나 왕공의 것으로 보이는 은으로 만든 벨트 부속품들. 이 벨트는 12에서 13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며, 칭굴-쿠간(Cingul-Kurgan)에서 발굴되었다. (키에프 역사박물관 소장))

 

 몽고인들은 가끔 코론(khoron)이라 불리는 독을 화살촉에 사용했다. 몇몇 기록문헌에는 타타르 무기에는 '독이 차 있다'라는 기술이 남아있다. 중앙 및 북부 아시아의 군사기술에는 이런 용도로 2가지 독이 알려져 있었다. 한 종류는 식물에서 추출한 것으로 '7번째와 8번째 달(seventh and eighth Moons)' 혹은 그 해의 태음월(lunar months of the year) 기간 동안에 화살을 담그어 스며들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독으로 부상당한 자는 누구든지 즉사하며, 독을 가열할 때 발생하는 증기 역시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 또 다른 종류의 독은 모가인 코란(mogain khoran)이라 불리며, 독사(steppe viper or adder)에게서 추출된다. 이 뱀들은 그들의 독이 가장 위험한 시기인 봄에 포획하며, 나중의 사용을 위해 말려서 보관한다. 말려서 농축된 독은 전투 직전에 물을 약간 가하면 화살촉에 바를 수가 있었다. 이 종류의 독화살은 단지 피부에 생채기만 내도 사람을 죽일 수가 있엇다.

 

 활과 화살이 타타르-몽고의 전사들의 무장에서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화살통(quiver) 역시도 중요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단지 한 종류의 몽고 화살통만이 알려져 있다. 이것은 나무 틀에 자작나무 껍질로 싸여있으며, 윗부분에 타원형의 구멍이 나있어서 입구 역할을 한다. 바닥부를 만든 재료가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마도 가죽이나 펠트일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유물로서 발견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화살통에 사용되는 자작나무 껍질은 나무의 줄기에서 긴 띠모양으로 채집하였다. 가장자리끼리 서로 포개서 강한 실로 꿰맨다. 화살 머리를 아래로 하여 최대 30개까지의 화살을 이 종류의 화살통에 보관하였다. 화살통 자체는 철로 된 고리를 이용하여 허리 벨트에 부착시켰다. 지금까지 발굴된 화살통을 살펴보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화살통은 몸의 왼쪽에 차고 다녔을 것이라는 것이다.

 

 타타르-몽고의 기마궁수들에게 중요했던 또 다른 장비의 하나가 줄(file)이었다. 줄은 철로 만들었고, 쐐기 모양이자 사면체 형태의 슴베에 손잡이가 달려져 있는 매우 무거운 판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밑둥 끝에는 특징적인 손잡이가 달려져 있다 (This was made of iron and was in the form of a quite heavy plate with a wedge-shaped tetrahedral tang to which a handle was attached, and had a characteristic lug or projection at the butt end). 

 

 (이것은 돌에 조각된 부조로서, 본래 한쌍의 기마 궁수를 묘사했었던 것의 한쪽으로 보인다. 오늘날 러시아 연방의 다게스탄 공화국의 남단부에 위치한 12~14세기 쿠바치(Kubachi) 지역에서 나온 물건으로, 이 지역은 그 이후로 완전히 이슬람으로 개종했지만, 사물을 조각하는 고대 터키의 전통은 몇 세기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이 작품에의 기마 궁수의 모습은 아마도 할크 강 전투 당시의 장비 특성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오늘날까지도 타타르-몽고의 방패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완전한 방패 유물 뿐만이 아니라, 그 주요 구성품 조차도 유물로서 발견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는 문헌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문헌에 따르면 방패는 둥글고, 지름이 약 20cm 정도이며, 종종 나무로 된 가로대(cross-piece)에 나무판자를 붙여 만들어졌다. 방패의 바깥 표면은 강한 가죽으로 덮였으며, 여기에 금속 돌출물이나 금속판이 덧붙여졌다. 특히 금속판은 중장갑을 한 전사들인 경우에 많았다. 방패의 가장자리는 강화 테두리가 달렸으며, 중심부에는 돔 형태의 금속 돌출부가 있었다.

 

 근접전 무기들은 형태와 기능이 다양했다. 자르고 찌르는 목적으로는 세이버(sabre; 기병도)와 다양한 종류의 칼이 있엇다. 그 외에 도끼(axe)와 창(thrusting spear)이 있었다. 몽고 수도 카라코룸(Karakorum)에 남아 전해지는 세이버는 강철(steel)로 만든 것으로, 약간 굴곡지고 끝이 가느다랗다. 길이는 1미터 가량이고, 폭은 3~3.5cm 가량이다. 한눈에도, 굴곡도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한쪽 방향에만 날이 있다는 점을 빼면 일반 도검과 별다른 특징이 없다. 따라서 중세 유럽인들은 이것들을 몽고의 '약간 굽은 칼(slightly crooked swords)'이라고 불렀다. 유능한 기병에게 있어서 세이버가 일반 도검류에 비하여 보다 효과적이었는데, 이는 13세기 유럽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무거은 칼을 쓸 때보다 훨씬 빨리 칼든 손을 놀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세이버는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직도에 필적하는 충격력을 가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세이버의 무게 중심이 일반 칼과 다른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세이버 외에도 몽고인들은 일반 도검도 사용했다. 여기에는 2가지 기본 종류가 있었다. 한가지는 양쪽에 날이 서있고 칼 끝은 둥근 형태로, 유럽에서 카롤링거(Carolingian) 시기에 쓰던 칼과 유사하다. 두번째 형태는 보다 무겁고 칼 끝이 뾰족하다. 이것은 13~14세기의 유럽 검과 비슷하다. 상기 두가지 외에도 몽고 기병은 외날에 검신이 좁고 직선형의 칼도 사용했다. 이것들은 보통 검폭이 3cm 정도였다. 

 

 다른 근접전 무기로 일부 문헌에 '좋은 철 막대기(rods of good iron)'이라고 기술된 둥근 철퇴(rounded maces)가 있고, 도끼와 창 또한 포함된다. 창날은 여러가지 형상이 존재하여, 12cm 길이의 마름모형 창날도 있었고, 길이 18cm 날의 장창(pike) 형태의 무기도 있었고, 새의 깃털 형상의 창날도 존재했다. 한 문헌에 따르면 창대를 붉게 칠하는 경우가 있는데, 몽고어로 네안 조스(nean zos)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은 무기의 품질과 전투에서의 유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스텝지역 동단에서는, 중국 화가들이 몽고족 전사들에 대한 매우 정교한 그림을 남겼다. 이 그림은 14세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터번을 쓰고 있고 왼팔- 활의 팔(bow-arm)이라고도 불림-을 옷 밖으로 내놓은 것으로 보아, 중앙아시아의 무더운 여름 날씨에 걸맞는 복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투용 말에 대한 보호에도 특별한 관심이 기울여졌다. 문헌에 따르면, '숫소나 다른 동물의 가죽 띠를 취하되, 폭은 팔과 같고, 3~4개의 띠에 송진이나 타르를 발라 줄로 묶는다. 윗 쪽에 있는 띠에서는 줄이 끝부분에 위치하고, 아래에 있는 띠에는 줄이 중간에 위치하고, 끝에 가면 다시 위로 간다. 따라서 아래 띠가 휘게 되면 다른 띠가 들어오고 이것들이 몸에는 두배 혹은 세배가 된다(one takes a strip (of leather) from an ox or any other animal, which has a width equal to an arm, then three or four straps are covered with resin (or tar) and tied with ropes. On the upper strap, ropes are located at the end. Thus when the lower belts are being bent, the other ones are introduced and so they are doubled or put three times on a body)'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가죽 찰갑형 갑옷을 만드는 데 대한 다소 혼란스런 기술인 것 같다. 말의 방호는 5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동물의 양 측면, 목과 가슴 부분, 등 부분, 엉덩이 부분이다. 엉덩이 부분에는 꼬리가 나올 수 있도록 구멍이 있었다. 모든 부분들은 말의 무릎 내지는 정강이까지 연장되었다. 동물의 이마 부분은 3개의 연결된 철판으로 덮였다. 이러한 찰갑형 말 갑옷은 이란과 일본의 타타르-몽고 기병에 대한 채색 미니어처들에서 목격된다. 그러나 동시대에 연질 갑옷 형태의 것도 사용되었으며, 3개의 판으로 된 말머리 보호대인 챔프론(chamfron)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에밀(emeel)이라 불린 기병용 안장은 최근까지도 몽고 기수들이 사용했던 것과 유사했다. 나무 틀로 되어있으며 아치형의 안장가지가 있었다(It had a wooden frame and arched saddle-bows). 안장은 조각이나 그림, 황동 부속물들로 치장되었다. 양 안장가지들은 철제 띠로 고정되어 있었고, 철판이 붙은 안장판은 앞쪽 안장가지가 뒤보다 높았다(Both saddle-bows were fixed with iron straps while the saddle-boards with joined by iron plates, the front bow being higher than the back). 그 뒤 안장은 먼저 펠트로 덮이고, 이어서 가죽으로 덮인다. 땀 흡수 천이 안장 밑에 놓인다. 안장은 장신구와 금속 마구류(metallic horse-brasses), 가죽제 안장 천 등으로 장식되었다. 안장 자체의 색상은 보통 어두운 갈색이었다.

 

 고삐, 재갈 등 각종 마구류(Bridle, bit, buckles or clasps and saddle rings) 역시 장식되는 경우가 있었다. 마구류들의 장식은, 12~14세기의 동부 트랜스 바이칼 지역의 고분 유물들에서 살펴보면, 뼈로 만든 것도 있고 구리로 만든 것도 있었다(The latter, according to burial finds from eastern Trans-Baikal dating from the 12th to 14th centuries, included copper 'horse-brasses', which were sewn to the throat and breast straps, as well as to smaller straps; other decorations were made of bone). 끈을 땋아올리거나, 여러 종류의 매듭을 지어 마구류(horse harness)를 치장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사용되었다.

 

 (할크 강 전투에 참가한 러시아 왕공들을 그린 초상화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북부 러시아의 네레티짜(Nereditsa)의 구세주 교회(Church of the Saviour)에 남아있는 이 벽화는, 왕공 야로슬라브 브세볼로도비치(Prince Yaroslav Vsevolodovich)를 그린 것으로, 할크 강 전투 23년 뒤에 그려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 왕공이 입고 있는 복장이나 사반세기 전의 할크 강 전투 시기의 왕공들의 복장이 그리 크게 차이가 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타타르-몽고의 전사들의 또하나의 특징으로는 박차(spur)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몽고인들이 징(horseshoes)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받아들여져 왔지만, 가끔씩은 사용한 예도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카라코룸(Karakorum)에서 타흐스(takhs)라고 불리는 못을 사용하지 않는 징이 여럿 발견되었다. 아마도 말발굽에 징을 묶어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장갑의 기병들과는 달리, 경장의 기마궁수들의 경우 그리 많은 장비들을 휴대하지는 않았다. 가끔 담비 가죽으로 만들기도 한 모자 정도를 쓰는게 전부였다. 모자는 야생 염소 가죽이나 여우 가죽, 또는 늑대 앞발(wolf's paws)로 만들기도 했다. 모자의 정수리 부분(crown)은 뾰족하거나 둥글거나 했는데, 여기에는 동물의 꼬리가 달리기도 했다. 기마 궁수는 연질 갑옷을 입었을 것이며, 이는 긴 상의(jacket)에 다중 펠트층이나 펠트에 고급 천을 더한 것으로 만든 잎사귀 모양의 어깨 보호대가 있는 형태였을 것이다. 금속 비늘로 보강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이런 경기병들은 길고 좁은 소매가 달린 누비옷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Otherwise such light cavalrymen wore a quilted coat which wrapped at an angle across the front of the body and had long, relatively narrow sleeves). 복장을 이루는 것으로는 아르칸(arkhan)이라 불리는 가죽 장갑과, 누빈 바지(quilted trousers), 높은 장화(high boots)가 있었다. 경기병 궁수의 무장에는 활과 화살 뿐만이 아니라 세이버(sabre)와 동물 털로 만든 올가미(lassoo)가 포함되었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