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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할크 강 전투 1223 (The Kalka River 1223) - 러시아의 군대

박용수 2014. 10. 27. 15:18

   다음은 Osprey Publishing 사의 Campaign 시리즈 중의 하나인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를 (무단으로 ^^;) 번역한 일부입니다. 총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양이 많아 챕터별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러시아의 군대

 


 각 러시아 왕공 군대의 중핵은 의심할 바 없이 왕공들의 근위대(bodyguard)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유 모병된 용병들로 이뤄진 엘리트 부대로서, 공령의 크기나 경제력에 따라 수십 명(few dozen)에서 5천 명에 이르는 다양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부대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중기병(heavy cavalry)으로서, 이들은 '고참의(oldest)' 혹은 '최고의(best)' 근위대(guard)로 불렸다. 반면 '신참의(youngest)' 병력들은 경장 궁수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두 부류의 병력들은 군사 경험이나 기술 측면 뿐만 아니라 복잡한 봉건 사회 내에서의 신분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였다. 또한, 근위대 부대는 전문군인(professionals)과 보조병(auxiliaries)으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모든 왕공 군대의 근간(backbone)을 이뤘다.

 

 (러시아 기병의 모습. 좌측은 수즈달(Suzdal) 왕공의 중기병 근위대원의 모습이며 중앙은 러시아 왕공의 모습, 우측은 키에프 대공의 중기병 근위대원의 모습이다. 이 당시의 러시아 투구는 코를 포함한 얼굴을 부분적으로 가리는 마스크가 있는 것이 특징이며,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종류도 존재했다. 마스크들은 쇄갑형 아벤테일(aventail; 투구에 유연한 커튼 형태로 달려 목과 얼굴을 가리는 보호대)과 함께 전사의 얼굴과 목을 보호했다. 가장 중요한 무장으로는 아직도 칼과 창을 사용했다. 러시아 왕공의 복장은 색상의 풍부함과 밝기로써 구분된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여름일지라도 착용하는 모피 모자를 들 수 있으며, 코르즈노(Korzno)라고 불리는 특유의 외투 역시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복장은 러시아에서 15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카프탄(kaftan; 러시아 특유의 소매가 짧은 원피스 형태의 옷의 일종)에 비버, 검은담비, 담비 등의 모피로 치장하는 것도 가능했으며, 이는 착용하는 왕공의 높은 지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보통 병사들과 달리 왕공은 행군간에 카프탄 및에 쇄갑을 입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적이나 다른 동맹군의 암살자가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

 

 러시아 근위대의 무장은 초원(steppe)지역과 유럽 지역의 전통 모두를 물려받았다. 칼(sword)의 경우 유럽 타 지역의 칼과 똑같았으며, 일부는 아예 서유럽에서 수입된 것들도 있었다; 또한 전투 도끼(war-axe), 철퇴(spiked maces), 세이버(sabre), 전투 나이프(fighting knives), 단도(smaller daggers) 들도 마찬가지다. 키스턴(kistern)이라고 불리는 철퇴(mace)의 경우, 흑해 북부 연안의 유목민들의 것을 모방한 것이다. 키스턴은 철제 머리를 가졌으며, 속을 비우고 납을 녹여 부은 종류도 있었다. 손잡이는 나무로 되어 있으며, 가죽 끝이 달려있었다. 키스턴 한방이면 전투에서 적을 기절시킬 수도 있으며, 늑대를 죽이는 데에도 유용했다. 이런 종류의 무기는 저렴하고 쉽게 획득 가능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이용했다. 싸구려 버전의 경우 머리를 뼈로 만든 경우도 있었으며, 강도나 도적단에 의하여 17세기까지 사용된다. 초원 지역의 사람들과의 전투가 잦았던 탓에, 궁술 역시 러시아 전역에 퍼지게 된다.

 

(체르니코프 부근의 네진(Nezin)에서 출토된 12~13세기 경의 무기 및 마구류. 유목민들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런 종류의 장비 역시 러시아 기병들이 사용했다: 1. 세이버(sabre)로서, 아랍 글자가 상감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슬람 세계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2. 등자로서, 역시 어떤 무늬가 상감되어 있다.)

 

 방어용 갑옷은 기본적으로 쇄갑형 호벅(mail mauberk)으로 되어있었으며, 13세기에 이르르면 정예 전사들의 경우 대부분 찰갑형(lamellar) 혹은 인갑형(scale) 흉갑(cuirass)을 그 위에 덧입게 된다. 흉갑 자체는 아시아와 비잔틴 제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작은 조각들을 서로 묶은 형태(laced lamellar construction)인 형태이며, 가끔씩은 천 옷이나 가죽 옷 위에 비늘(scale)을 덧붙인 형태로 되어 있기도 하다. 다리를 보호하기 위한 유럽 방식의 쇄갑형 쇼즈(mail chausses) 역시 사용되었다. 방패는 원형(round)인 것도 있지만, 길쭉한 비잔틴 방식의 것도 있엇다. 그 밖에 전사들이 사용한 장비로는 투구(helmet)이 있는데, 가끔씩은 얼굴을 반쯤 가리는(half-mask) 장치가 되어있는 것도 있었다. 12세기 말로부터는 눈구멍 2개가 나 있고 얼굴은 완전히 가리는(full face-mask) 종류가 유행하였다. 이것은 유럽과 아시아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전투에서 통상 전사복(warrior's clothing)을 갑옷 아래에 입곤 했다.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각종 필사본의 세밀화와 기타 그림들에 이러한 전투복들의 색상들이 잘 나타나 있다. 쇄갑형 호벅 아래 입는 셔츠는 통상 무릎까지 길게 늘어졌으며,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 갈색 등등이 사용되었다. 높은 장화(high boots)는 염색된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쓰였고, 겨울에는 러시아 기후에 맞는 벙어리 장갑(mittens)을 착용했다. 비록 몇몇 연대기에서의 기록과는 틀리긴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전사들이 행군 중에 갑옷을 착용하지는 않았다. 이를 당대의 사람들은 소위 '루스인 방식의 행군(marching in the manner of the Rus)'이라고 불렀다.

 

(키에프 공령의 남쪽 변경 지역 부근에 있는 루스 강(Rus River) 주변에서 출토된 12~13세기 무렵의 군사 장비들. 이것들은 키에프 대공 휘하에서 복무하던 유목민 전사들의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1-2. 세이버; 3-4. 전면과 측면에 보스(boss; 돌출물)가 달려있는 철제 방패; 5. 창날에 대한 단면도가 포함된 전면 및 측면도)

 

 말에도 가끔씩 쇄갑이나 챔프론(chamfron; 말에 씌우는 투구)을 씌우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들은 그다지 흔한 것들이 아니었고 다만 남서 러시아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는데, 이 지역은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의 습격으로부터 매우 취약한 지역이었다. 이 장비들은 몽고의 침략 전후에 공히 사용된 것들이다. 

 

 이 외에도 러시아 왕공들은 마을(town)에서 징집된 도시 민병대(urban militia) 형태로 신민(subjects)들로부터 군사적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이들을 '검은 사람들(black people)'이라고 불렀다. 시골 사람들(rural populations)이 갖는 의무는 식량 제공에 있었으며, 이들이 징집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도시 민병대인 '검은 사람들'과 '신참 근위대(young bodyguards)'의 무기와 갑주는 왕공이 제공하거나 마을 무기고(town arsenals)에 있는 것을 사용했다. 이런 장비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고참 근위대(old guard)'의 군사 엘리트들이 사용하는 것만큼 다양하거나 고급인 것은 없었으며, 쇄갑형 호벅이나, 투구, 칼, 창들을 쓰게 된다. 그 외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부대 단위로(as a complete unit) 왕공들에게 고용될 수 있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병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알아서 조달해야 했고, 따라서 무장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스텝 지역의 유목민 전사들에게 터키 내지는 몽고의 짧은 복합궁이 중요한 무기를 차지한 만큼, 러시아 보병에게도 궁술은 중요했다. 그러나 러시아 보병의 경우 상대적으로 커다란 준 복합궁(semi-composite bow)을 사용했으며, 이것들은 여러 층의 나무들을 접착하여 만들어졌다. 가끔 자작나무 껍질로 감싸는 경우도 있다. 이 사진에 나타난 복원품은 러시아 보병용 혹은 사냥용 활의 부스러기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노브고로드의 크레믈린 박물관 소장))

 

 러시아 왕공들은 앞으로의 전투에서 닥칠 위협의 성격이나 심각성에 대해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이 몽고에 대항하여 이끈 군대는 대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무장 상태가 충실했고, 군사 경험도 풍부했다. 할크 강 전투에 참가한 세력을 포함한 러시아 공령들의 1223년 당시의 군사력은, 10, 11, 12세기 시절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전략 수준에서는 물론 전술 수준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가장 단순한 방어 작전에서부터도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공령들은 여러 변방 요새들을 건설했다. 대부분은 보다 북부의 사람들을 불러 주둔시켰지만, 여기에는 러시아 변경지대 방어를 위해 불러들인 한때 터키계 유목민이었던 톨크인(Torks)들과 베렌드인(Berends)들도 주둔했다. 또한 긴 토성과(long earth ramparts) 그 위에 나무 방책(wooden fence)을 올린 것 역시 만들어졌다. 때로는 이러한 '러시아 영토의 순찰 부대(sentry units of the Russian lands)'라는 것에 대하여, 위험한 여름 시기에 여러 왕공들이 공동으로 방어와 경계책임을 지도록 조직되는 경우도 있엇다. 어쨌든 이들은 폴롭티인들의 습격이 발생할 수 있을 만한 방향으로 신경을 쓰게 되어 있었다. 몇몇 러시아 왕공들은 폴롭티인들이야말로 이들의 공동의 적이며, 왕공들 각자의 힘만으로는 싸워나갈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러시아의 분열적인 봉건제도 하에서는, 장기적인 협력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결과 통상 공통적인 방어 전략은 없다시피 하게 된다. 

 

(클리마쿠스 성인(Saint Climacus)의 아이콘(icon; 그리스 정교의 성화,성상 등)에 부수적으로 그려진 조지 성인(Saint George)의 모습. 이 그림은 13세기 후반에 노브고로드에서 만들어졌으며, 전투 성인의 갑옷과 복장이 비잔틴 예술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커다란 칼을 보면 당대 러시아 무기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상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박물관 소장)

  

 공세적 목적으로 병력들을 동원하여 군대를 구성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으며, 러시아 공국 한곳(single Russian state) 단위의 군대 구성조차도 대단히 어려운 문제였다. 관습적으로 왕공은 스스로 자기 군대의 리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부대들은 스스로를 보야르(boyars), 즉 상급 귀족의 가신 집단으로 생각했는데, 이에 따라 이들은 각자의 보야르의 명령에만 복종할 뿐 다른 출처의 명령에는 전혀 복종하지 않았다. 심지어 왕공의 명령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12세기에는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자신의 군대를 이끈 왕공이 거의 없었다. 왕공이 충분한 권위를 가졌을 때만이 휘하 병력 전체에 대한 직접 통제가 가능했는데, 이것은 점차 희귀해져가는 일이었다. 이 조건을 갖춘 사람 중의 하나가 블라디미르(Vladimir) 공국의 독재적 왕공인 안드레이 보골룹스키(Andrei Bogolubskiy)였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도 군대를 직접 통솔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갈리치아의 왕공이자 연대기 작가였던 야로슬라브 오스모미슬(Yaroslav Osmomysl)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모욕을 당하면, 병력들을 손수 이끌지 않고 보이보데(voivode)[지정 지휘관]를 보내서 이끌게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그 결과, 여러 공령들에 의한 대규모 연합군이 결성될 경우, 참가한 왕공들 간에는 끊임없는 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으며, 때로는 각 왕공들간에 전투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 당연히 연합군 전반에 걸쳐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또한 중요한 전략 혹은 전술적인 의문점에 대해서는 왕공과 그 근위대들의 모임에서 통상 결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에서도 분규 가능성이 있었는데, 왕공과 휘하 근위대 간에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근위대 전원이 왕공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떠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신록이 가득한 남서 러시아 및 동부 우크라이나의 서부 초원지대(western steppes). 이곳은 제베와 수부타이의 몽고군이 1222년-1223년의 겨울을 보냈던 장소이다. 이 광대한 목초지는 부유하고 번성하던 서부 폴롭티 칸국(Western Polovtsian Khanate)의 심장부였으며, 폴롭티인들로서는 이곳을 싸움 한번 없이 포기할 수는 없었다.)

 

 병력 동원은 봉건적 원칙에 따라 이뤄졌다. 따라서 왕공은 휘하 근위대들이 사는 영지에는 특사(couriers) 및 광고원(public criers)을 파견하고, 마을(town)에는 집결 명령(order to muster)을 발송했다. 병력들은 마을 광장(town squares)에서 북(tambour-drum)을 치거나 군용 나팔(military trumpet)을 울려서 집결시켰고, 근처 작은 마을(villages)에 사는 사람들은 2일 내에는 집결하였다. 한편, 병력들이 전쟁에 참가하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럴 경우 왕공들은 실질적으로 손쓸 방법이 없었다. 강력한 왕공이었던 안드레이 보골룹스키조차도 1172년 볼가 불가르인(Volga Bulgars)들과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 오카 강(River Oka) 입구에 마련한 집결지에 각종 병력들이 집결하는 데까지 2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안드레이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았던 보야르들은 느리게 움직였으며, 당대 연대기 작가들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서두를 것 없이 재촉했다(hurried without haste)'. 

 

( 최근까지도 중세 몽고의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혀진 군사 장비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몇년 전, 동부 러시아의, 현 몽고 공화국과의 국경선 바로 북쪽에 있는 투바(Tuva) 지역의 한 동굴에서 상당수의 무기와 갑옷들이 발견되었다. 제품의 품질에 있어서 대단히 세밀할 뿐만 아니라, 몇몇 유물들의 경우 대단히 고급의 강철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는 중국으로부터의 기술적 영향을 의미하고 있다. )

 

 러시아 군대는 통상 여름 혹은 겨울에 움직였다. 각 계절마다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여름에는 말들이 풀 뜯어 먹을 곳이 많았고, 따라서 장거리 작전 혹은 심각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겨울에는 강이 얼었고, 물로 둘러쌓인 곳도 쉽게 접근할 수가 있었다. 겨울 기간에는 폴롭티인들을 공격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었고, 기습이 가능했다. 야간 행군은 갑자기 적진 앞에 등장하는 방법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행군 템포는 사전에 조율되었으며, 그 속도는 군대의 치중대(train of loaded wagons)에 따라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치중대는 음식, 마초, 무장 등을 수송했다. 갑옷은 일반적으로 전투 직전이 되어야 입었다. 통상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달리, 러시아 전사들은 쇄갑과 흉갑, 투구를 다 갖추고 행군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런 중장비들은 물론 가지고 다니기는 했지만, 착용은 위협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만이었다.

 

 급속 겨울 행군은 썰매 없이 이뤄졌다. 기마병의 일일 통상 행군거리는 약 50 킬로미터였지만, 하루에 최대 120 킬로미터까지도 움직일 수는 있었다. 물론 이런 거리는 행군을 지연시키는 치중대가 없는 경장 병력에 보조용 말을 추가 공급해 주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서부 초원지대(western Steppes)를 지배하고 있던 킵차크 터키 부족들은 당시 러시아인들에게 폴롭티인(Polovtsians)들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몽고의 1차 러시아 침공 당시 러시아 왕공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림 좌측은 폴롭티인들의 칸의 모습이며, 중앙부는 중장갑을 한 폴롭티 정예병(heavily armoured Polovtsian elite)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폴롭티 귀족 여성의 모습이다. 배경에는 이들이 지나가고 있는 발발(balbal)이라고 불리는 석조 조각상이 서 있으며, 이것들은 유목민들이 초원지대 여러 곳에 세운 바가 있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유목 생활을 했으며, 승마술과 궁술에 뛰어났다. 다만 이들 여성 궁사들이 사냥에만 참가했는지, 전투에도 참가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

 

 전역에 전개된 군대는 다리를 수리하거나 도로를 보강하는 것과 같은 여러 기능들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체 방호와 정찰도 필요하다. 정찰대가 전방으로 파견되어 적의 전초기지를 공략했고 가능한 경우 정보 수집에 필요한 포로도 획득했다. 경장비로 행군이 이뤄질 경우, 병력에게 식량과 마초를 공급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기능은 '탐사대(prospectors)'에 의해 행해졌는데, 정찰대와 마찬가지로 전방으로 보내졌고, 정찰뿐만이 아니라 보급품을 찾아다니는 일을 수행했다. 사실 여러 러시아 왕공들에게 정찰 임무는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러시아 전역에서 밤낮으로 정찰대에게 밀사(courier)들이 왔고, 왕공들에게 적의 활동에 대하여 보고했다. 강과 같은 주요 통상로는 이런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드네스터 강(River Dnester)변에 위치했던 갈리치아는 멀리 북쪽과 서쪽에 있는 원격지의 정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키에프 대공 역시 같은 원리로 멀리서 접근하는 적에 대한 정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밀사 외에도 상인들 역시 전령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러시아인들은 정찰 실패에 대해서는 가혹한 입장을 갖는 편이었는데, 예를 들어 갈리치아의 대공 블라디미르 공은 안드레이 보롤롭스키에게 '어째서 당신은 블라디미르의 군대가 당신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있었다는 거요?' 라고 물으며 당황했었다고 한다. 잘 조직된 정찰 조직은 왕공이 적의 침공의 방향과 성격에 따라 재빨리 대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리와 도섭장에 대해서는 항상 경비를 붙였으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스스로의 근위대에 대한 안전을 제공하기 위해서, 거주지로부터 100킬로미터 거리까지도 순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유명한 왕공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크(Vladimir Monomakh)는 저서 Exhortations(권고, 훈계)에서 정찰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몸소 83회 이상의 대규모 작전에 참가한 바가 있다.

 

 (철퇴(spiked mace)는 초원지대의 유목민 전사들에게서 자주 사용된 물건들이며, 서부 초원지대는 물론 러시아, 중부 유럽, 스칸디나비아 지역 등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이 사진에 있는 헝가리에서 출토된 13세기 물건들 처럼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대단히 작았다. (부다페스트 국립 박물관 소장))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 러시아 보병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는데, 이는 웅장한 기병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흥미가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병 역시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스텝 지역 깊숙히로도 들어가 작전했다. 장거리 작전의 경우, 보병은 하천 선박으로도 수송되었다. 때때로, 보병 지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왕공이 작전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보병 역시 기병을 격파할 수가 있었다. 보병의 주 무기는 짧은 창으로, 오늘날의 총검과 비슷했다. 그 외에 방패, 칼, 활 등이 보조적으로 사용되었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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