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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할크 강 전투 1223 (The Kalka River 1223) - 러시아 지휘부

박용수 2014. 10. 27. 15:16

 

 다음은 Osprey Publishing 사의 Campaign 시리즈 중의 하나인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를 (무단으로 ^^;) 번역한 일부입니다. 총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양이 많아 챕터별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러시아 지휘부

 

 

 갈리치아의 왕공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Mstislav Mstislavich, Price of Galicia)는 매우 활동적이며 정열적이고 진취적인 러시아 왕공이었다. 우달리(Udaly), 즉 '용감한 자'로 알려졌으며, 여러 러시아 공령(principalities)들에 대한 지배권을 다툰 여러 유력한 왕공가문(princely families) 중의 하나인 로스티슬라비치 가문(Rostislavichi dynasty)의 주요 멤버(leading member)였다. 키에프 대공(Grand Prince of Kiev)인 류릭 로스티슬라비치(Ryurik Rostislavich)의 조카로서,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는 군사전략촌락(strategic garrison town)인 토르체스크(Torchesk)의 총독으로 부임한다. 이곳은 키에프 대공의 군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다양한 터키 유목민(Turkish nomadic)들과 전직 유목민 보조병(ex-nomadic auxiliaries)들의 사령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토르체스크는 또한 폴롭티인(Polovtsian)들의 습격에 대한 중요 방어거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1207년,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는 키에프의 지도자와 충돌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토르체스크를 내놓게 된다. 그래서 그는 스몰렌스크 공령(principality of Smolensk)의 최 북단 도시인 토로페츠(Toropets)로 옮기게 된다. 이후에 그는 북부 러시아의 일에 관여하게 되고, 심지어는 몇 년간 대 노브고로드(Novgorod the Great)를 장악함으로써 러시아 북서부 전역을 장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는 노브로로드에서도 추방당하게 된다. 그 대신 그는 1221년까지 남서 러시아의 공령인 갈리치아(Galicia)에 그의 본거지를 건설하게 된다. 그는 이웃 폴롭티 군주인 코텐 칸(Koten Khan)의 딸과 결혼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러시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폴롭티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최고로 쳤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결혼에는 물론 정략적인 측면도 있었으며, 따라서 갈리치아와 폴롭티인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반면에 할크 강 전역(Kalka campaign) 당시, 똑같이 므스티슬라브의 이름을 갖고 있는 키에프와 체르니고프(Chernigov)의 왕공들에 대해서는 '대단한 반감(great feud)'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대패전을 겪고 난 뒤, 왕공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는 갈리치아에 틀어박혀 방어태세를 갖추었고, 1228년에 사망하게 된다.

 

               

(한때 스텝 지역 여기 저기에 산재되어 있던 balbal statues(발발상?)들 중에서 비교적 특징적인 것들로서, 이것들은 폴롭티안 킵차크 내지는 쿠만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사진의 남성과 여성상은 모두 컵을 들고 있다. 한편 이슬람 전래 이전의 토속신앙의 영향이 남아있는 터키 궁정 전통 의식 중에서는 소위 '컵 성사(cup rites)'가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모스크바 역사 박물관 소장)) 

 

 볼히니아의 왕공 다닐 로마노비치(Daniil Romanovich, the Prince of Volhynia)는 갈리치아의 왕공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의 사위였다. 그는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에게 소위 Rex Russiae라고 불렸고 갈리치아와 볼히니아 모두에서 왕공을 지냈던 로만 므스티슬라비치(Roman Mstislavich)의 아들이기도 했다. 로만 므스티슬라비치는 대단히 유능하고 정력적인 지배자로서, 그의 힘이 급격히 신장됨에 따라 주변 러시아 왕공들에게 두려움을 선사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가 1205년 사망하면서, 그의 뒤는 아직 어린아이였던 두 아들 다닐 로마노비치와 바실코 로마노비치(Vasilko)가 잇게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의 어머니이자 대단히 똑똑한 비잔틴 공주였던 안나(Anna)가 통치하게 된다. 그녀는 그녀 힘으로는 영토 전체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에 볼히니아만에 집중하게 된다. 그 결과 갈리치아는 외부 간섭에 노출되게 되었고 동서로부터 침공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가 갈리치아에 정착하여 주변 헝가리인들의 침공을 막아냄에 따라, 안나는 당시 18세였던 아들 다닐 로마노비치와 역시 이름이 안나였던 므스티슬라브의 딸과의 결혼을 승락하게 된다. 그는 볼히니아와 갈리치아의 강력한 연합을 만든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했다. 할크 강 전역에서, 그가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가 지휘권을 갖는데에 동의했다는 증거가 있긴 하지만,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여전히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의 장인과 마찬가지로 다닐 역시 할크 강 전투에서 생존하였고, 1264년 사망시까지 볼히니아를 지배하였다. 그의 만년에는 스스로 가장 강력한 왕공의 자격으로, 러시아의 주변 왕공들간의 시시한 전쟁들에서 평화 주재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가 잠시 키에프를 접수하는 것을 막은 것은 아니다. 그의 키에프 지배는 몽고군이 돌아와 1240년 도시를 접수하면서 끝나게 된다. 이후 다닐은 몽고의 수도로 가서 1245년 대 칸에게 충성을 다짐(offered his submission)하게 된다. 다음 해부터 갈리치아의 그의 군대는 몽고군 형식으로 무장하게 된다. 몇 년간 다닐은 몽고 종주권 하의 전 러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서구세계와 리투아니아인(Lithuanian)들의 도움을 기대하며 대 칸을 배신하게 된다. 이 배신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다닐은 다시금 몽고에게 복종하게 되며, 몽고의 리투아니아 침공에 참가하기까지 하게 된다. 그 이후로 그는 죽을 때까지 칸에게 복종하는 봉신으로 남게 된다. 

 

 (전투를 준비하는 몽고인들. 몽고 군대에는 다양한 병종들이 존재했는데, 중장기병과 경기병이 모두 존재했다. 이들이 사용한 무기와 갑주는 형상이나 원류가 모두 다양했다. 예를 들어 이 그림에서 보면, 왼쪽에 있는 몽고 중장기병은 순수하게 중앙아시아 스타일이다. 중앙에 있는 경기병 기마사수의 장비 역시 전적으로 몽고 스타일이다. 그러나 세번째 우측의 중기병의 경우 중국에서 만들어진 무장과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몇년 후, 서유럽 선교단이자 여행가인 플라노 카르피니(Plano Carpini)가 몽고 기병의 복장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게 되는데, 이는 1223년 이후 별로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대공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 (Grand Prince Mstislav Romanovich)는 스타리(Starii), 즉 '늙은이'로 불렸으며, 키에프의 지배자였다.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처럼 므스티슬라브 모마노비치는 키에프 대공 류릭의 조카이자 로스티슬라비치 왕공가문의 주요 멤버였다. 그의 삶 전반부에서 그는 스몰렌스크의 왕공이었던 바가 있었으며, 1206년에 류릭이 잠시 키에프를 상실한 시절, 강력한 요새촌인 벨고로드(Belgorod)를 함락시킨 바가 있었다. 사실 로스티슬라비치 가문은 키에프를 상실한 적이 몇 번 있었다. 1212년에 그가 키에프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스몰렌스크가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의 세력 근원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다른 라이벌 왕공가문들이 그의 위치를 끊임없이 위협하였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정략 결혼을 통한 동맹 시도들은 대체로 실패하고 만다. 한편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는 갈리치아를 위협하는 헝가리인들과도 싸워야 했다. 1221년 여기서 그는 휘하 군대를 직접 이끌고 싸워 헝가리인들에 대해 큰 승리를 얻게 된다. 이는 러시아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강화시켰고, 그 결과 로스티슬라비치 가문은 1223년까지 갈리치아, 키에브, 스몰렌스크를 포함한 남부 러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의 다른 경쟁 공령들은 작고 약하거나 나가떨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반면에 로스티슬라비치 가문과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 대공은 북부 러시아에 대해서는 별다른 권위나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는 할크 강 전투에서 패하여 몽고인들에게 항복한 3일 후에 살해당한다.

 

 (할크 강 전투 시대로부터 몽고 병사에 대한 삽화는 이슬람 예술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서사시 샤흐나마(Shahnamah)가 적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의 기원이 서기 1300년 무렵이다. 이것들은 '작은 샤흐나마(Small Shahnamahs)'로 불렸는데, 아마도 시라즈(Shiraz)나 바그다드(Baghdad)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필사본에 나오는 병사들과 지배자들, 수행원들은 명백히 몽고 복장을 입고 있으며, 그림에서 보다시피 일부는 커다란 몽고 스타일의 활을 들고 있다. (테헤란 레자 아바시 박물관 소장))

 

 폴롭티아인들의 칸 코텐 (Koten, Khan of the Polovtsians)은 부족민들에 대한 영향력이 서부 유럽 지배자들이나 러시아 왕공들에 비하여 그다지 강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동부와 서부의 폴롭티 부족 연합들은 비교적 최근에야 쾬첵 칸(Konchek Khan)에 의해 느슨한 연합으로 뭉쳐졌다. 그는 동부 혹은 '야생의(wild)' 폴롭티인들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두 딸은 12세기 후반에 러시아 왕공들에게 시집갔다. 쾬첵 칸은 전래의 폴롭티인 정부 시스템도 바꿨는데, 기존 시스템에서는 지배권을 가장 나이든 부족장이 맡았던 반면,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그의 아들인 코텐이 갖도록 했던 것이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러시아인들과 달리 코텐 칸은 동방의 스텝 지역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사실 그는 동부 킵차크 터키 부족과 혈연관계에 있는 캉리스(Qanglis)로부터 몽고의 침략 전쟁을 전해듣고 있었다. 상당수의 휘하 전사들이 호라즘의 군대에서 복무했었으며, 그루지아 왕의 정예 킵차크 터키인 근위대(elite Kipchaq Turkish guard)였다가 살아돌아온 자들로부터도 비슷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코텐 칸의 형제인 유리(Yuri)와 그의 아들 다닐(Daniil)이 폴롭티인 군대를 지휘하여 1222년 몽고인들이 코카서스 산맥에 나타났을 때 대적했다. 폴롭티인들은 동맹이었던 알란인들과 기타 코사서스인들을 배신했다가, 몽고인들에게 패배하고 만다. 러시아 영토로 달아난 뒤에, 코텐 칸은 키에프에서 열린 러시아 왕공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은 그들이 우리 땅을 탈취했습니다, 내일은 그들이 여러분의 땅을 탈취할 것입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몇몇 러시아 왕공들은 할크 강 전역이 시작될 때 코텐에게 폴롭티 군대와 동행하기는 하지만 폴롭티인들의 칸 자리에서는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어쨌든 할크 강의 패전 직후에 그가 칸 자리에 (다시) 위치하고 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코텐 칸은 패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키에프와 체르니코프, 갈리치아 공령들의 동맹을 지원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는 1225년과 1228년에 서부 러시아 왕공들을 도와 휘하 병력들을 이끌었으며, 1235년에 올고비치 왕공가문(Olgovichi princely dynasty)이 키에프를 장악할 때에 함께했던 폴롭티인들도 아무래도 그가 지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238년에 몽고인들이 더 심각한 침공을 해왔을 때에도 폴롭티인들의 칸이였다. 이 무렵이 되자 코텐 칸은 전투를 통해 몽고인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는 신민들 중에서 서부 스텝 지역을 떠나 카르파티안 산맥(Carpathian Mountains)을 거쳐 헝가리로 도피하고자 하는 자들을 이끌게 된다. 일부 폴롭티인들은 이미 헝가리로 달아난 상태였고, 그곳에서 이들은 쿠만인(Cumans)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코텐 칸은 헝가리가 그와 그의 40,000명의 전사들을 받아준다면 기꺼이 모두 카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헝가리의 왕 벨라 4세(King Bela IV)는 대단히 기꺼워하며 영세식에서 코텐의 대부가 되기로 한다. 그러나 1241년 몽고인들이 헝가리를 위협하게 되자, 많은 헝가리 귀족(barons)들은 이 위기가 코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그와 폴롭티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코텐과 그의 가족들은 다른 폴롭티 귀족들과 함께 체포당하게 된다. 몽고인들이 헝가리를 침입하자, 코텐 칸은 그들이 적에게 넘겨질 예정임을 알아채게 된다. 이에 그는 아내를 죽이고 자살하고 만다. 코텐 칸의 전사들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이들이 헝가리인들이 몽고 침략자들과 싸우는 것을 돕기를 거부하고 나라 밖으로 떠나갔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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