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 관련

[스크랩] [번역] 할크 강 전투 1223 (The Kalka River 1223) - 전역의 전개 (3)

박용수 2014. 10. 27. 15:19

  다음은 Osprey Publishing 사의 Campaign 시리즈 중의 하나인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를 (무단으로 ^^;) 번역한 일부입니다. 총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양이 많아 챕터별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몽고군의 퇴각 (The Mongol Withdrawl)


 드네프르 강(River Dnieper)에 집결한 연합군의 총 전투병력은 약 8만~ 10만명일 것으로 추산되지만, 이 중에서 제대로 훈련받고 무장을 갖춘 인원은 약 15,000명~ 20,000명 가량 뿐이었다. 이 무렵 몽고군의 첫번째 그룹이 동쪽 제방에 나타났다. 이들은 활과 세이버, 올가미 정도만 갖고 있고 갑옷은 갖추지 못한 기마 궁수들에 불과했기 때문에, 러시아군과의 교전 당시 젊은 러시아 병사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들이 나중에 경멸조로 기술한 바에 따르면, 몽고인들은 폴롭티인들보다도 못해 보인다고 했다. 반면에 비교적 전투 경험이 있던 러시아 군인들의 경우에는, 이 몽고인들이 활솜씨가 뛰어나서 기존에 러시아군이 상대했던 어떤 적들보다도 위협적이었다고 보았다.

 

(키에프의 우스펜스키 성당(Uspensiki Cathedral)은 11세기 후반 무렵에 키에프 동굴 수도원 지구(Kievan Cave Monastery complex)에 건설되었다. 이곳은 러시아에 전파된 기독교(Christianity)의 중심지였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나치 군대를 피해 달아나던 소련군에 의해 1941년 파괴되었다.)

 

 교전 바로 다음 날(5월 16일로 추정됨), 갈리치아 공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는 휘하 병사들과 일부 폴롭티인들이 포함된 소규모 분견대를 이끌고 드네프르 강 건너편 제방으로 이동하여 몽고군 전초부대 일부를 공격했다. 결과는 대단히 고무적이어서 몽고군은 즉시 초원드로 달아났다. 갈리치아 공은 이들을 추격했고, 폴롭티인들의 공동묘지를 둘러싸고 있던 나무 울타리 뒤에 숨어있었던 이름이 겜야벡 또는 하마벡(Gemyabek or Hamabek) 쯤 되는 몽고군 지휘관을 생포했다. 폴롭티인들은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 공에게 이자를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 포로는 폴롭티인들의 손에 처형되었다.

 

(이것들은 이스탄불에 있는 비잔틴 황궁 유적에서 발견된 철제 얼굴 가리개들로,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것들은 황제의 엘리트 근위대를 구성하고 있던 폴롭티-쿠만-킵차크(Polovtsian-Cuman-Kipchaq) 병사들이 사용했던 것들이다. 이런 방식의 얼굴 가리개들은 남동 유럽 초원지대(south-east European steppes)에서 볼가 불가르 지역(Volga Bulgar territory)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도서관 사진 보관소 소장))

 

 그 다음 날에는 볼히니아 공 다닐과 유리 도마네리치가 또 다른 분견대를 지휘하여 강 건너편으로 정찰을 실시했다. 이들은 가축들을 돌보고 있는 소규모 몽고인들 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러시아인들이 공격하자 몽고인들은 가축들을 남겨두고 달아났다. 이러한 성공들에 고무된 러시아 지휘관들은 드네프르 강을 쉽고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겠다고 판단한다. 부교가 가설되었고, 군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강을 건넜다. 이러한 초기의 성공들로 인하여 연합군에는 일종의 자만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규모는 13세기 기준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대규모였고, 반면 지금까지 부딛힌 타타르(Tartar; 러시아인들이 몽고인등을 부르던 표현)인들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제 연합군은 강을 건너 초원지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곳은 적어도 러시아인들에게는 미지의 땅이었다. 연합군 앞에서는 소규모의 수부타이 군대의 선견대가 퇴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가끔 몽고군이 적에게 의도적으로 포로나 가축들을 남겨두는 것처럼 보였다. 연대기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그 결과, '전군에는 가축들이 넘쳐났고, 진군할 수록 그 수는 불어났다'.

 

 

 연합군의 지휘는 왕공 회의에서 결정되었는데, 어떻게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가에 대한 의견은 계속 갈려지기 마련이어서, 드네프르 강을 출발한 이래 계속 논쟁과 다툼이 계속되었다. 딱 한가지 동의하는 바가 있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은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한편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 공과 그를 지지하는 왕공들은 적을 계속 추격하기를 바랬지만, 키에프 공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는 단번에 드네프르 강을 건너는 것은 위험하다며 신중을 기하기를 바랬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몽고군과의 전장은 드네프르 강 주변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연합군이 강을 건너는 것으로 결론이 난 이상, 연합군은 진군에 신중을 기하고 초원지역 너무 깊숙히 들어가는 것은 피해야 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봄의 풀로 덮인 초원지대로 깊숙히 들어가게 된다. 최근에 몽고인들에게 초원지역을 빼앗겼던 폴롭티인들의 입장에서는 대규모 러시아 동맹군을 등에 업은 채 고향을 되찾으러 몽고인들과 싸우게 되는 셈이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세 이슬람 시기에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는 매우 특이한 양식의 석조 부조 양식이 발전되었다. 일면으로는 이슬람 이전의 사산조(pre-Islamic Sassanian) 방식의 조각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사진에 나타난 복장과 무장, 마구류 등을 살펴보면 몽고 양식임을 알 수 있다. )

 

 (대부분의 중세 러시아 아이콘 그림들과는 달리, 테오도르 성인(St. Theodore)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실제 당대에 사용한 무기와 갑옷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제작 시기는 117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 크레믈린 박물관))

 

 9일에 걸쳐 폴롭티인들이 선봉에 섰으며, 여기에는 갈리치아와 볼히니아의 비교적 어린 병사들로 이뤄진, 다닐 공 휘하의 연합군 전위부대(advance guard)가 함께했다. 이들이 가는 길에 몽고군의 전방 초소들은 하나 둘씩 함락되었다. 매번 몽고인들이 도망칠 때마다 몽고군의 작고 빠른 말(small, fast ponies) 때문에 몽고군은 달아날 수가 있었다. 연합군 전위부대(advance guard) 뒤로는 갈리치아 공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가 이끄는 주력 부대의 선발대(vanguard)가 뒤따랐다. 그 뒤로는 다시 체르니코프 군대가 뒤따랐고,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 공이 이끄는 키에프 군대가 후위를 맡았다.

 

(이 12세기 경에 만들어진 부조는 블라디미르(Vladimir)에 있는 드미트리 소보르 성당(the Cathedral of Dmitri Sobor) 외곽에 있는 것으로, 왼쪽에 있는 병사가 작은 머리를 갖는 메이스(mace;철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점이다. 한편 오른쪽의 반인반조(half-man half-bird)의 경우 칼을 사용하고 있다. )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국경선 근방에 있는 드네프르 강 남쪽 제방 위에는 쿄틴 요새(fortress of Khotyn)가 서 있다. 지금의 석조 성곽은 13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지어진 것이지만, 12세기에는 이 자리에 목조 성곽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요새는 갈리치아인들의 요새로서, 동쪽의 초원 유목민들의 위협에 대비한 것이 아니라 카르파티아 산맥 너머에 있던 헝가리 왕국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

  

 더운 날씨에 지쳐가는 기병들이 호위하고 있는 수많은 수레들이 초원 지역을 가로질렀다. 연합군을 드네프르 강에서 멀리 유인하고 미끼 부대들을 적의 전위에게 먹이로 넘겨주면서 수부타이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부타이와 제베 노욘은 적이 패전 후에 드네프르 강으로 달아나기 어려운 장소를 전장으로 골랐다. 연합군이 실수를 하게 되면 몽고군의 공격은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었다. 반면 러시아 왕공들간의 다툼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는데, 이야말로 몽고 지휘관들이 바라던 것이었다.

 

 (겜야벡(Gemyabek)의 체포. 몽고군은 달아나는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에게 추격당한다. 후위대를 맡고 있던 지휘관 중 하나였던 겜야벡은 낙마하고 나서 울타리가 쳐진 폴롭티인들의 공동묘지 성소로 숨어들게 되지만, 러시아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고급 장교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래도 양질의 갑옷과 장비들을 착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겜야벡을 수행했던 전사들은 아마도 가벼운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었을 것이고, 추적자들을 따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사실 몽고인들이 아니라, 몽고인들에게 복종하는 봉신으로서 트란스옥사니아에서 제베와 수부타이군에 합류한 위구르인(Uighurs), 퉁구스인(Tungus), 터키계 무슬림(Turkish Muslim)인들일 가능성이 높다. 몇몇 기록에는 하마벡(Hamabek)이라고도 되어 있는 겜야벡은 터키식 이름일 것으로 생각된다. )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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