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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할크 강 전투 1223 (The Kalka River 1223) - 전역의 전개 (1)

박용수 2014. 10. 27. 15:19

 다음은 Osprey Publishing 사의 Campaign 시리즈 중의 하나인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를 (무단으로 ^^;) 번역한 일부입니다. 총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양이 많아 챕터별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역자 주[1] : 오늘날 Kur(Kura)강과 Araxes(Aras)강이라는 2개의 강이 따로 존재하며, 이들은 코카서스 산맥을 따라 흐르다가 하류에서 서로 만나 카스피해 서안으로 흐릅니다. 이 일대 지역을 Kura-Aras lowland 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http://en.wikipedia.org/wiki/Kura_River) )

 

 


전역의 전개 (The Campaign)

 

 

 


코카서스 산맥에서 크리미아 반도까지 (From the Caucasus to the Crimea)


 호라즘 샤 (Khwarazmshah; 호라즘의 국왕)의 3만 병사들과 페르시아 지원군을 무찌른 장대한 여정과 전투가 있은 후, 몽고군 지휘관은 마침내 호라즘 샤가 죽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확신이 선 후에야 비로소 몽고군은 겨울 방목지에서 휴식하게 되는데, 이곳은 오늘날 북서 이란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위치한 무간스크 초원(Mugansk steppes)의 과거 아락세스 지역으로 불린 퀴르 강 제방 일대(banks of the River Kur, the ancient Araxes)[1]에 위치하고 있다. 휴식 기간 동안 수부타이(Subodei)는 징기스 칸(Genghiz Khan)으로부터의 명령을 수령한다. 즉,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행군하여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폴롭티 칸국(Polovtsian Khanate)을 뒤에서부터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카스피해 북쪽을 돌아서 중앙아시아에 있는 몽고군 주력과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장대한 계획이었다.

 

 (제베 노욘과 수부타이 바하두르가 오늘날 동부 터키,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해당하는 복잡한 산악지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지역 안내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이들 안내자들이 달아나게 되면서 몽고군은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징기스 칸이 친히 보낸 증원군이 추가되고 현지에서 뽑은 쿠르드(Kurdish)인과 투르크멘(Turkmen) 전사들이 합세한 뒤인 1222년 9월, 수부타이와 제베(Jebei)는 그루지아(Georgia)를 침공했다. 그루지아의 왕(Georgian tsar or king) 게오르기 4 라샤(George IV Lasha)가 이들을 공격했지만 결국 전멸당하고 마는데, 몽고군은 일단 도망치는 척 하다가 그루지아군을 매복공격했던 것이다. 간자(town of Ghanzha)와 세마하(town of Shemaha)는 몽고군의 강습에 함락당해 약탈당했고, 보다 남쪽에 있던 위대한 이슬람 도시 타브리즈(great Islamic city of Tabriz)는 저항조차 못한 채 항복했다.

 

(12-13세기의 북서 코카서스 지역의 군사 장비들. 이것들은 코소기인들이나 알란인, 혹은 근처의 폴롭티인들이 착용했을 장비들이다: 1-3. 세이버(sabre;기병도). 손잡이의 측면과 후면도가 나타나 있다; 4. 측면에서 본 단면도와 함께 정면과 상면에서 본 투구의 모습; 5-7. 화살촉; 8. 전사의 허리띠에 사용하는 여러가지 부속품들)

 

 이 전역이 진행되는 동안 몽고군은 복잡한 코카서스 산맥의 길을 알려줄 안내자들을 몇 명 사로잡았다. 몽고군은 이들 중 하나를 처형함으로써 이들이 꼼짝없이 몽고군을 안내하지 않을 수 없게 겁주었다. 몽고군은 기마병과 낙타 행렬을 이끌고 답답하리만치 둘러싸인 산맥 사이를 지나고 지나, 드디어 내리막길인 다르얄스크 협곡(Daryalsk ravine)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안내자들이 도망치게 된다. 한편 폴롭티인들도 드디어 몽고군이 접근해 온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된다. 이에 폴롭티인들은 코카서스 북사면에 살고 있던 이아시안 민족(Iasian people)과 연합된 군대를 파견한다. 연합군은 코카서스 산맥에서 보다 저지대의 계곡으로 이어지는 통로들을 감제하고 있는 테렉(Terek)에 주둔하게 된다.  

 

 (이 유명한 12세기 벽화는 키에프의 산타 소피아 성당(Cathedral of Santa Sofia)에 있는 것으로서, 러시아 혹은 유목민 귀족이 초원 지대에서 말을 사냥하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당시 초원지대에는 야생 혹은 반 야생의 말떼들이 아직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러시아 왕공 군대에서 말을 확보하는 원천 중의 하나였다. )

 

 수부타이와 제베는 몽고군이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좁은 산악 통로에 갖힌 채 적군에게 포위당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안내자들이 이미 도망쳤기 때문에 지리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고, 반면에 적군은 숫자 상 엄청나게 우세했다. 몽고군에게는 통상 전투 방식으로 병력을 배치할 공간이 없었고, 강점인 몽고 기병대가 전통적인 기술을 사용할 만한 여지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적을 우회할 길도 없었다. 몽고군은 위기상황에 놓였고 단지 적의 자비만을 바래야 할 판이었다. 다만 한가지 가능성은 적을 기만하는 것이었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폴롭티의 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며 신앙심이 깊어서 유혈사태도 원치 않으며, 다만 원하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라고 했다.

 

( 북서 코카서스 산맥지역의 쿠반(Kuban) 지역에서 출토된 세이버. 13에서 1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전형적인 몽고계 금장한국(Mongol Golden Horde)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모스크바 국립 역사 박물관 보관실 소장))

 

 몽고군은 여기에 상당한 선물을 함께 딸려보냈고, 그 결과는 낙관적이었다. 폴롭티인들은 말을 타고 북쪽의 고향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폴롭티인들이 사라지자 몽고군은 북부 코카서스의 계곡에 남아있던 지역민족인 이아시아인(Iasians), 코소기인(Kosogians), 알란인(Alans) 전사들을 공격해 손쉽게 해치워버렸다. 그 다음으로 몽고인들은 지역 마을들을 공격하여 가축과 말들을 빼앗고 북부 코카서스 전역을 약탈했다. 이제껏 약탈한 것으로도 식량은 풍족했고,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었지만, 몽고인들은 폴롭티인들의 영토를 침공한다. 몽고인들의 기습적인 공격에 폴롭티인들은 돈강(River Don) 근처의 대회전을 포함한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나이든 폴롭티의 지도자들 여럿이 살해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드네프르 강(River Dnieper)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난다.

 

 

 

러시아인들과 폴롭티인들의 반응 (The Russian and Polovtsian reaction)

 

 아마 이 시점에 러시아 왕공들은 몽고인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최초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 러시아 왕공들과 폴롭티의 칸들 사이의 관계는 적대관계라고는 하기 어려웠고, 종종 조약이나 동맹 등도 맺는 관계였다. 귀족 가문간에 서로 결혼 관계가 성립하기도 했으며, 양 측의 엘리트들의 상당수는 서로의 언어와 풍습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다수의 폴롭티인들이 도피해왔던 러시아 남부 변경지대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 오늘날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 초원의 봄 모습으로 수풀이 무성하다. 이곳은 일부 낮은 언덕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평탄하다. 또한 러시아에서부터 시작되는 큰 강들 외에도 작은 수많은 하천들이 이곳 저곳을 가로지르고 있다. )

 

 겨울은 빨리 닥쳤으며, 거대한 볼가 강, 돈 강, 드네프르 강 사이에 있던 초원지대는 몽고군이 혹독한 초원의 겨울을 지내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몽고군은 바퀴가 있는 수레 등을 사용하지 않았다; 전역 내내 몽고군의 모든 물자는 수많은 말과 박트리안 낙타(Bactrian camels)의 등 위에 있었다. 또한 각각의 전사들은 열마리 이상의 말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대에서 다수의 양떼를 길러서 식량으로 사용했다. 이는 몽고군이 어떠한 중세 군대에 비교해도 우월한 이동속도를 갖는 원인이었으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전략적 강점이었다. 반면 이들이 한 곳에 모여있게 되면, 이들이 데리고 있는 대규모의 동물들을 먹이는 일은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초원지대 대부분 지역은 식생이 그리 풍부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먹이 때문에 군대를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니게 하는 것 역시 상당한 위험 요소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 서부 스텝지역(western steppes)에서는 식생이 풍부하고 토양은 비옥했기 때문에, 폴롭티인들이 사라진 이곳에서 몽고군은 여기저기 흩어져 휴식과 재충전을 할 수 있엇다.

 

 (할크 강 전역(Kalka campaign) 무렵 시기에 러시아에서 사용된 다양한 종류의 투구류들. 대부분은 원뿔모양이지만, 일부(A&B)는 코 보호대(nasal)가 있으며, 일부(C)는 부분 얼굴 가리개(partial face-mask)가, 일부(D)는 후기 중세 러시아에서 유행하는 끝이 뾰족한 형상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 크레믈린 병기창 및 역사박물관 소장) )

 

 한편 서부 폴롭티 부족 연맹의 지도자 코텐 칸(Khan Koten)은 갈리치아(Galicia)의 러시아 왕공인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Mstislav Mstislavich)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코텐은 그의 사위이기도 했던 므스티슬라브에게 그의 국민들을 보호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외의 다른 폴롭티 칸들 역시 다른 러시아 왕공들에게 가서 도움을 간청하고 있었다. '운 좋은자(The Lucky)'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는 차마 장인의 간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러시아 왕공들에게 키에프(Kiev)에서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왕공들이 도착하자 폴롭티인들은 명마와 낙타들과 같은 선물들을 안겨주며 제발 러시아인들이 도와줘야 한다며 간청했다. 폴롭티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타타르인(Tatars)라고 알려져 있는 몽고인들이 폴롭티인들을 무찌르게 되면, 그 다음 차례는 러시아인들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갈리치아의 왕공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는 여기에 동의했으며, 나아가 다른 러시아 왕공들에게 만약 러시아인들이 폴롭티인들을 돕지 않는다면 폴롭티인들은 몽고인 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즉, 몽고인들이 러시아인들을 공격하려고 할 때 그 전력이 더 강력해진다는 뜻이었다.

 

( 키에프의 산타 소피아 성당에 있는 12세기 벽화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점이 많다. 이 그림에서 곰과 싸우고 있는 기병에게는 등자(stirrups)가 없다. 당시 러시아와 주변 유목민 전사들이 수세기에 걸쳐 이미 등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는 비잔틴 필사본 삽화에 나타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

 

 폴롭티인들의 애원과 선물의 영향 외에도, 다른 곳에서 몽고군이 저지른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전해듣게 된 러시아 왕공들은 몽고인들에 맞서기 위해 폴롭티인들과의 동맹을 맺는 데 찬성하게 된다. 이 당시의 전쟁에서는 군대가 지나가는 지역은 황폐화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몽고인들이 러시아 도시들에 가까이 오기 전에 먼저 나가 맞싸우기로 결심했다.

 

 한편 몽고인들은 폴롭티인들의 서부 스텝지역에서 겨울을 보내던 도중, 명목상 제노바 공화국의 소유로 있으며 서유럽인들의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서 부유했던 크리미아 반도의 수닥(Sudak or Sugdeya)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또한 비교적 길고 취약했던 트란스옥사니아의 몽고군 주력과의 통신망도 강화시켜 두었다. 몽고군은 1221년과 1222년간 이란과 코카서스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지나가는 길마다 소규모 병력들을 남겨두어 명령과 보고를 릴레이 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일련의 역참 체계를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통신 속도는 매우 놀라울 정도여서 단 하룻만에 600km 이상을 전달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통신 수단으로 인하여 징기스 칸은 휘하 고급 지휘관들과 긴밀한 연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할크 강 서쪽에 있는 언덕들은 높지는 않지만 기복이 심하고 초목이 우거진 편이다. 이곳이 아마도 몽고군들의 퇴각로이자 전투 전에 러시아인들이 진군한 경로일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전투가 끝난 뒤에 키에프인(Kievans)들이 최후의 저항을 한 곳도 이곳이 아닐까 한다. )

 

 수부타이와 제베가 돈 강의 브로드니키(Brodniki)와 동맹을 맺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략 1222년-23년의 겨울 시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브로드니키는 러시아의 공령들에서 탈주하여 돈 강 제방지역에서 살고 있는 슬라브어를 하는 변경민들 및 전사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은 미래의 코삭(Cossacks)들의 선조격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할크 강 전투에서 몽고군의 동맹군 입장으로 전투를 기록하게 된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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