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Osprey Publishing 사의 Campaign 시리즈 중의 하나인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를 (무단으로 ^^;) 번역한 일부입니다. 총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양이 많아 챕터별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전투 (The Battle)
1223년 5월 31일, 연합군은 할크 강(Kalka River) 제방에 다달았다. 정확한 전투 장소에 대해서나, 이 작은 강이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할크 강은 분명히 아조프 해(Sea of Azov)를 향해 흘러가는 강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마리우폴(Mariupol) 보다는 북쪽에 있었을 것이다. 이날 아침에도 몇 차례 몽고군과의 소규모 접전이 있었으며, 역시 몽고군은 달아났다. 이날 러시아 왕공들 사이에서는 다시금 논쟁이 불붙었는데, 논쟁의 핵심은 군대가 보다 더 진군할 것이냐 아니면 방어에 적합한 장소인 현 위치에 머물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반나절 동안 논쟁이 계속되었고 다툼은 사그러들기는 커녕 점차 심해졌다. 결국 왕공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더운 5월에 벌어진 할크 강으로의 진격 과정에서 러시아 병사들 대다수는 갑옷을 착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쇄갑과 기타 갑옷, 방패들은 수레에 실었으며, 비상시에는 원형으로 배치하여 임시 방편의 축성 진지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은 임시 방어시설 속에서 러시아인들은 끈질긴 저항이 가능했다. 러시아인들은 전쟁에 나가게 되면 최대한 화려하고 웅장한 복장을 하고 나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복장에는 붉은 셔츠도 포함되는, 중세 러시아어에서 '붉은'은 '아름다운'과 동의어였다(역자 주: 현대 러시아어에서도 두 단어는 서로 비슷함. 끄라씨나야(붉은)-끄라씨바야(아름다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죽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폴롭티인들이 전위로서 앞서나가 있었고, 러시아 주력의 측면 역시 기병이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이 나타나더라도 갑옷을 입을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드네프르 강에 있을 당시, 갈리치아 공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는 장인인 코텐 칸 대신에 다른 칸인 야룬(Yarun)이 폴롭티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야룬과 폴롭티아인들은, 다닐 공이 이끄는 볼히니아 군대와 함께 할크 강 너머에서 공세를 지속하고 있었다. 갈리치아 군대가 그 뒤를 따랐고, 다음으로 체르니코프 공 므스티슬라브 스뱌토슬라비치가 이끄는 군대가 이어졌다.
(러시아군의 공격 : 남서쪽 방향에서 본 것으로, 1223년 5월 31일 아침에 있었던 러시아군의 몽고군 선발대에 대한 최초 공격에 대한 그림. 러시아군은 공격을 조율하는 데에 실패하였고, 각각의 부대가 별도로 진격함으로써 할크 강에서 이들은 분단되게 된다. )
[1. 수부타이 바하두르 휘하의 몽고 기병 중앙군 / 2. 제베 노욘 휘하의 몽고 기병 우익 / 3. 츄기르 칸과 테시 칸 휘하의 몽고군 좌익 및 폴스키니아 휘하의 브로드니키 군대 / 4. 몽고 기병 선발대 / A. 러시아 군대의 전위와 측위를 맡은 폴롭티 기병대. 야룬 칸이 지휘한 것으로 판단됨. / B. 러시아군 선발대를 맡은 다닐 로마노비치 공 휘하의 볼히니아 군대 / C. 므스티스라브 므스티슬라비치 공 휘하의 갈리치아 군대 / D. 므스티슬라브 스뱌토슬라비치 공 휘하의 체르니코프 군대와 올렉 공 휘하의 쿠르스크 군대 / E. 뒤로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던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 대공 휘하의 키에프 군대 ]
폴롭티인들은 초원에서의 전초전에 있어서 몽고인들과 대등했으며, 할크 강 대안에 있었던 몽고인들의 전초들을 간단히 몰아냈다. 볼히니아 기병대는 이들을 간신히 따라잡고 있는 정도였으며, 이들 바로 뒤로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 공 휘하의 갈리치아 군대가 따라왔다. 그러나 체르니코프 군대는 아직도 천천히 강을 건너고 있었다. 한편 키에프 군대는 할크 강 서쪽에 있었으며 아마도 제방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다가오는 러시아인들을 살펴보고있는 수부타이와 제베. 외눈박이 수부타이와 젊은 제베는 경험 많은 몽고군 지휘관이었다. 징기스 칸은 이들 유능한 지휘관들을 믿고 호라즘 샤 무하마드를 사냥하는 최초 임무에 덧붙여서 서쪽에 있는 '최후의 바다(last sea)'를 향한 장거리 정찰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이 그림에서 두 지휘관은 모두 순수하게 몽고식 복장을 하고 있다. 제베가 입고 있는 금박 갑옷은 몽고 양식의 중국 노획품(mixture of Mongol style and Chinese booty)인 것으로 보인다. )
연합군 각각의 부대들 간의 거리가 상당히 벌어지자 수부타이는 휘하 병력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그 결과 먼저 할크 강을 건너가 있던 러시아군은 전투가 시작된 시점에서 전혀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군대의 행동에 대해서 전혀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폴롭티인들에게 의존하고 있던 정찰 역시 폴롭티인들이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어서 제대로 되어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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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오르기 성인(St. George)에 대한 조그마한 석조 아이콘은 조야하게 조각되긴 했지만, 13세기 북부 러시아 군사장비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묘사일 가능성이 높다. 이 조각은 1250년 무렵에 만들어졌으며, 소매가 길고 끝단이 긴 쇄갑형 호벅(mail hauberk)을 착용하고 있고, 다리에도 쇄갑형 쇼스(mail chausseses)를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창과 유럽식의 카이트형 방패를 소지하고 있다. (상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박물관)) |
('바실리오크는 창에 관통당했으며...' 한동안 몽고 전사들은 강력한 합성궁을 통해 원거리에서만 싸웠으며 창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으리라는 그릇된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할크 강 전투에서 이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웠다. 연대기에서 분명히 서술하는 바와 같이, 몽고군은 이 전투에서 활로 최초 공격을 하는 대신 창과 갑옷으로 무장한 중기병이 돌격하여 러시아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5월의 뜨거운 열기와 이 시기에 많이 나타나는 쇠파리떼로 인하여 양측 중기병들은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
러시아인들도 초원 유목민들과의 전투 경험이 있었고 도강 과정에서의 전투 경험 역시 있었다. 1185년, 수율리 강(River Suyurly) 전투에서 이고리 공(Prince Igor')은 강을 건너 폴롭티인들을 무찌른 바가 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기마궁수들이 선두에 있었고, 경기병 10개 부대가 뒤따랐으며, 마지막으로 중갑기병 3개 연대가 뒤따랐었다. 폴롭티인들이 초기 공세에 붕괴되어 도주할 당시 중갑기병 3개 연대 중에서 2개 부대는 예비로 남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었다. 만약 타타르인(몽고인)들이 1185년에 폴롭티인들이 했던 것처럼 병력을 구성했더라면 아마도 이들 역시 패배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몽고인들은 러시아인들이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습격을 가했다.
(대 노보고르드(Novgorod the Great)에 있는 산타 소피아 성당(Cathedral of Santa Sophia)에 있는 유명한 청동제 문. 12세기 중반 독일의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서 만들어 진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문의 표면에 있는 수많은 군인들의 모습은 당대 러시아의 것들을 반영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볼히니아와 갈리치아와 같은 서부 러시아 지역 공령들의 병사들의 경우, 이웃한 폴란드, 헝가리, 독일과 유사한 장비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
수부타이는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몽고군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최초 공격에서 경기병과 기마궁수들을 사용하는 대신, 중기병들을 동원하여 선두 폴롭티인들을 공격함으로써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들을 해치워버렸다. 이어서 몽고 기병들은 볼히니아 공 다닐이 이끄는 기병대를 공격했으며, 몽고군의 활 솜씨가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부대의 선두에는 다닐 로마노비치와 함께 고위 장교, 즉 보이보데(voivodes)였던 세멘 올류에비치와 바실록 가브릴로비치가 있었다. 연대기에 기록된 바는 다음과 같다: '상자 안에는 창에 찔려 죽은 바실록과 부상당한 다닐이 담겨 있었다'. 몽고군은 기마 궁술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근접전으로도 싸운 것이 확실하다. 앞에 펼쳐진 참상을 목격한 루츠크 공 므스티슬라비치는 진격하여 구원하고자 했으나, 몽고 기마 궁수들이 계속 미친 듯이 활을 쏘아대고 있었기에 볼히니아 군대는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 몽고군의 반격 : 남서쪽 방향에서부터 본 것으로, 1223년 5월 31일 낮 몽고군이 폴롭티 군대와 볼히니아 군대를 격퇴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전투 태세를 갖추려던 갈리치아와 체르니코프 군대의 시도는 도주하는 폴롭티인들과 볼히니아인들로 의해 방해를 받는다. )
[1. 수부타이 바하두르 휘하의 몽고 기병 중앙군으로 중기병으로 이뤄져 있고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 2. 제베 노욘 휘하의 몽고 기병 우익 / 3. 츄기르 칸과 테시 칸 휘하의 몽고군 좌익 및 폴스키니아 휘하의 브로드니키 군대 / A. 러시아 군대의 전위와 측위를 맡은 폴롭티 기병대. / B. 다닐 로마노비치 공 휘하의 볼히니아 군대 / C. 므스티스라브 므스티슬라비치 공 휘하의 갈리치아 군대 / D. 므스티슬라브 스뱌토슬라비치 공 휘하의 체르니코프 군대와 이들의 전위를 담당한 올렉 공 휘하의 쿠르스크 기병대 / E.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 대공 휘하의 키에프 군대 ]
갈리치아 공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 역시 사태를 전해 듣고 휘하 병력들에게 전투 준비를 명령했다. 몽고군의 기마 궁수들에게 쫒기던 폴롭티아와 볼히니아 병력들은 도망을 멈출 수가 없었고 이에 갈리치아 군대도 휩쓸리게 되어 할크 강까지 가게 된다. 이곳에서는 므스티슬라브 스뱌토스라비치 공 휘하의 체르니코프 군대가 아직 도강을 진행 중이었고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채로 도망병들에게 휩쓸리게 된다. 몽고군대가 연합군을 몰아붙이고 있는 동안, 갈리치아인들을 돕기 위해 병력을 배치하는 데에 성공한 자는 쿠르스크 공 올렉 뿐이었다. 이들은 체르니코프 군대와 함께 강을 건너고 있던 중이었고, 몽고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긴 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만다.
(키에프인들의 진지를 공격하는 몽고군. 여러 러시아 왕공들과 군사지휘관들의 다툼 때문에 키에프와 체르니코프의 군대는 갈리치아와 볼히니아의 군대와 동시에 할크 강을 건너지 않는다. 갈리치아 및 볼히니아 군대가 괴멸당하는 동안, 키에프 군대의 병사들은 수레로 만든 야전 축성진지 안에서 저항을 시도한다. 이런 종류의 야전 방책은 수세기에 걸쳐 사용된 바 있으며, 15세기 얀 후스(Jan Hus)의 체코인 추종자들이 잘 써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수레로 만든 이 임시 방호시설 안에서 키에프 대공과 부하들은 츄기르 칸과 테시 칸이 이끄는 2개 연대의 몽고군의 포위공격에 직면한다. 고통스러운 며칠 동안 러시아인들은 성공적으로 적을 막아내며 서서히 서쪽으로 움직여갔다. 그러나 식수가 고갈되고 탈출할 가망조차 없게 되자 키에프 대공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는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식의 전투는 오래 버틸 수가 없는 법이며, 두 배가 넘는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갈리치아 공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는 적을 저지하지 못한 채 심각한 병력손실을 입게 된다. 필연적으로 러시아군은 퇴각하게 되고 몽고군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러시아군은 거대한 도망병 집단으로 변하게 된다. 한편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 휘하의 키에프 군대는 할크 강 건너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키에프 군대는 수레들을 주변에 배치하고 무장을 꺼내듦으로써 간신히 방어 진지를 설치한다.
(갈리치아 공 므스티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의 탈출. 할크 강 전투에 참가한 러시아 지배자들 중에서 단지 일부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투에 참가한 3명의 므스티슬라브 중에서 갈리치아 공만이 살아남았다 - 키에프 대공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와, 체르니코프 공 므스티슬라브 스뱌토슬라비치는 살해당한다. 그 밖의 왕공은 10명이 더 죽었고, 참전 병사 중에 10분의 1만이 고향으로 살아돌아왔다고 전해진다. 이런 종류의 전역에서 대부분의 러시아 군대는 하천 부대(river fleets)를 운용했다; 이들은 보병을 집결장소로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할크 강 전투는 러시아 영토를 관통해 흐르는 주요 하천들과는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벌어졌다. 사실 할크 강은 남부 초원지대를 흐르는 조금 넓은 개울 정도에 불과하여 선박 항해는 무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할크 강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고 난 뒤, 므스티스라브 므스티슬라비치는 갈리치아를 4년간 더 지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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