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Osprey Publishing 사의 Campaign 시리즈 중의 하나인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를 (무단으로 ^^;) 번역한 일부입니다. 총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양이 많아 챕터별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러시아군의 붕괴 (Russian Collapse)
달아나던 연합군과 그를 추격하는 몽고군은 이제 키에프 군대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떤 종류의 반격도 무의미했기에, 키에프 군대는 이동식 진지 역할을 하게 된 수레들을 움직이며 서서히 후퇴하게 된다. 일부 도망병들은 키에프 군대와 합세하고자 시도했지만, 몽고군들은 이들을 차단했으며 주변 초원으로 몰아낸다. 수부타이는 츄기르 칸(Tsugyr Khan)과 테시 칸(Teshi Khan) 휘하의 병력들에게 키에프 군대를 묶어두도록 하고, 나머지 도망병들을 계속 추격했다.
(키에프에 있는 황금의 문(Golden Gate at Kiev)은 당시 파괴되었다가 근대에 다시 지은 것이지만, 이보다 다소 이후에 만들어졌던 블라디미르의 황금의 문(Golden Gate at Vladimir)는 파괴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게 된다. 이 건축물은 1164년에 건축되었으며, 키에프의 황금의 문과 마찬가지로 위에 예배당(chapel)이 있다. 하지만 중세 러시아에서 이런 종류의 석조 방어시설은 대단히 희귀한 것이었다. 이곳 블라디미르에서도, 문의 양쪽방향으로 이어진 성곽들은 위에 목재 벽이 설치된 흙벽으로 지어졌다. )
(할크 강 상류 지역은 좁은 계곡 지역으로서, 기복이 심한 초원 지대의 언덕들 사이에 가려져있다. 그다지 깊지도 넓지도 않았지만, 진군하는 군대에게는 상당한 방해물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군과 폴롭티 군대가 할크 계곡에 도착했을 때, 상당히 깊은 내리막과 마주치게 된다. 주변 다른 곳은 절벽이 더 가파르고 물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우회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패배한 러시아 왕공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 군대는 러시아 해군이 아직 정박 중이었던 드네프르 강 도섭지로 달아났다. 이들은 달아나는 데 필요한 배를 제외한 나머지는 추격을 막기 위해 침몰시켰다. 살아남은 갈리치아와 볼히니아 인들은 드네프르 강을 따라 항해하여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추격자들의 손을 벗어났다. 한편 므스티슬라브 스뱌토슬라비치 공 휘하의 체르니코프 군대는 초원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들은 고향으로 가능한 한 빨리 가고자 했으나, 추격하는 몽고군은 말 그대로 말 뒤꿈치에 따라붙어 있었으며, 체르니코프 군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므스티슬라브 스뱌토스라비치 공과 그의 아들 모두 탈출 과정에서 전사한다.
(러시아군의 붕괴 : 남서쪽 방향에서부터 본 것으로, 1223년 5월 31일 오후 몽고군의 공격에 의한 러시아군의 붕괴를 보여주고 있다. 몽고 기병에 의해 공격당한 체르니코프와 갈리치아 군대는 붕괴되어 전장을 탈출한다. 수레로 야전 축성진지를 설치한 키에프 군대와의 합류를 막기 위해 몽고군은 도망치는 러시아 병사들을 바짝 추적했다. )
[1. 수부타이 바하두르 휘하의 몽고 기병 중앙군 / 2. 제베 노욘 휘하의 몽고 기병 우익 / 3. 츄기르 칸과 테시 칸 휘하의 몽고군 좌익 및 폴스키니아 휘하의 브로드니키 군대 / A,B. 폴롭티와 볼히니아의 도망병들 / C. 므스티스라브 므스티슬라비치 공 휘하의 갈리치아 군대와 폴롭티 도망명들. 몽고군에게 사실상 포위당한 상태이다. / D. 체르니코프와 쿠르스크의 군대, 그리고 붕괴 상태의 폴롭티인들 / E. 수레로 만든 천천히 움직이는 축성 진지 안에 있는 키에프 군대 및 폴롭티인들)]
스몰렌스크 공의 경우에는 다소 운이 좋았다. 1,000명 가량의 분견대와 함께 북서쪽으로 달아나는 과정에서 추격하는 몽고인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드네프르 강에 도착하여 추격자들을 떨궈내는 데에 성공한다. 분산된 다른 도망자 그룹들은 몽고인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어야 했으며, 일부 폴롭티인들의 경우 코텐 칸이 폐위된 데에 대한 복수로 러시아 도망병들을 공격하여 말을 빼앗았다.
(패배한 적들을 깔고 앉은 채 잔치를 벌이는 몽고인들. 키에프 인들에게 전투의 끝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 되었다. 군대의 일부는 전투 중에 전사했으며, 나머지는 목숨을 보장한다는 몽고인들의 약속을 믿고 항복했다. 이들이 항복하자 마자 일부는 도살당했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 승리한 몽고인들은 생포한 러시아 지도자들 위에 무거운 나무판을 깔고 그 위에서 잔치를 벌였다. 몽고인들이 승리를 만끽하는 동안, 러시아 지도자들은 서서히 질식해 가며 죽음을 맞게 된다. )
이러한 비극적인 일들이 주변 초원 지대에서 벌어지는 동안, 사방으로 포위된 키에프 군대는 서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몽고인들은 이 먹잇감이 손쉽게 달아나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몽고군은 무수한 화살을 쏘아댔으며, 키에프 인들은 약 3일에 걸쳐 끈질기게 방어태세를 유지했다. 몽고군의 공격은 계속 격심해지는 반면, 러시아군의 식수는 마침내 바닥이 났다. 탈출은 불가능했기에 항복은 시간문제였고, 수부타이는 교섭하기로 결심한다. 수부타이는 중개자로 폴스키니아(Polskinia)를 선정한다. 그는 아마도 상급 보이보데였고, 아마도 브로드니키(Brodniki;몽고인들에게 협력한 슬라브계 도망자들)들의 우두머리었을 것이다. 이들은 적당한 몸값만 내면 러시아 왕공들과 부하들을 풀어주겠노라고 약속한다.
(폴롭티인들은 부유한 민족이었으며, 전사들은 최소한 엘리트 부대의 경우 대단히 잘 무장되어 있었다. 고고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폴롭티인들이 12세기에서 13세기 무렵 다양한 형상의 투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에 나타난 것들 중 하나(A)는 유럽 혹은 비잔틴 식의 철제 두상(skull)에 폴롭티 장인들이 덧붙인 도금 가장자리 장식(gilded rim)이 붙어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칸의 무덤에서 발견된 다른 종류(B)에서는 표면 전체가 도금되어 있으며, 헝가리에서 발견된 것(C)은 다소 후대의 것으로서 몽고 침략에 의해 전래된 중국 방식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
몽고 지휘부는 아무도 피흘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으며, 이에 대한 증거로써, 폴스키니아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 십자가(Holy Cross)에 입맞추기도 했다.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는 항복 조건을 수락하는 외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키에프 인들이 수레로 만든 진지를 벗어나자마자 몽고인들은 이들을 공격하여 일부는 학살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았다. 몽고인들은 므스티슬라브 로마노비치와 다른 왕공들을 사로잡은 뒤에 곧장 죽이지는 않았다. 몽고인들은 이들 귀족 포로들을 묶은 다음 소위 나무 '다리(bridge)'라고 불리는 것 아래로 던져넣었다. 몽고인들이 그 위에서 축하 연회를 벌이는 동안 귀족 포로들은 목재와 몽고인들의 무게에 짓눌려 서서히 질식해 죽어갔다. 이 특별한 처형 의식은 전역이 시작되었을 때 몽고 사신들을 처형한 데에 대한 보복이었다.
(몽고인들이 최초 방어 진지를 선정했던 칼카 소하천의 동쪽 사면. 확실히 가파르긴 하지만 몽고 기병이 다소 무질서한 적군을 향해 돌격하는 것을 막을 만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