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Journal of Medieval History. Vol 22. No. 1. pp. 53-67.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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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제가 번역한 논문은 몽고로 간 초기 유럽 종교사절단 사람들이 남긴 글에서 서구 상인들에 대한 언급을 분석한 논문입니다. 전쟁사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내용이긴 하나, 당시의 몽고 제국의 변천 양상에 대해서 배경지식으로써 다소나마 알아보자는 차원에서 읽고 번역해 보았습니다. 번역하다 보니 중언부언하는 내용도 많고 그다지 잘 쓰여진 논문이라는 생각은 안듭니다만, 대체로 내용은 평이하여 읽기에 부담은 없으리라 생각되며, 단편적인 몽고와 서구에 대한 당대의 사실들이 조금씩 적혀있어 읽을만은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논문이 다루고 있는 시기는 1231년-1255년 기간으로, 몽고의 러시아 1차 침공 (할크강 전투 시기) 이후로부터 중동 및 중국 침략 사이의 기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예) 중위 박용수 드림
몽고에 대한 유럽 종교사절단 : 동부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서구 상인들에 대한 보고서, 1231-1255
(European clerical envoys to the Mongols: Reports of Western merchants in Eastern Europe and Central Asia, 1231-1255)
그레고리 G. 구즈만
미국 일리노이주 페오리아, 브래들리 대학교 역사학부
초록
기독교계 유럽과 몽고 치하의 아시아간의 최초 문화적, 외교적 교류는 1240년대의 몽고의 중부 유럽 침공이 있은 후 수십년이 지나지 않아 이뤄졌다. 이 연구의 주 목적은 몽고인들이 아직 초원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었던 1230년대에서 1250년대 사이에 파견된 7회의 초기 서구 사절단에 의해 기술된 라틴 문서들에 의하여 묘사된 상인들에 대한 기술들을 연구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외교 문서들의 내용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사절단들은 유동 상인 사회(mobile merchant community)의 사람들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사절단들이 정보를 얻은 것이 대체로 몽고인들 사이에 살고 있던 서구 출신 포로들과 기술자들로부터이기 때문이다. 상인들이 언급되는 경우에는 주로 사절단의 여행 및 보고서에 대한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로서 사용되는 경우였다. 외교 문서들에 종종 러시아, 비잔틴, 터키인들과 거래하는 유럽 상인들에 대하여서는 종종 언급하곤 하지만, 이들이 기독교계 유럽과 몽고계 아시아간을 직거래하는가와 관련된 정보는 거의 제공하고 있지 않다. 서구 사절단들은 광대한 몽고 제국 내에서의 상업 활동에 대해서는 쓸만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고 있지 않으나, 이들은 유럽으로 돌아오면서 유럽에 몽고의 과거 역사와 장차 의도에 대한 재미있고 가치있는 정보들을 제공하게 된다.
본문
1241년에 있었던 몽고의 동유럽 침공 이후, 13세기 내내 많은 서구 왕들과 교황들이 몽고 제국과 사절단을 교환하였다. 이러한 공식 외교 문서들은 20세기 학자들에 의하여 대단히 많이 연구되었으며, 이들 연구자들은 오늘날 기독교계 유럽과 몽고계 아시아간의 이런 방식의 초기 문화적 교류에 대하여 연구 및 평가를 계속하고 있다. 서구의 외교 문서들과 편지들, 초기 사절단의 견문록 등을 보다 보면, 몽고인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일하고 있는 수많은 상인들과 서구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실제로 이러한 문서들에 적혀서 유럽에 퍼지게 된 정보들의 원천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람들이 사절단에게 제공한 정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연구의 주 초점은 초기 서구 외교문서에 언급된 상인들에 대한 것과, 몽고인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삶과 일에 대하여 서구 사절들이 얼마나 자주 접촉하고 언급하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종종 상인들의 이름이 지나가는 내용으로서 언급되기도 하며, 사절의 보고서 내용의 출처로서 단순히 언급되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사절단이 실제로 위험하고 멀고 먼 중앙아시아와 몽고, 중국의 지역을 실제 통과했음을 입증하는 증인 역할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왕과 교황의 사절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것은 기술자들과 다른 포로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연구에서는 1230년대에서 1250년대 사이의 라틴계 기록 문서에서 언급된 상인들에 대한 것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몽고가 유교권의 중국과 이슬람권의 중동과 같은 주요 문명 중심지들을 정복하고 동화되어가면서 상인들은 점차 중요한 정보 원천이 되어감과 동시에 아예 공식 사절단의 일원화 되어가기 시작했다. 이전 연구들에서는 이러한 후기의 보다 대규모의 중세 동서 문화 교류에 대하여 많이 연구가 되어 왔었다: 페테크(Petech)의 짧은 논문에서는 외교 문서보다 주로 상업 문서들을 바탕으로 마르코 폴로의 여행 이후 시기 몽고 제국 내에서의 이탈리아 상인들에 대해서 다루었다. 페테크가 발표한 논문에서 다룬 시기 이전을 다룬다는 점 외에도,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상인들이 초기 서구 사절단에게 상당한 도움과 정보를 주었는지에 대하여서도 다루고자 한다.
이 연구는 몽고가 농경 문명 중심지와 접촉했으나 아직 초원 유목민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시기에 있었던 서구와 몽고간의 초기 25년간의 문명 교류에 대하여, 소량의 라틴계 외교 문서들에 의지하여 다루고자 한다. 몽고가 정주문명인 유교권 중국, 불교권 티벳, 이슬람권 중동과 대규모 교류를 하게 된 것은 이들을 정복한 1255년 이후가 되어서부터의 일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몽고에 파견된 13세기 중반 초기 서구 사절단들이 라틴어로 기록한 다음 문헌들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헝가리 수도사 리카두스 및 줄리안(Hungarian Friars Riccardus and Julian)(1231-1237),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John of Plano Carpini)(1245-1247), 폴란드의 베네딕트(Benedict the Pole)(1245-1247), 씨 데 브리디아(C. de Bridia)(1247), 생 퀜틴의 사이먼(Simon of Saint-Quentin)(1245-1248), 루브뤽의 윌리엄(William of Rubruck)(1253-55).
이 연구에서 분석한 라틴 문헌들은 기록된 시기 순으로 다룰 것이며, 서구의 외교, 학문, 문학 전통의 흐름에 맞추어 소개될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몽고에 대한 최초 유럽인 사절에 대하여 기록을 남긴 두 도미니카 수도사가 작성한 '헝가리 수도사 리카두스 및 줄리안'의 것으로부터 시작하도록 한다. 1230년대 초중반, 4개의 독립적인 도미니카 선교단이 대 헝가리(Greater Hungary) 지역의 동족 마자르인들을 찾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이들의 목적에는 남부 러시아 초원지대에서 불거져오고 있던 몽고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리카두스 수도사는 앞쪽의 2회의 도미니카 선교단의 여행을 기술하였으며, 줄리안 수도사는 뒷쪽 2회의 선교단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리카두스 수도사가 쓴 글은 교황 그레고리 9세(1227-1241)에게 제출되었다. 이 글에서는 4명으로 이뤄진 도미니카 선교단이 최초 여행에서 3년을 보냈으나 '... 상인으로 가장했던 오토라는 사제 한명을 제외하면...' 살아남지 못했다라고(were unsuccessful) 기술하고 있다. 그는 '... 억양으로 몇몇 헝가리인들을 식별해냈으며, 이들이 어디에 사는가를 알아냈다...'고 한다. 그는 즉시 헝가리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경로를 설명해 줄 수는 있었지만, 여행의 피로로 인하여 곧 죽고 말았다.
다시 4명의 도미니카 수도사로 구성된 선교단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 일반적인 종교적 습관들을 버리고 야만인들처럼 보이게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출발하였다고 한다. 헝가리의 왕자 벨라(Prince Bela of Hungary)가 이 모험의 초기 후원자였기 때문에, 이 두번째 여행은 1235년 9월 벨라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출발해야만 했다. 이들 수도사들은 우선 콘스탄티노플로 간 뒤, 해로를 통해 흑해를 건너갔다. 뚜렷하게 적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아마도 이들은 이미 확립되어 있는 무역로를 따라 상인들과 함께 여행했으리라 추정된다. 리카두스 수도사에 따르면, 대 헝가리(Greater Hungary)에 도착한 것은 줄리안 수도사 뿐인데, 지역민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몽고인들이 대 헝가리에 사는 사람들을 무찌르지는 못했기 때문에, 줄리안 수도사는 몽고인들이 대 헝가리 사람들을 동맹으로 생각하며, 대 헝가리 내에서 많은 몽고인들을 볼 수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들 중에는 '... 타타르 족장의 전령이 있었는데, 그는 헝가리어, 루테니어, 쿠만어, 튜턴어, 사라센어, 타타르어를 알고 있었다...' 라고 하였다. 대 칸의 이 전령은 또한 타타르인들이 '... 알레마니아(Alemania; 독일 의미)로 쳐들어가고자 한다...'고 하였다. 기독교 서구 세계에 대한 침공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새로 입수하게 된 줄리안 수도사는 이를 보고하기 위하여 즉각 그곳을 떠난다; 그는 헝가리로 돌아오는 보다 직선 경로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와 폴란드를 경유하여 말을 타고 복귀한다.
줄리안 수도사 스스로도 동쪽으로 향한 이후의 2회의 헝가리 사절단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의 보고서는 '타타르에 대한 논문(Tract on the Tartars)'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며, 교황 특사(Papal legate)였던 페루지아 주교(Bishop of Perugia)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띄고 있다. 이 편지는 몽고에 특정하여 파견된 초기 서구 사절단에 대한 최초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데, 앞서 언급한 선교단들이 파견된 당초 목적은 볼가-우랄 지역에 있던 대 헝가리 사람들을 대상으로 보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주로 몽고인들과 그들의 풍습, 그들의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곳(probable origins)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줄리안 수도사가 몽고인들의 위협에 대하여 대단히 잘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급박한 위협을 교회 지도부에게 경고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그는 몽고인들이 노예와 하인으로 부릴 자들을 제외한 모든 포로들을 처형하며, 다른 족속 병사들을 강요하여 몽고인들을 위해 싸우도록 하는 점을 기록한 최초 유럽인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의 보고서에서는 몽고의 팽창에 대한 대단히 정확한 데이터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의 목적이 완전한 세계 정복이 있다는 것도 적시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몽고의 최종 목표가 아시아 뿐 아니라 유럽까지도 정복하는 데 있다는 서구의 최초의 명백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줄리안 수도사의 짧은 글은 리카두스 수도사의 글보다 서구에 훨씬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줄리안의 글에 바투 칸이 벨라 왕에게 보낸 서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투의 서신에는 서구 기독교인들에 대한 몽고인들의 최후통첩이 최초로 포함되어 있었다; 몽고를 향한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줄리안 수도사는 이 몽고 최후통첩을 수즈달 공작(Duke of Suzdal)으로부터 건네받으면서 헝가리 왕에게 전달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줄리안 수도사가 몽고에 대한 정보 출처에 대하여 명확하게 목록을 작성해 두지는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이 정보들은 러시아인들이나 대 헝가리인들로부터 얻었을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일단 러시아인들은 1220년대 초부터 몽고인들과 직접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있었으며, 대 헝가리인들의 경우에는 줄리안 수도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고의 동유럽 정복의 초기 시기에서, 초기 사절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몽고인 사이에 살고 있는 서구인들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몽고인들 사이에 상당수의 상인들과 서구 포로, 기술자들이 살게 된 것은 1238년에서 1241년 사이에 몽고인들이 벌인 대규모 동유럽 정복 원정 이후의 일이다.
1230년대 중반에 있었던 헝가리계 도미니카 수도사들이 벌인 4회의 여행은 최초로 유럽인들이 몽고에 대해 목격한 사절단 기록을 제공했다는 의의가 있긴 하지만, 이들 보고서들은 몽고인들 사이에 살며 일하고 있었던 상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단서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 이들 보고서에서는 몽고인들의 기원이나 풍습, 의도, 목표, 그리고 대 칸의 '전령'이 알고 있던 유럽 및 내륙 아시아 민족들의 언어들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지리적인 부분이나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가 않다. 단지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들자면, 리카두스 수도사의 글에서 최초 선교단의 한 수도사가 '... 상인처럼 가장하고 여행하였다...'라는 부분이나, 두번째 선교단들이 '... 평소 습관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꾸었다'라고 하는 정도이다. 이 두가지 문장들은 사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상인들의 경우에는 비교적 자유롭고 안전하게 야만적인 초원 유목민들 사이를 오가고 무역할 수 있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들 상인들이 서구 상인이였는지 여부는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상인들이 비잔틴계 상인일 수도 있고 러시아계 상인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따라서 이 최초의 상인 언급 라틴계 문헌은 몽고 사회에서의 유럽계 상인의 존재에 대하여 별다른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John of Plano Carpini)은 광대한 몽고 제국(Mongolia)를 가로질러 수도까지 여행한 최초의 서구 사절이다. 이 프란시스코 수도사는 인노센트 4세 교황의 사절로서 파견되었으며, 1246년 8월의 귀윅 칸(Guyuk Khan; 몽고제국의 3번째 대칸이자 오고타이 칸의 장남, 징기스칸의 손자. 1246-1248년간 재위.)의 즉위식에도 참석한다. 카라코룸에 입성한 최초 유럽인 사절이었던 요한 수도사는 그가 작성한 정보들의 출처와 신뢰도에 대하여 대단히 신경을 많이 썼는데, 서문에 '... 모든 것은 우리들의 육안으로 직접 목격하거나 ... 우리가 신뢰해도 되리라 믿어지는 기독교인 포로들을 통해 전해들은 것들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서문의 뒷부분에도 '... 우리가 여러분에게 보고하는 내용은 우리가 직접 보았거나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서 전해들은 것들로 이뤄져 있다.'라고 씌여 있다.
요한 수도사는 본문 앞부분에도 '... 우리가 타타르 땅에서 목격한 것들에 대하여' 주로 서술하겠다고 하고 있다. 그는 여러 러시아 공작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으며, 상당수 정보들을 러시아 성직자들로부터 얻었다고 하고 있다. 그는 특히 러시아 금세공자인 코스마스(Cosmas)를 정보제공자로서 적시하면서, '타타르인들은... 최고의 기술자들을 잡아가서 타타르인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본문 뒷부분에는 몽고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방대하고 상세한 정보들의 원천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쓴 바에 따르면:
우리는 (몽고) 황제의 사적인 정보들에 대하여 많은 단편들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그 원천은 다른 족장들과 함께 온 사람들로서,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아는 러시아인들과 헝가리인들, 그리고 러시아 사제들과 그외 여러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타타르 사람들과 더러는 30여년간 살면서 전쟁 및 여러가지 일을 함께 겪었으며, 이들은 타타르인들과 지속적으로 살아오면서 이들의 언어를 배웠고 이들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았다. 이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말해 주었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들도 알고 있었기에 묻지 않은 것까지도 말해 주었다.
요한 수도사가 그의 대다수 정보 원천이 러시아 귀족들과 성직자, 그리고 포로가 된 서구 기술자들과 노예들이라고 적시하고 있는 한편, 몽고인들 사이에 서구 상인들이 살면서 일하고 있다는 점도 언급하고 있다. 그의 보고서 마지막 장인 9장에는, '... 우리가 행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타타르의 영토에서의 여행길에 함께한 증인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라고 되어 있다. 이어 그는 러시아 공작, 성직자, 기술자, 기타 그루지아와 이슬람 중동 지역에서 온 여러 사절들의 이름들을 길게 나열하고 있다.
요한의 몽고 역사(Historia Mongolorum) 단락의 마지막 몇 문단들이 등장할 때까지 상인들이 명시된 부분은 나타나지 않는데, 이곳에서 이 주제가 나오면서부터는 대단히 긴 목록이 등장하게 된다.
또한 증인으로써 브라티슬라비아의 상인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우리와 키에프까지 동행하였으며 이들은 우리가 타타르 땅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타타르로 향한 뒤에 키에프에 도착한 폴란드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많은 다른 상인들도 있다. 또다른 증인으로는 콘스탄티노플 출신의 상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타타르를 경유하여 러시아에 왔으며, 우리가 타타르의 땅에서 돌아왔을 때 키에프에 있었다. 이들 상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제노바의 미카엘, 베네치아의 바르톨로뮤와 마누엘, 아크레의 제임스 레베리우스, 피사의 니콜라스 등은 대장들이다: 덜 중요한 인물들로는 마크, 헨리, 존, 바시우스, 헨리 보나디스, 피터 파스차미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의 이름을 알지는 못했다. 우리는 앞으로의 서술을 읽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첨삭하지 않기를 간청하는데, 이는 사실이야말로 참고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기록한 모든 것은 직접 보거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들은 것들로만 이뤄져 있으며, 하느님께서 증명하실 바와 같이, 우리는 어떤 것도 덧붙인 사실이 없다.
따라서 요한 수도사의 기록에서 그의 여행을 증명할 수 있는 목격자와 정보들은 서구 기술자들과 포로, 상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멀고 먼 몽고 제국으로의 여행을 수행하여 대 칸을 만나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가 러시아 공작들과 성직자들, 서구 기술자들과 포로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주 언급한 바와는 달리, 특정 서구 상인들을 언급한 것은 단지 1차례에 불과하다 - 그의 글 맨 끝에 있는 긴 목록에서이다. 이들이 기록된 방식으로는 이들 상인들이 러시아 땅에서 요한 수도사와 만났는지 중앙아시아나 카라코룸에서 만났는지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요한 수도사가 몇몇 다른 증인들에 대해서는 카라코룸에서 만났다고 적시한 것으로 미뤄보아, 이들 상인들 중 몇몇은 몽고 심장부 지역에서 만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요한 수도사와 동행했었던 폴란드의 베네딕트(Benedict the Pole)가 작성한 짧은 보고서(1247) 역시도 몽고인들 가운데 살고 있던 상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를 주고 있지 못하며, 단지 1회의 간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귀윅 칸의 즉위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베네딕트는 '... 세계 방방곡곡에서 온 3000여명의 사절들이 참석하여 편지와 답장, 그리고 다양한 조공과 선물들을 궁정에 선사하였다. 그들 중에는 앞서 말한 수도사들이 있었고...'라고 적고 있다. 베네딕트가 상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전혀 없지만, 당시 중세에 외교 사절과 상업 사절을 구분하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3000여명의 사절들 중에는 상인들도 끼어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실로 상인들은 외교 사절에게 붙는 특권을 활용하기 위하여 사절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세 내륙 아시아 외교 역사에서, 최초 단순한 상인으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서면 신용장을 가진 공식 외교관으로 지정되는 사례들이 존재한다.
프란시스코 수도사인 데 브리디아(C. de Bridia)는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이 수행한 1245년-1247년간의 대 칸 궁정에 대한 교황 사절단 과정에 대한 또다른 독자적인 기록을 남긴다. 그 스스로는 중앙 아시아 지역에 대해 여행한 바는 아니지만, 데 브리디아는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 수도사와 폴란드의 베네딕느, 보헤미아의 세슬라우스와 사적으로 만나면서 그의 '타타르 관계(The Tartar Relation)'라는 글에 필요한 정보들을 수집하게 된다. 그가 쓴 내용은 아무래도 베네딕트가 본 부분에 대한 것으로 보이며, 폴란드어(vernacular language)로 전해들은 내용을 라틴어로 옮겨쓴 것 같다. 그럼에도 이 '타타르 관계'에서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사람들을 거쳐온 내용이 아닌 몽고인들로부터의 직접 정보들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이 다수 존재한다. '타타르 관계'에는 많은 문장들 앞부분에 '타타르인들이 직접 수도사들에게 말한 바와 같이...', '이 모든 것들을 타타르인들이 우리 수도사들에게 말했는데...' 등의 내용이 씌여있곤 하다. 몽고인에 의한 직접 정보를 다룬 글이기 때문에 데 브리디아의 글에서 유럽 상인들이나 기술자, 포로들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데 브리디아의 대부분 글들은 몽고인들이 직접 언급한 내용들이라고 되어 있다.
생 퀜틴의 사이먼(Simon of Saint-Quentin)은 1248년의 목격담을 기술하고 있다. 이 도미니카 수도사는 아셀린 수도사(Friar Ascelin)의 사절단의 일원이었으며, 이 사절단은 십자군 기질의 교황 인노센트 4세가 중동 지역에 있던 몽고인들에게 1245년에서 1248년 사이에 파견한 사절단이었다. Historia Tartarorum이라는 명칭을 가진 사이먼의 보고서는 독립적인 문서로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부베의 빈센트(Vincent of Beauvais)가 작성한 Speculum historiale의 마지막 세 권 내에 수록되어 남아있다. 빈센트는 그의 백과사전 내에 사이먼의 증언과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의 증언을 한 토픽 내에 섞어 기록하였다. 최근 수십 년간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사이먼의 기록과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의 기록들을 서로 분리할 수가 있었다. 장 리차드가 1965년에 출판한 라틴어 책자는 아직 번역되지는 않았다.
다른 서구 사절들처럼, 사이먼의 기록에도 비자발적으로 몽고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존재하고 있다. 그는 몽고인들이 통상 '... 쓸만한 기술자들과 하인으로 쓸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포로들을 살해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뒷부분에는 또한 '... 함락시킨 도시에서, 젊은 미혼 및 기혼 여성들을 영속적인 노예이자 부억데기로 삼으면서 헐벗고 굶주린 채로 일하게 강요하였다' 라고 덧붙이고 있다.
대 칸이 반포한 일반 칙령(General Edicts)를 서술하면서, 사이먼은 '... 타타르인이 발행한 안전 통행증을 갖고 있지 않은 여행자가 타타르인이나 타타르인의 동맹자에게 발견될 경우, 이를 발견한 자는 해당 여행자를 평생 노예로 삼을 수 있다'라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안전 통행증을 갖고 있는 상인이나 사절의 경우에는 칸과 칸의 정권의 특별 보호를 받았으리라는 점을 역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몽고 영토 내에서 자유롭게 여행, 무역, 협상이 가능했다; 이들은 포로가 된 기술자들과 노예들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몽고 내에 있는 것이었다.
Historia Tartarorum은 다양한 출처에서 수집된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사건들을 담은 모음집이다. 5개월간 선교단에 소속되어 있었던 크레모나의 귀카르두스(Guichardus of Cremona)와 티플리스 시(city of Tiflis)의 도미니카 수도원(1240년 창건) 소속 수도사들은 사이먼에게 다양한 몽고 문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코니움 술탄국(Sultan of Iconium) 군대의 라틴계 용병들 역시도 사이먼에게 정보를 제공한 중요한 정보원들이었다. 대다수의 다른 용병들처럼 이들 역시도 자신들의 영웅적 이야기에 과장을 섞어 이야기하였다. 사이먼이 기록에 포함시킨 이야기들 중에는 두 라틴계 인물인 브린디시의 윌리엄(William of Brindisi)과 레이먼드 가스콘(Raymond Gascon)의 놀라운 영웅담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 프로벵칼(Provencal)이라는 이름의 서구 용병에 대한 언급도 있다; 그는 분명 남부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서 온 병사였을 것이다. 사이먼은 셀주크 투르크에 대한 몽고의 정복 과정에 대한 정보 대부분이 프로벵칼에게서 얻은 정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레판트 지역(Levant; 중동지역)에 사는 서구인들만이 사이먼의 정보원은 아니었다. 그의 글 소재 일부는 분명 그가 직접 만난 지역 원주민으로부터 얻은 것일 것이었다. 그가 중동 언어를 할 줄 알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데, 그렇다면 중간 통역을 거치지 않고 들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사이먼이 일부 정보의 경우 몽고인들에게 직접 들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그가 몽고어를 알았으리라는 증거는 없기 때문에, 아마도 현장에서 통역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그는 기록의 몇몇 부분에서 '... 그들이 말한데 따르면...', '... 그들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라는 표현들을 쓰고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몽고인에게 직접 얻은 정보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몽고 귀족이 수도사들에게 통역을 동반하고 찾아온 일을 언급하면서 이 과정에서 편지를 '단어 대 단어로' 라틴어-페르시아어-몽고어 순으로 또는 그 역순으로 번역했다고 했다.
결국 사이먼의 글은 다양한 정보원을 통해 작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동료 도미니카 수도사들, 라틴 용병들, 중동 사람들, 그리고 몽고인들. 이러한 4종류 정보원들 중에서 사이먼이 얻은 정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들은 중동에서 근무했던 라틴 용병들로부터 온 것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상인을 언급한 것은 딱 한번인데, 그 내용은 상인이 몽고인의 통행 허가증을 소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묘사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야기나 정보들의 출처에 대하여 상인이라고 지목한 적이 전혀 없다. 그는 이러한 정보들을 목격자들의 구두 진술로 전해들은 반면, 이런 사람들을 실제 여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으로서 기록해둬야 할 필요성은 전혀 없었다. 그는 정보 출처에 대하여 다소 아무렇게 되는대로 적어둔 경향이 있다. 사이먼의 보고서는 다소 우화집적인 어투를 띄고 있는데다 그 구성도 다소 엉성한데, 이는 동료 수도사들이 자유롭게 관련된 역사를 집필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1253년-1255년간에 있었던 루브뤽의 윌리엄(William of Rubruck)의 몽고 여행이 있었던 시기는 몽고가 동부 유럽을 강타한지 약 15년이 흘렀을 때가 된다. 이 시기가 되어서는 이미 몽고가 세계 문제에 있어서 잘 알려진 요소가 되었을 때이기 때문에, 윌리엄 수도사의 경우에는 요한 수도사의 경우처럼 그의 여행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증인들에 대하여 기록해야할 필요성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윌리엄 수도사는 주기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이름과 정보 출처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몽고인들 사이에 많은 서구 기술자들과 하인들이 살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몽고 영토 내에서 시장과 무역, 상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하고 있다.
여행 중에 윌리엄 수도사는 몽고인들에게 포로가 되어 노예화된 많은 사람들을 마주쳤다. 카라코룸에서의 부활절에 대해 윌리엄 수도사가 적은 바에 따르면, '이 당시 이곳에는 대단히 많은 기독교인 군중 - 헝가리인, 알란인, 루테이아인, 그루지아인, 아르메이아인 - 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포로가 된 이래 성사(Sacrament; 기독교 의식)를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윌리엄 수도사가 이들에게 처음으로 고백성사를 베풀게 되는 과정에서 '이들은 도둑질에 대하여 변명하였는데, 이들은 도둑질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으며, 이는 이들의 주인들이 옷이나 음식을 전혀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로 미뤄보아 기독교 노예들이 몽고인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삶은 대단히 고달픈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윌리엄 수사는 몇몇 서구 기술자들과 노예에 대해서 보다 심층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들을 통해 몽고인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다수의 기독교 포로들과 그 주인들의 삶에 대하여 보다 명확한 그림을 얻을 수가 있다. 카라코룸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 성직자였던 몇몇 헝가리인들...'을 만나는데 '이 사람들은 우리에게 코스모(cosmo; 칵테일의 일종)와 먹을 고기를 가져다 주는 등 큰 도움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글을 좀 아는(semi-literate) 포로들의 경우 몽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이상적인 정보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몽케 칸(Monke; 재위기간 1251-1259년. 몽고 제국의 4번째 대 칸)의 궁정에서 윌리엄 수사는 몇몇 흥미로운 서구 포로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로렌 지방의 메츠(Metz; 오늘날 프랑스에 있는 도시임)에서 온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헝가리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하며 파켓(Paquette)이라고 불렸다. 그녀는 우리에게 가능한 한 성대한 성찬을 대접해 주었다... 또한 그녀는 카라코룸 내에 윌리엄이라는 금세공인이 있으며, 그의 성은 부시에(Buchier)이고 파리(Paris; 오늘날 프랑스 수도) 태생이라고 했다'. 윌리엄 부시에는 은세공 장인이었으며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었고, 4개의 은 사자 및으로 음료수가 솟구쳐 나오는 은으로된 커다란 나무를 만드는 작업에 투입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몽케의 궁정 입구에 자리잡았다. 또한 위리엄 장인의 '... 아내는 헝가리 태생인데, 로렌 지방 사람의 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쿠만어를 모두 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바실이라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는데,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영국 사람이었기에 영어도 할 줄 알았다.'
따라서 서구 기독교계 포로들과 기술자들이 윌리엄 수사에게 몽고에 대한 대다수의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의 사절들과는 다르게, 윌리엄 수사의 경우 시장과 무역, 상인들에 대하여 몇차례 언급하게 된다. 윌리엄은 글의 초반부에 그가 흑해의 크기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이 '... 상인들로부터'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나중 부분에는 크리미아의 가자리아(Gazaria on the Crimea)가 흑해의 남북 무역의 중심지라는 것을 언급하는데, 내용은 '... 터키에서 와서 북방 지역으로 가려는 상인들 모두 그쪽으로 길을 떠났고,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북쪽 지역에서 와서 터키로 가려는 상인들 역시 길을 떠났다.'는 부분이다. 그가 크리미아에 도착하자,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어떤 상인들은 우리에 앞서 도착했으며, 사절단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윌리엄 사제가 공공연하게 그는 '... 우리는 어느 누구의 사절도 아니다'라고 했었음에도 벌어진 일이었다. 일행이 소지품을 수레에 실어야 할지 말에 실어야 할지 선택해야 했을 때, '콘스탄티노플 출신 상인들은 우리에게 수레를 고르라고 조언하였다...' 라고 한다. 수레를 선택할 경우 매일 짐을 풀었다 묶었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어지지만, 대신 소 수레의 속도는 말의 반밖에 안된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윌리엄 수사는 이 에피소드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는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잘못된 조언이었다...'라고 하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흑해 지역에서 상인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은 식인 풍습(cannibalism)에 대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 타타르인들이 왔을 때, 쿠만인들은 자신들의 영토로 들아가 바닷가까지 도망쳤으며, 너무 많은 수가 몰려 이들이 서로를 잡아먹게 되었고, 산자가 죽은 자의 시체를 먹었는데, 내가 이것을 목격한 상인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산자가 죽은 자의 시신을 이빨로 뜯어먹는 것이 마치 개가 시체를 뜯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윌리엄 사제는 쿠만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은 사실에 대한 이야기의 원천이 한 무명 상인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기재하고 있다.
카라코룸으로 가는 길에, 윌리엄 수사는 몽고인들이 돈 강 제방지역에 러시아인 마을을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들의 임무는 '... 사절단과 상인들을 작은 배로 건네주는 것이며... 또한 상인들로부터 두둑한 배삮을 받았다'라고 적고 있다. 여행 중 보다 이후 부분에서, 윌리엄은 다음과 같은 이상한 풍습을 갖고 있는 모셀(Moxel)이라는 민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만약 이들에게 상인이 오게 되면, 상인이 최초로 마주친 집은 그 상인이 남아있기 원하는 한 끝까지 대접해 줘야 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우리는 카이락이라고 불리는 한 대형 촌락에 도착했는데, 이곳에는 시장이 있었고 다수의 상인들이 모여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카라코룸에 도착했을 때에 윌리엄은 '... 약 3시 경에 우리는 도시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자(bazaar; 중동식 시장)와 시장(market)이 있는 사라센(Saracens; 아랍인 의미)인 지역을 지나 교회로 향했다.'라고 적고 있다. 같은 도시를 묘사하는 좀더 뒷 부분에서는, '이곳에는 두개 지역이 있다: 한 지역은 사라센인 지역으로 이곳에는 시장들이 있고 이곳에는 많은 상인들과 다수의 사절들이 있었다. 다른 지역은 카타얀(Cathayans; 캐세이, 키타이 등은 거란족을 의미. 오늘날에는 변형되어 중국인을 의미하기도 함)인 지역으로 모두 기술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윌리엄 수도사는 복귀 행로에서 상인들을 만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무슬림 중동 지역을 거치면서의 내용을 적고 있다. '이코니움에서 나는 몇몇 프랑스인들과 아크레에서 온 제노바 상인인 산토 시로의 니콜라스, 그리고 그의 파트너였던 베네치아 사람 몰렌디노의 보니파스를 만났다. 이들은 터키의 백반(alum) 판매에 대한 독점 상인이었는데, 술탄은 이들 둘을 제외하면 아무에게도 백반을 팔지 않아 백반 가격이 폭등했으며, 예전에 15 베잔트에 팔리던 것이 이제는 50 베잔트에 팔린다... 그리고 내가 언급한 상인들은 ... 아르메니아 왕의 소유 항구인 쿠르카로 나를 데려갔다.' 이 유럽 상인들이 중동 무슬림들과의 무역에 관계했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지만, 이들이 그 너머의 몽고인들과 직거래를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기독교계 유럽과 몽고 아시아간의 일곱 초기 사절단의 기록에 대한 본 연구를 통해 1231년에서 1255년 사이의 25년간의 기간 동안 무역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절들은 몽고와 새로 방문한 지역에 대한 정보 대부분을 상인들이 아닌 유럽 포로들과 기술자들로부터 습득했다. 광대한 유럽 제국에 대한 서구의 경제적 침투는 보다 이후에 벌어지는 일로써, 몽고인들이 피정복민인 중동이나 중국 사람들처럼 정주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이러한 선진 문명들은 몽고의 지배 속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상인들에게 흥미를 끌만한 상품들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 상인들은 일단 칸들로부터 통행 허가증만 얻으면 이란 및 중국으로 자유롭게 여행 및 무역이 가능했다. 따라서 기독교계 유럽과 몽고계 아시아간의 진정한 상업 접촉은 1260년이 되어서야 이뤄졌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페테크가 언급한 1264년 경 타브리즈에 있었던 이탈리아 상인 집단이나 1261년에서 1295년 사이에 벌어진 마르코 폴로의 여행의 사실과도 맞아 떨어진다. 페테크는 몽고인들과의 무역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상인들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루칼롱고의 피터는 몬테 코르비노의 존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자이톤 지방의 제노바 식민지는 페루자의 앤드류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 제노바 사람인 사니뇽의 안돌로는 프랑크인 앤드류로 더 잘 알려졌으며 중국의 칸에게는 '피흘리는 천마(bloodsweating or heavenly horses)'로 통했다; 부스카렐로 기솔피는 제노바 상인인데, 일 한국의 사절로서 기독교계 유럽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피사의 이솔은 1290년 경의 아르군 칸의 궁정에 대해 영향력 있는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보낸 교황청 편지에 여러차례 등장한다. 1231년에서 1255년 사이에는 기독교계 유럽과 몽고 아시아 사이를 연결하는 영향력있는 이탈리아인 내지는 기타 서구 상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외교 문서들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러한 초기 시기에는 상업적 접촉이 훨씬 적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으며, 몽고인들과의 직거래 역시 상대적으로 미미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몽고인들이 이 당시까지는 아직도 초원의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교역, 시장, 상인들이 상대적으로 적게 등장하는 초기의 외교 문서들에는 또한 흥미로운 공통점이 나타나 있다 - 이들 대부분에는 중앙아시아의 몽고인들과 접촉하는 상인이 아닌 러시아, 비잔틴, 터키인들과 교역하는 서구 상인들에 대한 언급은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 수도사의 긴 상인 목격자 목록에는 그가 키에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동유럽, 콘스탄티노플, 이탈리아 출신의 상인들 이름이 잔뜩 적혀있다. 루브뤽의 윌리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한 상인 이야기는 글 앞부분에 있는 남부 러시아의 콘스탄티노플 무역과 글 뒷부분에 있는 터키에서의 이탈리아 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는 몇몇 도시에 대한 시장 이야기를 빼면 상인과 상업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 7건의 몽고를 향한 초기 기독교계 사절들의 문서들은 기존에 이미 잘 알려진 사실들 - 서구 상인들이 비잔틴 제국, 슬라브 러시아, 무슬림 중동과 상거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러한 초기 외교문서들은 기독교계 유럽과 몽고계 아시아 사이의 무역 발상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초기 시기에 언급된 소수 상인들은 1255년이 되기 전- 즉 몽고가 중동을 정복하여 페르시아 및 이라크 지역에 일 한국을 세우는 1258년 무렵-까지는 동서 경제, 외교, 정치, 문화 교류 측면에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기독교계 유럽과 몽고계 아시아간 장거리 무역이 활성화 된 것은 1260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몽고로 향했던 서구 사절들의 몇몇 라틴어 기록들을 통해 한편으로 피복과 겉모습과의 관계를 알 수 있으며, 안전과 인정받음과 관련있음을 또 한편으로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30년대 초에 리카두스 수도사는 '... 상인으로 가장하여 여행한 오토라는 사제 한명을 제외하고' 헝가리인 도미니카 수도사들 모두가 실패했다고 썼다. 두번째 사절단에 대해서 줄리안 수도사는 도미니카 수도사들이 '... 습관을 세속적으로 바꾸고, 머리와 수염을 야만인처럼 길러서' 출발했다고 적었다. 이후 1250년대가 되어 윌리엄 수사가 적은 바에는 '우리는 우리의 수도사 습관대로 맨발에 대머리로 있었으며, 그들 눈에는 커다란 가축처럼 비쳐졌다. 폴리카프의 요한 수도사도 과거에 이곳에 있었지만, 당시 그는 교황님의 사절로서 저들에게 멸시받지 않기 위하여 습속을 바꿔서 있었다.'라고 하였다. 윌리엄은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형식에 따라 옷을 입으면서 발생한 2가지 일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 그곳에 있던 헝가리인 하인이 우리들, 그러니까 우리 수도회를 알아봤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몰려들어와 우리들을 마치 괴물처럼 바라봤는데, 특히 우리가 맨발이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길 가다가 발을 잃지 않겠냐며 조롱하였다. 헝가리 사람들은 그들에게 우리가 맨발인 이유와 우리 수도회의 규정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나중에 윌리엄은 '그날 아침 내 발끝이 얼어붙어서 더이상 맨발로 갈 수가 없었다 ... 안내자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수염을 깎음으로써, 칸 앞에 섰을 때 우리 고향 지역에서의 모습에서처럼 보이도록 하였다.'라고 적는다. 이런 내용들은 초기 인상이 매우 중요했으며 인정받고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초기 수도사들은 상인들이나 야만인들처럼 입고 행동해야 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세속적인 복장과 머리모양을 함으로써 사절단은 안전하고 자유롭게 몽고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으며, 또한 중간 길의 몽고인들이나 목적지의 몽고 지도자들에게 더 쉽게 받아들여질 수가 있었다. 따라서 초기 사절들은 몽고 지역에서 상인들에게 제공되고 있던 안전함의 이점을 누리기 위하여 겉모습을 바꾸었다.
유럽인 포로들과 기술자들이 몽고인에 대한 대부분 정보 제공자들이긴 하였지만, 초기 상인들 또한 일부 흥미로운 정보 - 윌리엄 수사에게 쿠만인들의 식인 사례를 알려준 것 등-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광대한 몽고 제국 전역에 걸쳐 상인들이 존재했다는 점은 서구 사절들이 이들과 자주 여행하고 이들의 조언을 들었고, 안전을 위해 이들처럼 옷을 입었다는 사실로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절들은 자꾸 이동하는 상인들 보다는 유럽인 포로들이나 기술자들과 같이 정주해 있고 장기간 정보를 습득한 사람들을 정보원으로 선호했다. 비록 초기 사절들의 기록에서 상인들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초기 이들이 별다른 중요도를 갖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기는 하지만, 이후 시기에 가서는 동서간 경제, 외교, 정치, 문화 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13세기 후반에는 기독교계 유럽과 몽고계 아시아, 14세기 초에는 이란과 이라크의 일한국과 서유럽을 이어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13세기 중반 무렵 몽고인들 사이에 살고 있던 유럽계 상인들과 기술자, 포로들에 대하여 단시간 동안 살펴봄으로써 밝혀낸 몽고계 아시아에 대해 새로 얻은 정보들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상당한 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코 및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수천 마일의 거리를 여행하여 구두로서만-형태가 어쨌든 말이나 음성의 방식으로- 획득한 자세하고도 가치있는 정보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이나 폴란드의 베네딕트 같은 사람들은 아마도 중유럽과 동유럽 언어에는 능통했을 것이며, 생 퀜틴의 사이먼은 중동 언어도 알고 있었을 지 모르지만, 이들 유럽 사절들 모두는 중앙아시아 내지는 동아시아 언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이 적대적 몽고 지역에서 돌아와 조금이라도 사실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가져왔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인 것이다. 초기의 이러한 불굴의 사절들이 제공한 정보와 그에 대한 다양한 측면의 정보원들이 없었다면, 13세기 중반에 유럽인들이 갖고 있던 몽고계 아시아에 대한 지식은 훨씬 얕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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