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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할크 강 전투 1223 (The Kalka River 1223) - 이후의 일들

박용수 2014. 10. 27. 15:21

     다음은 Osprey Publishing 사의 Campaign 시리즈 중의 하나인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를 (무단으로 ^^;) 번역한 일부입니다. 총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양이 많아 챕터별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이후의 일들 (Aftermath and reckoning)

 


동쪽으로 돌아간 몽고인들 (The mongols return to the east)

 

 몽고군은 분쇄된 적들을 쫓아 드네프르 강까지 추격한다. 이들이 이 거대한 하천을 건넌 것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강 서쪽 제방에 위치한 노보고로드 스뱌토스폴치(Novgorod Svyatospolch) 마을을 공격한 것에 대한 것이다. 수부타이와 제베 노욘은 이제 징기스 칸으로부터 주치를 도와 볼가 불가르인(Volga Bulgars)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이후에는 불복종의 징후가 명백했던 주치를 데리고 징기스 칸의 본대로 돌아오게 된다. 따라서 몽고군은 1223년 여름 어느 시기, 볼가 강(Volga River)의 서쪽 제방에 위치하고 있던 주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도네츠 강(River Donets)을 따른 행군과 돈 강(Don)의 도하를 차례로 실시한다. 주치 역시 수부타이와 제베의 군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합군은 볼가 강 서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한 뒤 볼가 불가르인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작 수부타이와 제베의 군대는 볼가 불가르인들에게 공격을 당하는데, 이는 수바르 마을(town of Suvar) 근처에서 볼가 강을 도하하는 과정에서였다. 이들은 광신적인 터키어 계통의 무슬림들로서, 남쪽의 무신론자 폴롭티인들에게 닥친 불행을 이용하려던 참이었다. 몽고군 입장에서는 이미 할크 강에서 러시아인들과 싸우면서 상당한 인명피해를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볼가 강 좌안을 따라 퇴각하는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징기스 칸과 그의 지휘관들 입장에서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치욕이었다.

 

(몽고 지도자들이 사용한 안장과 마구류들에 나타난 아름다운 장식들. 사진에 나타난 물건들은 엠보스 가공한 은제 판들로서, 원래는 안장의 앞면으로 사용하던 것들이다. 제작시기는 12세기에서 14세기 초로서, 한때 몽고인들이 원시적인 야만인에 불과하다고 했던 주장을 반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A - 안장 뒷가지(cantle) 표면에 붙이는 은판; B - 안장 앞가지(pommel or bow) 표면에 붙이는 은판; C - 안장 뒷가지(cantle) 표면에 붙이는 은판. (상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

 

 몽고인들은 나중에 금장한국(Golden Horde)의 수도가 되는 사라이(Sarai) 근방을 지나게 된다. 이 지역은 볼가 강이 카스피 해로 흘러들어가는 근처에 있다. 몽고인들은 그 이후 동쪽으로 꺾어 트란스옥사니아로 향하며, 이곳에서 징기스 칸과 몽고군 주력 부대는 천천히 몽고(Mongolia)로 돌아가는 행보를 시작한다. 사실 이들은 1223년 여름 동안 힌두쿠시 산맥(Hindu Kush mountains)의 수풀 무성한 언저리 지역에서 휴식을 취했다. 한편, 동쪽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주치, 수부타이, 제베는 1223년 가을 무렵 캉글리 터키인(Qangli Turks)들을 무찌르고 그들의 칸을 살해한다. 이어지는 겨울 기간에는 아랄 해 북쪽에 있는 황량한 대 초원(Great Steppe)를 통과한 것으로 보인다.

 

(할크 강 동쪽 벼랑에서 내려다 보면, 이쪽 방향의 평평한 지역은 대단히 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인들과 폴롭티인들이 도강 후 전열을 정비하려고 한 곳은 이곳일 것이다. 동시에 이곳에서 몽고 기병들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 

 

 서부 몽고군이 거의 몽고 주력군과 만나기 직전인 이밀 강(River Imil) 근처를 통과할 무렵 제베 노욘이 열병으로 사망한다. 수부타이와 주치가 천산 산맥(Tien Shan Mountains) 북쪽의 이르치시 강(Irtysh River) 상류에 주둔하고 있던 징기스 칸과 만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단지 며칠 뒤의 일이었다. 이곳에서 족장회의 즉 쿠릴타이(Quriltai)가 열리게 되며, 수부타이는 징기스 칸에게 장대했던 서부 전역의 결과에 대해서 보고한다. 여기서 주치는 불복종에 대한 혐의를 사면받게 된다.

 

(러시아인들과 폴롭티인들에 대해 놀라운 승리를 거두고, 다시 볼가 불가르인들에 대해서는 놀라울만큼 변변치 못한 실적을 낸 이후, 제베와 수부타이, 그리고 주치 휘하의 몽고군은 징기스 칸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트란스옥사니아로의 긴 여정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대단히 황량한 지역을 지나치게 되며, 일부 지역은 한 겨울에 통과하게 된다. 점차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아랄 해 주변에 남아있는 오늘날의 스텝 지역은 아마도 13세기 무렵에 비해서도 더욱 더 황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징기스 칸과 그의 아들 주치 모두 4년 후인 1227년에 사망한다. 징기스 칸의 뒤는 아들 중의 하나였던 오고타이(Ogedei)가 물려받게 된다. 그는 바투(Batu)와 함께 징기스 칸의 정복 전쟁을 계속하게 되며, 1238년에는 훨씬 끔찍한 제 2차 러시아 침공을 개시하게 된다.

  

(13세기 중반, 쿠빌라이 칸(Kubilai Khan)의 신임을 받고 있던 중국 화가인 조맹부(Zhao Mengfu)가 그린 몽고 말과 마부의 모습. 이 화가는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 휘몰아치는 거친 바람까지도 잘 표현했다. 할크 강에서의 승리 이후, 몽고인들은 동부 유럽과 이슬람 세계를 몇 년 동안 내버려 두고 중국을 정복하는 데에 집중한다. 중국 정복이 대체로 끝날 무렵 몽고인들은 다시 서쪽으로 눈을 돌렸고, 이번에는 화약을 포함한 당대에 가장 발전된 형식의 무기를 몽고에 제공한 중국인들과 함께 쳐들어오게 된다. (중화민국 고궁 박물관) )

 

 

위험 신호를 눈치채지 못한 러시아 (Russia - The unheeded warning)

 

 

 몽고인들과 러시아인들간의 이 첫번째 대결에서 징기스 칸의 전사들이 만난 군대들은, 군사적으로는 강력했지만 몽고인들이 갖고 있는 기동성은 갖고 있지 못했다. 또한 조직력 측면에서도 러시아인들은 대단히 부족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부활된 폴롭티 칸국과 볼가 불가르인들은 주치와 바투-나중에 금장한국(Golden Horde)을 건국한다-에게 복종하는 몽고 군대들로부터의 소규모 침공에 대해 이후 몇 년간 성공적으로 방어하게 된다.

 

(사진에 있는 것은 돌로 조각된 조지 성인(St. George)의 아이콘으로, 1234년에 만들어졌다. 이 시기는 몽고의 러시아 1차 침공과 2차 침공 사이의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시기에 해당한다. 2차 침공은 1차 보다 집요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러시아인들에게 '타타르의 멍에(Tartar Yoke)'라고 불리는 발전의 정체기를 선사하게 된다. 이 석제 아이콘은 오늘날 수즈달(Suzdal) 서쪽에 있는 유리에프 폴스키(Yur'yev-Pol'skiy)의 성 조지 성당(Cathedral of St. George)에 위치하고 있다.

 

 아마도 폴롭티인들과 볼가 불가르인들에 의해 거둬진 이 작은 성공들이 러시아인들을 다시금 안도감 속에 빠지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러시아 왕공 군대가 할크 강에서 참패하긴 했지만, 이제는 그 공포스럽던 몽고인들이 미지의 아시아 저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할크 강의 비극은 앞으로 닥쳐올 일들의 단지 서막에 불과할 뿐이었다. 물론 할크 강 패전 자체도 심각한 재앙이었다. 여러 국가들의 최정예 군대가 말 그대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여러 왕공들과 수많은 보야르(boyar; 귀족)들이 살해당했다 - 기존의 러시아식 전쟁사에서 군사/정치 엘리트들이 이처럼 대규모로 죽어나가는 것은 일찌기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었다.

 

(사진을 누르면 커집니다) 

 

 몽고의 제 1차 러시아 침공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특기할 사항을 담고 있다. 이 치욕스러운 패배를 통하여 러시아 왕공들은 기존 몽고인들을 곡과 마곡(Gog and Magog)라고 비하하던 견해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이 새로운 몽고 침략자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몽고인에 저항하기 위한 제대로 된 동맹을 결성하는 것을 막는 한 원인이 된다. 14년 후에 몽고인들이 다시 쳐들어 왔을 때 러시아 왕공들은 거의 무기력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1223년 몽고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여러 러시아 왕공들의 군대를 완파하고는 다시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실은 수 많은 러시아와 유럽의 연대기 작가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일이었다. 몽고인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었지만, 그 동안 러시아의 왕공들은 전통적인 집적대기에 다시 몰두하게 되었으며, 위대한 도시 키에프를 누가 장악하느냐도 그러한 다툼의 주요 소재였다. 비록 과거의 영광은 많이 사라졌지만 키에프는 러시아의 문화적, 정신적 중심지로서 건재한 상태였고, 중심부에는 키에보-페체르스카 라브라 언덕(hill of the Kyyevo-Pecherska Lavra), 즉 키에프 동굴 수도원 복합지구(Kievan Cave Monastery complex)가 위치하고 있었다. 키에보-페체르스카 라브라는 오늘날 국가 역사 및 문화 보호지구(State Historical and Cultural Preserve)로 지정되어 있으며, 11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놀라운 건축물들을 포함하고 있다.) 

 

 1235년, 대칸 오고타이는 서부 몽고 지역의 칸이었던 바투에게 대규모의 증원군을 보낸다. 이로써 바투는 마침내 볼가 불가르인들을 무찌를 수 있었고, 이어 폴롭티인들도 같은 운명을 맞는다. 바투의 대규모 군대가 마침내 러시아 공령들을 공격하게 되었고, 여러 도시들이 하나하나씩 유린당한다. 1240년 12월에는 위대한 도시 키에프마저 잿더미로 변하게 된다.

 

(중세 러시아와 비잔틴 제국, 그루지아, 아르메니아에서는 크리스찬 기병(통상 창이나 랜스로 싸우는 모습)과 터키 또는 몽고 기병(통상 기마 궁수)이 서로 싸우는 모습이 예술의 모티프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 금박 청동 사발의 경우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몽고인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른 보물들과 함께 땅 속에 묻혀졌던 것이다. (상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이제 중부 유럽으로의 길이 활짝 열린 셈이다 - 몽고인의 다음 먹잇감은 헝가리와 폴란드였다. 몽고인들이 과연 유럽 전역을 정복하려고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분명하긴 하지만, 오늘날까지 이들에 대하여 난폭하고 비합리적이며 거의 무적의 전사들이라는 인상을 남기며 서쪽의 카톨릭 크리스챤 세계에 전쟁의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에 사용된 볼가 불가르인들의 군사장비; 1-2. 장식된 얼굴 마스크; 3. 무늬가 상감되어 있는 전투 도끼로, 이슬람 중동 지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몽고의 2차 침공은 이들이 1237년 랴잔 공국(principality of Ryazan)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러시아 북서부와 남부 전역이 잿더미로 변하는 데에는 단지 3년의 시간만이 필요했다. 몽고군은 번영하던 러시아 영토를 종횡무진하며 요새화된 마을들과 효율적으로 조직된 수비대로 이뤄진 방어망을 유린해 나갔다. 여러 증거들을 살펴보면 러시아 군대가 기술적으로 우월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상황에서는 전술적으로도 몽고인들에 비하여 우월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몽고인들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역으로 심각한 심리적 공황의 원인이 되었다.

 

(후세의 중국 목판화에 묘사된 수부타이 바하두르.)

 

 침략자들이 피침략자들에 비해서 사회, 정치, 문화 또는 군사적 측면에 있어서 보다 발달된 상태였다고 믿을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비록 몽고인들의 군사과학 수준은 몇몇 방면에 있어서 훌륭하다고 할 수는 있었지만, 분명 한계가 있었으며 상당히 제한된 전쟁 방식에 묶여있었다. 예를 들자면 몽고인들은 상당수의 중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전통적인 중앙아시아식 기마 궁수 전술에 상당부분 계속 의지하고 있었다. 한편, 몽고의 부족 전사들은 대단히 탁월했는데, 예를 들면 엄청나게 긴 거리를 행군할 수 있다던가 하는 점 따위였다. 또한 이들은 생애 내내 적군과의 싸움으로 일생을 보냈다. 제 2차 몽고 침공과 연이은 러시아 정복기간 무렵의 몽고 군대에는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대단히 정교한 공성전 기술 역시 도입되어 있었다. 몽고인 특유의 전투 감각과 공성전 기술이 만나면서 힘의 균형은 몽고 측으로 넘어가게 되고, 러시아로서는 향후 '몽고의 멍에(The Mongol Yoke)'라고 불리는 수 세기간의 저주받은 시기를 맞게 된다.

 

(중앙아시아의 터키계 유목민들과 마찬가지로, 몽고인들 역시 이주 간에 기후와 계절에 맞는 다양한 종류의 텐트를 사용하였다. 사진의 것은 서유럽에서 일명 유르트(yurt)라고 알려진 종류로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게르(ger)라고 불리는 것이다. 유르트는 사실 그 주변의 목초지를 뜻하는 말이다. 이 텐트들은 목재 뼈대에 펠트 천으로 덮여있으며, 문틀은 나무로 되어 있다. 분해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특별히 화려하게 치장된 경우에는 조립된 상태 그대로 대형 수레 위에 얹어 옮기는 것도 가능했다. (베른 역사 박물관))

 

 러시아군의 경우 전략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전술적으로는 엄청난 병력 열세 하에서 싸우게 된다. 러시아 왕공들 간의 정치적, 군사적인 행동 통일이 결여된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이들 러시아 지도자들이 자란 환경은, 주로 사소한 이유를 들어 일어나는 봉건적 소규모 전쟁만이 일어나는 사회였다. 반면 몽고인들은 러시아 군사 엘리트들과 민중들에게 전혀 새로운 방식의 전쟁을 소개하게 된다. 즉, 적국 국민의 완전 소멸과 그 문화의 말살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었다.

 

 따라서 몽고인들의 내방이 당대인들에게 그토록 심각한 공포를 초래했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13세기의 러시아 및 유럽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친 참극의 규모에 대하여 감을 잡고 있지 못했다. 일반적인 러시아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거대하고 강력했던 조국 전체가 어떻게 붕괴되었는가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한편 몽고 정복자들은 활발한 노예 사냥과 강제 조공 체계를 확고히 했고, 이는 이들이 실상 무인지대로 만들어 버린 곳에서도 적용되었다.

 

(유라시아 초원지대 전부와, 러시아, 이슬람 중동 세계의 반 가량, 극동의 여러 지역, 그리고 중국을 손에 넣으면서 몽고인들은 일명 세계 제국(World Empire)을 건설하게 된다. 몽고의 궁정 및 궁정 의식은 대단히 세련되게 변했지만, 삶의 양식과 남녀의 전통 복장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 그림은 14세기 초반의 페르시아-몽고 미니어쳐 그림으로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스탄불 톱카피 도서관))

 

 제 2차 몽고 침략에서의 바투 칸의 첫번째 전역이 수행된 원인은 즉각적인 복수와 더불어 약탈에 대한 소망이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러시아의 생산 능력에 대한 전반적인 소멸이 발생했다. 당분간은 이것이 몽고인들이 승리하고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라고 불려졌다. 참극의 규모는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으며, 몽고의 침략이 러시아의 발전을 150년에서 200년간 정체시켰다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었다. 또한 이 시기가 서부 유럽에서는 경제, 문화, 과학, 사회적으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다는 것도 문제였다. 아무튼 러시아 사람들에게 몽고 침략시기와 그 이후의 2세기 가량의 시기는 아직까지도 '암흑 시대(Dark Age)'라고 불리고 있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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