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스크랩] [번역] 베트남 연구 - 전술 및 군수물자 측면에서의 혁신, 1971 (Tactical and Materiel Innovations) : 서문 / I. 소개

박용수 2014. 10. 27. 15:26

 < 원문 출처 : Tactical and Materiel Innovations (http://www.history.army.mil/books/vietnam/tactical/index.htm#Contents) >

 

 

 이아 드랑 전투를 공부하다가 찾은 온라인 서적이며 따로 번역본은 없는 것 같아 직접 번역하여 올립니다. 역시 양이 많기 때문에 여러 게시글로 나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베트남 연구 (Vietnam Studies)


전술 및 군수물자 측면에서의 혁신 (Tactical and Materiel Innovations)

 

저자 존 H. 헤이 Jr.(John H. Hay, Jr.) 중장

1989년 워싱턴 DC.

의회도서관 분류 번호 72-600390

 

 

 

추천의 글

 

 미국 육군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대단히 복잡한 도전과 맞닥뜨리고 있다. 타군과 연계하여 미국 육군은, 한 국가가 외부 간섭 없이 자기 자신의 자유 의사에 의하여 정부 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을 돕겠다는 미국의 국가 방침을 지원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싸움에 동참해 왔다. 무장 투쟁을 벌이는 데 있어서의 일반적인 문제들에 더하여, 동남아시아에서의 상황은 현대적 군대를 미개발 지역 환경에 투입시켜야 한다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와 함께, 이들이 대단히 넓은 범위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문제도 야기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농민들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돕는 것과, 실패하고 있는 대게릴라 작전에 대한 것들, 그리고 잘 훈련되고 강한 전투 의지를 갖고 있는 적 정규군과의 재래식 전투를 벌이는 것이 모두 포함된다. 미국 육군은 그 앞에 놓여있는 모든 다른 도전에 대해 끊임없이 준비할 필요가 있다. 비록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으며, 모든 군대가 옛 것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꼭 잘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미 육군은 과거의 경험과 문제점들, 그리고 그 성취들을 연구함으로써 다양한 이득들을 얻을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공식 역사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있었던 일들의 세부적이고 객관적인 부분들을 내놓는 데에는 아무래도 몇 년은 더 필요하겠지만, 일단 우리가 현재로써 접할 수 있는 다소 두드러진 측면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참모 총장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서 중요한 자리를 담당했고 오늘날에도 무거운 임무들을 수행하고 있는 일단의 고급 장교들이 일련의 글들을 준비해 주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육군이 장차 작전 개념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역사의 기록으로서도 의미가 있으며, 일반 미국 시민들에게 당대에 싸웠던 미국 병사 및 장교들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얼마만큼 잘 행동해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문집을 읽는 분들에게 일러두고자 하는 바 중에 하나는, 글들의 대부분이 베트남 전이 아직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쓰여졌으며, 그 탓에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마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집의 일련의 글들은 주로 공식 기록들에 근거하고 있으며, 출판 혹은 미출판된 여러 2차 저작들, 주요 참가자들의 보고서나 인터뷰, 그리고 저자 개인들의 경험들도 상당수 참조하고 있다. 군사 보안 문제로 인하여 본 출판본에서는 주석 및 참조문헌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참조 문헌이 다 있는 원본은 중앙 군사사 연구소(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에 보관되어 있다.

 

 이 저서를 저술한 존 H 헤이 Jr. 중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하버드 대학에서 고급 경영 과정을 수료한 헤이 장군은 1962년 12월에서 1964년 6월에 이르기까지 국방성 무기체계 평가 그룹의 군사 연구 및 연락부서에서 육군 멤버로 참가하였다. 그 후 1964년 7월부터 1966년 8월까지 독일 서베를린에서 베를린 여단의 지휘관으로 근무했고, 다시 1966년 9월에서 1967년 1월까지 태평양 지역에서 제 11 보병여단장으로 복무했다. 1967년, 베트남에서 제 1 보병사단장이 되었으며, 1968년 3월에는 사이공 방어를 책임지는 제 2 야전군(II Field Force)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1968년 베트남을 떠난다. 1968년 9월 5일, 그는 캔사스 레벤워스 요새의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지휘부장(?)(Commandant of the U .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Fort Leavenworth, Kansas) 자리와 복합 군사 및 지원에 관한 육군 전투 발전 지휘 연구소장(?)(Commanding General of the U.S. Army Combat Development Command Institute of Combined Arm$ and Support) 자리를 겸직하게 된다. 연구소장직은 베트남에서의 전투 경험과 이전의 무기 시스템 평가 그룹에서의 경험과 맞물려 이 저서의 저자로서 헤이 장군이 최적임을 알려준다. 현재 헤이 장군은 노스 캐롤라이나 브래그 요새의 제 18 공정단의 지휘관으로 있다.


1973년 5월 1일, 미군 부관참모감 베르네 L. 바워스 소장, 워싱턴 D.C.

 

 

저자 서문

 

 본인은 윌리엄 C.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내게 이 글을 요청하였을 당시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지휘부장(?)이었다. 대학의 자료와 대학 임직원들의 도움으로 인하여 이 연구의 질적인 부분이 더욱 향상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연구의 범위를 보병 사단 지휘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으로 한정시켰다. 이 글은 전문가를 대상으로 쓰여진 글이긴 하나, 일반인들도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전투 이야기는 전술 및 물자 측면의 발전 모두를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이 연구는 베트남에서 벌어진 수천가지의 혁신 중에 단지 일부만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도 육군 각계 각층의 우리 군인들이 항상 극복해야하는 목표점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 역사에서 군인들에게 오늘날에도 계속 발전하고 있는 수많은 도전들보다 항상 앞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1973년 5월 1일, 미군 중장 존 H. 헤이 Jr., 워싱턴 D.C.

 


 

제 I장: 소개

 

 베트남전에서 미 육군은 전혀 새로운 적을 맞아 싸우기 위하여 새로운 무기와 새로운 전술로 싸우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선이 따로 없고 게릴라 전술로써 싸우는 전쟁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 나라(즉, 미국)의 시작 때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며, 한편으로 복잡한 하드웨어의 발전은 미래의 자동화 전장 관리 시스템을 예견하기도 했다.

 

 이 글은 보병 사단장의 관점에서 베트남전에서 발생한 중요한 전술상, 군수물자상의 혁신들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 몇몇 잘 기술된 전투들을 통해 새로운 개념과 장비들을 보여줄 것이며, 이들 대부분은 여러가지 작전이 벌어지는 긴 시간에 걸쳐 발전되어 왔다. (지도 1) 그러나 기본적 전술 교리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능력이 추가되거나 베트남의 실정에 알맞게 적용되었을 뿐이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병사들이 사용한 전술 및 방식들은 제 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기간 적군에게서 나타난 패턴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특히 폭동 시기(stages of the insurgency) 당시에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이 당시 적군 주력은 정면 충돌을 피하고 테러리즘과 기습에 주력했다. 또 다른 차이점은, 지난 전쟁들에서 비교적 정해진 좁은 전선에서만 전투가 벌어진 것과는 달리, 남베트남 전역이 변화 무쌍하는 전쟁터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전술은 상황에 적응하였다. 쉽게 숨고 경무장 상태인 보병이 유리한 지역에서 헬리콥터의 등장이 그 균형을 맞추었다. 공중 기동성(Airmobility)이야말로 새로운 장을 열어주는 것이었으며, 이로써 다양한 전투력의 정확한 적용이 가능해졌다. 마지막으로 지역 평정(pacification)이 전투 지휘관의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종전에는 중요하지 않던 일이었다.

 

 베트남에서 발전된 많은 전술 및 물자 측면의 혁신들은 적들의 동남아시아에서의 작전 방식에 따른 대응으로 나타난 것들이다. 북베트남군(NVA)과 베트콩(VC)의 핵심 군사 전략은 공세적인 행동으로 주도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저들은 연합된 방어거점은 회피하고 약한 지점을 골라 공격했다. 연합군 진지에 대하여 여러 차례 의도적인 공격을 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세가지 기본 작전을 더 선호했다 : 습격, 매복, 화력에 의한 공격. 이러한 공격들의 주 목적은 가끔씩은 단순히 정치 심리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장비와 시설을 파괴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1965년 미군이 남베트남에 들어온 이후, 적들은 전략 요충지를 점령 혹은 거부하는 것이 그들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들이 어느 정도나마 영구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던 곳은 캄보디아, 라오스, 북베트남 접경지역에 있는 해방구(sanctuaries)들에 불과했다.

 

 (지도 1)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방어 방식은 회피(evading)에 있었다. 저들이 가끔씩 진지를 방어하는 것은 연합군을 함정에 유인하거나 근처의 보다 대규모의 부대로부터 떼어놓기 위한 기만을 목적으로 할 때 뿐이었다. 적군 전술가들은 연합군이 화력과 기동성 면에서 우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러한 우월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적들은 연합군이 반응하기 전에 집결, 공격, 퇴각을 완료하는 것을 시도했다. 적들의 작전들은 매번 작은 부분까지 계획되었고, 종종 예행연습까지 실시했다.

 

 적의 전투병력은 경무장이었기에 보다 자유롭고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의 재래식 군대가 사용하는 방식의 보급선은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이들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전장에 보급품을 집적시켜 두었다. 여분의 무기와 탄약을 목표지점 근처에 은닉해 두었다. 의료 물자와 탄약, 식량 등은 탈출로상에 저장해 두었다. 그 결과 보급품 이동의 증가와 은닉 장소의 발견은 적의 공세 작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엇다.

 

 적군이 전장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연합군과의 교전을 중단하고 달아나는 능력이 꼭 필요했다. 저들은 작전 전체에서 도주 단계를 다른 전투 행동 못지 않게 중요시했다. 필요한 경우 저들은 달아나기 위하여 반격을 실시했다. 만약 도주로가 차단된 경우, 적은 연합군의 약한 지점을 골라 공격하고 그 간격을 통하여 탈출했다. 일부 부대가 지연 목적으로 잔류하여 추격자들을 매복공격하기도 했다. 만약 질서 정연한 퇴각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나중에 사전 약속된 장소에 모이기로 하고 병력들을 흩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매우 초반부에, 미군은 이러한 회피하는 적들을 찾아내는데 있어 정보 자원을 극한까지 소모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미군에게 필요한 시의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있어서 기존의 정보 수집 및 분석, 배포 방식은 너무 느렸다. 그 결과 패턴 분석이나 장거리 정찰과 같은 새로운 방식들이 조기에 개발되었지만 이 역시도 충분하지 못했다. 음향 센서, 자기 센서, 진동 센서, 공중 정찰 장비, 감시 정찰 장비 등과 같은 장비들이 급속도로 개발되었다. 정보가 아직 유용한 상태에서 활용되어야 했으므로, 정보 활동과 작전 부대간의 긴밀한 협조가 매우 중요해졌다. 과거의 전쟁에서는, 미군은 적들의 정보들을 조합하고 이를 지형, 날씨, 목표를 고려하여 결론을 내렸지만, 베트남에서는 적의 위치가 대충이나마 드러나게 되면 즉각 추격하게 되었다.

 

 과거 적아 지역의 구분이 명확했던 전통적인 전쟁과는 구분되는 2차원 전쟁(area war)으로 인하여 모든 군사작전 측면에서 심각한 영향이 발생했다. 넓게 분산되고 준영구적인 군수시설들과 군사기지들이 공중 보급로 혹은 무장 수송대에 의하여 연결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그곳에 거주하는 병력들에 의하여 방어되었고, 기동 대대들에 대하여 행정, 군수, 전투 지원을 제공했다. 포병이 적절히 지역들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화력 지원기지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아담한 방어 진지들은 보병, 기계화부대, 기병대, 전차부대들을 지원했으며, 또한 이들에 의해서 보호되었다.

 

 보병 대대와 중대, 소대들은 통상 공세적으로 운영되었으며, 밤에는 미리 준비한 야간 방어 진지에 참호를 파고 들어갔다. 주간 작전 지도에는 정확한 접촉선이 나타나 있는 대신, 작전 지역 전역에 걸쳐 적색과 청색의 점들이 무수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양군 사이에 무인지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구가 가득한 교외 지역에서 자주 전투가 발생했다. 적들은 겁에 질린 주민들 사이로 쉽게 숨어들어갔고, 그 결과 주민들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정보원이 되어 주지 못했다. 연합군 측면에서는 민간인 사상자 발생을 피하기 위하여 전투력 사용에 대한 특별한 교전 수칙이 제정되었다.

 

 헬리콥터는 대단히 중요했다. 한국 전쟁 당시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헬리콥터는 전쟁에 있어서 새로운 차원을 열어 주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헬리콥터로 인하여 보병의 통제 영역이 최소한 3배로 늘어났다. 지휘관은 기회에 더 빨리 반응할 수 있었고, 결심을 유보하거나 이동간에 계획을 바꿀 수 있는 여지도 제공하였다. 지휘관은 병력을 집적시키거나, 적의 탈출로를 차단시킬 수 있었고, 병력들을 퇴출시키거나 적을 기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휘하 전 병력이 짧은 준비시간 안에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휘관이 지형에 대한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공중기동 사단(airmobile division)에서는 헬리콥터가 모든 작전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베트남에서 헬리콥터가 없었더라면, 제한된 수의 연합군으로서는 적의 기동을 앞설 수 없었으며, 또한 우세한 화력을 이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베트남 각지의 지형과 날씨는 전쟁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전술 지휘관으로 하여금 고유한 전투 방식을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메콩 삼각주(Mekong Delta) 지역에서는 광대한 논과 늪지대가 각종 운하와 수로와 함께 펼쳐져 있었고, 종종 차량의 통과를 불가능하게 하기도 했다. 하천 전술(Riverine tactics)은 흘수선이 낮은 특수 포함(gunboat)과 부유 포대, 장갑 수송선 등을 활용했으며, 참호를 파고 대항하는 베트콩과 싸우는 지상군에게 도움이 되었다. (지도 2)

  

(지도 2)

 

 사이공 주변의 산록 지대(piedmont)는 완만한 구릉지대와 넓은 평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장자리에는 잘 준비된 캄보디아 해방구들이 있고, 이 지역 안에 악명 높은 정글 기지들인 '전쟁구역 C, D'(War Zones C and D)역시 위치하고 있다. 궤도 차량의 이동에 적합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은 많은 주력 부대들의 전투가 발생한 장소이다.

 

 남베트남 북쪽 절반 지역은 좁은 해안 평야 지대로서, 모래 해안과 넓고 평평한 강 골짜기, 늪지대, 논밭 등이 많은 지역이다. 인구 상당수와 상업 및 농업, 그리고 미군 군수기지와 사령부 상당수가 이 지역에 집중되어있다. 이것들은 적에게는 고가치 목표물로서, 미군과 연합군의 전투 작전시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특별한 보호가 필요했다.

 

 숲이 무성한 거친 산악지대는 플레이쿠(Pleiku)에서 반메투옷(Ban Me Thuot)에 이르는 고원지대에 의하여 끊어진다. 궤도 차량의 이동과 헬리콥터의 착륙 측면에 있어서 상당한 제약이 따르는 지역이다. 거친 날씨와 보급 중심지로부터의 먼 거리 역시 중요한 제한 요소가 되었다. 고원지대에 있는 적군은 대개 북베트남군의 정규군 부대들이었다.

 

 이 나라는 대체로 덥고, 습하며 열대인 지역이다. 연간 강우량은 매우 많으며, 북부 해안지방의 경우 120인치, 사이공의 경우 80인치, 판랑(Phan Rang) 지역의 경우 40인치를 나타낸다. 특히 비가 많이 오는 시기는 북쪽 산악지역의 경우 겨울의 몬순(monsoons) 시기이고, 메콩 삼각주와 산록 지역의 경우에는 여름 시기이다. 몬순 시기에는 관측과 길 외에서의 이동, 공중 비행, 통신 등에 방해를 받게 된다. 정비 및 보급, 저장 문제도 심각해지며, 질병의 발생도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우기에는 적의 활동 역시 통상 감소한다.

 

 포병, 전술공군, 중폭격기, 헬리콥터 건쉽 등으로 이뤄진 미군의 화력 지원은 통상 박격포, 로켓, 무반동포로 이뤄지는 적의 화력 지원을 훨씬 능가했다. 적은 그 결과 중화기 사용이 어려운 초 근접 거리에서 연합군 지상군과 싸우고자 종종 노력했다. 미군과 연합군의 전술은 정교한 정찰과 공중기동, 압도적인 화력에 중점을 두었다. 방어 측면에 있어서 세심하게 계획된 화력 지원 기지들과 미군의 야간 방어 진지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기존의 전쟁들과는 달리, 연합군에게 그다지 중요한 지형 목표물은 없었다. 반면에 남베트남에 있는 적 부대는 어디에 있던지 목표물이 되었다.

 

 지역 평정작전이 중요한 임무가 되면서 전투 지휘관들은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되었다. 모든 공세 및 경계 작전들은 해당 지역에 대한 베트남 공화국 정부의 통제권을 되돌려 놓는다는 보다 넓은 의미의 목표에 부합되게 이뤄져야 했다. 미군 전투 부대들은 베트남 군대와 지역 정부 기구들과 연합하여 베트콩 기반시설들을 제거하고 도로를 재개통하며, 시장을 재건하고, 학교를 세우고, 아픈 이에게 의료 지원을 제공했다. 가능한 한 그러한 작전의 공은 지역 정부 지도자에게 돌렸다.

 

 한국 전쟁 참전용사라면 철모와 권총, 박격포, 견인포, 사각 연료통(jerrycan)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그 외의 장비들은 전혀 새로운 것들이다. 과거의 식사 기구(mess kits)들은 사라졌다; 오늘날의 병사들은 트레이나 종이 접시에 담아 먹는다. 과거의 M1 소총은 경량의 M16 소총으로 교체되었으며, 새로운 M79 유탄발사기와 경대전차 로켓, 클레이모아 지뢰는 보병 화력을 증대시켜 주었다. 헬리콥터와 향상된 통신장비, 향상된 화력지원 관리시스템은 미군 부대의 전투력을 대단히 증폭시켜 주었다. 장갑차와 셰리단 경전차, 휴이 헬리콥터는 새롭게 개발된 장비들이다. 최신의 센서들과 자동 데이터 처리 시스템, 그리고 발전된 관리 기법들은 미래를 향한 초석들이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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