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출처 : (http://www.history.army.mil/books/vietnam/tactical/chapter3.htm) >
제 3장
어빙 작전 (1966년 10월 2-24일)
어빙 작전(Operation IRVING)은 베트남 전에 걸쳐 사용된 몇 가지의 혁신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혁신들은 전쟁 수행간의 전술적, 기술적, 심리적 측면들에 있어서의 중요한 변화들을 나타내고 있다. 헬리콥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단지 병력을 전투 지역으로 수송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공중 포병 임무나, 부상자 후송 임무, 군수 지원 임무, 그 밖의 신형 경량 장비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어빙 작전은 또한 대 비정규전 작전에 있어서의 민사작전과 심리전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적은 수직 포위로써 교란당한 데 더하여, 미군 전략 폭격기의 공격과 지하 땅굴을 침입하는 미군 보병들의 공격으로 괴로움을 겪게 된다.
1966년 10월 동안, 연합군측 군사력은 베트남 공화국의 중동부 지역에 위치한 빈딘 성(Binh Dinh Province)에 위치한 적군을 분쇄하고 성내 해안 지역의 인구 밀집지역에 존재하는 베트콩들의 정치 기구들을 근절하기 위하여 총 3가지의 서로 긴밀히 연결된 작전들을 실시하게 되었다. 22일간의 기간 동안, 남베트남 제 22사단, 대한민국 수도사단, 미국 제 1 (공중기동) 기병 사단이 이 지역을 휩쓸면서 침략자들에게 싸우지 않으려면 항복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 적은 주요 결전들을 통해 대규모 인명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 군수지원 기지들이 발각 및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승리로 빈딘 성의 중앙 해안지역 및 이 곳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남베트남 정부의 수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빈딘 성의 시민들은 이제 수년 동안 지속되었던 베트콩들의 공포정치와 착취로부터 처음으로 해방되었으며, 앞으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미 제 1기병사단이 이 전역에서 빈딘 성을 평정하는 데에 기여한 부분이 바로 어빙 작전이다.
어빙 작전이 시작된 것은 1966년 10월 2일이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여러 날 이전부터였다. 적들은 킴 손(Kim Son) 지역의 기지들과 506 계곡에서 쫓겨나 바다 쪽으로 밀려났다. 9월에 있었던 테이어 작전(Operation THAYER)을 통하여, 미국, 남베트남, 대한민국의 강력한 군대가 포위공격을 실시하여, 산악 지역의 해방구에 은신하고 있던 제 610 북베트남 육군 사단을 격멸하고 대량의 의료물자와 무기, 지원물자, 식량을 찾아냈고 연대 병원과 대규모 대인지뢰 및 수류탄 생산 공장을 찾아냈다. 일련의 격렬한 전투로 인하여 적들은 자연적인 포켓 지형 안으로 쫓겨가게 되었으며, 이 지역은 남으로는 푸캇 산맥(Phu Cat Mountains), 동으로는 해안선, 북으로는 누이 메우 산맥(Nui Mieu Mountains), 서쪽으로는 1번 국도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로써 어빙 작전의 전투 대형이 결정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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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기병사단은 어빙 작전에 대하여 세세한 부분까지도 계획하였다. 사단 참모들은 전투 작전들 뿐만아니라, 정보, 심리 작전, 주민 장악, 민사작전 프로젝트 등에도 신경을 썼다. 적과의 전투가 성공적이 되려면 심리적 측면, 주민 장악 측면, 민사작전 측면 모두가 효과적이어야 했다. 적이 들어차 있는 포켓지역 내에는 약 25만명의 민간인들과 중요한 농장 및 염전지역들이 들어차 있었다. 비전투요원의 사상을 막기 위해서 주민 장악 대책이 심리전 프로그램 내에 포함되게 되었다. 민간인 통제의 한 방안으로 어빙 작전 내내 120만장의 전단지와 150시간의 라디오 방송이 동원되었다.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되었고, 때로는 주민들에게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적에 대한 심리전도 실시되었다. 예를 들면, 항복 할 때 무기를 가져오면 그에 해당하는 사례를 해주기도 했다.
어빙 작전의 D-데이가 되었을 때, 자유 진영 지원군들(Free World Military Assistance forces)은 정위치하였다. 제 1 기병사단의 1, 3여단은 어빙 포켓지역 내 깊은 곳으로 공중 강습에 들어갔다. 동시에 남베트남과 대한민국 군대는 전투지역 남쪽으로부터 협조된 공격을 실시하여 총 3개의 기동작전이 상호 보완할 수 있도록 실시되었다. 남베트남 제 22사단은 2개 보병대대와 2개 공정대대를 동원하여 북동방향으로 지상전을 개시했다. 대한민국 수도사단은 푸캇 산맥을 관통하여 북쪽으로 진격했다. 남중국해에서는 남베트남 정크선 함대와 미 해군이 바다 방향으로의 탈출로를 봉쇄했고, 구축함 헐(Hull) 호와 폴슨(Folson)호 및 기타 소형 선박을 통하여 화력 지원을 실시했다.
제 1 기병사단은 10월 2일 아침 07:00에 공격을 개시했다. 제 1여단장 아치 R. 하일(Archie R. Hyle) 대령은 8기병연대 1대대를 투입하여 목표지점 5060을 점령토록 했다; 그리고 8기병연대 2대대로 하여금 목표지점 506A를 점령하도록 했다; 그리고 12기병연대 1대대로 하여금 목표지점 506B를 공격하도록 했다. 제 3여단장 찰스 D. 다니엘(Charles D. Daniel) 대령은 7기병연대 1,5대대를 동원하여 목표지점 507을 공격했다. 9기병연대 1대대는 사단장인 존 노튼 소장(Major General John Norton) 통제 하에 사단 관심지역에 대한 통상 정찰 임무를 맡았다. 작전이 시작하자 얼마 안되어 적과의 결전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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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데이 아침 일찍, 제 9기병연대 1대대 병력들은 호아 호이(Hoa Hoi) 부근에 대한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마을에 있는 7명의 북베트남군 병사들을 발견했다. A 중대는 마을 지역에 보병 병력을 착륙시켰고 무장 헬리콥터로 이들을 지원했다. 이들은 이어 이 마을을 진지화시켜 둔 대규모 적군과 교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호아 호이의 상황에 대하여 전해들은 하일 대령(Colonel Hyle)은 당시 다른 목표를 향해 공중 이동 중이었던 12기병연대 1대대 병력을 불러들였다. 1대대장 제임스 T. 루트 중령(Lieutenant Colonel James T. Root)은 자신의 지휘통제 헬리콥터에서 새 임무를 내렸고, 대대는 구출 임무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B중대는 1대대에서 최초로 호아 호이에 도착한 부대였다. 프레드릭 F. 메이어 대위(Captain Frederick F. Mayer)의 지시에 따라 B중대는 마을 동쪽 300미터 지점에 착륙했고, 신속히 기동하여 적의 요새화된 진지를 공격했다. 메이어 대위는 부상당하면서도 휘하 부대가 잘 준비된 적 벙커 시스템을 향해 공격하는 것을 지휘했다. 개활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부대는 대단히 강렬한 사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고착되었다. B중대 2소대원들은 일어나 적탄을 뚫고 전진했다. 로이 살라거 일병(Private, First Class, Roy Salagar)가 선두에 선 한 분대가 다수의 부비트랩이 설치된 외곽 참호에 침입해 들어갔고, 수분만에 적군은 마을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A중대가 호아 호이 남서쪽 지역으로 공중강습해 들어갔다. 3소대가 적과 접촉에 들어간 시점에서, 이들 역시 전장에서 민간인 비전투요원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도날드 E. 그릭 중위(First Lieutenat Donald E. Grigg)가 휘하 소대를 적에게 응사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던 시점에서 몇몇 노인들과 부녀자, 아이들이 그와 적 사이에 끼어들어왔다. 그는 집중적인 사격을 뚫고 150미터를 뛰어가 꼬마 2명을 집어들고 이들을 아군 대열로 데려왔다. 나머지 민간인들도 무사히 그를 따라왔다. 그릭 중위의 소대는 이어 적에게 접근하였고, 적은 마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2 기병연대 1대대의 다른 부대들이 전장으로 공중강습해 들어가고 있는 동안, 대대는 마을에 대해서는 사격을 금하고 있었다. 심리전 헬리콥터가 마을 상공을 돌며 확성기로 민간인들에게 마을 밖으로 나와 경계선 외곽의 4개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라고 방송을 했다. 북베트남 병사들에게는 무기를 내려 놓으라고 요구했다. 이 잠시간의 중지기간 동안 다수의 민간인들과 병사들은 방송에서 하라는 대로 실시하게 된다. 1시간이 지났을 때, 더이상 아무도 마을에서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12기병연대 1대대는 마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미군 대대가 요새화된 마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하루 종일이 소요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날 저녁, 노튼 장군(General Norton)은 12기병연대 1대대에 대한 증원병력으로 5기병연대 1대대 A중대 및 C중대를 투입했다. 루트 대령 지휘하에서 해당 중대들은 호아 호이 동쪽의 해안가에 야간 공중강습을 실시했고, 야음을 이용하여 적을 포위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해 들어갔다. 북베트남 병사들은 총격전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으나 허사였다. 효과적인 포격 지원으로 적을 가둬두는 효과가 발생했다. 그날 일찍 19 포병 2대대 A포대는 12기병연대 1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습지원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이동해 있던 상태였다. 그날 밤, 105mm 탄 883발이 발사되어 적을 고립시키는 데에 사용되었다. 미 공군의 AC-47 플레어쉽과 포병, 해군 구축함 울만(Ullman)함의 포격에 의하여 전장은 밝게 밝혀졌다. 야간 동안 헬리콥터들은 화력 지원과 보급품 수송, 사상자 후송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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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는 제 12 기병연대 1대대 C중대가 적 진지를 뚫고 남쪽으로 공격하였으며, A,B중대는 촌락 반대편을 차단하였다. 적들의 방어 기술은 훌륭하였다; 그러나 아군의 공격 강도는 강했고 전투 지원들이 잘 조율되어 있었던 탓으로 호아 호이 전투는 호각을 이루고 있었다. 24시간의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제 12 기병연대 1대대 및 지원부대는 233명 사살의 전과를 거둔 반면, 피해는 3명 전사에 29명 부상이었다. 또한 북베트남군 35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북베트남군 정규군으로 의심되는 15명도 붙잡았다.
작전 D-데이 경, 목표지점 506A 근방의 누이 몌우 산악지대(Nui Mieu Mountains) 지역에 B-52 폭격이 1회 가해졌다. 제 9기병연대 1대대(1st Squadron, 9th Cavalry)는 이에 대한 피해 평가를 실시하였고, 7구의 시체와 문서들을 발견함으로써 동 지역에 제 2 베트콩 연대(2d Viet Cong Regiment)의 병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어빙 (IRVING) 포켓 지역을 조이기 위한 전 병력의 진격은 시간표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해안으로의 소탕작전은 헬리콥터 강습과 적을 격파하기 위한 지상 기동 등을 통해 지속되었다. 10월 4일, 제 3여단에서는 7기병연대의 1, 5대대를 활용하여 협조된 지상 공격을 실시하였다. 이 공격에는 사전 대규모 포병 준비사격을 실시하였다. 작전간에 적 30명을 살해하였다. 소탕작전(sweep operation)이 누옥 응곳 만(Nuic Ngot Bay) 근방에 다달았을 무렵, 전단지와 확성기를 통하여 민간인들에게 이 만에서 움직이는 모든 배들은 격침될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였다. 이 작전에는 폭동 진압 작용제(Riot control agent) 역시 사용되었다. 제 3여단의 대대들은 수로를 소탕하기 위하여 헬리콥터로 공수해 온 공격정(assault boats)를 사용하였다.
10월 5일, 제 12기병연대 1대대는 서쪽으로 돌아가 수이 까 계곡(Soui Ca Valley)에 대한 공중 강습작전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B-52 폭격을 활용함과 동시에, 어빙 포켓지역에서 빠져나갔거나 계곡 내의 비밀 거점에 존재하고 있을 적들을 기습하기 위함이었다. 어빙 전투지역에서 제 1 기병사단은 지속적으로 북베트남 부대를 수색함과 동시에 베트콩들을 색출하였다. 제 9기병연대 1대대는 접촉을 회피하려는 수 많은 소규모 적병 무리들을 목격하였다. 기병대는 무장 헬기에서 이들에게 사격을 실시하였고, 종종 보병을 착륙시켜 적들과 교전하였다. 10월 9일, 제 20포병(공중로켓포병) 2대대는 훙 록 반도(Hung Loc peninsula)에 대한 소탕작전 기간에 반도 내에 있던 한 벙커에 SS11 미사일들을 발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벙커는 파괴되었고, 베트콩 55명을 전투 없이 포로로 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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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 진지로 불도저를 운반하고 있는 CH-54 "플라잉 크레인(Flying Crane)"
10월 중순, 해안 지역의 적 접촉은 크게 감소하였고, 전투의 중심은 이제 다시 서쪽 계곡으로 옮겨갔다. 제 2 베트콩 연대의 일부 부대들이 킴손(Kim Son)과 수이 까 계곡(Soui Ca Valley)에 재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활용하여, 사단은 신속하게 몇몇 대대들을 해당 지역으로 공중 이동(airlift)시켰다. 10월 13일, 제 5기병연대 1대대는 베트콩 주 지역 사령부를 찾아내었고, 여기에는 공식 인장(official stamps), 무전기(radios), 문서, 타이프라이터 등이 발견되었다. 10월 14일과 15일에는 1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제 8 공병대대 A중대가 공중기동형 건설장비(airmobile engineer construction equipment)를 들여왔다. CH-54 "플라잉 크레인(flying crane)" 헬리콥터가 그레이더(grader; 땅을 평평하게 만드는 건설장비의 일종)와 공압식 롤러를 계곡으로 수송하였다. 터널 랫(tunnel rats)이라고 불리는 공병 팀들은 적들이 건설한 대단히 많은 터널들을 수색, 정찰, 파괴하였다. 계곡 지역에 대한 소탕작전으로 추가적인 장비 및 보급물자 집적물들이 드러났다.
어빙 작전 후반부에는 제 19포병 2대대 A포대가 포병 공격을 감행하였다. 4문의 곡사포 및 포반원, 탄약 280발, 그리고 최소한의 사격통제반원(skeleton fire direction center)들이 기존까지 적들이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한 지점으로 공수(airlift)되었으며, 다른 일반포병(tube artillery)의 사거리 밖에 있는 사전 선정된 목표들에 대하여 포격을 실시하였다. 17분 내로 280발을 모두 사격하였고, 그 직후에 포병은 다시 기지로 공수되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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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자정이 되면서 전투는 종료되었다. 적들은 제 1 기병사단(공중기병)의 공중 기동성(airmobility)와 유연성(versatility)에 대하여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대규모 화력은 적군을 학살하였고, 적들이 장기간 마련해 둔 보급 기지들도 파괴되었다. 제 1 기병사단은 아군 19명의 목숨을 잃는 대신 적군 681명을 살해하고 741명을 생포하였다. 미국 군대의 신속한 반응으로 인하여 사단은 처음으로 적 사살자보다 많은 적 포로를 생포할 수가 있었다. 어빙 작전의 성공은 빈 딘 성(Binh Dinh Province)의 평정(pacification)에 있어서 지속적인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어빙 작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전술적 혁신은 공중기동 전투(airmobile combat)에 있다. 공중기동 작전(airmobile operation)이란 전투병력(combat forces)과 이들의 장비가 항공기로 전장 부근에 수송되어 지상전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전에서 헬리콥터는 단순히 병력들을 전투 지역으로 수송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전투 중 작전을 확대하는 것(to develop the situation), 증원하는 것(to reinforce), 퇴각하는 것(to withdraw), 전투력을 빼돌리는 것(to displace combat power) 등을 가능하게 만든다. 공중기동 강습(airmobile assault)의 목적은 소진되지 않은 전투 병력(fresh combat troops)을 이들의 전술 목표 위 내지는 근방에 위치시키는 데에 있다. 전술부대는 장애물들과 통과 불가능한 지형지물들 위를 날아가서 전장의 전략적 지점에 착륙할 수가 있다.
어빙 작전에서의 성공적인 공중기동 강습과 기타 베트남에서 다른 부대들이 실시한 공중기동 강습들은 참가하는 지상군 부대(ground unit)들과 항공 지원(aviation support)부대, 전투지원(combat support) 및 전투근무지원(combat service support)부대들의 정교한 사전기획을 통해서 가능했다. 공중기동 특임부대(airmobile task force)의 통합 지휘관은 강습을 실시하는 지상군 부대 지휘관이 된다. 항공 지휘관은 헬리콥터 지원부대를 지휘하며 특임부대 지휘관에게 항공 관련 문제들에 관하여 조언한다.
베트남에서의 공중기동 작전들은 공정작전(airborne)과 비슷하게 역순으로 기획된다. 우선 지상 전술 계획(ground tactical plan)이 수립된다. 이것이 기본적인 공중기동 작전 계획(airmobile operation plan)이다. 이 계획에서 강습부대 지휘관은 그의 기동 계획(scheme of maneuver) 및 목표 지점에 대한 화력 지원계획을 명시한다. 강습 목표(assault objective)는 임무 완수를 보장할 수 있도록 선정한다. 이후에 지상 전술 계획을 지원할 수 있도록 착륙장(landing zones)을 선정한다. 동시에 기동 계획과 밀접하게 연계 및 통합된 화력 지원 계획(fire support plan)을 수립한다.
그 다음 단계로는 착륙 계획의 수립이다. 이를 통하여 다양한 전투력이 적시 적소에 도착하도록 꾸민다. 착륙 계획에는 순서, 시간, 병력들과 장비 물자들이 착륙할 장소 등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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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는 공중 기동계획(air movement plan)이 수립되며, 이는 이전 계획들에 근거하여 작성된다. 이 계획의 목적은 병력과 장비, 보급품에 대하여 승차장에서 착륙장까지의 이동을 계획하는 데에 있다. 비행속도, 고도, 대형, 경로 등의 세부사항들을 결정한다.
마지막으로 적재계획(loading plan)이 수립된다. 이를 통하여 적합한 시기에 부대가 승차장에 도착하여 적당한 시간 내에 올바른 항공기로 병력, 장비, 보급품이 적재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종종 신속하게 변화하는 전술 상황 탓에, 공중기동 계획 절차가 단축되기도 한다. 계획의 모든 요소들은 여전히 고려 대상이지만, 짧은 형태로 준비된다. 어빙 작전에서 제 12기병연대 1대대의 루트 대령(Colonel Root)이 실시한 행동이야말로 이러한 훌륭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목표지점 506B에 대한 1`대대의 공중기동 강습(airmobile assault)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격 직전에 호아 호이(Hoa Hoi)마을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루트 대령은 공중으로 이동하던 도중에 새로운 목표에 대한 새로운 명령을 준비 및 할당하였다. 지상부대와 항공부대에 있어서 적절한 훈련과 완벽한 예규(standing operating procedure)가 존재했기 때문에 신속하게 공중기동 계획을 수립하여 명령으로 내릴 수가 있었다.
무전 통신(radio communication)과 사전 약정된 시호(visual signals)수단, 유색 연막탄, 유색 조명탄 등은 공중기동 강습에 있어서 주요 통신수단이었다.
이러한 작전들 가운데에 화력 지원은 극히 중요하였으며, 여기에는 포병 지원, 함포 지원, 무장헬기, 전술 항공기, 전략 폭격기, 박격포 등이 포함되었다. 특정 작전 기간 동안 특수 임무부대(task force)는 이들 중 일부 혹은 전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가용한 모든 화력 지원은 공중기동 특수임무부대(airmobile task force) 지휘부(command group)의 통제를 받으며, 이들은 지휘통제 헬리콥터에 위치한다. 착륙장 및 근처 지역에 대한 준비사격은 통상 짧고도 격렬하게 진행되며, 다양한 소스를 활용하여 중단없이 진행된다. 최초 헬리콥터 착륙 몇 초 전이 되어서야 사격은 착륙장에서 빗겨가게 된다. 사격은 공격 부대를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선정된 장소들로 전환되며, 목표 지점의 확장을 지원함에 따라 재배치된다. 연막 지원은 화포나 특별한 장치가 설치된 헬리콥터를 통하여 실시되어 공격부대의 이동을 차장한다.
베트남에서의 사단장들은 공중기동 강습이 자신들의 작전 속도와 유연성을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며, 영향권을 확대시키고, 신속하게 병력을 집중함과 동시에, 임무 수행 후에 다시 이들을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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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보다 통상 전투 거리(combat range)가 멀었던 제 2차대전과 한국 전쟁에서는, 포병사격 오차가 아군 피해로 이어지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포병 임무 중의 약 50 퍼센트가 아군 진지와 매우 근접한 지점에 사격을 해야 하거나, 아예 아군 부대를 사실상 둘러싸는 지점에다 사격해야 하는 경우로 나타났다. 한번 실수를 하면 미군이나 동맹군, 혹은 작전지역에 거주하는 민간인 거주지역에 피해가 발생했다. 매 작전지역을 책임지는 선임 장교는 휘하 부대와 지역민들의 안전에 특히 책임을 저야 했다. 그의 화력 지원 보좌관(fire support coordinator)은 이러한 안전을 보장하는 데에 필요한 갖은 세부절차들에 관한 일들을 수행했다. 이 인원은 화력 금지선(no-fire lines), 화력 협조선(fire and fire support coordination lines)과 같은 것이나, 미국 고문관이 위치한 베트남 공화국 최하 행정단위 (통상 district)의 확인(clearance)등과 같은 것을 활용하여 일했다. 화력 지원 보좌관은 미국과 베트남의 최고 지휘부에서 합동으로 결정한 교전 규칙에 근거하여 설종된 특정 타격지대(specified-strike zone)나 사격 금지지역(no-fire zone) 등이 표시된 지도를 유지했다. 이것들은 모든 동맹군들에게 적용되었으며, 아군 및 민간인들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고 작전영역 및 국경을 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규칙들은 매 상황을 특정했다(The rules were specific). 즉, 모든 일반적 작전 형태들을 다뤘는데, 예를 들어 초병선 수색(cordon and search)이라던가, 무력정찰(reconnaissance in force), 수로 거부작전(waterway denial operation), 기지 방어(defense of a base camp)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영역의 설정 문제도 다루었다. 사격 금지지역(no-fire zones)의 경우 베트남 공화국 정부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정해졌다. 통금시간에 관한 규칙은 각 성장(province chief)들이 경우에 따라 다르게 제정하였는데, 도심지나 주요 보급로, 새생활촌(New Life hamlets), 숲과 들판에 있는 모든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적용되었다. 통금 제한을 지키더라도 사격 금지지역 밖에 있는 인원들은 모두 일단 용의자(suspect)로 가정했다.
자연적으로, 이 규칙들은 자체 방어하려는 부대들의 권리를 제한하지는 않았으며, 공격받은 부대의 경우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격하는 적에게 대하여 공세적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해리스 W. 홀리스 소장(Major General Harris W. Hollis)가 나중에 술회한 바는 다음과 같다:
목표물이 적대적인지를 판단하는 가장 명백한 시험방법은 이들로부터 사격을 받아보는 것이다- 그 자체로 가장 명백한 증거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 부대들이나 항공기는 자체 방어를 위하여 반격할 수 있으나, 이에 있어서 위협을 처리하는 데에 필수적인 만큼만 해야 한다. 사전 허락도 받지 않고 베트콩 저격수를 잡겠다며 과도한 공습을 요청하는 것은 곤란하다. 나는 각 책임있는 지휘관들이 부여하는 이러한 제한들이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핵심이라고 믿는다.
승인(clearance)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발생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간접사격의 즉응성이 떨어지고 기습효과가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승인 절차로 인하여 매 요청마다 통상 약 3분가량의 지연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승인자(agencies)가 부대 내에 있는 것이 가장 지연 시간을 줄이고 복잡성을 줄일 수가 있었다.
사격 임무에서 시간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작전 이전이나 혹은 야간 정보, 차단사격 등을 위해 무인지대가 자주 청소되었다 (To reduce the time lost in firing missions, nonpopulated areas were frequently cleared in advance of operations and for night intelligence and interdiction fire). 지휘관들은 지역 정부 기관들이나 자유세계 군대들과 적절한 연락관을 두도록 하였고, 이를 통하여 신속한 요청 연락 수단을 제공함은 물론 가능한 경우 특정 타격 지대(specified-strike zones)들을 지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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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에서의 항공기 사용이 엄청나게 늘어남에 따라, 이들을 지상군 간접사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안전규칙들을 제정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항공 안내요원(air advisory agencies) 관련 작전 책임은 통상 해 지역에서 가장 대규모인 야전 포병 사령부에 부과되었다. 이들 요원들은 통상 대대 작전구역에 위치하였다. 항공 안내요원이 담당한 공역으로 들어가는 항공기는 통상 승인요청 무전을 보냈다. 항공기들에게는 사격이 이뤄지고 있는 지역 및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는 통로에 관한 정보가 제공되었다. 이러한 요원들은 네트워크를 통하여 자신들 지역 내의 항공기들에게 새로운 포격 작전 여부에 관하여 정보를 제공하였다. 항공 안내요원들은 5000피트 이상을 통과하는 모든 포격에 관하여 미공군에 통보해 주었다.
베트남전에서의 중요한 혁신 중의 하나로 전략 공군력(strategic air power)을 지상전 계획(ground combat plan)에 통합시킨 것을 들 수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러한 중폭격기는 훨씬 제한된 규모로만 사용되었다. 전략 항공사령부(Strategic Air Command)는 극히 고고도로 비행하는 B-52폭격기를 이용하여 적의 요새화된 진지에 대한 폭격을 적의 시각과 청각 범위 밖에서 기습적으로 실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파괴효과를 불러올 수가 있었다. 어빙 작전 기간 동안 2차례의 B-52 폭격이 실시되었다.
지상군 지휘관들은 B-52를 전술적 고가치 목표들에 대하여 활용하였다. 흔히 목표로 선정된 것은 적 기지 지역에 몰려있는 밀집병력이었다. B-52가 타격할 목표가 식별되면, 지휘망을 통하여 폭격 요청이 육군-공군 합동 목표물 선정 위원회(joint Army-Air Force targeting committee)에 전달되었다. 요청이 승인되면 해당 목표물이 폭격 스케줄에 포함되고, 이를 요청한 부대 역시 체크되었다. 이후 전술 지휘관은 이러한 B-52 폭격을 이용하여 자신의 지상전 계획을 최상의 것으로 완성할 수가 있었다. 폭격 이후에 벌어지는 후속 작전들은 그 목표물의 성질에 따라 달라졌는데, 해당 지역에 관한 소규모 정찰인 경우도 있었는가 하면, 대대 이상 규모 부대가 참가하는 대규모 유린공격 작전(sweep operation)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B-52 폭격 이후에 목표 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적 인원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종종 포병 사격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한편 B-52 폭격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데 있어서 헬리콥터에 의한 전술적 기동성과 지상군 지휘 통신망의 활용은 큰 가치를 발휘하였다. 아직 공기 중에 폭격으로 인한 먼지와 연기가 가라앉기도 전에 헬리본 강습이 개시되기도 하였고, 이를 통하여 적병들에게 최대한의 충격과 혼란을 가져다 줄 수가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큰 포병 혁신 중의 하나로 공중 로켓 포병(aerial rocket artillery), 흔히 ARA 내지는 공중 야포대(aerial field artillery)라고 불리는 것을 들 수 있다. 한동안 헬리콥터의 화력 지원 가능성에 대한 관심들이 증가되어 왔었다. UH-1 헬리콥터에 기관총과 로켓포, 유탄발사기 등 다양한 무장들을 결합시킨 건쉽(gunship)이 전쟁 내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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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론상 건쉽은 포병 형태가 아닌 경화기 형태의 화력지원만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 공중 로켓 포병의 경우 포병처럼 조직되어 활용될 수가 있었다. 제 1기병사단 2대대 20포병대(ARA) 지휘관이었던 넬슨 A. 마혼 중령의 말을 따르자면, "우리는 스스로를 별종으로 취급했고, 우리들의 성공 역시도 이를 부추겼다." 공중 로켓 포병 사격은 포병 통신망을 통하여 요청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들에 대한 통제 역시도 통상 포병 전방 관측관(artillery forward observer)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공중 로켓포병은 특히 사단 지상 포대의 사거리 밖에서 벌어지는 공중 기동부대(airmobile force)에 대한 지원에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공중 로켓포병은 즉응성에 있어서 극히 뛰어났고, 보병이 공중 강습에서 가장 취약한 시기인 착륙 직후의 상황에서 적아를 구분할 수 있는 화력 지원수단으로서 뛰어났다. 공중 로켓포병 헬리콥터는 착륙장 상공과 아군 병력의 이동로 상공을 감제하면서 날아다녔다. 필요한 경우 이들은 즉각적으로 요청된 지역으로 화력 지원을 실시할 수가 있었다.
비록 공중 로켓포병이 사용된 것이 일반 지상 화포(cannon artillery) 사거리 밖에서 빈번하긴 했지만, 이러한 일반 지상 화포를 지원하는 용도로도 활용되곤 했다. 공중 로켓포병에게도 재래식 포병의 통상적 전술 임무들이 주어지곤 했다. 그러나 공중 로켓포병이 갖는 사거리와 유연성 탓에, 이들은 통상 사단 포병의 통제 하에 일반 지원(general support) 임무로 사용되었다.
공중 로켓포병은 주 무장으로 M3 2.75인치 로켓(M3 2.75-inch folding-fin rocket system)으로 무장한 UH-1 헬리콥터를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코브라 헬기를 이용한다. 또한 공중 로켓포병은 SS 11 대전차 유선유도 미사일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SS 11은 고지 측면부의 벙커나 기타 요새지와 같은 점표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특히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베트남에서 중장거리 포(medium and heavy artillery)들은 통상 준영구적인 기지나 화력기지(fire base)에 위치하면서 전술 작전지역 내에 화력 지원을 실시했다. 이러한 화기들로부터의 지속적인 사격 내지는 위협에 대응하여 적군들은 자신들의 기지와 보급소를 이들의 사거리 밖으로 옮겼다. 이러한 외곽의 적 시설들을 타격하기 위하여 포병은 사거리가 닿는 곳으로 진지를 변환하여 사격을 실시하고, 이어 다시 기지로 돌아갔다. 헬리콥터를 통하여 소형 내지 중거리 화포들을 운반하는 것도 가능하긴 했지만, 이런 공격에 있어서는 자주포 형식의 중장거리 포들이 특히 적합했다. 사실 공중기동 사단들에서는 이런 작전에서 헬리콥터로 운반하는 105mm 곡사포들을 활용하여 특히 좋은 성과들을 올렸으며, 정글에 포병 진지를 만드는 데 있어서 독특한 기법들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기술들은 어빙 작전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1969년 10월, 제 101 공수사단(공중기동)은 자신의 포병이 갖는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레이다 공격(radar raid)이라는 것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공격은 AN/PPS-4 또는 AN/PPS-5 레이다를 이용하여 실시되었는데, 이들은 경계병력과 함께 화력기지 밖에 있는 감제 지형(dominant terrain)에 배치되었다. 이들 레이다는 과거 지형 조건 탓에 감춰져 있던 침투 경로들에 대한 감시를 할 수가 있었다. 색출한 적들에 대하여 기존 포병 사거리 내에서 포격을 실시함으로써 신속한 교전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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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빙 작전 기간 동안, 제 8기병연대 2대대 C중대는 누이 메우 산맥(Nui Mieu Mountains) 지역에서 한 터널 시설(tunnel complex)을 발견했다. 이 시설에는 5개의 수직 갱도(vertical shaft)와 이들을 연결하는 30~50 피트 깊이의 수평 터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터널을 수색한 뒤, 제 8공병대대의 공병 분대는 이 시설을 폭약으로 폭파하였다.
베트남 전쟁에서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로 적군이 터널과 기타 지하 시설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적들은 터널을 활용하여 폭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마음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수 있었고, 원시적 조건 하에서 효과적인 보급 체계를 운영할 수가 있었다. 1970년 말까지 총 4800여개의 터널들이 발견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자유세계 군대들(Free World military forces)이 실시한 유린공격 작전(sweep operation)간에 발견된 것들이었다. 지역 정보원이나 훈련된 개를 활용하여 발견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자 터널 탐지기나 진동 탐지기 등도 시험적으로 사용되긴 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적들로 하여금 터널을 비우게 만들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기법들이 개발되었다. 여러 보병 및 공병 부대들에서는 터널들 대한 소탕 및 탐색 임무를 위하여 터널 랫(tunnel rat) 팀을 조직하였다. 이들 팀들은 헤드 램프와 통신장비, 권총 등으로 구성된 탐색 키트를 활용하였다. 터널 탐색자 위치 추적 시스템(Tunnel Explorer Locator System)이 개발되어 터널 랫들이 터널 내를 진행하는 것을 관찰하고 터널 지도를 그리는 데에 활용되었다. 화학적 기법으로 효과가 증명된 것은 연기를 활용하여 터널 개구부를 찾아낸다거나, CS라고 알려진 폭동 진압용 최루탄을 활용하여 적 병력을 지하에서 몰아내는 등의 기법들이었다.
일단 터널을 소탕 및 수색하고 나면, 나중에 적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들을 폭파시켰다. 터널을 더 이상 사용 못하도록 만들기 위한 기법으로 여러가지가 개발되었는데, 예를 들어 터널 내에 폭동 진압제를 집어넣어 둔다던지, 입구를 폭약으로 폭파시킨다던지, 폭약으로 터널 자체를 폭파시킨다던지, 터널에 아세틸렌 가스를 주입한 뒤 폭발물로 점화시킨다던지, 건설장비를 이용하여 터널을 아예 뭉개버린다던지 하는 방법 등이 사용되었다.
베트남에서 최초로 폭동 진압제가 사용된 것은 1964년 12월 23일이며, 당시 안 후엔 성(An Xuyen Province)에 포로로 잡혀있던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CS 수류탄을 공중 투하한 것이었다. 이 작전간에 적과의 실제 접촉은 발생하지 않았다. 1965년 2월,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제 4군단 작전지역(four corps tactical zones)의 고위 고문단들에게, 미국 정책은 자위 목적으로 폭동 진압제탄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자위용으로 방독면과 CS 수류탄으로 구성된 키트가 각 분구 고문관들에게 지급되었다. 이들 키트들은 미군이 공세용으로 쓰도록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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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널 랫 팀이 베트콩 터널을 수색하는 모습(MEMBERS OF AN ENGINEER TUNNEL RAT TEAM explore Viet Cong tunn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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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3월,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지 특파원 피터 아넷(Peter Arnett)은 남베트남군에서 폭동 진압 작용제(riot control agents)가 사용되었음을 보고한다. 그의 보고서는 미국과 기타 외국 언론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미군 및 정치관련 기관들이 베트남에서 CS 작용제를 사용하는 데 대한 찬반에 대해서 조사를 하게 된다. 1965년 9월 5일, 제 6 해병연대 2대대장이 독자적으로 한 행동이 향후 베트남에서의 CS 작용제 사용 정책에 대해서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당시 2대대는 일련의 터널과 벙커들, "거미(spider)" 구멍들로 이뤄진 속에 숨어있는 적들과 봉착하게 된다. 그 안에 여성들과 아이들도 있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이 복합단지를 소탕하는데 CS 작용제가 활용된다. 그 결과 비전투원에 대해 특별한 부상을 입히지 않은 채 400명을 몰아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65년 9월 7일, 모든 미군 지휘관들은 "MACV의 정책은 폭동 진압 작용제의 작전에의 활용을 분명히 금지한다"라는 점을 주지받는다.
동월 후반기에,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MACV)에서는 CS 작용제의 유용성으로 볼 때, 다가오는 철의 삼각형 작전(Iron Triangle operation)에서 이를 사용할 허가를 얻기 위해 상급기관에 요청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 요청은 국방장관 로버트 S. 맥나마라에게 전달되었으며, 국방장관은 CS 작용제의 사용을 이번 철의 삼각형 작전에 한하여 승인하게 된다. 이어진 몇 주 동안을 거치면서 CS 작용제 사용에 관한 정책은 크게 완화되었고, 1965년 11월 3일에는 합참이 웨스트모어랜드 장군(General Westmoreland)에게 남베트남 군사작전에서 CS 작용제와 CN 작용제(이것도 최루 가스의 일종이다)의 사용 결정권한을 부여하게 된다. 이 권한은 이후 주요 지휘관들에게 재위임 되었다.
1967년 7월 24일자 MACV 명령 525-11에서는 전술 작전에서의 폭동 진압 작용제의 사용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비전투요원들이 관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 작용제들을 사용하는 것은 특히 적절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4개의 ARVN 군단들에 파견되어 있던 상급 미국 고문관들에게는 남베트남군을 지원하는 데 있어서 미군이 CS 작용제를 사용하는 데 대한 승인권이 위임되었다. 모든 계층의 미 고문관들은 자신들이 담당하는 베트남군 측에 대하여 전술적 이점이 있는 경우 언제든지 CS 및 CN 작용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고취시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민간인 시위나 폭동, 기타 비슷한 혼란과 같은 상황에서는 MACV 사령관의 사전 허락 없이는 폭동 진압 작용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폭동 진압 작용제는 지휘관이 활용할 수 있는 통상적인 전투력 요소로 간주되었다.
CS 작용제는 초기에는 탄약 부족으로 많이 활용되지 못했다. 작전 소요에 맞게 처음으로 가용했던 탄종은 M7과 M25 수류탄이었다. 기타 지상군 및 공군용 탄종이 다수 개발되어 이후 베트남에서 실험 및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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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 진압 작용제 수류탄, CS1, M25A2)
M7 CS 수류탄의 최초 용도 중의 하나는 동굴과 터널, 기타 지하 요새시설들을 소탕하는 데에 있었다. 제 1 기병사단(공중기동)에서는 매셔-화이트 윙 작전(Operation MASHER-WHITE WING)에서 CS 수류탄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는데, 이 작전은 인구 밀집지대에서 벌어진 작전이었다. CS 수류탄을 적이 숨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곳에 활용함으로써, 제 1 기병대 병력들은 그 안에 있는 인원이 피해있던 민간인인지 아니면 무장 베트콩인지를 판별할 수가 있었다. 한번은 43명의 베트콩들이 추격 당하면서 동굴 안으로 도주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CS 수류탄을 동굴 안으로 던져 넣자 43명 모두가 도로 밖으로 나오게 된다. 사상자는 항복을 거부했던 베트콩 1명 뿐이었다.
연소 방식의 CS 수류탄이 HC 연막 수류탄과 함께 활용되었는데, 이는 소위 마이티 마이트(Mity Mite)라는 명칭을 갖고 있던 휴대용 발사기인 M106 폭동 진압제 발사기(M106 Riot Control Agent Dispenser)를 통해 사용되었다. 이 시스템은 그리 정교하지 않은 터널 시설로부터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몰아내는 데에 유용했으며, 또한 숨겨진 출입구와 환풍구를 찾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마이티 마이트 시스템은 다수의 기밀실(airlock)이 존재하는 보다 정교하고 다층의 터널 시스템인 경우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제 1 보병사단의 경험을 살펴보면, 해당 터널을 봉쇄할 경우 최루가스가 5~6개월간 효과를 유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적이 해당 요새지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거부하는 데 있어 분말형 CS 작용제가 효율적이라는 점과, 수많은 벙커들과 요새시설들을 재래식 폭약으로 파괴하는 것이 힘들었다는 점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적 방어시설에 CS 작용제를 투여하는 다양한 기술들이 발전되게 된다.
제 1 기병사단(공중기동)은 일명 벙커 사용 거부탄(Bunker Use Restriction Bomb, BURB)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BURB는 2.75인치 로켓탄 포장용 판지와 2개의 비전기식 폭발 뇌관, 약 25초로 설정된 시한 신관, 그리고 기폭제로 구성되었다. 이 장치에는 CS 작용제를 채우고 테이프로 밀봉했다. 폭파 뇌관은 포장 판지를 터트리는 데 충분한 폭발력을 제공하였으며, 이로써 CS49를 흩뿌리게 된다. 다른 부대들도 자기 나름 방식의 즉제 CS 탄약을 만들어 적 요새지를 오염시키는 데에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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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