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스크랩] [번역] 베트남 연구 - 전술 및 군수물자 측면에서의 혁신, 1971 (Tactical and Materiel Innovations) : II. 이아 드랑

박용수 2014. 10. 27. 15:27

<원문 출처 : http://www.history.army.mil/books/vietnam/tactical/chapter2.htm >

 

 


제 2장

이아 드랑 (1965년 10월-11월)


 이아 드랑 전투는 전투 작전에 대한 헬리콥터의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전투를 통하여 적을 찾아내고 교전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된 공중 기병(air cavalry)이라던가, 그 기동성이 크게 향상된 공중기동 사단(airmobile division)과 같은 새로운 조직들의 유용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육군 항공의 임무가 확대되는 모습은 건쉽이나 공중 기동부대의 전술적 활용 등으로 잘 나타났다. 이번에 설명하고자 하는 전쟁 이야기를 통해 베트남전 이전부터 전쟁 기간에 걸쳐 생겨난 일련의 혁신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혹자는 만약 헬리콥터가 없었더라면 이 전쟁을 어떻게 끌고 나갔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그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하였다:

 

 만약 우리에게 오늘날 헬리콥터와 공중기동 사단이 없다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이제껏 우리가 남베트남에서 이룬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병력들이 필요했을까? ... 베트남에서 우리의 전술은 헬리콥터의 대량 사용에 기반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정확한 답은 가능하지 않다... 헬리콥터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보다 좁은 지역에서 보다 많은 희생을 치러가며 비효율적인 전쟁을 치루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패튼 장군에게 전차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싸웠을까?"

 

 미군이 헬리콥터를 최초로 사용하게 된 것은 한국 전쟁에서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최초이다. 비록 미 육군과 해병대에서 나중에 여러가지 헬기 공격 기법들을 연구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우저 위원회(Howze Board)의 연구와 제 11 공중 강습 사단의 창설, 그리고 소형 터빈 엔진의 개발이야말로 공중 기동이란 것이 실체화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공중기동사단은 1965년 3사분기에 베트남으로 파병된 제 1 기병사단(공중기동)(1st Cavalry Division(Airmobile))이라고 할 수 있다. 동 사단은 2군단 전술 지역(II Corps Tactical Zone)의 안케(An Khe)에 기지를 설치한 후 지역 베트콩들에 대한 몇 차례의 전투를 실시하였고, 마침내 1965년 가을, 이아 드랑 계곡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10월 19일, 적군은 플레이 메(Plei Me)에 위치한 민간 비정규 방위대(Civilian Irregular Defense Group, CIDG) 기지를 급습함으로써 중앙 고원지대(Central Highlands)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10월 22일까지의 정보 조사에 의하면 해당 지역 내에 2개의 북베트남 정규군 연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제 33연대가 플레이 메에 있었고, 제 32연대는 플레이 메 북쪽의 플레이쿠(Pleiku)에서 올 것으로 예상되는 구원부대를 매복공격하여 격파하려고 숨어있었다.

 

 남베트남 제 11군단장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그는 플레이 메를 구원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곳의 기지를 포기하던지, 아니면 플레이쿠에 있는 예비대를 구원부대로 파견함으로써 플레이쿠를 위험에 빠뜨리던지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 했다. 예비대를 손실하게 될 경우 플레이쿠는 손쉽게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었으며, 그 결과는 중앙 고원지대 서부지역을 전부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단장은 미군의 도움을 얻기로 결심했다. 베트남 지역 미 야전군단장(Commanding General, Field Forces, Vietnam; field force는 베트남전 당시 사용된 용어로, 사단/비사단급 부대들을 통괄하는 통상적인 군단(corps) 기능에 더하여 베트남 정부와의 정치연락 기능, 민사작전 기능 등이 포함되는 차이가 있었음.)이었던 스탠리 R 라슨 소장은 제 1 기병사단장 해리 W.O. 킨나드 소장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10월 23일 미명과 동시에 제 1 기병사단은 최소 1개 보병 대대와 1개 포대를 포함한 1개 대대특임부대를 플레이쿠에 전개시킬 것, 임무는 플레이쿠에 있는 미군 및 남베트남군 주요 시설 방어를 돕는 것 혹은 플레이 메의 CIDG 기지를 구출하는 11군단 작전을 돕는 것이 될 것임".

 

 잉그램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INGRAM)은 10월 23일 일찍 안케에서 플레이쿠로 공중수송되었다. 이 부대에는 제 12기병연대 2대대와 1개 포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동이 실시되는 동안, 사단장은 플레이 메에서 결정적인 작전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제 1여단을 플레이쿠에 전개할 것을 허락 받는다. 8기병연대 2대애와 19 포병연대 2대대의 2개 포대, 그리고 여단 지휘부가 공중 수송을 통해 10월 23일 한밤 중에 할로웨이 기지(Camp Holloway)에 도착하였으며, 이들이 잉그램 특수임무부대의 작전 통제를 맡게 된다. 제 1여단은 플레이쿠를 장악하고, 플레이 메를 구원하러 가는 남베트남군을 포병으로 화력지원하며, 유사시 예비대가 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남베트남군(Army of the Republic of Vietnam, ARVN) 기갑부대로 구성된 구원군이 플레이 메로 향한 6C 지방도로를 따라 이동을 개시했다. 17:30 경, 북베트남군이 구원부대를 2개 지점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포격 요청에 따라 매복한 적에 대하여 1 기병사단의 포병이 끔찍할 정도로 정확히 타격을 가하였고, 이에 적의 공격은 격퇴되고 만다.

 

 구원부대가 플레이 메에 도달하기 전에 당 기지는 밤낮으로 공중투하에 의한 재보급을 받고 있었으며, 여기에 사용된 것은 육군 제 92 항공 중대의 CV-2(카리부) 수송기와 육군 항공 시험 위원회의 CV-7(버팔로) 수송기, 그리고 공군의 C-123 수송기였다. 10월 24일 밤, 날씨가 흐린 관계로 공중에서 해당 기지를 관측할 수가 없었다. 낙하산으로 물자를 투하할 분진점(release point)를 식별하기 위하여, 기지 사령관은 오성 신호탄(star-burst flare)을 구름 위로 쏘아올렸고, 조종사들은 이 신호탄을 참조점으로 하여 보급품을 투하하였다. 대부분의 탄약과 식량은 기지 영역 내에 떨어졌다.

 

 10월 25일 저녁, 구원부대가 아직도 포위상태에 빠져있던 플레이 메 기지에 도착했으며, 구원부대는 즉시 방어진지에 증원 투입되었다. 그동안 1기병사단의 보병과 포병들은 플레이쿠로부터 공중 강습을 실시하여 근접지원 거리 내에 있는 착륙장들을 소탕했다. 남베트남군 구원부대를 격파하고 플레이 메를 함락시키겠다는 적의 최초 계획은 분쇄되었다. 10월 25일 22:20 경, 플레이 메에 있던 북베트남군 연대는 증강된 1개 대대로 퇴각을 엄호하면서 서쪽으로 퇴각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 시점에서 윌리엄 C.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1여단의 전방 지휘소에 방문하여 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적을 추적하여 격파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사단의 작전 범위가 단순한 증원 및 반격 작전에서 무한 공세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사단에게는 중앙 고원지대를 위협하는 모든 적군을 색출하여 격파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제 1여단은 11월 9일까지 전투를 지속하였다. 11월 20일까지는 3여단이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어서는 2여단이 마지막 임무를 넘겨받았다.

 

 전장 지역은 약 1500 평방마일에 이르렀으며 대체로 평야 혹은 완만한 구릉지대였다. 대규모의 강과 하천들이 서쪽과 남서쪽으로 흘러 캄보디아 국경을 지나갔다. 이 지역의 감제 지형으로는 지역 남서쪽 구석에 자리잡은 추퐁 산괴(Chu Pong massif)가 있었으며,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 사이를 걸쳐앉아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이 산괴는 적의 중요한 침투 지역이 되어왔으며, 적군이 하늘을 빽빽하게 가리는 정글 아래로 집결하여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많은 거점 중의 하나였다.

 

 정보 분석에 따르면, 1개 야전 전선(field front; 사단급 사령부)이 지역 적군 연대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작전은 베트남에 파견된 미군 부대가 최초로 단일 지휘관 아래에 있는 사단 규모의 북베트남군과 싸우게 되는 사건이었다.

 

 11월 1일 최초로 의미있는 규모의 교전이 발생했다. 9기병연대 1대대 B중대의 한 소대가 플레이 메 남서쪽 6마일 지점에 위치한 적의 연대 구호소를 습격하여 적병 15명을 사살하고 15명을 포로로 잡았던 것이다. 이 소총소대는 분산된 여러 적병들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보고서에 근거하여 이 지역을 공중 강습했었다. A중대와 B중대에서 온 2개 소대가 추가로 착륙하여 이 지역을 휩쓸었다.

 

14:00이 조금 지났을 때, 정찰 헬리콥터들은 대대 규모의 적군이 이 소대들을 향해 북동쪽으로부터 이동해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투가 너무 근접거리에서 발생하는 바람에 공중 포병이나 전술 항공 지원이 불가능했다. 그 위치는 또한 가용 일반 포병의 사거리 밖에 있었다. 12기병연대 1, 2대대의 소대들과 7기병연대 2대대의 소대들이 오후 늦게 증원되어 착륙했고, 이어서 12기병연대 2대대의 소대 2개가 추가로 도착했다. 증원병력, 보급품, 후송인원 등을 태운 헬기에 대한 지상 사격이 격심하였고, 그 결과 7대의 헬기가 격추당한다. 17:00 무렵에 이르러 8기병연대 1대대 B중대가 전투에 투입되었고, 19:00에 이르러서는 적을 찾아내 고착시킨 9기병연대의 대대의 소대들이 공중 수송으로 그 지역을 빠져나갔다.

 

 전장에서 격퇴당할 시점에 이르러, 적 제 33 북베트남군 연대는 구호소와 그곳의 환자들을 상실하였고, 아울러 4만달러 상당의 의료물자를 빼앗기고 99명의 전사자와 183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공중기동 개념이 그 가치를 증명하게 된 것이다. 정찰 헬기는 정찰을 실시하여 적 집단을 찾아내고, 소총 부대는 그곳에 적군을 고착시키며, 헬리본 부대는 대규모 공중 및 지상 화력지원을 업고 적군을 공격하여 격파하는 것이었다. 이 전술은 전투 내내 반복되어 성공적으로 사용된다.

 

 11월 3일 21:00에는 9기병연대 1대대 소속 소총 소대들이 훌륭하게 매복 공격을 실시하게 된다. 추퐁 산 바로 북쪽의 여러 곳의 매복 진지에 있던 병력들이 많은 짐을 운반하고 있던 대략 중대 규모의 북베트남 부대가 동서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통과하는 것을 발견한다. 적은 매복 장소의 살상지대로부터 단지 10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90분간이나 휴식을 취하였으며, 이에 미군은 매복 공격을 위하여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21:00이 되자 적군은 오솔길을 따라 시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초 선두 병력을 통과시킨 후, 100미터 거리에 걸쳐 설치된 8개의 클레이모아 지뢰를 작동시켰다. 공격은 완벽하게 실행되어 기관총과 박격포, 무반동총으로 무장한 적 화기 소대는 납의 벽 안에 꼼짝없이 갖혀버렸고, 미군들이 2분간 지속 사격하는 동안 단 한 발조차 응사하지 못했다.

 

 매복 부대는 즉시 기지로 복귀하였으며, 방어 진지를 보강하는 공사에 투입되었다. 22:30에 이르렀을때, 기지는 2-3개 북베트남 정규군 중대로 추정되는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게 된다. 한밤중이 되어, 방어진지는 유린당할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증원군이 오고 있었으니, 길없는 정글을 따라 북쪽으로 12마일 지점에 있는 둑코 특수부대 기지(Duc Co Special Forces Camp)에 주둔하고 있던 8기병연대 1대대 A중대가 그들이었다. 한밤중으로부터 40분이 지났을 시점에 첫번째 증원 소대가 착륙하여 전투에 합류했다. 중대 전체가 도착한 것은 02:40 무렵이었다. 오늘날 이런 방식의 구원 및 증원 방식은 당연한 것이지만, 1965년 11월의 시점에서는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이 전투는 강력한 적의 공격에 당면한 방어진지가 야간에 생소한 지역으로 투입되는 헬리본 병력에 의해 증원되는 첫번째 사례였다. 이 전투는 또한 공중 포병이 야간에 미군으로부터 50미터까지 근접한 지역에 사용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새벽이 되자 적은 공격 기세를 상실하였고, 이제 전투는 가끔씩 주변 나무들로부터의 저격수 공격으로 변하게 된다. 이 전투의 결과 북베트남군 98명이 사망하였고 10명이 포로가 되었다. 또한 7.62mm 소총탄 10만발 이상과 82mm 박격포 2문, 75mm 무반동총 3정이 파괴된다. 그리고 다수의 박격포 및 무반동포탄을 노획하였다. 안전지대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발생한 매복작전은 분명 북베트남군 고위층을 충격에 빠뜨렸을 것이다.

 

(휴이 코브라 공격헬기가 적군에게 로켓을 발사하는 모습)

 

 비록 헬리콥터가 적에게 신기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적군은 그 전술적 용도를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는 것 외에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적은 탈출로가 차단당하고, 종대가 공격당하며, 탈출로상으로 포병 사격이 지향되는 일을 겪게 되었다 - 이는 헬리콥터를 공세적 전술 용도로 사용함에 따라 전쟁에 새로운 차원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제 33 북베트남 연대가 플레이 메로부터 달아나는 과정에서 적들은 지속적으로 공격당했고 "안전한" 기지들이 급속도로 파괴당했기 때문에 북베트남군 지휘부는 미군에게 목표물 정보를 제공하는 배신자가 연대 내에 있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육군 항공기를 무장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1950년대부터 시도 되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게 된다. 1962년 나트랑(Nha Trang)에서는 지역 부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띤 제 23 특수전 항공 분견대(정찰)가 구경 50 기관총과 2.75인치 로켓탄으로 무장한 6대의 OV-1A 모호크 정찰공격기를 시험 운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어서 1966년까지 확대되었는데, 이때 육군의 고정익 항공기가 국방성의 전투기-호위기 임무에서 배제되면서 무장프로그램들은 더 이상 승인받지 못하게 된다.

 

( CH-47 치누크 수송헬기 )

 

 같은 시기, 무장 헬리콥터의 사용이 급속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1962년 10월, 다용도 전술 수송 중대(육군의 최초의 무장 헬기 부대)는 당시 CH-21(쇼니) 병력 수송 헬기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B-26 경공격기와 T-28 훈련기를 대체하여 UH-1A 헬리콥터를 지급받게 된다. 손실이 급격히 감소했다. 1964년 5월이 되자, UH-1B가 CH-21의 병력 수송 임무를 물려받게 되고, 1~3개의 무장 소대를 보유한 10개의 경 공중기동 중대가 베트남에 존재하게 된다. 1965년에는 제 1 기병사단(공중기동)에서 최초로 베트남 공화국에 공중 기병 대대와 공중 포병 대대를 들여오게 된다. 1966년에는 3대의 무장 치누크(CH-47A) 헬기를 시험해 보았으나, 코브라(AH-1G) 헬기가 등장하면서 이 프로젝트는 종료된다. 1968년에 도입된 휴이 코브라는 기존의 어떤 휴이 건쉽에 비해서도 탄약은 75퍼센트, 속도는 30퍼센트 이상 우수했다. 1969년 4월에 이르러 베트남에 있던 680대의 헬리콥터 반수 이상이 코브라였다.

 

 남베트남에서 작전하는 미군 부대 중에서 무장 헬기를 사용하도록 인가된 부대는 5종류가 있었다 : 강습헬기 부대 (비사단), 공격헬기 부대 (공중기동 사단 혹은 비사단), 일반지원 중대(보병사단), 공중 포병 대대(공중기동 사단), 공중 기병 중대(비사단, 사단, 기갑기병연대). 무장헬기들은 지상군의 기동을 지원하는 데에 주 임무를 두었다. 이러한 임무에서 헬리콥터들은 주로 경계제공 및 화력 지원의 임무를 맡았다. 무장 헬기들이 주로 맡게 되는 임무들은 크게 5가지로 구분되었다: 다른 비행체, 지상 차량, 함정, 지상 인원에 대한 경호(armed escort) 임무; 저공 정찰 중인 정찰 헬기(observation helicopter)에 대한 경호(security) 임무; 지상 기동부대 지휘관이 지정한 목표물에 대한 직접 화력 지원 임무; 화력지원통제소나 전방관측관, 공정 지휘관 등에 의해 지정된 목표물에 대한 공중포병(aerial rocket artillery) 임무; 저공 정찰 중인 정찰 헬기와 함께 수행하는 헌터-킬러 전술 수행 임무; 임기 목표물(targets of opportunity)에 대한 공격 임무.

 

 초기 베트남에서 미군이 시도했던 가장 두드러진 전술 혁신 중의 하나는 "독수리 비행"("eagle flight")이었다. 이 용어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최초로 사용된 것은 1962년 후반부의 일로서, 남베트남군(ARVN forces)을 수송하던 5개의 미군 CH-21 헬리콥터 중대가 최초의 무장 UH-1헬리콥터 중대(다목적 전술 수송 헬리콥터 중대(the Utility Tactical Transport Helicopter Company))와 함께 움직였던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1개 정예 남베트남군 소대가 5대의 CH-21에 탑승하고, 여기에 2-5대의 무장 휴이 헬기가 따라붙었다. 건쉽들은 착륙장에 제압 사격을 실시했으며, 적을 찾기 위한 공중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건쉽들의 지원 하에, 보병들은 착륙하여 소규모 적과 교전하거나 촌락을 수색하고, 또는 심문할 만한 용의자를 잡아들였다. 아무 것도 건지지 못했을 때에는 다시 보병은 헬기에 탑승하여 다른 적당한 장소에 가서 같은 행동을 되풀이했다. 독수리 비행이 남베트남군 작전에 기여한 바는 지대하다. 한 보고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규모 부대를 앞세우는 경우, 적은 미리 숨어버릴 수 있지만, '독수리 비행'을 실시하는 경우 적은 그럴 수가 없다". 이러한 초기 작전들의 성공으로 인하여 실전에서 공중 기동 전술(airmobile tactics)이 가능하다는 것이 실증되었으며, 무장 헬기의 개념이 발전되게 되었고, 보다 대규모의 공중 강습 부대(air assault forces)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게 되었다. 이러한 실전적 경험들은 제 11 공중 강습 사단(11th Air Assault Division)의 공중기동(airmobile) 개념 실험에서 나타났다.

 

 공중 기병에 다양한 종류의 비행체들이 소속됨에 따라, 조직 과정에서 최대한의 유연성을 지니게 되었고, 해당 지휘관으로서는 임무의 성격에 따라 적합한 자산을 조합하여 팀을 구성할 수가 있었다. 보병 사단의 기갑 기병 대대(armored cavalry squadron)의 경우 1개 공중 기병 중대(air cavalry troop)를 갖고 있었고, 공중 기동 사단의 경우에는 공중 기병 대대(air cavalry squadron)에 3개 공중 기병 중대를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중대에는 경량 정찰 헬기(light observation helicopter)로 구성된 1개 정찰 소대(scout platoon)와, AH-1G 무장 헬기로 구성된 1개 공중 화기 소대(aerial weapons platoon), 그리고 편제 UH-1H 다목적 헬기로 구성된 1개 소총 소대가 포함되었다. 베트남의 전투임무에서, 지휘관은 다양한 팀들을 활용했다. 레드 팀(red team)의 경우에는 다양한 무장을 장착한 AH-1G 코브라 건쉽 2대로 구성되었다. 이 팀은 지휘관이 언제나 활용할 수 있는 순수한 공세 용도로 사용되었다. 화이트 팀(white team)의 경우에는 7.62mm 미니건으로 무장한 2대의 경량 정찰 헬기로 구성되었으며, 적정이 불명확하고 강력한 적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을 정찰하는 경우에 활용되었다. 이러한 헬리콥터 중의 한 대는 지상이나 나무 위 수 피트 높이의 저공비행으로 근접 정찰을 실시했다. 또 한 대는 보다 고공으로 날면서 엄호 및 무전 중계, 그리고 항법 지시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지휘 및 통제 임무 역시도 수행했다. 핑크 팀(pink team)의 경우 레드 팀과 화이트 팀의 혼합 성격을 가져, 1대의 경량 정찰 헬기와 1대의 코브라 헬기로 구성되었다. 정찰 헬기는 오솔길을 따라가며 적 진지 위로 낮게 날았으며, 정찰 임무 수행 간에 지형 정보를 수집했다. 건쉽의 경우 그 근방의 보다 고공을 원형 패턴으로 날면서 제압 사격을 실시하거나 정찰 헬기에서 수집된 정보를 중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포병 사거리 밖이거나 위험도가 매우 높은 지역인 경우에는 지휘 및 통제 헬리콥터가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적의 사격으로 헬기 한대가 떨어지는 경우에는, 나머지 한대가 지원군(reaction force)가 올 때까지 엄호를 제공했다. 비록 AH-1G의 2.75인치 로켓 포드 2문의 위력이 105mm 곡사포의 위력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이 포병의 탄착 수정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가능했다. 공중 기병 중대에서 핑크 팀이야 말로 가장 많이 사용된 전술 구성 형태(tactical combination of aircraft)였다.

 

 블루 팀(blue team)은 공중 기병 중대의 공중 소총 소대(aerial rifle(aerorifle) platoon) 혹은 기병 대대의 일반 기병을 탑재한 여러 대의 UH-1H 헬기로 구성되었다. 블루 팀은 통상 핑크 팀과 함께 행동했다. 공중 기병 중대의 공중 소총 소대는 편제 항공기에 탑재되어 다양한 임무에 투입되었다. 공중 소총 소대가 투입되는 경우, 근방의 대대 중에서 1개 소총 중대를 선정하여 유사시 이들을 증원할 수 있는 신속 대응부대(quick reaction force)로 지정하였다. 공중 기병 중대가 투입되는 임무는 통상 지상 및 공중 정보수집 임무나 경계임무, 병력 절약임무(economy-of-force mission; 타 중요 지역에 병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소수 병력만을 배치하여 방어하는 임무) 등이었다.

 

 적에 대한 정보수집 임무에는 이동로 육안 확인, 지역 확인, 특정 목표물 확인, 폭격 피해 평가, 착륙장 정찰 및 선정, 목표물 선정, 포로 획득(body snatch), 레인저 및 공정 요원 탐지 임무 등이 있었다. 공중 기병은 지휘관의 눈으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포로 획득 임무와 같은 임무에서 헬리콥터 특유의 유연성은 잘 드러났다. 항공기와 지상 병력의 "패키지"("package")는 특정 상황에 맞춰 구성되었으며, 공중 기병 지휘관은 정찰 헬기를 보내 체포할 인원의 위치를 확인하고 공중 소총 소대의 몇 개 분대를 착륙시켜 해당 인원을 낚아챘다. 코브라 헬기가 엄호를 제공하는 가운데, 정찰 헬리콥터가 해당 지역을 차장했다. 납치 팀 패키지에는 임무를 조율할 UH-1H 지휘 및 통제 헬리콥터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포로 획득 임무를 통하여 지휘관은 신속하게 신선한 정보를 획득할 수가 있었다.

 
 레인저 장거리 정찰대(Ranger long-range reconnaissance patrol)의 경우 사단 지역 내에서 소규모 팀으로서 운영되었다. 팀원들은 공수작전에 능하고 레펠(rappel; 현수하강. 암벽, 헬기 등에서 줄을 이용해 내려오는 기술)을 할 줄 알야야 하며, 특수 회수 장비(special recovery rigs)를 사용할 줄 알아야 했다. 이들은 어떤 종류의 지형에서도 5-7일가량 작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공중 기병들은 이들 레인저들을 UH-1H 수송헬기와 공중 화력지원, 지휘 및 통제 헬리콥터, 그리고 공중 소총 소대(aerorifle platoon) 혹은 공중 기동 소대(airmobile platoon)으로 구성된 신속 증원군(immediate reaction force)으로 지원했다. 정찰대를 투입하는 데 사용된 기법들에는 위장 침투(false insertion), 저공 비행(low-level flights) 등이 있었고, 종종 레인저 팀과 공중 소총 소대를 동시에 착륙시키는 방식도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 공중 소총 소대는 곧장 철수하는 대신 레인저 부대는 몰래 잔류하여 정찰을 실시했다. 일반 포병(tube artillery) 사거리 밖에서 작전하는 동안, 레인저들은 건쉽(aeroweapon gunships(AH-1G))에 크게 의존했다.

 

 경계 임무(security mission)의 경우 주로 아군에게 조기 경보를 하여 기동할 시간을 주는 데에 주 목적이 있었다. 경계 임무 내에는 차장 작전이나 특정 지역에 대한 여명 혹은 황혼 시의 정찰, 그리고 수송대 보호활동이나 추락 항공기 방어 활동 등이 포함되었다.  

 

 공중 기병은 정지 혹은 이동 중인 부대 주변에 대한 비교적 장거리 감시정찰(surveillance)을 제공하기도 했다. 핑크 팀은 지상군 지휘관과 무전 연락을 유지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적의 진지와 기동로, 병력의 위치 등을 알려주었고 이에 적합한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핑크 팀과 레드 팀의 경우에는 자체 화기를 활용하여 적과 교전하는 것은 물론, 포병 사격 및 공군 폭격을 유도하는 것도 가능했다.

 

 야외에 있는 부대 근처에 대한 여명 정찰(first-light reconnaissance)을 수행하는 경우, 핑크 팀은 해가 뜨기 전에 이륙하여 여명시에는 기지 상공에 떠 있도록 하였다. 이동간에 팀장은 지상군 지휘관과 연락하여 포격 관련 조언과 지상군이 특별히 관심있어하는 지역이 어디인가에 대해서  확인했다. 황혼 정찰(last-light reconnaissance)의 경우에는 해가 지기 1시간 반 전에 시작되어 해가 질 무렵에 종료되도록 하였다. 목표물이 발견된 경우, 팀은 해당 지역을 책임지는 지상군 부대에게 연락하고 사격 허가를 요청했다. 발견된 모든 적에 대해서 해당 팀이 작전하고 있는 지역 부대에게 보고했다.

 
 수송대 호송 부대(convoy security force)의 구성은 수송대의 규모와 지형, 적의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무장 경정찰 헬기 1,2대로 구성된 정찰부대(scout elements)의 경우 화력 지원과 통신 중계, 포병 사격 수정, 지휘 및 통신 임무를 수행했다. 공중화기 소대(aeroweapon platoon)의 경우 수송대가 습격당하는 경우 신속하게 화력 지원을 해 줄 수 있었고, 공중소총 소대(aerorifle platoon)의 경우 신속하게 이동하여 증원해 주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다른 헬리콥터들을 이용하여 나머지 신속대응부대들을 습격 현장으로 이동시킬 수가 있었다.

 

 항공기가 사단 작전지역 내에서 추락한 경우, 그 위치를 찾기 위해 핑크 팀이 즉각 파견되었다. 그 다음으로 해당 지역에 공중소총 소대 혹은 기병 소대가 파견되었다. 해당 항공기와 이를 지키는 소대병력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핑크 팀은 해당 공역을 차장했다. 비록 소대 병력들도 항공기를 운반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대하여 훈련 받기는 했지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기술 조사관과 인증된 정비병력들이 해당 지역에 파견되어 항공기 회수 과정을 담당했다.

 

 공중기동 기병대(airmobile cavalry)가 담당하는 병력절용 임무(economy-of-force missions)로는 포병 공격(artillery raids), 전투 강습(combat assaults), 매복(ambushes), 지연 임무(delaying actions), 화력 진지 건설부대에 대한 장기 경호임무(prolonged security for elements constructing fire bases), 기지 방호부대로서의 신속 대응군 임무(base defense reaction force) 등이 있었다.

 

 공중 기병부대가 지원하는 포병 공격(artillery raids) 임무는 일반 포병(tube artillery)과 공중 포병(aerial rocket artillery)이 실시하는 공격을 모두 포함하였으며, 이들 공격은 적들이 포병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지역에 대해 실시되었다. 일반 포병에 의한 공격 간에는 먼저 공중 기병 중대가 해당 착륙장을 사전 정찰하고 공중소총 소대를 이용하여 이곳을 장악했다. 그리고 나서 CH-47과 CH-54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포병이 착륙했다. 핑크 팀은 육안 정찰을 실시하여 임기 표적들을 찾아다녔고, 즉각적인 포격 유도 및 그 효과에 대한 평가를 실시할 수가 있었다.

 

 공중소총 소대의 경우 뭔가가 보이는 지역을 탐색하거나 기 실시한 공격에 대해 지상에서 피해평가를 내리기 위하여 활용되었다. 공중포병 대대가 공격을 실시한 경우, 공중 기병 부대들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기는 했지만 착륙장을 선정하거나 만들 필요는 없었다.

 

 화력 진지 건설 임무에 투입되는 부대로는 공중소총 소대와 공병 팀, 그리고 핑크 팀이 있었다. 공중소총 소대는 지정된 착륙장으로 레펠 등의 방식을 이용하여 투입되어 공병 인원들을 경호하였다. 헬기 한대가 들어갈 정도로 착륙장이 준비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추가적인 공병 장비들이 투입되게 되었고, 화력 진지가 들어설 정도로 영역을 확대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핑크 팀은 이러한 병력들에 대한 차장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지휘통제 항공기를 통하여 조율되었다. 헬기 한대가 들어갈 정도의 착륙장이 준비된 단계에서는 통상 보병 부대들이 지역 내로 투입되었고, 그렇게 되면 공중소총 소대는 주변의 적이 있을만한 지역에 대한 정찰을 실시할 수가 있었다. 이 소대는 제한적으로 전투 강습(combat assault)과 매복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만약 공중 기병 중대의 정찰 팀이나 공중화기 소대와 조합되는 경우, 그아말로 균형잡힌 전투 부대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초기 베트남 작전에서는 야간 헬기 공격이 대단히 드물었지만, 육군이 효과적인 야간 전투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에 신경쓰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실전경험을 통해 헬리콥터들이 주간 작전을 통해 성공시켰던 임무들도 항법장치와 야시장비의 도움이 있는 경우엔 야간에도 통상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베트남 전을 통해서 야간 헬리콥터 운용으로 미군의 적에 대한 기동 우위가 크게 향상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야간 전투 강습은 대부분 접적 중인 부대에 대한 증원 목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가끔씩은 전술적 기습 임무나 위치 차단 임무, 매복 실시 등을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교전 중인 미군에 대한 야간 증원이 최초로 이뤄진 것은 제 9기병연대 1대대의 매복전투 당시의 일이었다. 고작 5대의 헬기만이 들어갈 크기의 착륙장을 향해 날아간 조종사들을 유도해 주는 불빛이라고는 단지 착륙장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총격전 속에 빛나는 기관총들의 예광탄 불빛 뿐이었다. 이 전투는 또한 공중포병 부대가 아군진지에 대한 야간 근접 화력지원을 수행한 첫번째 사례이기도 했다.

 

 공중기동 105mm 곡사포 부대가 최초로 야간 공격에 사용된 것은 1966년 3월 31일, 제 1 (공중기동) 기병 사단의 링컨 작전(Operation LINCOLN) 간이었다. 당일 이른 저녁 무렵부터 1개 소총 중대로 증원된 제 9 기병연대 1대대 병력들이 적과 맹렬한 교전에 돌입한 상황에서, 또다른 1개 소총 중대와 제 19 포병연대 2대대 B포대로 구성된 병력들이 기존에 아직 정찰이 실시되지 않은 한 착륙장으로 01:05경에 투입되었다. 이 포대의 화력 지원으로 인하여 총 197명의 적병을 살해할 수 있었다.

 미군의 최초의 대대규모 야간 공격은 1966년 10월 31일, 제 101 공수사단 327 (공정)보병연대 2대대의 전투병력들이 투이 호아(Tuy Hoa) 부근의 2개 착륙장으로 투입되었을 때의 일이며, 이 당시 이들을 수송해 준 헬기부대로는 제 10 전투 비행대대의 제 48, 제 129 강습 헬기 중대 및 제 179 강습 지원 헬기 중대를 꼽을 수 있다. 여기에 사용된 헬기들은 UH-1D 24대, UH-1B 6대, CH-47 4대였다. 전날 밤에는 제 10 전투 비행 대대는 기만 작전을 실시하였으며, 여기에는 전술 항공기와 포병, 건쉽, 플레어 조명을 이용한 준비사격을 동반한 위장 야간 전투 강습이 포함되었다. 실제 작전간에는 준비사격과 조명지원 없이 실시되었다. 패스파인더와 경계병력들은 주 강습병력 착륙 전에 착륙장에 배치되었다. 기습 효과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헬리콥터들은 초저공 비행 경로(nap-of-the-earth flight path)를 택했다.

 

 야간에 적의 행동의 자유를 박탈하겠다는 목적으로 여러가지 헬기 조명 시스템들이 개발되고 실험되었다. 가장 초기의 시스템으로 잘 알려진 것이 라이트닝 버그-파이어플라이(Helicopter Illumination System Lightning Bug-Firefly) 헬기 조명 시스템으로, 그 특징으로 6개의 C-123 착륙등이 건쉽에 달려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승무원들은 이 조명등을 이용하여 목표물을 탐색 및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동안 다른 건쉽들이 적과 교전할 수가 있었다.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는 종종 OV-1C 모호크 항공기가 팀의 일원으로 작전에 참가하였으며, 이 경우 적외선 장비를 이용하여 적을 찾아내어 조명 항공기를 해당 목표물로 유도하였다. 이 장비에는 이후 여러가지 개량이 이뤄졌는데, 예를 들어 조명 시스템 조명을 촛점 맞추기를 한다거나, 여러가지 조명등을 시험해 본다거나, 수동 탐지 방식으로 야시장비를 사용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파이어플라이 조명 시스템)

 
 전장에 코브라 공격헬기가 도입될 무렵, UH-1D/H 나이트호크 헬기가 전장에 등장하게 된다. 나이트호크기의 기본 구성품으로는 AN/VSS-3 제논 탐조등(셰리단 무장 정찰 공정 강습 기체의 구성품) 및 동축으로 달린 AN/TVS-4 야시장비, XM-27 El 7.62mm 미니건 시스템이 있었다. 탐조등은 백색광과 적외선광 모두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화물칸에 설치된 미니건 시스템은 나이트 호크가 적과 교전하거나 지역 제압 사격을 실시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나이트 호크 팀(조명 기능이 있는 UH-1D/H 1대와 AH-1G 건쉽 1~2대로 구성)은 통상 다른 방법으로 확인된 특정 목표 혹은 지역에 대한 공격에 사용되었다.

 

 팀의 항법 지원을 위하여 지상관제 접근 레이다가 종종 활용되었다. UH-1D/H는 후방 1500피트 쯤에 건쉽을 따라오게 하며 약 500 피트 고도에서 약 50노트 속도로 날곤 했다. 조명 헬기가 적외선으로 적을 발견한 뒤에는, 백색광을 켜던지 미니건으로 교전하던지 선택할 수가 있었다. 따라오는 건쉽은 미니건의 예광탄 형상을 보고서 적의 위치를 파악, 교전에 참가할 수 있었다. 나이트 호크는 평평한 개활지에서 특히 효과적이었다. 산악의 숲이 무성한 정글지역에서는 도로 및 소로, 그리고 Rome plow cuts 지역에서만 활용 가능했다. 기타 나이트 호크가 제한적으로 사용된 분야로는 기지 방호 임무나, 레이다상 탐지물에 대한 확인, 센서 탐지물 확인, 기계화부대 매복작전 등이었다.

 

 1966년 5월, 저광량 TV를 장착한 5대의 UH-1C 건쉽들이 베트남에 배치되어 TV의 야시 능력 및 목표 탐지 능력을 시험하게 되었다. 메콩 삼각주 지역에서의 작전에서 이 건쉽들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이뤄냈다; 그러나 개념과 장비 측면에 있어서 보다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1969년 11월, 3대의 INFANT (이로쿼이 야간 전투 및 야간 추적 시스템) 시스템이 베트남에 도달했다. 각각의 시스템을 이루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았다; 즉 M21 무장 서브시스템(7.62 mm 미니건과 2.75인치 로켓탄)을 갖춘 UH-1H 헬리콥터와 AN/ASQ-132 야시용 화상 강화 시스템이다. 이 개선된 장비는 III군단과 IV군단 전술 지역에서의 야간 전투 작전에서 시험 운영되었다. INFANT 시스템은 헬리콥터의 야간 공격 및 정찰 능력을 향상시켰다.

 

 헬리콥터가 지상군 부대에게 해 줄 수 있는 야간 지원 방식에는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예를 들면 MK24 항공기 플레어를 통한 조명지원이라던가, 비상 탄약 재보급이라던가, 부상자의 퇴출 작전 등이었다. 건쉽들은 기지 방어를 위해서도 기여하였는데, 이들은 박격포들을 찾아다니며 발견되는 적 박격포들을 공격했으며, 레이다에 포착되는 것들을 확인하기 위한 신속대응부대를 수송하거나, 원격지 공격시에 로켓 지원 및 박격포 지원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헬리콥터 소음이 북베트남군 및 베트콩에게 숨을 시간을 제공했기 때문에, 야간의 정찰 효과는 다소 제한적이었다.

 

 미 육군은 베트남에서 사용할 새로운 정찰 항공기를 개발했다. 1967년 4월, 록히드 미사일 및 우주 회사는 2대의 실험용 저소음 항공기를 만들도록 선정되었다. 1967년 9월, 소위 '조용한 비행기'로 불리는 것들이 60일간의 시험 평가를 위하여 IV군단 전술 지역으로 배치되었다. 이 항공기는 100마력 엔진으로 추진되는 나무 프로펠러가 달린 글라이더 변종에 불과하였지만, 조종사가 육안 정찰을 하는 동안 느리고 조용하게 나는 것이 가능했다. 시험 기간 동안, 이 '조용한 비행기'는 공격 전후간의 정찰 임무들을 수행했다; 지역, 운하, 강, 도로, 해안가 지역에 대한 정찰을 실시했다; 그리고 방어진지 주변에 대한 정찰도 실시했다. 테스트가 완료되었을 때, 이 항공기는 쓸모있는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몇가지 개선할 점들 역시도 지적되었다. 이에 록히드 항공기 회사는 더욱 발전된 모델을 개발하였고, 이는 YO-3A 콰이어트 에어크래프트('조용한 비행기')로 명명되었다. YO-3A는 소음기가 달린 210마력 엔진 구동의 더 튼튼한 비행기였다. 여기에는 적외선 일루미네이터가 장착된 야시 잠망경과 레이저 목표 지시기가 달려있었다. '조용한 비행기'는 1970년 여름, 베트남에 배치되었다.

 

 육군이 보유하고 있던 가장 큰 고정익 항공기는 CV-2 카리부 항공기였다. 이는 전쟁 초기 무렵 공중 재보급 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CV-7 버팔로 항공기는 카리부의 터빈화된 버전으로서, 화물 적재능력이 약 30퍼센트 향상된 것이었다. 1965년 가을, 2대의 버팔로 항공기가 앨라배마 주 포트 뤼커 기지에서 베트남으로 날아가 전투 임무를 통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모든 버팔로 항공기와 카리부 항공기는 1967년 봄에 미 공군으로 이관되게 된다.

 

 

( YO-3A '조용한 비행기(Quiet Aircraft)' ) 

 

 헬리콥터와 공중기동 기법들은 지휘관에게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였다; 기존의 시간-거리 요소들과 지형 요소들은 구식이 되었다. 공중기동 사단에서는 헬리콥터는 단순히 병력 이동이나, 병력 증원, 부상자 후송, 재보급에 쓰이는 공중 수송수단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레벨의 지휘관들에 의하여 작전 내에 완전 융합되어 쓰이는 요소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항시 사용 가능한 공중 자산은 적에 대한 기동작전이나 정보 수집, 화력 지원, 군수 지원 작전에 있어서 항상 자동적으로 고려 대상이 되었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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