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First Chechnya War - 1994-1996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war/chechnya1.htm) >
< 사진 및 동영상 출처:
[1] First Chechen War (http://en.wikipedia.org/wiki/First_Chechen_War)
[2] Army Learned Few Lessons From Chechnya (http://www.worldpress.org/Europe/2043.cfm) (Photo: Oleg Nikishin / AFP-Getty Images)
[3] Chechen Republic of Ichkeria (http://en.wikipedia.org/wiki/Chechen_Republic_of_Ichkeria)
[4] Englishrussia (http://englishrussia.com/index.php/2009/10/14/russian-biography/)
[5] 유용원의 군사세계 - 다랑어님의 글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num=123346)
[6] (http://www.documentingreality.com/forum/f166/russian-soldier-throat-cut-longer-colour-version-13379/)
제 1차 체첸전쟁, 1994-1996 (First Chechnya War 1994-1996) - 글로벌시큐리티
1994년 12월, 러시아 연방(Russian Fedration)으로부터 분리독립하려는 체첸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러시아 군대가 체첸 지방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2년의 전투 끝에 평화 협상이 맺어졌다. 이 협상의 일환으로 체첸의 독립 요구는 5년 이상 연기되었다. 이 전쟁이 벌어지고나서부터 수만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고, 5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피난민이 되었다.
(러시아 연방에서의 체첸 지방의 위치.[1])
이 전쟁의 근원은 복잡하다. 러시아와 체첸 민족간의 분쟁의 역사는 대단히 길며, 19세기의 러시아 제국의 팽창으로까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체첸인들이 러시아 제국에 강제 합병된 이래로, 체첸인들은 러시아 지배를 단 한번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시아 내전(1917-20) 당시 체첸인들은 독립을 선포했지만 1920년 소련 적군(Red Army)에 의하여 진압당한다. 카스피해 100킬로미터 지역의 코카서스 산맥 북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체첸 지방은 2가지 측면에서 러시아의 전략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 지역은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흑해 및 카스피해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차지하고 있다. 두번째로 카자흐스탄과 아르제바이잔과 연결되는 러시아 석유 및 가스 파이프라인이 체첸 지방을 경유하고 있다.
(주요 공격로 및 도시, 철로, 주변국들)
러시아 연방의 소속국이었던 체첸 공화국(Republic of Chechnya)은 1991년,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의 영도 하에 러시아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두다예프는 과거 소련 전략 항공부대(Dalnya Aviatsia) 소속 조종사로서 핵무장 폭격기를 여러 해 동안 조종했던 인물이다. 두다예프가 이끌던 체첸 정부는 1993년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공화국 내에서의 내전이 시작됨은 물론, 러시아는 1993년에서 1994년 동안 여러 차례 두다예프를 실각시키고자 꾀하게 된다. 1994년 여름이 되면서 러시아 정부는 분리주의자 정부의 대통령인 두다예프에 대한 비난을 강화하게 되는데, 그 내용으로는 정치적 분란을 일으킨다는 점과 부정부패, 국제 범죄행위에 대한 가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체첸은 조직 범죄와 무기 거래, 마약 밀매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러시아 정부로부터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받는 여러 무장저항단체들이 두다예프 대통령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활동했다. 1994년 8월, 이들 단체들이 전화국 한 곳을 폭파하고 모스크바-바쿠간 철도선을 파괴했다. 두다예프 정부는 이러한 정치적 저항단체에 대하여 규탄하고 비상시국을 선언하였다. 이어 1994년 9월에는 계엄령(martial law)이 선포된다. 제한조치들로는 야간통행금지와 출입절차의 통제, 일부 지역에 대한 도로 여행 제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체첸 주요 수뇌부들의 기도 장면. 가운데 인물이 조하르 두다예프 초대 대통령이다.[3])
1994년 11월 26일, 이러한 저항단체들이 몇몇 러시아 육군 특수부대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공세를 개시한다. 러시아 군사관리들은 이 분쟁에 대한 공식적 개입에 대하여 처음에는 부인하였다. 두다예프를 실각시키려던 이 공세는 실패한다. 1994년 12월 드디어 러시아 군대가 직접적으로 두다예프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개입한다. 두다예프를 몰아내기 위해 그간 비밀작전들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에, 대규모 재래식 군사작전 계획을 세부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2월 초가 되어서부터였다.
옐친 행정부의 어느 곳에서 나온 결정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1994냔 12월 10-11일에 러시아 3개 기갑사단과 친러시아계 체첸 보병부대, 그리고 정규군에서 차출하여 편성한 치안부대가 체첸으로 진공한다. 작전 목표는 신속하게 승리하여 지역을 평정하고 친러시아계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나타난 것은 미숙한 러시아군으로 인한 일련의 장기적 군사작전들의 연속이었고, 전통적으로 그 끈질김을 보여온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게릴라 활동이 우세하였다.
러시아 군용기들은 체첸 수도 그로즈니 시의 군사 목표와 민간 목표물들을 모두 폭격했다. 12월 10일, 러시아 정규군(regular army; 러시아 국방부 군대)과 MVD(러시아 내무부 군대) 부대가 체첸 국경을 넘어 그로즈니 시를 포위했다. 체첸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러시아군은 12월 말부터 그로즈니에 대한 대규모 포격 및 공중 폭격을 감행하여 수십만명의 시민들을 학살한다. 공습은 12월-1월간 이어지며 대규모 파괴와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이 그로즈니 겨울 공세 당시 시간당 최대 4000회의 폭발이 관측되었다고 한다. 대규모 민간인 사상자 외에도 그로즈니의 대부분 주거 및 공공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1995년 2월, 그로즈니 중앙 공원[4])
이러한 활동은 옐친 대통령의 인권 위원장(Human Rights Commissioner)이었던 세르게이 코발레프로부터 심각한 인권 침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이러한 비난에는 수많은 인권관련 비정부단체(NGO)들도 가세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12월 28일 성명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지상군은 그로즈니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작전을 벌이고 있으며, 이를 위해 각 구획마다 하나하나 진입하여 "불법 무장 단체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있다라고 하였다. 두다예프 지지자들은 저항을 계속할 것을 맹세하고 게릴라전으로 전환하였다.
(1994년 12월 31일, 체첸 동부 촌락인 카사뷰르트( Khasavyurt)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휴식 중인 러시아 병사들. 이날 러시아는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 공격을 감행했다.[2])
비록 러시아군이 오랜 피비린내나는 도시지역 전투(urban campaign)를 통해 체첸 수도 그로즈니와 기타 다른 인구 밀집지대를 파괴하긴 했지만, 체첸군은 1995년에서 1996년 동안 공화국의 나머지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 두번의 유명한 대규모 인질사건이 벌어졌는데 - 한차례는 1995년 6월 남부 러시아의 부데노브스크(Budennovsk)에서, 또 한차례는 1996년 1월 다게스탄 공화국 국경마을인 페르보마이스코예(Pervomayskoye)에서 벌어진다- 인질들을 구출하려 군사작전들을 벌였다가 실패로 돌아가 곤욕을 치르게 된다. 페르보마이스코예 사건의 경우에는 마을 전체가 붕괴하고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1995년 부데노브스크 병원 인질 사건을 벌인 체첸 군사조직 지도자 샤밀 바사예프의 모습[4])
체첸 분쟁은 정부의 정책 결정의 책임 범위에 대하여, 정부가 국민의 권리에 대해 얼마나 간섭할 수 있는지, 그리고 국제적인 기준은 무엇이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대규모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헌법 재판소는 옐친 대통령이 국회 승인 없이 체첸 지역에 군대를 파견한 것에 대하여 헌법 합치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재판소는 정부군이나 반란군 모두 국제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적시하였는데, 양측 모두 실제로는 제네바 조약 II번 추가규약(Protocol II Additional of the Geneva Convention)을 준수하지 않았다. 이 규약은 민간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조항을 의미한다.
러시아 군대는 체첸 마을들을 공격하면서 무차별적이고도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러시아 연방군이 몇몇 대도시와 촌락들을 점령하자, 체첸 전사들은 내무부 병력들(forces of the Ministries of Defense and Internal Affairs)과 부데노브스크의 러시아 민간인들 등에 대한 게릴라 및 테러리스트 전략으로 대응했다.
러시아 독립 뉴스 미디어들에 의하여 작전 실패와 대규모 사상자(1995년 4월까지 러시아군 1500명 가량과 민간인 25000명 가량이 사망)에 대한 정보들이 전달되면서 러시아 여론은 작전 지속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러나 한 민족공화국에 대한 분리 독립을 허용할 경우 다른 민족 분리주의자 세력들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옐친 대통령은 1995년 내내 체첸 작전에 대한 비난과 지지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되었다. 옐친은 몇몇 고위 장성들을 해임하게 되는데, 이 중에는 국방부차관이자 전쟁에 비판적이었던 보리스 그로노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95년에서 1996년 초까지 국방부 장관이었던 파벨 그라체프가 제대로 된 결과를 내놓지 못한 것과 상급 지휘부에서의 지속적인 혼란 상황이 벌어졌던 것들을 살펴보면, 그가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1995년 1월, 체첸 수도 그로즈니의 대통령 궁 폐허 근처에서 촬영된 체첸 전사[1]
(96년 1차 체첸 내전 말 경의 사진. [5])
1995년 7월 30일, 두다예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체첸 정부 및 군대는 휴전 협정에 조인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반군의 무장해제와 대다수 러시아 정부군의 철군, 포로 교환이 명시되어 있었다. 협정 이행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가을 무렵 전직 체첸 주둔 러시아군 사령관이었던 로마노프 장군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게 되자 이행 자체가 중단되게 된다.
1995년 말, 러시아 정부는 두다예프를 그로즈니에서 몰아낸 뒤에 세운 친러시아 괴뢰정부를 대체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여러 인권단체들에서는 현지 사정을 들어 1995년 12월 17일의 선거를 취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 선거의 신뢰성이 불투명하며 이에 따라 선거로 인해 기존의 긴장이 강화되고 정치적 화해 분위기가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OSCE(유럽안보협력기구)의 구호그룹(Assistance Group, AG)은 선거를 감시하는 대신 그로즈니를 잠시 떠나겠다고 결정하였는데, 이는 선거가 "자유롭고 정당하지" 못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 도쿠르 자브가예브(Dokur Zavgayev)가 당선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다수의 선거 부정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의혹들이 존재하고 있다.
국제 인권법과 관련된 위반에 대해서는 러시아 군대가 체첸 분리자들에 비해 더 대규모로 위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군은 무차별적인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고, 그 결과 다수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민간인들이 위험지역에서 대피하는 것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인권지원단체들이 민간인들을 구호하는 것도 차단했다. 체첸에서의 각종 실종사건들에 대해서도 치안부대에 책임을 돌릴 수가 있다. 체첸군대는 러시아 연방군의 몇몇 인사들을 처형하였으며, 반복적으로 민간인 인질을 생포했다. 전쟁의 양측 모두 고문에 의존하였으며, 전쟁 포로를 학대하고 일부의 경우 처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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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 게릴라에게 붙잡힌 에브게니 로디아노브라는 러시아 병사가 잔인하게 참수당하는 모습을 찍은, 일명 "Chechclear"로 불리는 동영상 파일 [6])
1996년 4월 21-22일, 체첸 반군의 수장인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폭발로 인해 두부 치명상을 입고 사망한다. 한 보고에 의하면 그가 죽을 당시 벌판에서 위성 전화를 걸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죽기 몇 초 전 대화에서, 그는 상대방에게 상공을 날고 있는 항공기 소음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일종의 공대지 미사일에 당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러시아 관리들은 그 지역에 러시아 항공기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보고서에 따르면 두다예프가 죽은 것은 그가 들고 있던 위성 전화기 전파를 따라 유도된 미사일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종종 전파 탐지장비를 이용하여 확인된 위성전화기 사용 지역에 대하여 공습을 실시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보충 자료 : 1차 체첸전 관련 동영상 >
(체첸 국가를 배경으로 여러 영상들이 나옵니다. 자막의 언어는 어느 나라 말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대체로 체첸 독립선언 무렵으로부터 1차 체첸전쟁까지의 기간 사이의 것으로 보이는 영상들이 나옵니다.)
('(Chechnya) Grozny 95'라는 이름으로 올라와 있는 영상입니다. 1차 체첸전쟁 당시 그로즈니에서 찍은 영상인 것 같습니다. 배경 대화로 러시아어가 나오긴 하지만, 체첸인들도 체첸어 외에 러시아어, 터키어 등을 쓸 줄 알기 때문에 어느 쪽에서 찍은 영상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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