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Russia in Afghanistan and Chechnya: Military Strategic Culture and the Paradoxes of Assymmetric Conflict (http://www.strategicstudiesinstitute.army.mil/pubs/display.cfm?pubID=125) >
이번에 제가 번역한 논문은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의 소련/러시아군과 그에 대항하는 지역군대간의 전쟁 양상을 바탕으로 일명 비대칭전의 특징에 대해서 연구한 글입니다. 비대칭(asymmetry)의 개념이 어떻게 애매하게 쓰여지고 있는지에 대한 소개와 이에 대한 정의 등이 흥미롭고, 비대칭 분쟁에서의 파라독스라는 것들을 설명하면서 소개되는 여러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체첸 전쟁의 단면들을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뒤의 '미군 변혁에 대한 시사점' 부분은 내용이 제법 어려운 편이고 크게 관심이 없는 부분이라 일단 번역을 생략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용수 드림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의 러시아 : 군사전략 문화와 비대칭 분쟁에서의 파라독스
(Russia in Afghanistan and Chechnya: Military Strategic Culture and the Paradoxes of Assymmetric Conflict)
로버트 M. 카시디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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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비대칭 전쟁은 오늘날 미합중국이 당면한 가장 시급하고도 복잡한 도전의 일부가 되었다. 미국 국방 지도자들과 전략가들은 이러한 비대칭 시대에 적응하고 있으며, 우리 고유의 경험과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이러한 비대칭적 적들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을 통하여, 로버트 카시디 소령은 비대칭전에 관련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의 러시아인들의 경험을 심층 분석하였다. 그는 이 결론을 바탕으로 미군 특히 미육군에 대한 건의사항들을 정리하였다. 카시디 소령은 모든 열강에게 있어서 소전쟁(small wars)은 어려운 것이지만, 반면에 가장 흔한 것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비대칭전 시대에 있어서도, 미국 육군은 문화적으로 "대전쟁(big war)" 패러다임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미군 전반에 걸쳐, 특히 육군에 경우에는 이러한 비대칭전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하여 완전한 문화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문화 전환으로부터 교리(doctrine)가 성장하고 조직 변화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전략연구소는 이 논문을 전략적 비대칭성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도전과 기회에 대해서 앞으로도 계속될 연구들의 일환으로써 여러분께 제공합니다.
더글라스 C. 러브리스 주니어.
전략연구소장
저자 소개
로버트 M. 카시디는 미육군 제 4기계화보병사단 4여단의 작전장교(S3)이다. 그는 과거 중기병사단에서 행정장교로 복무(served as a heavy division cavalry executive officer)한 바 있으며, 웨스트포인트에서는 국제관계학 조교수를, 제 82공정사단에서는 기병중대장(cavalry troop commander)을 맡은 바 있다. 카시디 소령은 프랑스 합동방위대학 졸업생이며, 터프스 대학교의 플레쳐 법/외교 학교에서 국제 안보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요약
이 연구에서는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의 소련 및 러시아의 군사력이 보여준 효율성(performance)을 비교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방법과 교리의 연속성 및 변화를 식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러시아 군사 문화는 장기간에 걸쳐 체화된 대전쟁 패러다임에 선호도를 두고 있었으며, 비록 1994년 무렵에는 러시아의 열강으로서의 지위가 크게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화가 금방 변화되었다기 보다 계속되었으리라는 쪽으로 가정하였다. 이러한 연속성- 즉 재래적(conventional)이고도 대칭적인(symmetric) 접근 방식의 유지-의 존재가 더 타당하다고 보았으며, 이는 통상 문화적 변화에 10년 가량은 소요되기 때문이다.
비대칭 분쟁에서는 몇몇 파라독스가 존재한다 - 이런 것들은 강대국 지위에 항상 따라붙는 문화적인 인습들과도 많은 연관이 있다. 사실 러시아 군사력이 양개 전쟁에서 실패한 원인을 비대칭 전쟁에서의 파라독스 탓으로 돌릴 수가 있다. 이러한 파라독스들은 강대국들이 전근대적(pre-industirial)이고 반봉건적(semi-feudal)인 적들과 상대할 때마다 항상 작용하게 되는데, 이는 이러한 적들은 내재적으로 교활함과 비대칭성을 활용하여 강대국이 갖고 있는 수많은 이점들을 상쇄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소전쟁에서 강대국들이 잘 싸우지 못하는 이유가 강대국으로서의 입장상 반드시 대전쟁 패러다임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연구에서는 비대칭 분쟁에서의 6가지 파라독스에 대하여 식별하고 설명하고자 한다. 또한 각 파라독스에 대한 아프가니스탄과 체첸 전쟁에서의 사례들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최종적으로, 이 논문에서는 미육군 개혁에 있어서 필요한 교훈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속적이고도 거의 배타적으로 대전쟁 패러다임에 집착함이 얼마나 비대칭전의 세계에서 미군의 효율성을 갉아먹으며, 어떻게 혁신과 적응을 저해하고 변화를 저해하게 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양개 분쟁 및 비대칭 분쟁의 파라독스들은 미군 혁신에 대한 생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의 러시아 : 군사전략 문화와 비대칭 분쟁에서의 파라독스
(Russia in Afghanistan and Chechnya: Military Strategic Culture and the Paradoxes of Assymmetric Conflict)
소개 (Introduction)
적의 목적은 우리가 주력 부대를 집결시켜 결전을 벌이도록 하는 데에 있다. 우리의 목적은 그와 정확히 반대 방향에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을 선택하고자 하며,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 때에만 우세한 병력을 모아 결정적인 전투를 벌인다... 우리는 우리가 승리할 지 알 수 없는 조건에서는 결전을 회피한다.
모택동
1979년 크리스마스 이브,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 안정적인 친소련 정부 수립 및 소요 진압을 위하여 카불과 아프가니스탄의 기타 중요 지점에 대한 재래식 공세를 감행한다. 약 10년이 지나 소련군이 철수하던 시점에서 약 14000명의 전사자 피해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간의 친소련정부는 아직도 불안정했으며, 내전은 끝날줄 모르는 상태였다. 1994년 12월, 러시아군은 체첸을 침공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와 거의 동일한 방식의 재래전을 감행했다. 1994년의 마지막 날(New Year's Eve), 러시아군은 그로즈니에 주 공세를 펼쳤지만, 초기 대규모 손실과 함께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체첸에서의 목적 역시도 15년 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목적과 거의 같았다 - 친러시아계 정부를 수립하고 체첸 공화국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2년 뒤 철수하였을 때, 전사자 피해는 약 6000명이었으며, 목적 역시도 달성하지 못했다. 강대국으로서, 소비에트 연방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전쟁을 승리하지 못했다. 예전의 강대국이었던 러시아 역시 체첸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이 두가지 사례에서, 소련/러시아 군대는 기술적으로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잠재적인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이 두가지 사례 모두, 소련/러시아 군대는 비재래식 방식으로(unconventionally) 싸운 적에 대응하여 재래식 방법으로(conventionally) 싸웠다. 양개 분쟁에서 러시아군이 상대한 적은 사상적으로 경도되어 독립을 위해 싸웠던 토착 운동가들이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의 큰 차이점을 들자면: 1) 국제 정세 구조가 크게 바뀌었다 - 양극체제에서 일극체제로 2) 러시아는 더이상 강대국이 아니었다. 이러한 큰 2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에서는 체첸에서의 러시아 군사 전략 문화가 연속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이는 냉전의 종식과 체첸 분쟁 사이의 기간이 군사 문화가 바뀌는데 소요되는 5-10년에는 못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러시아인들의 군사력 사용 선호방식에서 연속성이 있었으리라 보며, 이는 대전쟁 혹은 재래식 전쟁 패러다임에 촛점을 맞추어 행동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연구의 목적 및 범위 (Purpose and Context)
이 논문의 목적은 2가지이다: 1) 러시아인들이 군사력 투사에 있어 선호하는 군사전략을 찾아내는 것; 2) 이러한 선호와 맞물려, 비대칭 분쟁의 파라독스들이 어떻게 러시아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 실패하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하는 것. 체첸에서의 전쟁에 있어서는 이 논문은 1994년에서 1996년 사이의 분쟁 내용으로 분석을 한정할 것이다. 이 주제는 특히 미군과 동맹군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인데, 장차 NATO가 당면할 분쟁 형식은 이러한 비대칭 분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4가지 요소가 이러한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
환대서양 동맹 내의 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기술 및 화력 측면에서) 군사력을 갖고 있다;
이들 국가들간에 경제 및 정치적 동질화가 심해짐에 따라서, 이들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질 확률은 점차 희박해져가고 있다;
잠재적 적국이 될 수 있는 대다수의 2류 국가들은 걸프 전쟁을 보면서, 재래식 전쟁으로는 서방과 대적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미합중국과 그 유럽 동맹국들은 그 화력과 기술력을 저개발국의 저열한 적들을 상대로 비대칭적 방식으로 투사하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비대칭적 분쟁은 가끔씩 예외적으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표준적인 분쟁 형식이 될 것이다. 이 논문이 2001년 봄에 완성된 것이긴 하지만, 2001년 9월 이후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작전 역시도 이러한 측면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강대국의 군사 기구들은 통상 커다란 피라미드형 조직을 갖기 때문에, 변혁을 하는 데에는 점진적으로만 변화하는 특징이 있다. 즉, 러시아 군사조직 역시 안보 환경의 변화에 당면하였음에도, 새로운 전쟁 방식에 적응하는 데 있어 대단히 느리게 변화하였으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특히 필요한 혁신과 적응이 기존의 재래식 전쟁 관심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내용일 경우 심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강대국들은 그들이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소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이들의 군사력은 이들과 대적하고 있는 다른 강대국들의 군사력에 밀리지 않기 위하여 대칭전 전력 측면에 초점을 맞춰야 했고, 또한 이에 따라 대규모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2가지 측면들은 조합되어 유럽 평원에서나 이라크의 사막 위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두가지 특질들이 반드시 전지전능한 조직 및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었다.
비대칭 분쟁에서의 파라독스들 (Paradoxes of Asymmetric Conflict)
우세한 공업국가가 열세하고 준봉건적이고 준식민주의적이며 저개발된 국가의 적과 대적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대전쟁 문화 외에도 몇가지 다른 문제점들이 논리적으로 어쩔수 없이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강대국들은 이런 종류의 분쟁에 자연스럽게 엄청나게 우세한 자원과 기술력을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외관상 열세인 적의 경우 통상 의지력에 있어 우세한데, 이는 어떠한 큰 댓가라도 치를 각오를 하며 많은 불리함에도 굴하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의지에 있어서의 불균일함(disparity in will)은 비대칭 분쟁에 있어서의 가장 기본적인 파라독스이다. "승리 아니면 죽음(Death or victory)"이라는 표현은 단지 자동차 범퍼에 붙이고 다니는 스티커에 써있는 문장이 아니라, 비대칭 분쟁에서 보여지는 딜레마를 표현하는 말이다: 일면으로 질적, 양적으로 열세한 일방이 제한된 수단을 가지고 무제한적인 전략 목표- 독립-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측면으로, 질적 혹은 양적으로 우세한 일방은 잠재적으로 무한정한 수단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한적인 목적- 지엽적인 제국 영토 혹은 전초기지의 유지-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외형상 약한 군사력이 종종 화력 및 기술력에서 압도적인 상대를 격파하는 사례는 이들이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강대국이 비대칭 분쟁 상황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여러 사례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의 로마인들이나,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영국인들, 스페인 반나폴레옹 전쟁(Peninsular War)에서의 프랑스인들,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의 프랑스인들,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인들,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의 러시아인들, 소말리아에서의 미국인들 등을 들 수 있다. 이 목록에 나온 전쟁들이 다 동일하지는 않다. 이 중에서 미국 독립전쟁과 스페인 반나폴레옹 전쟁, 베트남 전쟁은 강대국들이 대칭적 접근과 비대칭적 접근을 혼합한 전략을 쓴 상대와 싸워 실패한 전쟁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워싱턴 장군은 북부 전역에서 재래식 접근 방식이면서도 장기전의(Fabian) 접근 방식을 사용한 반면, 남부 전역에서의 그린 장군은 콘왈리스 장군을 녹여내기 위하여 재래식 전술과 비재래식 전술을 혼합하여 사용하였다. 또한 요크타운 전투에서 콘왈리스 장군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킨 것은 프랑스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실시한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웰링턴 장군도 스페인에서 프랑스인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휘하의 정규군의 사용과 함께 스페인 게릴라들의 히트 앤드 런 전술을 병행하여 활용하였다. 테트 공세(Tet offensive; 구정 공세)는 북베트남인들의 정치적/전략적 승리였으며, 미국의 직접 개입이 점차 감소하게 되는 시초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을 최종적으로 정복하게 된 것은 북베트남군의 재래식 공세에 의한 것이었다.
강대국과 소전쟁에 관한 2가지 추가적인 특이사항을 더 소개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강대국이 반드시 소전쟁에서 지는 것은 아니며, 단지 이기지 못할 뿐이다. 사실 강대국 세력은 많은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생존 자체에 대한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니므로, 강대국이 신속하고 결정적으로 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내부적인 결속력이 쉽게 무너지게 된다. 둘째, 약한 상대방은 재래식 전쟁을 통해 강대국과 대칭적으로 대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신중하게 된다. 약소국이 신중하지 못하여 대전쟁 패러다임에 따라 강대국과 싸우게 되는 경우, 강대국들이 완벽한 대승리를 거두는 사례들을 역사는 수없이 보여주고 있다. 피라미드 전투(Battle of Pyramids;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나 옴두르만 전투(Battle of Omdurman; 영국-수단 전쟁), 이탈리아인들의 아비시니아 침공, 페르시아 걸프 전쟁 등은 이러한 후진 군사국들이 선진 군사력에 대칭적으로 대적하려고 했을 때 어떠한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4가지 사례 모두에서, 후진 군사국들은 재앙에 가까운 패배를 맛보았다. 모택동은 유럽인들이 토착민 군대를 학살하다시피한 옴두르만 전투와 아비시니아 침공을 분석하고 나서, 토착민 군대가 현대적 군대의 방식에 따라 싸우게 될 경우 패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대칭 전쟁과 비대칭 전략에 대한 정의는 엄청나게 많다 - 1990년대 중반 이후, 수 많은 사람들이 비대칭(asymmetric)이란 말을 다양한 분야에 마구잡이로 사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합동 교리 사전(Joint Doctrine Encyclopedia)에서는 비대칭(asymmetry)이란 말을 "적의 방어에 압박을 주기 위하여 다양한 종류의 무기로서 다양한 방향에서 위협을 가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반면, 동 서적 JP 3-0, 합동작전교리 편에는 비대칭 작전(asymmetric actions)을 "군사력, 기술, 무기가 다르"거나 테러리즘의 방식을 따르거나, 표준에 있어 재래식 방식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고 있다. 1999년의 합동 전략 리뷰(Joint Startegy Review)에서는 비대칭을 더욱 넓게 정의하였는데, "미국이 예측하는 작전 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방식으로 미국의 약점을 이용함으로써, 미국의 힘을 우회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시도들"이라고 정의하였다. 마지막으로 미육군 전쟁대학교의 한 교수는 전략적 비대칭성(strategic asymmetry)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를 제시하였다:
군사문제와 국가안보 문제에 있어서, 비대칭성은 상대방과 다르게 행동하고 조직하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상대적으로 힘을 최대화하는 것과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 자신의 행동의 자유를 최대화 하는 것 등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정치전략적, 군사전략적, 작전적, 또는 이들의 혼합 형태일 수 있으며, 방법과 기술, 가치, 조직, 시간 측면에서 다른 모습을 갖게 된다. 이는 장기간일 수도 있고 단기간일 수도 있고 그냥 보통일 수도 있다. 이는 대칭적 접근과 전혀 별개로 진행할 수도 있고, 또는 이와 연계하여 실시될 수도 있다. 심리적, 물리적 측면을 모두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에 따르게 될 경우, 1918년의 독일군 공세 조차도 비대칭적 접근에 포함되게 된다. 정의가 대단히 넓어지기 때문에, 재래식 정면 공격을 제외한 거의 모든 종류의 분쟁과 공격이 이 "비대칭" 범주 내에 들어가게 되며, 이럴 경우 이 용어는 사실상 무의미해지게 된다. 현재로서는 비대칭이라는 용어가 너무 많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애초의 유용성과 선명성을 어느 정도 상실하고 있는 상태이다. 예를 들어 한 논문에서는, 일본이 2차세계대전 당시 싱가포르를 수비하던 영국의 재래식 군대를 간접적이지만 재래식 방법으로 공격한 것을 '비대칭적' 공격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거의 모든 사례를 포함해버리는 용어나 개념은 그다지 선명성이나 유용성을 갖지 못하게 된다. 대반란전쟁(couterinsurgency) 전문가인 막스 맨워링(Max Manwaring)이 미육군 대학교의 다른 논문에서 정의한 바로는, 비대칭 전쟁의 범위를 반란전(insurgencies) 및 소규모 내전으로 한정하였다. 또한 맨워링은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게릴라들과 싸웠던 경험을 명시적으로 비대칭 전쟁으로 언급하였다. 실로 그의 논문에서 "비대칭 분쟁(asymmetric conflict)"에 대한 첫번째 사례로 초점을 맞췄던 것이 미군의 베트남에서의 경험들이었다.
이러한 새롭고도 넓은 정의들에도 불구하고, 비대칭 분쟁은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분쟁의 기원은,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로마가 스페인과 레판트(중동) 지역을 점령한 시기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인의 비대칭 분쟁의 정의는 조금 더 명확하게 선이 그어져 있다: 비대칭 분쟁은 우세한 외부 군사력(일국 군사력 및 다국적 군사력 포함)이 약한 국가 혹은 원주민의 영토에 들어가 대결하는 분쟁을 의미한다. 반란전(insurgencies)과 소전쟁(small wars)들은 이 범위에 들어가며, 이 논문에서는 두가지 용어를 서로 대등하게 사용한다. 대전쟁(big wars)와 대비되는 소전쟁(small wars)는 군사력 대 군사력,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며, 성공 여부가 경계선이나 고지 점령 여부로 측정되는 재래식이고도 정통적이며, 그 의미가 명확한 전쟁과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소전쟁은 대반란전이며 저강도 분쟁이고, 불확실성이 지배하며 우세한 화력이 반드시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논문은 비대칭 분쟁을 특징짓는 6가지의 파라독스에 대하여 설명할 것이다. 첫번째 2가지 모순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한 역사가가 "전략적 파라독스"라고 부른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아래의 표는 비대칭 분쟁에서의 파라독스들을 정리한 것이다.
비대칭 분쟁에서의 파라독스들 (Paradoxes of Asymmetric Conflict)
파라독스의 성격 | 우세한 측 | 약한 측 |
전략적 목표 | 제한 | 무제한 |
전략적 수단 | 무제한 | 제한 |
기술 및 무장 | 우세 | 열세 |
의지 및 내부 응집력 | 조건에 따라 다름 | 무조건적임 |
군사 문화 | 클라우제비츠 형, 직접접근 | 파비안-모택동 형, 간접접근 |
시공간 | 집중됨 | 분산됨 |
군사전략 문화 (Military-Strategic Culture)
이 논문은 군사 전략(military strategy)을 '힘의 투사나 힘에 의한 위협으로 국가 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국가의 무력을 사용하는 기술 및 과학'이라고 정의한다. 전쟁에서, 군사전략은 전략 목표의 설정과 자원의 할당, 군사력 사용에 있어서의 결심, 전쟁 계획의 발전 등을 아우르게 된다. 또한 조직 문화(organizational culture)는 '한 집단이 외부 환경에 반응하고 내부 구조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가정 및 생각, 신념들의 패턴'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군사전략 문화(military-strategic culture)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군사적인 수단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 가에 대하여 군대 내에서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선호방향을 갖게 하는 일련의 신념들과 태도, 가치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이나, 지리적 조건, 정치 문화 등에 의하여 발생되고 발전되게 된다. 핵심 지도자들은 이를 영속화시키고 반복 학습시키는데, 이는 작전술 레벨(operational level)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이는 군대가 전쟁에서 성공을 거두는 경우, 기억 속에 남아 신격화 되는 부분은 적을 격퇴한 작전 기술(operational techniques)과 작전 역사(operational histories)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군사작전 문화는 계량화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군사적 역량을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선호 방향은 실제 현상을 통해 식별이 가능하다. 이러한 정성적 선호방향은 군사교리, 군사작전, 핵심 군사엘리트들의 발언을 통하여 관찰할 수가 있다. 종합하면, 이러한 군사작전 문화의 3가지 역사적 관찰 가능요소들을 통하여 선호되는 전쟁 패러다임에 대하여 알 수가 있다.
소련과 러시아에서 선호한 전쟁 패러다임 (Soviet and Russian Preferred Paradigm for War)
18세기 러시아 지휘관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식 모델(Frederician model)에 대단히 열광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써 이들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복합군 교리(Combined arms doctrine)는 아직도 소련 사상가들에게 만연해 있으며, 공격이야말로 여전히 선호되는 전쟁 방법이다.
옛 군사 격언으로 "군대는 항상 마지막으로 치룬 전쟁을 준비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대는 항상 마지막으로 성공적으로 치룬 전쟁을 준비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소련 및 그 후계자인 러시아의 군대가 마지막으로 성공적으로 치룬 전쟁을 들자면 바로 대조국 전쟁(Great War for the Fatherland) - 즉, 조국 러시아의 생존을 위하여 벌였던 총력전이면서도 재래식 섬멸전이었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열강으로서의 러시아가 대전쟁 패러다임에 천착하게 된 것은 최소한 지난 18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유럽 중심으로 발전된 전쟁 모델은 국가가 병사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 및 훈련시킬 수 있도록 한 공업적, 기술적 발전 및 사회정치적 변화들에 기인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프리드리히, 조미니, 클라우제비츠 방식의 전쟁 모델 중 어느 것에 열광해 있었는가 여부와는 관계 없이, 러시아는 열강으로서 활약하기 위한 실질적인 주 패러다임 내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러시아 제국, 소련, 이후의 러시아 연방이 3세기의 기간을 거치는 동안 대전쟁 패러다임 속에서 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과 체첸을 침공한 러시아군 모두 대전쟁, 재래식 전쟁 패러다임- 전차, 포병, 통제선(phase line)-에 의거 전쟁을 수행했다.
소비에트 연방이 제정 러시아로부터 일부 역사적 인습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콘돌레자 라이스의 발언으로 명확히 표현된다 : "소련이 거대한 희생을 치러가며 과거 군사 열강들처럼 조직된 국가 군사력에 의존하게된 것은, 역사상의 경험에 의한 것이다." 또한 1917년 어느 날로부터 1945년 독일 정복에 이르기까지의 기간동안 발전되어온 소련 군사 사상이야말로 이후의 소련 군사력이 건설된 기반이었던 것이다. 미하일 바실레이비치 프룬제(Mikhail Vasileyvich Frunze)의 전쟁 개념은 국가 총동원에 의거한 총력-대량살상전(total-mass warfare)이었다. 부르주아 국가들의 특징인 소규모, 전문 군대가 미래 전쟁을 승리할 수는 없으리라는 신념 하에, 그는 전 국민들이 전쟁 노력에 합세해야 한다고 예측하였다. 프룬제는 공세의 우월성(primacy of offensive)과 "군사행동에 있어서의 기동의 중심성(centrality of maneuver in warfare)"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소련 군대를 살펴보면, 군사 작전 측면에서의 공세 전략과 정치 측면에서의 수세적 교리가 조합되어 있는 묘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련 군사전략은 선제 공격을 통한 우위 획득을 중요시했다.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 적백내전)을 통하여 소련 최고 사령부는 동맹군들에 대한 소모전을 피하고 고립된 적들에 대한 신속한 공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내전의 승리 이후, 소련군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중부 유럽 평야 지대에 걸맞는 대규모 복합군 대형(combined arms formation)을 통한 공세 작전을 강조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군사 교리화시켰다. 전차, 보병, 포병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소련인들은 대단히 중앙 집권화된 지휘통제 시스템 및 교리를 수립, 발전시켰다. "그러나, 교리 과정에 있어서의 중앙 통제는 선제권을 배제하고 유연하지 못한 작전을 벌이게 만든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1920년대, 소련군은 작전술(operational art)을 도입함으로써 종심 작전(deep operation) 및 종심 전투(deep battle)에 대한 발전을 이루는데, 이는 소모전 이론에서 기동전 이론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했다. 1928년 투하체프스키(Tukhachevskii)는 레닌그라드 군구 사령관을 맡게 되면서, 처음으로 기계화 및 공정부대에 대한 실험을 시작하게 된다. 투하체프스키는 자타가 공인하는 열광적인 기계화 지지자였으며, 기계화는 대규모의 기계화된 군대가 새로운 작전술을 전장에 적용토록 하여 연속 및 종심 작전을 통해 적의 완전 섬별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었다. 1931년 가을, 새로 창설된 푸룬제 군사학교 작전학부(Operations Department of the Frunze Academy)에서는 작전술의 기초에 대하여 재검토하였으며, 결정적이고 섬멸적인 작전 수단에 대하여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6년 임시 야전군 규정(Provisional Field Service Regulations)에서는 현대 기술에 의거한 종심 전투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다 - 이 규정에서는 결정적 공세와 적군의 완전한 파괴를 요구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을 침공했던 소련과 러시아 군대와 그 군사구조 및 교리들은 모두 대조국 전쟁(Velikaya Otchestvennaya Voyna)에서의 산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42-43년의 기간 동안 소련은 중앙에서 통제하는 준비사격 및 종심지역의 공격에 대한 지원사격을 실시하는 공세 방식을 발전시켰다. 1943년 이후, 소련은 종심 전투를 부활시켰고, 이러한 작전술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1944-45년 기간에는 군사적, 정치적 목적에 모두 부합하는 다전선 종심 섬멸전(multi-front deep battles of annihilation)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작전술 발전 및 정교화에 있어서의 동인은 기술발전(technology)에 있었다. 스탈린 사후, 주코프는 군 구조에서 군단(corps) 및 기계화 군(mechanized army)을 제거하였다. 이에 따라 195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소련 지상군은 주로 전차 사단(tank division)과 차량화 소총 사단(motorized rifle division)으로 구성되었다. 1970년대에는, 소련의 대전쟁 개념(big war model)이 지상-공중 전투 개념(land-air battle concept)으로 극치를 달리게 되며, 이는 "적의 전체 전투대형 종심 전반에 걸쳐" "현대 복합군 전투"를 벌이는 기술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과 그로즈니를 공격한 러시아군은 대규모 재래식 전쟁에 맞춰 조직되고 훈련되어 있었다. 또한 소련 군사 교리는 중부 유럽 평야와 같이 평평하고 기복 없는 지형에서의 소련군 투입을 상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전쟁식 접근은 "중전차와 기계화 부대가 집단 대형을 갖춰 조밀한 방어지대를 돌파하고 이어 적의 후방으로 신속하게 침투 포위한 뒤 이들을 격파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러한 공세는 공지 공격(air ground attack)과 장거리 포병, 그리고 적 방어지대 종심 깊은 곳에 대한 공수 공격(airmobile assaults)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소련 및 러시아 교리는 신속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추구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군의 전투 능력에 대하여 이미 기존부터 의심스러워 하던 바- 유연성과 기동에 의존하기 보다는 병력(양)의 집중 및 포병 지원에 의존한다-들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신기한 파라독스가 있었다 - 소련 군사전문가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승리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문화적인 저항(cultural reluctance), 다른 말로 문화적 관성(cultural inertia) 탓에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럽의 주적에 대항한 전쟁에 맞춰져 있던 육군의 교리, 훈련, 조직을 개혁하려는 어떠한 의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1992년 러시아 국방부는 국방교리초안(draft security doctrine)을 발표하면서, 나토가 아직도 장기적 측면에서의 위협임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지역 분쟁과 저강도 분쟁이야말로 더 가능성 있는 문제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두가지 분쟁 형태에 알맞는 군사 교리 및 군사력들은 서로 부합하지가 않는다. 러시아 일반참모부(Russian General Staff)는 페르시아 걸프 전쟁을 다른 20세기 지역 분쟁들의 맥락에서 분석하면서, 재래식 전쟁이면서도 비선형 전쟁이야말로 해답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러한 종류의 공세를 위해서는 적 지역 종심에 걸쳐 동시에 작전적, 전술적 기동을 할 수 있는 기동 전력을 필요로 했다. 1992년 러시아 국방부 장관 그라체프 장군(General Grachev)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한 신 기동군 위원회(new Mobile Forces Directorate)를 창설하였고, 1994년 11월, 옐친 대통령은 기동군(Mobile Force)의 창설이 완료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마지막으로 다음의 언급이 중앙 아시아와 코카서스 지역에서의 전통적인 러시아 군사력의 역할을 투명하고 간략하게 재정리해 주는 내용이 될 것이다:
러시아 군사력은 제국 가장자리의 작은 전쟁들에 간여해온 긴 전통을 갖고 있다. 이 전통은 때때로 군사 혁신과 개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곤 했다. 1860년대에서 70년대에 있었던 군사개혁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드미트리 밀류틴과 휘하 장군들에 의하여 코카서스 지역에서 벌어진 개혁들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 개입은 체르니에프와 같은 일련의 독립적이고 제국주의적 생각을 갖는 장교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독단적인 외교 정책을 시도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전략의 파라독스 - 수단 대 목적 (The Strategic Paradox- Means versus Ends)
대칭 전쟁은 양측 모두 생존을 위해 싸우는 제로섬의 총력전이다 - 예로 세계대전을 들 수 있겠다. 반면 비대칭 분쟁은 원주민 저항군 입장에서는 총력전이지만 열강의 입장에서는 근본적으로 제한전이 된다. 이는 폭도들이 강대국의 생존에 있어서 결코 직접적 위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대칭 상황에서의 강대국 입장에서는, 총동원이란 것이 결코 정치적으로 가능하거나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군사적 역량의 차이가 매우 크고 군사력이 우세하리라는 신념이 매우 강하므로 승리를 예측한다. 그러나 약세인 측이 제한된 수단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표는 강대국의 축출에 있다. 약자의 선택은 말 그대로 "죽음 아니면 승리"가 된다.
흥미롭게도 무한한 목적과 제한된 수단이라는 전략적 파라독스에 직면한 무자헤딘과 체첸 전사들 모두 러시아 군사력에 대응하면서 파비안 전술(Fabian strategy; 장기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파비우스(Fabius)의 전략은 시간을 벌기 위해 전투를 회피하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적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을 계산한 점에 있었다." 리델 하트(Liddel Hart)에 의하면, 로마 장군 파비우스는 적이 군사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정면 공격은 선택하지 않았다; 따라서 파비우스는 전면전을 피하고 "침입자의 참을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바늘찌르기(pin-pricks) 전략"을 선택하였다. 즉, 파비우스의 전략은 히트 앤드 런 전술을 통해 전쟁을 장기화 시키고 적의 우세한 집중부대에 대한 직접전을 회피하는 데에 있었다.
파비안 전략은 이 전략 파라독스에 따라붙는 수많은 비대칭 수단으로부터 통상 기인한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가 아래와 같은 비유를 통해 로마 내전 당시에 휘하 스페인 야만인 부대들로 하여금 로마군과 직접 교전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린 사실이야말로, 이 파라독스를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휘하 병력에게 2마리의 말을 데려왔다. 한마리는 매우 강했고, 또 하나는 매우 허약했다. 그리고 그는 이와 똑같이 강건한 젊은이와 허약한 젊은이 한명씩을 불러세웠다. 강건한 젊은이에게는 허약한 말의 꼬리털을 한꺼번에 잡아뽑도록 하였고, 허약한 젊은이에게는 강건한 말의 꼬리털을 한올 한올씩 뽑도록 하였다. 허약한 젊은이가 임무를 완수하였을 시점에서도 강건한 젊은이는 아직도 허약한 말의 꼬리털을 잡아뽑지 못하고 낑낑대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내 부하인 여러분들께 보여드린 이것이야말로 로마 군단의 특성이다. 로마 군단은 한 덩어리로 공격하는 자(who attacks them in a body)에 대해서는 무적이다. 그러나 여러 집단으로 편성되어 공격하는 자(who assails them by groups)에 대해서는 취약하다.
아프가니스탄
1979년 12월에 시작된 소련 전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소련이 군사적 개입 수준에 있어서 제한을 두겠다는 결심을 하였다는 것이다. 소련이 투입하고자 했던 병력 규모 측면에 있어서 정복 및 점령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며, 또한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소련 전략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군대(Democratic Republic of Afghanistan's Army)를 재건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무래도 소련측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제한된 규모의 폭동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마침내 이들은 꼭둑각시 아프간 군대의 능력으로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주민들의 저항세력에 대한 지지가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프간 전쟁(Afghan War)에서의 소련 작전들은 사실 무자헤딘을 격퇴하는 데에 목적을 둔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주민들을 협박하고 공포에 떨게 함으로써, 저항이 심하게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서 주민들이 떠나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게 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작전에 사용된 방식과 무기들 - 촌락들의 의도적 파괴, 고공 융단 폭격, 네이팜탄, 유산탄 사용, 부비트랩이 장치된 장난감 살포 등- 자체가 소련군이 아프간 민간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초토화 정책(scorched-earth policy) 및 주요 도로 및 촌락 주변 대한 대규모 지뢰 부설등과 함께 농경지의 상당수를 파괴하게 되었다. 또한 저항군 지배 지역에서 일하고 있던 한 프랑스 의사가 작성한 1984년의 보고서에 따르면, 소련군이 가한 사상자의 80퍼센트 이상이 민간인이었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제한전으로 싸운 반면 무자헤딘은 총력전으로 싸웠기 때문에, 비대칭 분쟁이다. 모스크바는 의도적으로 작전 범위와 참가 병력 규모를 제한시켰다. 한편으로 저항군 측에서는 총력전이었다- 생존을 위한 전쟁이자 국가의 미래를 건 싸움이었다. 실로 소련 군사력은 아프가니스탄의 전투에서는 패하지 않았으며, 단지 이기지 못했을 뿐이다- 즉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육군은 심리적, 육체적으로 혹평을 받았다(battered). 반면 무자헤딘은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격파당하지는 않았다. "게릴라들은 큰 승리를 거둘 수는 없지만 침략자들의 전투 의지를 갉아먹을 수는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실질적으로 아프가니스탄 게릴라들은 키신저의 격언인 "게릴라는 지지 않으면 이긴 것이다; 재래식 군대는 이기지 못하면 진 것이다"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아프간 저항군 전사들은 소련의 섬멸 전략에 장기 소모전을 수행함으로써 잘 대응하였다.
체첸
승리란 없다. 우리가 싸우고 있다면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싸우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진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우리를 죽이고 이 땅을 파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그 과정이 대단히 고통스럽도록 만들 것이다.
허약한 체첸 군대가 유라시아의 강대국의 막강한 군대를 격파한 것은 이들이 재래식 전술을 통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활용하여 러시아 군대의 약점에 대해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로즈니에서, 두다예프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방법과 비재래식 방법을 성공적으로 혼합 사용하였다. 체첸 군대와 러시아 군대 사이에는 비대칭성이라는 관계가 지배하였으며, 체첸인들이 도심지 전투에서 사용한 방법은 개활지 전투를 회피하고 도심지 방어물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러시아군에게 대규모 피해를 입힐 수가 있었던 적절한 방법이었다.
두다예프의 군대는 병력과 자원, 훈련 측면에서 제한되어있었기 때문에 두다예프는 휘하 병력을 러시아인들과의 개활지 전투에 내보내면 재앙을 맞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95년의 체첸 군대의 값비싼 그로즈니 방어전 이후, 두다예프는 러시아군과의 정면 충돌을 피했다. 이러한 제한 사항을 감수하고 두다예프는 간접적인 소모전략을 채택하였으며, 러시아 주력과의 전면 전투는 회피하고 약한 적군 경계초소나 소규모 분견대만을 대상으로 공격하였다. 두다예프의 승리 계획은 휘하 군대를 보존한 채로 전쟁을 지속시키고 러시아군의 말단 부대들에 대한 공격을 실시함으로써 러시아의 전투 의지를 마모시키는 데에 있었다. 두다예프의 접근 방식은 러시아인들이 게릴라 사냥시의 무력사용에 있어서 무차별적이 될 수록 필연적으로 두다예프군 지원자는 늘어나게 되는 특징이 있었다. 저명한 미국 군사 역사가인 러셀 웨이글리는 처음으로 이러한 전략적 파라독스를 미국 독립전쟁의 상황을 들어 설명하였다. 체첸인들은 당시의 미국인들과 같은 파라독스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이들의 "마모 전략"이 나왔다는 것이다: 일면으로 체첸인들은 절대적인 정치적 목표 - 러시아 군사력의 체첸 지역에서부터의 완전한 추방- 를 갖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체첸인들의 군사적 수단은 대단히 미약하여 이들은 전략적 방어 외에는 택할 길이 없다.
이에 따라 체첸에서의 러시아군은 비대칭 분쟁에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원칙 모순(principal contradiction)"에 봉착하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인들은 게릴라 작전에 대응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초소 전쟁(a war of posts)이라는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다. 일단 분산하긴 하였지만 이러한 전초들이 실제로 지역 장악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가 된 적은 한번도 없다. 이는 소규모 병력이 지키는 초소에 대해서 게릴라들이 공격을 펼침에 따라 수비대들을 계속 통합시켜 규모를 불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초소들의 숫자도 너무 적게 되었고, 그 초소의 병력 규모도 시골지역 게릴라들의 작전을 저지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체첸의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해 끈질기게 싸우는 전사들에 대항하여 체첸 전토를 통제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다. 다시 한번 헨리 키신저가 미국이 베트남에서 했던 대폭동전 노력에 대해 묘사한 표현이 이 전략적 파라독스에 대하여 잘 설명하게 된다: "게릴라는 지지 않으면 이기는 것이다. 재래식 군대는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이다."
체첸인들의 러시아인들에 대한 마모 전술은 모택동이나 헨리 키신저가 서술한 게릴라 승리 요건과는 좀 다르다. 두다예프의 전략 목표는 말단의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러시아 분견대에 대하여 점진적이고 끈질긴 공격을 펼쳐 러시아 정부와 국민들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데에 있었다. 체첸인들은 한편으로 러시아인들에게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전술적 공세를 펼치면서도 전략적 수세를 취함으로써 그들의 소규모 군대를 보존하여 "지지 않는" 태세를 갖추었다. 두다예프의 군대는 러시아 군대에 비해 너무 약하여 이길 수 없는 재래식 전투에 휘하 병사들을 내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체첸인들의 정치적 목적-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전면전 방식(total)이어다. 이러한 모순에 대한 해결책으로 두다예프는 완전한 군사적 승리에 의존하지 않고 언젠가 모스크바의 정치적 반대가 옐친 행정부로 하여금 분쟁을 포기하도록 하는 가능성에 주로 의존하게 되었다. 약하지만 더 약삭빠른 체첸 전사들은 러시아 군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싸우는 것을 거부하고 비정규적 방식에 의존하면서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기술의 파라독스 (The Paradox of Technology)
이 파라독스는 거대한 자원력 불균형으로부터 기인한다. 비대칭 분쟁에서는 기술 수준 및 공업 능력 측면에 있어서 양자간 거대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강자 측에서는 잠재적인 전투력 측면에서 훨씬 많은 이점을 갖게 된다. 이러한 불균형은 말단 세력이 중심 세력에 대항하는 모든 분쟁 구조에서 등장한다. 역사에서는 제국 군대가 "야만인들" 내지는 기술적으로 열세한 적들과 싸우는 수많은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세기에 있었던 가장 뚜렸한 기술 비대칭 현상은 베트남 전쟁과 소련의 아프간 전쟁에서 잘 드러났다. 이 사례들을 살펴보면 재래식 전력 및 기술적 우위가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비대칭전 상황에서는 승리를 방해할 수도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비대칭적 접근을 실시하는 간사한 적군에 대항하는 상황에서 병력 우세나 기술 우세가 어떻게 문제를 일으키는 지에 대해서는 아프가니스탄 참전 용사나 그로즈니 참전 용사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소련은 무자헤딘과 아프간 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공업 국가가 갖고 있는 군사기술의 모든 목록들의 것들을 불러왔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기술이 전략과 의지를 대체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실 군사력의 무차별 사용은 대폭동작전을 평가할 어떠한 것도 없었다는 점과 맞물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민심 이반을 불러와, 소련의 아프간에서의 노력을 오히려 방해하게 되었다. 소련은 아프간 전쟁을 통하여 새로운 기술들을 도입하고 실험하였다. 신 기술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BMP-2, BTR-80 장갑병력수송차량들과, 82mm 자동 박격포, 자주 박격포차, AGS-17 자동 유탄발사기, BM-22 다연장 로켓 시스템, MI-8T 헬리콥터, SU-25 지상지원기, ASU-74 돌격소총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전쟁 기간동안 소련은 몇몇 MI-24 공격헬기 모델들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기술들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은 경보병들의 전쟁이었으며, 소련은 경보병을 갖고 있지 못했다.
소련에 경보병이 부족했을 뿐만이 아니라, 소련의 기계화 보병들이 쉽게 경보병으로 전환되지도 못했는데, 이는 이들 보병들이 장갑병력수송차량에 지나치게 유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기계화 부대 및 대규모 화력에 대한 의존으로 인하여 병사들이 가지고 다녀야 하는 하중이 지나치게 증가하였고, 이로 인하여 BMP로부터 1킬로미터 이상의 도보 이동은,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지형과 기후 조건 하에서는, 금방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표준 방탄 조끼는 16킬로그램이 나갔으며, 소련군에서 정확도보다는 화력을 중시한 탓에 병사들은 대량의 탄약을 휴대해야 했다. 또한 차량 거치 화기들의 무게는 엄청나게 무거워서 이들을 탈거하여 운용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 12.7mm 중기관총의 경우 삼각대를 제외하더라도 34킬로그램이었으며, AGS-17 유탄발사기는 30.4 킬로그램이었다. 또한 AGS-17 탄창 드럼은 14.7 킬로그램이었다. 결국 이러한 기술의 혜택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 하차 보병은 대단히 굼뜨게 되었으며 결국 아프간 게릴라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은 베트남에서의 미군과 같이 헬리콥터의 유용성을 잘 활용하게 되는데, 헬리콥터의 기동성, 무장, 이동거리, 다양성은 무자헤딘과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장악해야 할 광대한 영역과 아프간 작전의 분권화된 성격을 고려했을 때, 헬리콥터가 없었더라면 소련은 더 크게 고생해야 했을 것이다. 헬리콥터가 소련군을 기존의 재래식전 방식의 군대에서 대폭동전 전문 군대로 탈바꿈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지만, 이를 통해 무자헤딘과의 싸움에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헬리콥터로 인해 반군들이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기동성을 갖게 되었으며, 기습의 효과를 높이고 반군의 반응할 시간을 감소시켰으며, 소련군이 반군의 위협에 재빨리 대처할 수 있게 함으로써, 소련군이 주도권을 잡게 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을 제공하였다." 또한 1986년 이전까지의 낮은 대공방어위협 환경은 소련으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낮은 위험도 속에서 휘하 조종사들을 숙련시키고 헬리콥터를 테스트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 전략은 실질적으로 최신 기술의 사용과 (헬리콥터에 의해 제공된) 전술적 기동성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인들을 최대한 살상하는 반면, 자군 사상자는 최소화 하는 데에 있었다. 실제로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활용하여 초토화 전략 및 "이주 대학살(migratory genocide)"을 실행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수많은 보고서들에 다르면, 소련군은 특히 공격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촌락을 파괴하고 작물을 불태움으로써 주민들 - 무자헤딘에 대한 주요 지지 근원 -을 그 지역으로부터 몰아냈다. 다른 보고서들에 의하면 소련은 강력한 저항군이 있는 지역에서는 사격자유지대를 설정하였다고 한다. 한 소련 전문가에 따르면, 아프간에서 "소련이 가졌던 첨단 기술 독점 현상은" "이들의 파괴적 측면을 증폭시켰다". 아프간 지역에 주둔하던 "최첨단" 항공 플랫폼의 숫자는 평균적으로, 공격헬기 약 240대, 기타헬기 약 400대, MiG-21 및 MiG-23 수개 대대, SU-25 지상공격기 최소 1개 대대 정도로 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SU-25가 최초로 작전 투입된 전장이기도 하다. 다음 인용문을 통하여 소련이 기술과 화력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카불 주변의 계곡에서 러시아군은 수백대의 전차 및 기타 폭탄, 로켓, 네이팜, 화학무기 등을 활용한 일련의 대규모 작전들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경로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항복조차 받아주지 않았으며, 별다른 요구도 하지 않았다.
또한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은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더 많은 첨단 장비들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Mi-24 및 Mi-25 하인드 헬리콥터를 특히 효과적으로 이용하였으며, 적진 너머로 특수부대들을 투입하게 되었다. 1985년 이전의 소련군들은 대체로 수비진지 안에 남아있을 뿐이었으며, 그 밖으로 나가는 경우에는 대체로 대도시들을 잇는 주도로들을 따라 기갑 차량들을 타고 작전했을 따름이었다. 1986년이 되면서, 소련의 군사기술 및 전술적 혁신(비록 아직도 재래전 패러다임 내에 묶여있긴 했지만)이 무자헤딘 저항을 무너뜨리는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6년 4월 미국인들이 무자헤딘에게 스팅어 견착 대공미사일을 제공하게 되면서 전쟁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게릴라들이 소련의 핵심 기술적 이점인 헬리콥터를 통한 기동력 및 화력 우세를 잠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항공기 손실 추정치는 매일 1대 꼴이었다. 그 결과 소련군은 더이상 헬리콥터 건쉽을 지상 지원용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헬리콥터를 통한 침투가 어려워지면서 스페츠나츠 부대의 효용성도 감소하게 되었다.
1986년에 시작된 스팅어의 소개 및 사용은 높은 수준의 훈련과 조직을 갖지 못한 게릴라가 어떻게 공업국의 정규군대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 사례이다. 그 결과 소련군은 포병과 고공 폭격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전쟁이 길어지는 한편, 소련인들이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첨단기술과 대량화력에 더욱 의존하게 됨에 따라, 민간인 피해는 더욱더 늘어나게 된다. 그 결과 소련에 대한 저항은 더 강해지고, 더 조직화 되었으며, 효과적이 되었다. 소련의 첨단 기술과 그에 대비한 저항군의 상대적으로 원시적인 기술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 장비 손실은 제트기 118기, 헬리콥터 333기, 전차 147대, 장갑차 1314대, 화포 및 박격포 433문, 무전기 셋 및 지휘차량 1138기, 공병차량 510대, 트럭 11369대에 달한다.
소련이 훨씬 기술적으로 우세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아프간인들에게 상당히 많은 양의 군수물자를 상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술적 비대칭성이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모든 기술적 이점에는 스팅어의 사례와 같은 반대 측면이 있다; 또는 RPG를 응용해서 쓰는 사례도 있었다. 전장에 스팅어가 도착하기 전에도 이미 게릴라들은 기관총을 이용하거나, 팬테일 장비(후폭풍 방향을 전환시켜줌)를 달아 공중 목표를 조준할 수 있도록 개조한 RPG를 이용하여 수백대의 헬리콥터를 격추시키고 있었다. 20여년 후, 무자헤딘 베테랑들에 의해 훈련받은 소말리아 민병대원들도 비슷한 방식의 RPG로 2대의 미군 블랙호크 헬리콥터를 격추시킴으로써, 이후 미군이 소말리아에서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주석을 더 달자면, 아프간인들은 지뢰원을 개척하기 위하여 양들을 사용했다 - 첨단기술로 제시된 문제에 대해 매우 원시기술로 해결한 것이다.
체첸
체첸인들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가능한 한 러시아인을 많이 살상함으로써 이들의 전투 의지를 마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체첸인들은 러시아 기갑, 포병, 공군 전력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것을 "비대칭" 전략으로 삼았다. 이들은 보병 전투를 통해 대등하게 싸우고자 하였다. 체첸인들은 러시아인들 또한 똑같이 쉽게 죽을 수 있는 도심지에서의 보병전투로 러시아인들을 불러들였다.
1994년 12월 31일 그로즈니를 공격한 러시아군대는 기술적으로나 숫자상으로나 그로즈니의 체첸 수비대보다 우세했다. 아마도 이러한 숫자 및 기술적 우위가 러시아 군을 방심시켜서 체첸인들의 대전차 매복이 우글우글한 속으로 부주의하게 어정어정 걸어들어가게 만든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단순히 숫자만으로 보았을 때에도 러시아인들은 230대의 전차와 454대의 장갑차, 388문의 화포를 동원하였다. 반면 체첸인들은 전차 50대와 장갑차 100대, 화포 60문만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측이 모든 무기 시스템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체첸인들을 불리한 위치로 몰아넣지 못했다. 전직 러시아 국방장관 그라체프 장군이 자신은 1개 공정연대만 가지고도 두다예프 정권을 몇 시간 내로 전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즈니에서의 체첸군의 능란한 저항은 러시아군을 도심 중앙에서 후퇴하여 재집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도시의 모든 벽과 층에서, 도시의 한 블럭에서 또다른 블럭으로 움직이며, 체첸 대전차팀은 RPG-7을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러시아 전차들을 사냥했다. 그 결과 이날의 공세 과정에서 한 러시아 연대는 보유 차량 120대 중에서 102대를 상실하고, 장교 대부분을 잃었다. 손자가 말한 바와 같이, "전쟁에서의 상책은 적의 전략을 무너뜨리는 것이요, 차상책은 적의 동맹관례를 외교로 교란시키는 것이요, 그다음 차상책은 야전에서 적을 공격하는 것이며, 가장 하책은 성새를 공격하는 것이다."
체첸 전사들은 모든 도시들과 촌락들을 매복 네트워크로 바꾸었으며, 숫자와 기술적으로 우세한 러시아군에 대하여 심각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교활한 체첸인들이 러시아의 기술적 우위를 이용했던 방법 중의 하나는, 고의로 러시아 전술기로부터 사격을 유도하여 주변에 접근한 러시아군에게 간접 피해(collateral damage)가 가도록 만드는 방식이었다. 러시아 항공기가 도심 환경 속에 있는 한 무기에 대하여 응사하게 되면, 예외 없이 주변 가옥 및 도로는 파괴되었다. 이러한 겉으로 무차별적으로 보이는 파괴로 인하여 지역민들은 분노하게 되며, 이에 따라 체첸측은 더 쉽게 모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체첸인들이 영리하게 군 또 하나의 사례는, 2개 러시아군 연대 사이로 침입하여 야음 속에서 양쪽 모두를 향해 사격하는 것이었다. 이는 종종 러시아군끼리 격렬한 오인전투을 벌이도록 만들곤 하였다.
도심지이거나 산악이거나 할 것 없이, 1994-96년의 체첸 분쟁에서 러시아군은 대규모로 군사기술 및 화력 - 융단폭격 및 대규모 포격 - 을 사용하였으며, 이들 대부분은 민간인 피해나 관련된 간접 피해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반면, 전쟁 나머지 기간동안, 체첸군은 직접 교전을 회피하였으며, 그 대신 러시아군을 소규모 분견대로 고립시켜 매복 공격을 가하였다. 러시아군으로서는 대반란 작전에 대한 기술 및 개념에 있어서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병 기동 대신에 대량 포격을 사용하였고, 공세의 통상 원칙을 "목표에 대한 대규모 폭탄 투하로 해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러시아군은 대반란전에서 흔히 사용하는, 주민들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물과 물고기를 분리하도록 하는 접근방식 대신에, 포병 화력과 기술력으로 아예 주민들을 말살시키는 방식으로 가게 되었다.
러시아의 기술적, 숫자상의 우세가 이들이 목표를 이루도록 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기술의 키메라적인 성질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레스터 그라우(Lester Grau)는 게릴라전이 국가의 의지와 참을성의 시험장이라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기술 우위의 상당 부분을 상쇄시킨다고 하였다. 또한 비대칭전은 기술적으로 약자 그룹이거나 국가인 경우 강대국과 싸우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이 된다. 그라우는 기술과 비대칭 분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득력 있는 결론을 내놓았다: "게릴라전과 도심 전투, 평화 작전, 기타 험지에서의 전투에서는 기술이 그다지 결정적 이점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골라야 할 무기는 여전히 다수의 잘 훈련된 보병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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