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버미스 하이트 전투 1777 (The Battle of Saratoga, 1777) (2차 사라토가 전투)

박용수 2014. 10. 27. 15:45

< 원문출처 : The Battle of Saratoga 1777 (http://www.britishbattles.com/battle-saratoga.htm) >

 

 < 참고사진 출처 :

 [1] 미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http://www.dean.usma.edu/history/web03/atlases/american%20revolution/)

  ※ 기타 사진은 원문 홈페이지의 사진임 >

 


버미스 하이트 전투 1777 (The Battle of Saratoga, 1777) (2차 사라토가 전투)

 


전투 : 버미스 하이트 전투 (제 2차 사라토가 전투)

 

일시 : 1777년 10월 17일

 

장소 : 뉴욕 주 허드슨 강변의 사라토가 지역

 

교전자 : 영국군 및 독일군 vs. 미군

 

지휘관 : 영국 및 독일군 지휘관은 존 부르고인 소장(Major General John Burgoyne), 미군측 지휘관은 호라시오 게이츠 소장(Major General Horatio Gates) 및 베네딕트 아놀드 준장(Brigadier Benedict Arnold)

 

(부르고인 장군이 게이츠 장군에게 항복하는 모습)

 

병력 규모 : 영국측은 영국인, 브런스윅인(Brunswickers; 독일인), 캐나다인, 인디언 합쳐서 5000명 가량. 영국군이 항복할 시점의 미군 규모는 민병대 포함하여 12000명에서 14000가량으로 추정.

 

승자 : 부르고인 휘하 군대가 미군에게 항복함

 

(사라토가 전투의 미군측 지휘관 호라시오 게이츠 소장)

 

 

영국군 구성:
주요 고위 지휘관으로는 필립스 소장(Major General Phillips), 리더젤 남작(Baron Riedesel), 사이먼 프레이저 준장(Brigadier Simon Fraser), 해밀턴 준장(Brigadier Hamilton) 등이 있었다.

소령 발카레스 공(Major Lord Balcarres)이 제 9, 20, 21, 24, 29, 31, 47, 53, 62 보병연대의 경보병 중대들을 통합 지휘했다.

애크란드 소령(Major Acland)은 동일하게 제 9, 20, 21, 24, 29, 31, 47, 53, 62 보병연대의 척탄병 중대들을 통합 지휘했다.

 

브레이만 엽병대(Breyman's Jagers)
리더젤 연대(Riedesel's Regiment)
스페흐 연대(Specht's Regiment)
레츠 연대(Rhetz's Regiment)
헤세 하나우 보병대(Hesse Hanau Infantry)
파우쉬 대위의 헤세 하나우 포병중대(Captain Pausch's Hesse Hanau Company of artillery)
인디언 및 캐나다인들(Indians and Canadians)
제 9 보병연대
제 20 보병연대
제 21 로열스콧 수발총병연대
제 24 보병연대
제 29 보병연대
제 31 보병연대
제 54 보병연대
제 62 보병연대

 

(영국 제 20 보병연대의 모습)

 


미군 구성:
우익부대 - 호라시오 게이츠 장군이 직접 지휘:
글로버 준장의 대륙군 여단
닉슨 대령의 대륙군 연대
패터슨 준장의 대륙군 여단

 

중앙부대:
러니드 준장의 대륙군 여단
베일리의 메사추세츠 연대
잭슨의 메사추세츠 연대
웨슨의 메사추세츠 연대
리빙스턴의 뉴욕 연대

 

좌익부대 - 베네딕트 아놀드 소장이 지휘:
푸어 준장의 여단
칠리의 제 1 뉴햄프셔 연대
헤일의 제 2 뉴햄프셔 연대
스캄멜의 제 3 뉴햄프셔 연대
반 코틀란트의 뉴욕 연대
리빙스턴의 뉴욕 연대
코네티컷 민병대
모건의 강선총병대
데어본의 경보병대

 

(사라토가 전투의 영국군 지휘관 "죠니 신사" 존 부르고인 소장)

 


전말

 

 1776년에서 77년 사이의 겨울 동안, 런던의 영국 정부는 캐나다로부터 챔플레인 호수를 따라 강력한 군대를 파견하여 미국 식민지 반란군의 심장부인 뉴잉글랜드를 고립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캐나다의 영국 총독 거이 칼튼 경(Sir Guy Carleton)이야말로 1775년과 1776년의 캐나다 방어전을 포함한 북아메리카에서의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은 인물로서 누구보다도 이 임무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영국 전쟁 정책을 직접 책임지고 있던 저메인 공(Lord Germaine)은 칼튼 대신 1776년 기간 동안 칼튼의 부하로 일했던 존 부르고인 소장(Major General John Burgoyne, known to the troops as "Gentleman Johnnie")을 조지 3세 국왕에게 천거한다. 부르고인은 겨울 동안 미리 런던으로 돌아와 지휘권을 맡기 위한 로비를 해왔던 것이다.

 

(사이먼 프레이저 준장의 전사)

 

 브런스윅(Brunswick) 보병연대 및 포병을 포함한 강력한 증원군이 영국령 캐나다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부르고인이 받은 지시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챔플레인 호수를 따라 진군하여 타이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하고, 허드슨강으로 진격한 뒤 남진하는 것이었다.

 

(프리먼스 팜 근처에서 다시 벌어진 버미스 하이트 전투도)

 

 저메인 공과 부르고인은 뉴욕으로부터 클린턴 소장(Major General Clinton)의 또다른 부대가 허드슨 강으로 치고 올라와 북상하여 부르고인군과 연결하는 것으로 구상했다. 그러나 뉴욕의 영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하웨 장군에게는 이러한 구상에 따른 지시가 제대로 전달되지가 않았다. 하웨 장군은 장군 나름대로 펜실베니아를 침공하여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부르고인은 1777년 6월 말, 세인트 로렌스 강을 출발하여 챔플레인 호수를 따라 이동하였고, 1777년 7월 1일에는 타이콘데로가 요새에 도착한다. 영국군과 독일군이 도착하자 미군 지휘관은 요새를 포기하고 도주하였다. (타이콘데로가 요새 전투 참조)

 

 영국군 대령 생 레저는 이리 호수로부터 모호크 강을 따라 진군하여 교란 작전을 실시했다.

 

 1777년 7월 10일, 부르고인 군대는 스케네스보로(Skenesboro)에 도착하여 북쪽으로의 보급로 및 남쪽으로의 진격로 확보에 집중하였다. 이 지역은 숲이 무성한 지역이고 도로라기 보다는 오솔길들이 이리저리 나 있는 지역이라 대량의 보급품과 포병을 운반하려는 군대에게는 어려운 지형이었다.

 

(항복 회담이 벌어질 무렵의 병력 배치도)

 

 미군 지휘관 슐러 장군은 부르고인의 주 목표지점인 알바니 시에서 북쪽으로 30마일 지점에 있는 스틸워터까지 퇴각하였다. 미국 관리들은 뉴잉글랜드 민병대 모병에 전력을 투구함과 동시에 영국군 진격로에 대한 초토화 전술을 실시하였다.

 

 추가 보급품 및 브런스윅 용기병연대에 필요한 군마를 확보하기 위하여, 부르고인은 바움 대령 휘하의 500명의 독일군을 보내 뉴햄프셔주 베닝턴을 습격한다. 부르고인은 동시에 그의 주력 부대를 허드슨 강을 따라 사라토가로 이동시키며, 이곳에서 상당히 요새화된 숙영지를 구축한다.

 

 바움의 부대는 미국 민병대의 공격을 받아 궤멸당한다. 브레이만 대령이 이끈 구원부대 역시 약간의 손실과 함께 격퇴당한다. (베닝턴 전투 참조)

 

 생 레저는 베네딕트 아놀드 준장의 강력한 저항과 더불어 인디언 동맹자들과의 문제로 인하여 모호크 강을 따라 행하던 진군을 포기하고 만다. (스탠윅스 요새 포위전 참조)

 

 이제 부르고인은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군대가 주둔한 지역 주변에서는 수많은 민병대가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군대가 보유하고 있는 식량도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또한 명령상 분명히 남진하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거나 북쪽으로 퇴각, 혹은 동쪽으로 우회 기동하는 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거친 숲속 길을 뚫고 충분한 보급품이 도착한 것은 1777년 9월 13일이 되어서의 일이며,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격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허드슨 강 동쪽에서 본 영국군 대열)

 

 9월 19일, 부르고인은 허드슨 강 서쪽제방의 버미스 하이트(Bemis Height)에 있는 요새화된 미군 진지에 접근하게 되었다. 영국군은 전직 영국군 장교였던 호라시오 게이츠 소장이 이끄는 미군부대를 향해 3개 방향에서 접근을 시작했다. 독일 대령 리더젤이 이끄는 부대는 강을 따라, 부르고인이 직접 이끄는 주력 부대는 중앙 방면으로, 프레이저 준장이 이끄는 세번째 부대는 미군 좌측방으로 크게 우회하여 접근하였다. 영국군의 목표는 미군이 점령한 버미스 하이트 서쪽에 있는 아직 요새화되지 않은 언덕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아놀드는 게이츠를 압박하여 참호진지를 벗어나 영국군을 요격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게이츠는 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르고인은 휘하 부대 - 제 9, 21, 62, 20 보병연대 - 를 공격 대형으로 배치하였다. 프레이저는 우측에서 척탄병대대, 경보병대대, 제 24보병연대를 이끌고 미군 좌측의 고지로 접근하였다. 리더젤은 강가 제방을 따라 진격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전투를 프리먼스 팜(Freeman's Farm) 전투라고 부르며 일몰까지의 전투 결과 영국군이 승리하였다. (프리먼스 팜 전투(제 1차 사라토가 전투) 참조)

 

(1777년 10월 17일, 사라토가 전투에서 독일군 진지를 공격하다 부상당하는 베네딕트 아놀드 장군)

 

 다음날, 부르고인 휘하의 여러 고위 장교들은 미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속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상당수 사람들의 평에 따르면, 만약 부르고인이 공격을 속행했을 경우엔 전날의 격전으로 혼란에 빠진 미군 진영을 뒤흔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부르고인은 이 제안에 처음에는 상당히 끌리긴 하였지만 결국에는 허드슨 강가에 있는 숙영지에서 가만히 있기로 결심한다.

 

 같은 날, 부르고인은 미군이 조지 호수에서 영국군 보급함대 하나를 탈취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는 모든 원정 계획을 포기하고 타이콘데로가 요새로 퇴각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으나, 클린턴 소장의 영국군이 그와 연결하기 위하여 뉴욕에서 허드슨 강을 따라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진지를 고수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1777년 10월 7일까지, 남쪽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긴 하지만, 클린턴은 허드슨 강을 따라 그다지 올라오지를 못했다(클린턴 요새 및 몽고메리 요새에서의 전투 참조). 부르고인은 버미스 하이트의 미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기로 마음먹는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게이츠의 병력은 대단히 불어나 있어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4000여명에 불과한 반면 게이츠의 미군은 12000여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부르고인은 이 작전을 일종의 무력 정찰(reconnaissance in strength) 개념으로 수립하였으며, 미군 서쪽의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자 하였다.

 

 미군 전초부대는 영국군이 옛 프리먼스 팜 전장 근처의 한 밀밭으로 진격하여 진형을 이루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렸다. 모건의 강선총병대가 공격에 투입되었고, 곧바로 아놀드 사단의 다른 연대들도 지원하였다. 미군은 병력 수 측면에서 영국군 "정찰" 부대를 압도하였고, 영국군 척탄병 및 경보병 부대들은 밀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무렵, 영국군 준장 사이먼 프레이저는 모건의 강선총병대원 중 하나가 발사한 탄환에 맞아 치명상을 입는다. 영국군과 독일군은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브레이만 대령의 연대가 지키고 있던 보루가 탈취당한 이후 부르고인은 휘하 병력을 허드슨 강 상류에 있는 요새화된 숙영지로 퇴각시킨다.

 

 다음날 부르고인은 휘하 병력을 강 상류 쪽의 사라토가에 위치한 숙영지로 퇴각시킨다. 미군은 부르고인을 추격하여 영국군 진지를 포위한다. 부르고인은 남쪽의 클린턴 군대가 허드슨 강을 따라 구원하러 올 것을 기대하고 타이콘데로가 요새로 퇴각할 마지막 기회를 지나쳐보내게 된다. 양개 영국군 사이에서는 전역 내내 통신상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전령들이 미군에게 사로잡혀 교수형당했다.

 

 부르고인은 1777년 10월 17일까지 클린턴군의 진격 소식을 기다렸으나, 결국 이날 게이츠 군대에게 항복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만다. 이 당시 게이츠 군대의 규모는 18000명에서 20000명에 이르렀다.

 

(사라토가 전투에서 항복하는 부르고인 소장, Fauval 작)

 


사상자 : 캐나다에서 출발한 7000명의 영국 및 독일군 중에서, 항복 당시 시점까지 전투 능력을 유지하고 있던 것은 3500명에 불과했다.

 

이후의 영향 : 부르고인의 항복이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으며, 미국인들의 사기는 크게 고양되었다.

 

 

(버미스 하이트 전투(2차 사라토가 전투)의 최초 병력배치 및 이동경로.
부르고인은 보급문제로 인하여 즉각 공격 혹은 퇴각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10월 7일, 부르고인은 다음날 아침에 미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1600명의 정예병력으로 하여금 미군 좌익의 위치를 미리 정찰하도록 지시한다.
이에 게이츠는 모건과 푸어를 보내 영국군의 측면을 공격한다. 아놀드는 월권으로 러니드를 해임하고 진격하던 그의 부대 지휘권을 인수하여 영국군 중앙부를 돌파한다. 아놀드 지휘하에 미군은 영국군 축성진지를 공격한다. 그의 공격은 중앙부에서는 실패하였지만, 우측 보루를 탈취하는 데에는 성공한다. 이로써 영국군 통신선이 위협받게 된다. 밤이 다가오고 아놀드가 부상을 입으면서 작전은 멈추게 된다. [1])

 

 

(브레이만의 보루에 대한 공격 당시의 모습[1])

 

 

(1777년 10월 11일-17일간의 양군의 대치상황[1])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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