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 아프리카 반군

[스크랩] [번역] 해적질과의 기나긴 전쟁사 : 역사적 경향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2010년 / 제 5장. 현대 해적 (1)

박용수 2014. 10. 27. 16:40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123~ pp 127 >

 

 


제 5장. 현대 해적
(Chapter 5. Modern Piracy)

 

 

 주요 신문 헤드라인에 "소말리아 해적들이 뜻밖의 노획물을 얻다: 러시아산 전차", "소말리아 해적들이 나포한 배에 러시아산 전차 33대가 실려있어", "해적들이 나포한, 당초 수단으로 향하던 전차들이 실린 배를 미해군이 감시 중" 등의 내용이 장식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2008년 9월 25일, 소말리아 해적들은 33대의 T-72전차와 기타 무기들이 선적되어 있던 우크라이나 화물선 MV 파이나 호(MV Faina)를 나포한다. 해적들의 대변인 수굴레 알리 오마르(Sugule Ali Omar)는, "우리는 큰 배 봤다. 그래서 그거 나포했다. 나중에 그 안에 탱크 있는 거 봤다. 돈 더 요구할 수 있어서 우리 기뻤다." 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들은 더 많은 돈 - 최초 3500만 달러 - 을 요구한다. 그러나 더 많은 돈을 벌 기회는 곧 소말리아에서의 해적질을 박멸해야 한다는 국제 사회의 압력 증가와 동의어였다. 한 정보관리의 설명에 따르면, "해적들은 바라던 것보다 더 많은 것(즉 국제사회의 응징; 역주)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건은 현 시점까지 소말리아 해적들이 벌였던 것 중에서 가장 뻔뻔스러운 사건이었다. 해적들은 2008년 9월 25일 목요일, 소말리아 해안 200마일 지점에서 이 배를 나포한 뒤, 호뵤(Hobyo) 근방의 소말리아 영해로 끌고 갔다. 국제 사회의 반응은 신속했다. USS 하워드 호(USS Howard)가 당일 늦게 MV 파이나 호 근방으로 접근하여 이 배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파이나 호를 담당한 임무부대(task force)의 지휘관 켄달 카드 소장(Rear Admiral Kendall Card)의 진술에 따르면, 하워드 호의 임무는 배에서 어떤 무기도 반출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 있었다고 한다. 카드 제독에 따르면, 소말리아 해적들은 하워드 호가 유엔의 권한으로 소말리아 영해 내로 들어왔다는 것과, 또한 파이나 호에서 군사물자를 하역하려고 시도하는 어떤 배라도 격침당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파이나 호의 나포로 인하여 이제 게임의 규칙이 바뀌게 된다. 이 사건 이후 러시아는 이 지역에 군함을 파견하여 러시아 상선들을 보호하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얼마 안가 다른 국가들도 이곳에 군함들을 파견하기 시작한다. 일부는 나토(NATO) 혹은 유럽 연합(EU)의 후원 하에 파견된다. 그 외에 중국, 인도, 일본의 군함들도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파견된다.

 

 한편, 해적들은 눌러앉아 몸값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거의 한달여 간의 교착상태를 거친 뒤인 10월 23일, 해적들의 대변인은 해적들은 자신들이 요구한 금액을 받을 때까지 배를 계속 붙잡고 있겠다고 다시한번 발표한다. 수굴레 알리 오마르는, "해적들은 전혀 걱정이 없다. 해적들은 편안하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인질들의 상황은 그리 안락하지 못했다. 파이나 호의 선장은 선박이 납치된 직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나머지 선원들은 살아남긴 했지만, 이들의 생활조건은 열악했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이들을 방 한 곳에 감금하였고, 매주 1~2회만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하였다. 물과 식량 공급은 적었으며, 해적들의 감시의 공포 속에 살아야만 했다. 미국 측이 선원들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선원들을 배 윗쪽으로 올려보내라고 요구했을 당시, 파이나 호의 선원들은 자신들이 곧 처형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마침내 해적들도 지치기 시작하여 몸값을 내리기 시작한다. 이후 몇차례의 회담이 이뤄진 뒤에, 결국 3200만 달러에 배를 석방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2009년 2월 5일 목요일, 선주는 이들 현대판 해적들에게 낙하산으로 현금을 전달한다. 일단 돈을 받은 해적들은 배를 떠났고, 5개월 반 동안의 억류 끝에 파이나 호는 풀려나게 된다. 이후 파이나 호는 미국인들의 호위 하에 이 지역을 벗어났으며, 2009년 2월 12일, 최초 목적지였던 케냐 뭄바사(Mombasa, Kenya)에 도착한다.

 

 미 해군장관(Secretary of the US Navy) 고든 R. 잉글랜드(Gordon R. England)는, "바다는 순찰되지 않는 무법지대이며, 따라서 이걸 악용하려는 자들에게 매력적인 장소가 되어 있다"라고 한 바가 있다. 비록 이 언급이 2004년에 나온 것이었음에도, 이후 6년간 이에 대응하기 위한 활동은 전혀 없었다. 사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의 시기야말로, 지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보다도 더욱 진정한 "해적질의 황금기(Golden Age of Piracy)"라고 할 수 있었다. 1716년에서 1726년 사이에 서인도 제도의 해적들은 약 2400여척의 배를 납치한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연간 218척 가량에 해당된다. 한편 국제 해사국(International Maritime Bureau, IMB) 보고에 따르면, 1998년에서 2008년 사이의 11년 동안에는 총 3521회의 해적들의 습격이 있었으며, 이는 연간 평균 320회에 해당한다. 만약 IMB의 주장처럼 실제 해적공격의 50~ 90퍼센트 가량은 보고에서 누락되었다고 보게 될 경우, 이 숫자는 더욱 엄청나게 불어나게 된다. 분명 최근 30여년 동안 해적질은 심각한 문제로 성장한 것이다.

 


20세기 말의 해적질의 대두 (The Emergence of Piracy in the Late 20th Century)

 

 국제 사회가 현대 해적들에 대해서 인식하고 걱정하게 된 역사는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제 상업회의소(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ICC)에서는 1981년에 국제 해사국(IMB)을 창설한다. 비록 이 기구의 주요 임무는 해상 사기(maritime fraud)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었지만, 얼마 안가 다른 종류의 해상 범죄, 예를 들어 해적질 문제도 다루기 시작한다. "국제 해상무역의 안전과 보안을 증진시키기 위한" 법령 제정 책임을 갖고 있던 유엔 기관(UN agency)인, 국제 해사기구(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 IMO)의 1983년 해양안전위원회(Maritime Safety Committee) 총회 당시, 스웨덴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에서의 해적질 문제를 제기하였다. 스웨덴은 당시 나이지리아와 긴밀한 무역관계 - 석유 및 기타 원자재 - 를 갖고 있었는데, 해적들로 인해 이 무역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지리아 정부에게는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스웨덴은 유엔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스웨덴의 우려에 반응한 IMO 측에서는 1983년 11월, 각국 정부들로 하여금 "최우선 순위로, 자국 영해 및 영해 인근 지역에서의 해적질 및 선박에 대한 무장 강도 행위를 방지 및 제압할 모든 필요수단을 취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채용한다. "선박에 대한 무장강도 행위 및 해적질을 막는 조치 (Measures to Prevent Acts of Piracy and Armed Robbery Against Ships)"라는 결의안에는 또한 각국이 해적 사건에 대해 IMO에 보고하도록 하는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조치로 인하여 드디어 해적질 문제가 국제적 수준에서 관찰가능해진 것이다.

 

 비록 IMO에서 각국에게 해적질 사건들을 보고하도록 요구했음에도, 이를 실천한 국가는 많지 않다. 단지 서독, 일본, 그리스만이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983년 IMO에 보고하면서, IMB는 각 국가 및 각 선주들이 해적 사건을 보고하기를 꺼려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1. 해적 사건에 대한 언론의 부정적인 보도가 국가의 해상교역에 악영향을 즐 수 잇다.
 2. 사건을 보고할 경우 해당 지역 관리들이 싫어하며, 이는 지역 관리들의 보복조치로 이어질 수 있다.
 3. 선원들이 위험지역으로의 항해를 꺼리거나 위험수당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선주들에게 비용이 증가한다는 뜻이 된다.
 4. 해적질이 벌어진다는 증거가 알려지면 보험료가 인상되는 근거가 된다.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이들 이유들 외에도, 여러 선사들은 관련 조사와 재판 절차들에 드는 비용들 또한 해적질 사건 보고를 꺼리는 이유로 제시하였다. 사법관리들이 사건 조사를 하기 위해 배가 항구에 머무르게 되는 경우, 선사측에서는 하루 25000달러 이상의 비용이 소비된다. 게다가 재판 과정에서 증인이 증언을 하기 위해 외국으로 가야하는 문제 또한 큰 비용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상당수 선주들은 직간접적으로 선장들에게 해적질 사건을 보고하지 않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보고되는 해적질 사건의 숫자는 1990년대 초에 증가한다. 이러한 숫자 증가는, 보고되는 해적질 사건 숫자보다 실제 해적질 사건이 훨씬 많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맞물려, 해운산업의 많은 이들로 하여금 보다 향상된 보고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시키게 된다. 이에 1992년 10월, IMB의 하부기구인 지역해적감시센터(Regional Piracy Center)가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장소를 말레이시아로 선정한 이유는, 동남아시아야말로 당시 해적질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남아 지역의 몇몇 국가들의 관리들은 지역해적감시센터의 설립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센터의 명칭이 지역 국가들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여 자국의 무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센터의 명칭이 1997년에 해적신고센터(Piracy Reporting Center, PRC)로 바뀐 뒤에도, 동남아 지역 국가들은 PRC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PRC는 해적질 정보에 대한 집결장소다. 해적들에 희생당한 상선들은 사건을 PRC에 보고한다. 한편 센터에서는 음성 통신을 통하여 해적질 사건에 대하여 방송함으로써, 선원들이 사건 및 위험이역이 어디인지를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동시에 센터에서는 피해자와 선주, 그리고 사법기관을 지원한다. PRC에서는 실제 사법기관에 필수적인 첩보를 제공함으로써 범죄자들을 체포하는데까지 이른 사례가 몇차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PRC에서는 주간 단위 및 사분기 단위, 연간 단위로 인터넷에 해적사건에 대하여 정보를 게시한다. 비록 피해자들의 신고 건수가 증가하기는 했지만, IMB에서는 아직도 반 이상의 사건들이 PRC에 보고되지 않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대 해적문제에서의 보고문제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들자면, 해적질의 정의(definition of piracy)와 관련된 논란을 들 수 있다. 해적질의 정의에 대해서는 2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1982년 제정된 유엔 해양법 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UNCLOS)에 따르면 해적질을 다음과 같이 좁게 규정하고 있다:

 

 a. 개인 선박이나 개인 항공기의 승무원이나 승객이 개인적인 목적을 위하여 저지른 모든 불법 폭력행위 및 감금행위, 모든 약탈행위들을 의미하며, 이는
     1) 공해상에서, 배나 항공기에 대하여, 또는 이러한 배나 항공기에 탑승한 인원이나 자산에 대하여 벌어지거나;
     2) 어느 국가의 사법권역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에서, 배나 항공기, 인원 혹은 재산에 대하여 벌어진다.

 

 b. 해적선이나 해적항공기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해당 배나 항공기의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모든 행위

 c. a항과 b항에서 규정된 활동을 사주하거나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모든 행위

 

 유엔의 정의에 따르면, 해적질은 단지 공해(high seas)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특정 국가의 영해 내에서 벌어진 범죄사건은 해적질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는 그 대신 "선박에 대한 무장강도행위(armed robbery against ships)"로 정의되며, 유엔에서는 "국가의 사법구역 내의 지역에서 벌어지며, 선박에 대해서 혹은 선박에 탑승한 인원 및 재산에 대해서 벌어지는 해적질이 아닌 모든 불법 폭력 및 감금, 약탈, 위협 행위등을 의미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유엔에서의 해적질의 정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공해(high seas)'라는 부분에서 비롯된다. UNCLOS 이전에는 영해(territorial waters)의 범위가 통상 3해리(nautical miles)로 되어있었는데, 이후에는 12해리로 확장되었다. 또한 접촉수역(contiguous zone)이라는 추가적인 12해리 지역 설정으로 인하여, 연안국가의 통제권이 24해리로 확장되게 된다. 접촉수역은 공해의 일부로 보기가 애매한데, UNCLOS에서 국가들로 하여금 이 지역 내에서 관세, 이민, 위생에 관련된 사법행위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해적소탕활동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UNCLOS에서는 배타적 경제수역(exclusive economic zone)을 해안 200 해리까지 설정하도록 허용하였는데, 이 영역 내에서는 국가들이 어업규제 및 석유나 천연가스 등의 바다 속의 자원 채취를 규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접촉수역과 배타적 경제수역의 개념은 각각 공해의 정의에 애매성을 부여하게 되었고, 일부 이론가들이 이 지역들은 공해가 아니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해적질의 정의에도 애매성이 부여되게 되었다.

 

 한편, IMB에서는 해적질의 정의를 보다 광범위하게 정의하고 있다. IMB에 따르면, 해적질은 "도둑질이나 기타 범죄행위를 저지를 분명한 의도를 갖는 한편, 또한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할 분명한 의도 혹은 능력을 가진 상태에서, 선박에 탑승하거나 탑승을 시도하는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따라서 IMB 보고서에 등장하는 해적질에는 실제 공격과 공격 시도가 모두 포함되며, 장소 측면에서도, 항구에서든 투묘장에서든 항로상에서 벌어진 것이든 간에 모두 다 포함된다.

 

 UNCLOS에 따른 해적질의 정의는 대부분의 해적행위를 '선박에 대한 무장강도행위'로 규정하게 되는데, 이는 대부분의 사건들이 공해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갖게 된다. 사실 카리브 해적들이나 바바리 해적들의 시대를 살펴보더라도, 당대의 해적들은 해안가 근처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이는 주권 국가들의 영해 내의 지역이었고, 해적들은 이 지역 내에서 먹잇감을 기다리며 사법당국을 피해 숨어있을 수가 있었다. 2003년을 예로 들면, 보고된 445건의 사건 중에서 27퍼센트만이 공해에서 발생하였다. 항해 중에 발생한 사건 210건 중에서 단지 58퍼센트만이 공해(international waters)에서 발생하였다.

 

 한편, 범죄의 희생자 입장에서나 이를 단속할 담당자 입장에서 보면, 공해에서의 해적질이나 영해 내에서의 선박에 대한 무장강도행위나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소말리아 영해에서 수백마일 떨어진 인도양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공격당하거나, 말라카 해협의 인도네시아 영해 내에서 해적들에게 털리거나 서로 별다른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UN에서의 정의에 따르면, 전자는 해적질이지만 후자는 해적질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들이 합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들은 대응할 수가 없다.

 

(5장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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