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167~ pp 1 95 >
제 6장. 결론
(Chapter 6. Conclusion)
해적질은 전통적인 군사적 방안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비전통적인 안보 위협이다... 해적질은 지상에 있는 해적들의 힘의 원천을 공격하고, 저들의 조직구조를 교란시키며, 저들을 지원하는 근원으로부터 고립시킬 때만이 근절시킬 수 있다. 특정하여 이야기하면, 이것은 저들의 기지와 은신처를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저들의 자본 출처와 기술, 인원모집 출처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장물들을 처분할 수 있게 하는 중간상인과 시장을 파괴하는 것이다.
- 그레이엄 제라드 옹웹, "아시아 해상에서의 해적질: 현대의 경향 (2007)"
해적질에 대해서 여러 시공간에 걸쳐 살펴본 결과, 해군작전 단독으로는 해적들의 범죄활동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가장 좋은 접근방법은 해적질의 3가지 지탱점 - 지리조건, 정치적 불안정, 안전한 해방구 - 중의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사실 첫번째 지탱점인 지리조건은 사실상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나머지 2가지 지탱점을 제거하는 것으로 가야하는데, 둘 다 육지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서인도제도의 해적질은 수백년간 지속되어 왔는데, 이는 지리적 조건과 정치적 상황, 그리고 안전한 해방구의 존재로 인하여 가능했던 것이다. 17세기 및 18세기에 걸쳐 대영제국이 해적질을 박멸하는 것으로 정책을 바꾸었을 당시, 영국 당국에서는 해방구를 제거하는 외에도 정치적 환경 또한 바꿀 필요가 있었다. 즉 해적질로 이득을 보던 부패한 관리들을 제거하고 비인가 사략행위를 근절해야 했으며, 또한 해적질과의 불법무역이 자마이카와 미국 식민지 상인들 입장에서 매력적이지 않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해적들의 해방구를 제거하는 데 있어서 우드 로저스(Woodes Rogers)나 버지니아 주지사 알렉산더 스폿우드(Alexander Spottswood) 등의 활약이 있었다. 해적들은 자신들의 장물을 사려는 사람이 사라지고, 당국으로부터 자신들을 숨겨주려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자 자연적으로 말라죽게 되었다.
19세기에 서인도제도에는 해적질이 재발하게 되는데, 이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전쟁으로 벌어진 정치적 불안정 때문이었다. 이 지역의 지리조건은 계속 해적질에 유리했기 때문에, 일단 정치적 환경이 악화되고 지상의 해방구가 발생하게 되면 해적질은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앞선 시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략선 활동은 해적질로 변질되었다. 스페인 상인들과 관리들은 미국인들이 반란군에 동정심을 갖는 데에 분개하여 암묵적으로 해적들을 지원하였으며, 이들에게 정치적 지원과 해방구를 제공하였다. 데이빗 포터 준장(Commodore David Porter)은 스페인인들의 쿠바 및 푸에르토 리코에 대한 주권을 무시하고 육지로 해적들을 추격함으로써 해적들에 대해 제대로 조치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서도, 미국과 영국의 해군작전보다는 스페인 측의 해적들에 지원을 끊겠다는 결심이 보다 더 카리브해의 해적들을 끝장내는데에 기여하였다.
바바리 해적들 또한 수백년에 걸쳐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해적질을 해 왔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강대국들은 이들을 자신들의 국력을 위한 도구로써 활용했는데, 즉 해적들이 다른 국가의 배들에 대해 하는 짓이 결국 자국에는 이익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미국 독립전쟁 이후 미국인들은 더 이상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바바리 해적들이 미국에 대한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제 1차 바바리 전쟁에서의 미국인들의 노력은 우선 절대적으로 해군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트리폴리 해안에 대해 미국 해군의 수년간의 현시가 있었음에도, 윌리엄 이튼(William Eaton)이 지상군 요소를 도입하기 전까지는 전쟁이 언제쯤에나 결판이 날 지를 알 수가 없었다. 지상과 해상 양쪽에서 위협받는 시점이 되어서야 트리폴리 파샤는 미국측의 조건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해적질의 3가지 지탱점 중에서 사라진 것은 없었으며, 그 결과 1812년 전쟁 무렵 미국 측의 반격 위험이 감소한 시기가 되어서는 바바리 해적들이 다시 미국 상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단 1812년 전쟁이 종결되자 미국은 다시 해군전단을 지중해로 파견하여 해적들을 상대하게 된다.
제 2차 바바리 전쟁은 오늘날의 소말리아 상황과 상당히 비슷한데, 전적으로 해군력에만 의존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군력이 충분히 강력하여 바바리 해적들로 하여금 조약을 수락하도록 만들 수가 있었다. 여기서 바바리 공국들과 소말리아간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전자의 경우, 해적들은 소수의 쉽게 식별할 수 있는 해방구들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고, 따라서 당시 미국측은 오늘날 소말리아에 비교하여 훨씬 용이하게 해상봉쇄를 실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바바리 공국들의 해적행위는 이후에도 정말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며, 1830년대에 프랑스가 북아프리카를 침공하여 바바리 국가들을 장악함으로써 영구적으로 해적들의 해방구를 제거함으로써만이 비로소 해결될 수가 있었다.
1830년대의 그리스 해적문제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따른 정치적 혼란의 직접적 결과였다. 일단 그리스 섬지방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이 지방의 해적질은 급팽창하게 되는데, 이는 다른 2개의 지탱점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섬지역의 지리환경은 레판트 지역의 해상교역로와 인접해 있어 해적질에 유리했고, 수많은 섬들 또한 해적들이 숨을 수 있는 해방구들을 제공해 주었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미국 모두 해군력을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갖고 있던 영국조차 그리스의 해적질을 단독으로 제압할 만한 자산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해적들의 해방구에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하게 되자, 에드워드 코드링턴 제독(Admiral Sir Edward Codrington)은 결국 그리스 정부에게 만약 해적들의 해방구들을 제거하는 데 협조하지 않을 경우 처참한 결과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세기 경 아시아에서의 해적질 또한 해군력만으로 해적들을 다스리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발상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페르시아 만 지역의 해적질이 문제가 되었을 때, 영국은 2개의 해군전단을 파견하여 해적들을 응징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다우선들을 불태우고 마을들에 포격을 가했지만, 이러한 행동들은 아랍 해적들을 저지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3번째 원정대에 상당 규모의 지상군 요소가 포함되어 해적 기지들을 공격, 점령하게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아랍 지도자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영국에 굴복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수마트라와 보르네오의 동남아시아 해적들 또한 지상의 해방구들이 파괴되거나 손상되기 전까지는 계속 활동했다. 이 시기에는 영국 측이 중요한 기술적 이점 - 즉, 증기선 - 을 갖고 있었다.
중국 해적들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활동은 증기선 기술에 의해 큰 도움을 받았다. 증기선은 돛으로 움직이는 해적선들에 대하여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해군은 중국 해적들을 완전히 박멸하는 데는 실패했는데, 이는 해적질의 3가지 지탱점 중에서 어느 하나 제거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는 해적들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으며, 오히려 영국과 미국측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국과 미국인들이 단지 절반의 대책만을 구사했기 때문에, 해적들은 결코 완전소멸되지가 않았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위력은 대단한 이점을 제공하여 해적들로 발생하는 문제의 규모는 상당히 줄일 수는 있었다.
현대 해적소탕노력은 중국에서의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이 당면했던 상황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행동할 전투력은 갖고 있었지만,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고는 그 힘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해적들을 소탕할 전투력은 갖고 있지만 이 해적질이 만연한 국가들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고는 이를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소말리아 해안에서의 연합군의 경우,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한 결정적 행동을 취하기 보다는, 해적들의 해적질에 대해 수동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동남아시아에서의 경우, 제대로 작동하는 정부들이 존재하는 나라들에서 해적들이 활동했기 때문에, 미국은 더욱 운신의 폭이 좁았다. 미국이 할 수 있는 것은 해적을 소탕하는 데에 있어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나라에게 한해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하는 것이 최대였다.
어쨌든 해적질은 육상 근원의 문제다. 먼로 대통령은 1824년 다음과 같은 3가지 대안(alternatives)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명확히 하였다: 현행범에 대한 육지로의 추격(hot pursuit ashore to capture or kill the pirates), 해적 동조자들에 대한 보복공격(conducting reprisals against those who help the corsairs), 해적 해방구에 대한 봉쇄(blockading the pirate havens). 먼로 대통령의 결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만약 지상의 해방구를 제거하거나 지상의 정치적 환경을 개선한다면, 해적들은 말라죽을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러한 지탱점들이 계속 유지된다면 어떠한 규모의 해군 순찰작전을 실시하더라도 해적들을 완벽하게 박멸할 수가 없다.
소말리아 해적들의 활동 탓에 오늘날 뉴스 매체에는 해적질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소말리아에서의 상황은 확실히 어려운 상황이다. 1990년대 초부터 이 국가를 뒤흔들어 놓은 정치적 혼란이 해적질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현 상황에 대하여 몇가지 잠재적인 해결책들이 있지만, 이들 중 어느 하나도 쉬운 것이 아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1990년대 초 소말리아에서의 사건들이 기억나는 한, 소말리아에 개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결국 먼로의 3가지 대안을 살펴볼 수 밖에 없다. 미국과 기타 해양국가들이 유엔의 후원 하에 해적들을 육지까지 추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는 것이다. 아랍 해적들에 대한 영국의 사례에서처럼, 소말리아인들은 해적질을 지속하는 것이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프랑스는 이러한 방식을 시도하여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은 또한 해적들을 돕는 자들에 대한 보복을 할 수가 있다. 미군은 해적들의 기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으며, 또한 해적질로 이득을 얻는 자들이 누구인지도 식별할 수가 있다. 이번에도 목표는 소말리아인들에게 해적질이 지속하기엔 너무 위험한 일임을 가르쳐주는 데에 있다. 이러한 방식의 행동은 당연히 상당한 정치적 뚝심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보복 과정에서 무고한 소말리아인들도 상당수 희생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주요 해적 항구들에 대한 봉쇄를 감행할 수가 있다. 주요 항구들에 대해 봉쇄를 실시하고 밖으로 나가는 모든 선박들에 대하여 임검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봉쇄라는 방책은 장기간을 요하는 대책으로서, 지속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소말리아의 해적질은 상대적으로 조야한 면이 있어서, 쉽게 작전장소를 다른 항구로 옮겨 해적질을 재개할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대책은 물론 소말리아에 안정적인 정부가 세워지도록 돕는 데에 있으며, 이 정부가 해안을 순찰하고 해적들을 소탕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책은 최소한 여러 해가 지난 뒤에나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제사회가 소말리아의 해적질을 근절하고자 원하기만 한다면, 이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먼로 대통령의 정책이 공격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 일이다. 즉 지상까지 해적들을 추격해야 하고, 해적들을 돕는 자들에 대해 보복해야 하며, 주요 해적 해방구들을 봉쇄함으로써, 해적들로 하여금 지난 수년간 진화해 온 지원 인프라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책은 어느 정도의 국제적 협력과 결단을 필요로 하지만, 이는 사실 쉽게 얻기가 힘들다. 이는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그 대신 아마도 현상유지(status quo)를 하는 방안, 즉 이 지역에 임무부대를 주둔시키고 소말리아 해적질을 억제하되 실제 근원을 치료하는 것은 미루는 것을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대책 이상을 실시하리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공격적인 대책이든 방어적인 대책이든 그 비용이 이득을 상회하기 때문이다. 비록 소말리아 해적들이 어느 정도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이들이 갈취한 비용은 전체 세계 무역 금액에 비교하면 푼돈에 불과하다. 재정적 측면에서 방어수단을 설치하는 데 대한 합리성이 발견되지 않는 한, 선사들은 비싼 돈을 들여 방어수단을 설치하느니 차라리 확률과 보험을 믿고 해적들의 공격을 감수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상선들의 선장과 선원들이 이렇게 해적들에게 잡힐 위험을 감수할 태세가 되어 있다면, 해당 국가들 또한 자국의 국익에 심각한 위협을 주지 않는 귀찮은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자국의 자원과 명성을 위험한 곳에 던져넣지는 않을 것이다.
부록 A
1982년 12월 10일 유엔 해양헌장
(생략)
부록 B
배와 보트의 종류, 군함의 등급
(생략)
저자소개 (About the Author)
제임스 웜웰(James Wombwell)은 2007년 10월에 전투연구소에 입사하였다. 미 예비해군(Naval Reserve)의 퇴역대령이며, 마지막 근무지는 워싱턴 DC의 해군역사센터(Naval Historical Center)였으며, 해군 역사가로서 현대 해군작전에 대한 문서작업을 실시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그는 여러 곳에 파견된 경험이 있는데, 벨기에 몽스의 유럽연합군 최고사령부, 바레인의 미해군 중앙군 사령부,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의 해군 특수전 사령부 등이었다. 현역시절, 수상함 장교로서 USS Fiske (DD-842), USS Texas(CGN-39) 등에서 근무하였으며,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수상전 장교반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 웜웰은 반더빌트 대학교에서 학사를, 멤피스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멤피스 대학교와 캔사스 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 바가 있다. 최근 전투연구소에서는 웜웰의 논문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해지원 과정에서의 미육군의 활동(Army Support During the Hurricane Katrina Disaster)'을 출간한 적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