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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할크 강 전투 1223 (The Kalka River 1223) - 시대적 배경

박용수 2014. 10. 27. 15:14

 다음은 Osprey Publishing 사의 Campaign 시리즈 중의 하나인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를 (무단으로 ^^;) 번역한 것입니다. 총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양이 많아 챕터별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역사에 대한 전문 훈련도 받지 않은데다 부주의하기도 하여, 단순 번역이지만 크고 작은 오역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불확실한 경우 가능한 ()안에 원문을 인용하였으므로 참조하거나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역자 주 [1] : 그림의 Guo Zui에 대한 검색 결과 (http://www.chinahistoryforum.com/index.php?/topic/19103-general-guo-zui/) 실제 표기는 Guo Ziyi가 맞다라는 설명이 있으며, Guo Ziyi를 다시 검색하면 (http://en.wikipedia.org/wiki/Guo_Ziyi) 안록산의 난과 위구르, 티벳에 대한 원정에 참가한 당나라 장군이라고 나옵니다. 한자로는 곽자의(郭子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자 주 [2] : Li Gonglin에 대한 검색 결과(http://en.wikipedia.org/wiki/Li_Gonglin) 송나라 시대의 화가로 이공린(李公麟)이라고 합니다.

 역자 주 [3] :  Polovtsian에 대하여 검색한 결과 (http://en.wikipedia.org/wiki/Cumans) 러시아어로 Половцы - Polovtsi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방식으로 읽으면 '폴롭티안' 쯤으로 읽어야 할 테고, 러시아어 방식으로는 '뽈라브찌', '폴로베츠' 쯤으로 읽히겠군요. 네이트온 지식인 등에는 폴로베츠로 기술한 글도 있긴 한데, 여기서는 일단 영어 표기를 중시하여 '폴롭티' 사람들 내지는 '폴롭티'인 이라고 표기하겠습니다.)

 


 

 시대적 배경

 

 

 몽고가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기 전인 13세기를 돌아보면, 이 시기 역시 결코 평화롭거나 조용한 시기는 아니었다. 유럽에서 아시아에 걸쳐, 왕, 왕공, 황제, 지역 영주나 총독(kings, princes, emperors and even local barons or governors)에 이르는 크고 작은 세력들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러시아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왕공들끼리 또는 주변 세력들과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주변 세력으로는 동쪽에 볼가 불가인(Volga Bulgars)들이 있었고, 동북쪽에는 핀란드 부족(Finnish tribes)들이, 서쪽에는 폴란드인(Poles)들과 헝가리인(Hungarians)들이, 남쪽에는 폴롭티인(Polovtsians)[3]들이 있었다. 폴롭티인들은 킵차크(Kipchaqs) 혹은 쿠만(Cunans)이라고도 불리는 느슨한 터키 부족 연맹(federation of Turkish tribes)을 이루게 된다. 폴롭티인들 사이의 분쟁에는 종종 여러 국가의 군주들이 개입하곤 했었는데, 여기에는 그루지아(Georgia), 압하지아(Abkhazia), 아르메니아(Armenia),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등이 포함된다. 또한 크리미아 반도(Crimean peninsula)의 탐스러운 무역 거점들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으로 인하여 흑해 건너편의 아나톨리아(Anatolia) 지방에 있는 셀주크 터키(Seljuk Turk)의 군주들 뿐만이 아니라 서유럽의 제노바(Genoese)인들과 베네치아(Venetians)인들까지도 끌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트란스옥사니아의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였던 사마르칸트, 이곳은 몽고 침략 과정에서 최초로 함락당한 여러 이슬람 도시 중의 하나였다. 이 초기 중세 시대 도시 유적은 오늘날에는 버려진 지역에 불과하지만, 진흙과 벽돌로 만든 대규모 요새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후기 중세시대에는 또다른 정복자인 티무르로 인해서 다시 유명해지게 된다. 제베 노욘과 수부타이 바하두르가 할크 강 전투를 위해 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

 

 한편, 이슬람 세계 역시 결코 평화롭지는 않았다. 호라즘(Khwarazm) 지방은 트란스옥사니아(Transoxania)의 아랄해(Aral Sea) 남쪽 연안가에 위치한 지역으로, 다소 고립되어 있지만 한때는 부유했던 곳으로서, 여기에 한 야심만만한 왕조가 나타나게 된다. 호라즘 샤(Khwarazmshahs;호라즘의 국왕)들은 이제는 분열되어 유적처럼 되어 버린 대 셀주크 제국(Great Seljuk state)의 영토 위에 일어섰고, 그 세력은 트란스옥사니아에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거대 지역에 이르렀다.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던 셀주크 터키의 왕공들(remaining Seljuk Turkish princes)과 그 외의 다른 군소 국가들(other smaller succesor states)은, 난폭한 십자군 국가들(Crusader States)과 싸워야 했을 때를 제외하면 자신들끼리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없다. 극동 지역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국 대륙의 3개 국가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들 모두 중앙아시아와 몽고에 있는 이웃들에 대해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건 평화 협정이 조인되어 잠시 조용해지는가 하면, 다시 다른 전쟁이 발발하곤 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그 반대가 되는 일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13세기 유라시아 지역의 정세)

 

 유럽과 중동에서 이러한 반복적이고 파괴적인 전쟁이 마치 정상적인 국제 관계처럼 지속되고 있던 이 시기, 중국 북방의 고비 사막(Gobi Desert) 변방에서는 새로운 세력인 몽고(state of the Mongols)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13세기 이전의 국제 정세에서는 그리 크게 고려되지 않던 족속들이었지만, 이들이야말로 곧 유럽과 아시아의 수많은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할 족속들이었다.

 

 (중앙아시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의 거대한 초원으로만 이뤄진 지역이 아니다. 초원 자체도 그 성질이 다양하거니와 끝없는 시베리아 삼림의 남쪽에는 산악지대와 삼림지대가 펼쳐져 있기도 하다. 또한 사진에서의 카라 쿰(Kara Kum) 사막과 같이 황량한 지역도 존재한다. 그러나 중세에는 터키와 몽고 부족들이 양과 다른 동물들을 치며 어느 곳이서건 활개치던 시절이 있엇다. 이 족속들은 실크로드로 불리는 일련의 대상 무역로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실크로드는 중국과 중동, 유럽을 이으면서 그 무역로의 일부라도 차지한 세력에게는 상당한 부를 안겨다 주었다.)

 

 1206년, 몽고족의 모든 지도자들이 모인 족장회의, 즉 쿠릴타이(quriltai)에서, 보르지긴 부족(Borjigin clan)의 테무진(Temuchin)이 최고 지도자, 즉 대칸(Supreme Khan)으로 선출되었다. 테무진은 곧 징기스칸(Genghiz Khan)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는데, 그 의미는 '세계의 지배자(Universal Ruler)'라는 뜻이다. 이로써 생긴 새로운 몽고 국가의 전사들은 바야흐로 말 위에 올라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누비게 된다. 무적의 몽고군대에 저항했던 러시아를 포함한  많은 국가들에게는 잔인한 운명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중앙아시아의 터키와 몽고 족속들의 상당수는 스텝 초원지대에 돌로 된 석상을 세웠다. 대부분은 전사들이나 족장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이 사진의 것은 동부 스텝지역에 있는 것이지만, 우크라이나와 불가리아와 같은 서쪽 끝에서도 동일한 것들이 발견되고 있다.)

 

 13세기는 키에프 러시아(Kievan Russia)의 길고 영광스런 역사의 끝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유럽 동부 가장자리에 위치했던 광대한 영토는 산산히 흩어져 여러 개의 자치 공령(self-governing principalities)들이 되어 있었다.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키에프 시(city of Kiev)는 이미 쇠퇴하여 더 이상 러시아 세력의 중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실, 키에프는 러시아 민족의 종교적 수도 역할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1169년, 러시아 동부 지역의 강력한 세력가였던 블라디미르 공(Prince of Vladimir) 안드레이 보고륩스키(Andrei Bogolyubskiy)의 군대가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몇 년 지나지 않아, 키에프는 스몰렌스크 공(Price of Smolensk)을 포함한 러시아의 반목하는 여러 군주들의 군대에 또 다시 짓밟혔고, 1203년에도 류릭 로스티슬라비치(Ryurik Rostislavich)에 의해 유린당했다. 이로 인해 키에프 시는 다시 회복하여 그전의 명성과 세력과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키에프가 정치 경제적으로 몰락하면서, 다른 러시아 도시들이 일어서 경쟁하면서 이 옛 중세 러시아의 중심지를 능가하고자 하였다. 가장 주목할만한 도시로는 라잔(Ryazan)과 동부의 블라디미르(Vladimir)가 있었다. 한편 러시아 북방과 서방에 있었던 폴로스크(Polotsk)와 대 노보고로드(Great Novgorod)는 최소한 정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다른 러시아 지역과 분리되게 된다.

 

 (위구르 터키 족장 (Uighur Turkish chieftains)들이 중국 장군인 Guo Zui(곽자의(郭子儀)?)[1]에게 항복하고 있는 그림이다. 중국 화가인 Li Gonglin(이공린(李公麟)?)[2]이 11~12세기 무렵에 그렸다. 멀쩡하게 입은 중국 장수와, 야만적으로 차려입은 스텝 유목민들과 말들의 모습이 어쩌면 과장되게도 대조되어 있다. 그러나 이 중국 화가는 위구르인들이 터키나 몽고족 족속들과 마찬가지로 빗질이나 씻는 데에는 신경쓰지 않은 야만인이라는 점은 잘 표현하고 있다. (중화민국 고궁박물관 소장))

 

 한편 보통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별 탈 없이 지속되었다(continued much as usual). 몽고 침략이 있기 전의 세기는 사실 중세 러시아 문학과 예술, 건축에 있어서 일종의 황금 시대였다. 자라나는 마을과 도시마다 아름다운 새 성당들과 궁전들이 생겨났고, 대부분의 경우 토사와 나무로 만들긴 했지만, 소수 돌과 벽돌로 만든 성벽이 지어지기도 했다. 교외 지역은 경작되고 있었고, 성벽 주위에는 과수원들이 늘어서 있었다.

 

 여러 러시아 왕공들 사이의 살인적 전쟁(internecine wars)들은 대개 짧은 기간 동안만 벌어졌고, 제한된 사상자만을 냈으며, 또한 매우 짧은 기간의 휴전으로 이어지곤 했다. 크고 작은 왕공들간의 충성의 맹세(Oaths of loyalty)들은, 각 왕공과 그들의 상급 가신(senior followers)들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Christian Cross)에 입맞춤하는 것으로 성사되었으며, 이런 행사는 정치적 합의나 휴전 협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다소 짧은 기간 동안에는 이런 엄숙한 선서가 잊혀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따라 많은 아름다운 성당들이 파괴되거나 불탔고, 마을의 과수원들은 약탈당하거나 파괴당했으며, 주변의 경작지는 짓밟혔다. 이러한 반복된 파괴에 대한 대응으로, 끈질긴 러시아 인민들은 다시 짓고 다시 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야 밖에서는 파멸의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폭풍의 첫번째 벼락은 러시아 군대가 처음으로 새롭고 공포스런 적의 힘을 느끼게 되는 할크 강(Kalka River) 제방 지역에서의 무시무시한 전투를 통해 떨어지게 된다.

 

 (몽고의 침략)

 

 러시아의 왕공들과 참모들은 당연히 모르고 있었겠지만, 몽고의 지배자 징기스칸은 자신의 동쪽과 남쪽에 위치한 아시아인들과 오랜 기간 전쟁을 해 오고 있었다. 한편으로 위대한 칸은 서쪽 변경을 강화하는 데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야심만만한 라이벌이 있었다. 그 라이벌은 바로 호라즘 샤(Khwarazmshah; 호라즘 국왕) 무하마드(Muhammad)였다. 그는 이미 동부 이슬람 세계의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 징기스칸과 무하마드 사이에는 아직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중립지대들이 남아있엇다. 이 영역은 중가리아(Dzungaria)에서 시작하여, 발카시 호수(Lake Balkash) 동부, 그리고 남부 우랄 산막(Ural Mounhtains)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적대적인 지역들은 유럽과 중동, 중국을 있는 부유한 대상 무역로들을 이어주고 있었다. 이 다양한 통로를 이용하던 상인들은 매우 다양한 상품들을 운반했고, 그 상품들은 하나같이 매우 고가의 것들이었다. 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중국의 비단이다. 또한 이런 상인들은 길가의 지역들에 상당한 돈을 지불하곤 하였는데, 예를 들어 세금을 낸다던가, 과태료, 혹은 무역로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에 대한 상납금 따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아래에서 실크 로드(Silk Road)의 상황은 결코 평화롭거나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상인들은 지역 지배자들에게 불의를 겪거나 도적들에게 습격당하곤 했다.

 

( 북 코카서스 지방의 부식된 칼의 손잡이. 약 13~15세기의 물건임. 코등이(quillons; 손가락 보호대)가 은으로 상감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무기는 알란인(Alans), 이아시아인(Iasians), 코소기인(Kosogians)과 같은 코카서스 지역 민족들은 물론이고, 스텝 지역의 폴롭티안 킵차크 터키인들과 몽고 정복자들도 사용했다. (러시아 상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종교적 열정 역시 중앙아시아 지역에 추가적인 불안 요소를 더하는 것이었다. 호라즘 샤 무하마드에게는 무슬림의 예언자(Muslim Prophet)라는 칭호가 붙어있었다. 또한 알-가지(al-Ghazi)라는 칭호도 갖고 있었는데, 그 의미는 '이교도를 무찌르는 전사'라는 뜻이다. 사실 무하마드는 그다지 광신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동쪽의 이웃인 몽고의 세력이 강대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진정한 가지(ghazi)는 이슬람의 방어를 위해 싸웠으며, 중앙아시아의 비 이슬람 내지는 몽고 기원의 국가가 트란스옥사니아의 부유한 이슬람 지방을 위협했던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이 지역들은 가끔씩 이교도의 손아귀에 함락당하곤 했다 - 물론 무슬림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다. 호라즘의 지배자와 그의 신민들에게 있어, 징기스칸과 그 부하들은 원시적이면서도 위험한 무신론자들이었고, 이제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1216년, 징기스칸의 몽고인들은 오늘날 카자흐스탄(Kazakhstan)에 해당하는 이르기츠 강(Irgiz)에 도달한다. 그들 앞에는 징기스칸이 속해있던 보르지긴 부족의 오랜 적이었던 메르키트(Merkit) 부족이 달아나고 있었다. 이르기츠 강은 아랄해 약간 북쪽에 있었으며, 호라즘 샤 무하마드의 입장에서는 자국령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자국의 세력권 내에 있다고 믿고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무하마드는 몽고인들에 대항하여 약간의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격퇴당했다. 한편, 메르키트족은 동부 혹은 '야생의(wild)' 폴롭티인이라 불렸던 킵차크 터키인들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된다. 킵차크 터키인들과 서부 혹은 '문명화된(civilised)' 폴롭티인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동쪽으로 아랄해에서부터 서쪽으로 다뉴브 강(Danube River)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 지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즉, 이 폴롭티인들은 오늘날의 서부 카자흐스탄, 남부 러시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루마니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은 다수인데다, 강한 군사력에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민족이었다. 러시아, 폴롭티(Polovtsy), 비잔틴, 헝가리, 서구 유럽에서는 이들을 쿠만(Cuman)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여러 부족들이 모여 다소 느슨한 2개의 연방을 이뤘다 - 동부 혹은 야생의 폴롭티인과 서부 혹은 문명화된 폴롭티인의 2개이다. 대다수는 종교가 없었지만, 일부는 이슬람을 일부는 유태신앙을 받아들였다. 지배층의 경우에는 일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도중이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 터키 폴롭티인(Turkish Polovtsian)들은 몽고인에 있어서 군사적으로 무시못할 상대였으며, 숫자 상으로나 군사 역량에 있어서나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부 초원의 이들 터키 족속들은, 킵차크-폴롭티-쿠만의 정체성은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적어도 숫자상으로는 몽고 기원의 금장한국(Golden Horde; 킵차크한국, 金帳汗國)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대 몽고 원정이 종료되고 징기스칸의 세계 제국이 여럿으로 분할 된 다음에 벌어진 일이다.

 

 1220년, 징기스칸은 병력을 동원하여 호라즘으로 진격한다. 호라즘 역시 자체적으로 잘 훈련되고 잘 준비된 대규모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정예 부대들은 소위 굴람(ghulams)이라고 불리는 노예 출신의 전문 병사들로부터 선발되었는데, 이들은 십자군들에게는 맘루크(mamluks)라고 알려진 바 있다. 호라즘의 지배자 무하마드에게 불행하게도, 이들은 수많은 요새와 무장도시들의 수비대로 분산되어 있었다. 사실 무하마드는, 자체적인 반란을 더욱 두려워하여 부하 지휘관들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실책이 된다.

 

( 러시아 도시 블라디미르 시의 드미트리 소보르(Dmitri Sobor) 성당의 외곽 장식. 1193~9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디자인은 필사문서의 삽화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여기에는 사진의 보병 궁수가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의 형상이 포함되어있는 특징이 있다. 이 사진의 활은 이상하리만치 작은데, 합성궁 (weapon of composite)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호라즘의 거대한 요새들은 제국 이곳 저곳에 뻗쳐 있었으며, 이슬람 트란스옥사니아 최고의 군사 건축가들에 의하여 설계되고 건설된 것들이었다. 이들은 가히 세계 최강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새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하나 둘씩 함락되어 나갔다. 거대 도시인 부하라(Bukhara), 사마르칸트(Samarqand), 헤랏(Herat) 조차도 항복하여 몽고 군대는 곧 동부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까지 침입하게 되며, 이란에까지도 침공하게 된다. 한편, 별로 총애받지 못하고 있던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 알딘(Jalal al-Din)은 일부 정예 호라즘 병사들을 이끌고 남동 아프가니스탄과 북부 인도로 퇴각했다. 군사적으로 이곳은 호라즘의 가장 강력한 변경 지대였으며, 잘랄 알딘 역시 훌륭한 지휘관이었지만, 1221년 인더스강 전투에서 완패하고 말았다.

 

 군대와 왕좌를 잃은 호라즘의 지배자 무하마드는 이제 서쪽으로 도망치게 된다. 황량하고 고립된 카스피해 남단의 마잔데란(Mazanderan) 지역으로 목숨을 구하고자 달아났으나, 그 뒤에는 수부타이 바하두르(Subodei Bahadur)와 제베 노욘(Jebei Noyon)이 이끄는 20,000명의 몽고군이 뒤쫒고 있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부하들에게 버림받은 채, 무하마드는 아스타라(Astara) 인근의 작은 섬에 숨어들어갔다. 이곳에서 1221년 2월, 무하마드는 늑막염으로, 혹은 절망감으로 세상을 떠난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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