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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할크 강 전투 1223 (The Kalka River 1223) - 양측 군대의 구조

박용수 2014. 10. 27. 15:18

 

 다음은 Osprey Publishing 사의 Campaign 시리즈 중의 하나인 'Kalka River 1223 - Genghiz Khan's Mongols invade Russia' 를 (무단으로 ^^;) 번역한 일부입니다. 총 9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양이 많아 챕터별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양측 군대의 구조 (Opposing Plan)

 

 

 

몽고군의 구조 (The Mongol Plan)

 


 몽고군의 일반적인 전투 대형에는 쟈건스(dzaguns)라 불리는 5줄의 백인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초 2개 열은 중기병으로서, 갑옷을 입고 칼로 무장한 병력들이었다. 그 뒤의 3개 열은 경기병으로 이뤄졌다. 수부타이(Subodei)와 제베(Jebei)가 서부 스텝지역으로 데려간 군대는 일반 몽고군에 비하여 무장 상태가 더 양호했다. 이는 직전의 이란과 코카서스 지역에서의 작전이 성공한 탓이다. 이 지역에서 몽고 전사들은 대량의 양질의 무기들을 획득했을 것이며, 이는 보통의 몽고 기병들이 기존에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부타이 군대에서 중기병의 비중은 통상적인 경우에 비해 높았을 것이고, 어쩌면 전체 기병의 2/3 이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투 중, 몽고 기병 대열은 별개 부대들로 이뤄진 바둑판 모양으로 구분되었다. 앞열의 중기병 부대들 사이에는 넓은 공간이 존재하여, 몽고군 전열 깊숙한 곳에서부터 기마 궁수들이 뛰쳐나올 수 있도록 했다. 만약 최초 공격이 실패하고 적이 반격을 실시하면, 갑옷으로 보호받는 몽고 중기병들이 공격을 재개하는 동안, 경무장한 몽고 기마궁수들이 후퇴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역시도 실패할 경우에는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할 수 있어서, 적은 결국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 아랍 역사가는 몽고인들의 전투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들은 사자의 용기와 사냥개의 인내, 학의 신중함, 여우의 교활함, 까마귀의 선견지명, 늑대의 난폭함, 싸움닭의 열정, 암탉의 방호성, 고양이의 예민함, 멧돼지의 맹렬함을 갖고 있다'('They had the courage of lions, the patience of hounds, the prudence of cranes, the cunning of foxes, the long sightedness of ravens, the wildness of wolves, the passion of fighting cocks, the protectiveness of hens, the keenness of cats, and the fury of wild boars'). 할크 강(Kalka River) 전투 이후 몽고인들은 심리적인 우위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러시아인들이 몽고인들을 러시아인들의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보낸 고그와 마고그(Gog and Magog; 성경, 코란, 기타 여러 종교 전설에서 나오는 괴물 내지는 종족으로서 아마게돈 등과 연관됨)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구조 (The Russian Plan)


 중세 러시아 군대는 통상적인 전투 대형을 채택했으며, 중기병인 기사(knight)들을 중심으로한 대부분의 중세 군대들과 마찬가지로, 배치에 넓은 지역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군대가 산악 지역이나 좁은 계곡에서 싸운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예를 들어 한 왕공의 군대가 강의 높은 제방에 진지를 구축하게 되면, 다른 상대방은 싸우기 위해서 그 왕공에게 개활지나 보다 낮은 제방으로 이동하라고 빌어야 했다. 실제로 1180년에 두 러시아 왕공들간의 싸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만약 약한 측이 숲속에 자리잡게 되면 적의 공격으로부터 대단히 잘 보호받게 된다. 수즈달 공령(principality of Suzdal)의 군대는 전투에서 다른 공령의 군대에 비해 야전 축성을 더 빈번하게 이용했다. 이러한 방어 구조물에는 단순한 가지 울타리도 있었고, 뾰족한 말뚝을 땅에 박은 것도 있었다.

 

 전투 전에 부대는 통상 세 부대로 나뉘어졌다. 가장 강력한 부대는 지휘관과 함께 중앙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두 부대는 양쪽 날개를 이루었다. 고대의 삽화에는 각각의 부대가 최소한 공격 중에는 쐐기 대형을 이루었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이 쐐기 대형의 정확한 구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선두 병력의 인명피해가 다른 곳에 비해 더 클 것임은 자명하다.

 

 

 (중세 러시아 예술은 비잔틴 제국, 스칸디나비아, 초원 지대의 민족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중동의 이슬람권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이 청동 사발과 같은 금속 공예품에 잘 나타나 있다. 다만 위에 있는 기병의 경우 몸을 구부리고 랜스를 겨드랑이 바로 아래에서 잡고, 다리는 쭉 편 채로 긴 박차를 사용하는 전형적인 유럽 방식으로 말을 타고 있다. (상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러시아 기병은 서유럽 기병에 비해 장갑화가 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초원 지대의 유목민들과의 경험에 따라 러시아인들은 중기병에게 속사 기마궁수의 보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1세기 경부터는 러시아 군대에도 기마 궁수가 출현한다. 기마 궁수들은 때때로 적군의 앞열을 따라 달리면서 화살을 날림으로써, 적군이 뛰쳐나와 다른 러시아군 부대에게 측면을 노출시키도록 유도했다. 한편 보병은 적의 후방을 공격하거나 숙영지를 공격했다. 위장 퇴각이나 매복 공격도 사용되었으며, 1150년에 이쟈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 공(Prince Izyaslav Mstislavich)은 갈리치아의 블라디미르 공(Prince Vladimir of Galicia)를 속이기 위해 캠프 파이어를 포함한 모든 것이 완비된 위장 숙영지를 만들기도 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군대를 계속 효과적으로 통제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왕공들과 휘하 보이보데(voivode) 지휘관들은 사전에 전체 전투 계획을 수립했다. 정예 근위 부대들은 일반적으로 사전에 이 계획에 대해 통보 받았다. 주력 부대의 공격 신호는 통상적으로 전투 나팔이나 북으로 내려졌다. 또는 왕공의 친위부대나 왕공 자신이 전진하는 것이 공격 신호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폴롭티인들과 싸우는 경우처럼 쉽게 구분되는 외국인과 싸우는 경우가 아니라면 적아 식별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였다. 무기류 역시 노획과 재노획을 반복했기 때문에 적아 부대간 차이점이 그리 많지가 않았다. 전투의 혼란 속에서 전사들이 적군과 아군을 혼동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결국에는 여러 장식으로 치장된 군기(banner)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왕공들은 부하들과 지휘관들이 잘 알고 있는 각자의 고유한 문양이 담긴 군기를 갖게 되었다. 이 군기는 전투 후에 근위대의 집결 장소를 표시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군기는 지휘관의 위치와 군대의 중심의 위치를 표시했으며, 전군의 핵심부가 되었다. 군기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면서 종종 군기에 마법의 힘이 담겨져 있다고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전투 중에 군기가 탈취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으며, 군기를 탈취한 자가 잘 이용할 경우 군대 전체를 혼란으로 몰고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1136년에는 올고비치(Ol'govichi)가 야로폴크(Yaropolk)의 군기를 이용하여 야로폴크 군의 근위대를 사로잡은 일도 있고, 1153년에는 이쟈슬라브 므스티슬라비치가 같은 방법으로 갈리치아군 기병대를 기만하기도 했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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