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스크랩] [번역] 이아 드랑 계곡 작전 결과 보고서 1965 (After Action Report, IA DRANG Valley Operation) (1)

박용수 2014. 10. 27. 15:22

 < 원문 출처 : After Action Report (http://www.lzxray.com/documents/aar-xray.pdf)  >

 

 이번에 번역하는 글은 1965년 이아 드랑(Ia Drang)계곡 전투에 대하여 당시 미군 지휘관이었던 할 무어 중령(전투 당시 계급)이 작성한 작전 결과 보고서입니다. 여기서 이아 드랑 계곡 전투는 미군이 헬리콥터를 전투에 적극 활용한 공중기동(Air Mobile)사단의 첫번째 실전 사례이자, 영화 "We were Soldiers"로서 다시금 유명해진 전투이기도 합니다.

 

 < 역주 참고문헌 :

 [1] U.S. Military M274 Truck, Platform, Utility 1/2 Ton, 4X4 (http://en.wikipedia.org/wiki/U.S._Military_M274_Truck,_Platform,_Utility_1/2_Ton,_4X4)

 [2] Air Rocket Artillery Units In The Vietnam War(http://ezinearticles.com/?Air-Rocket-Artillery-Units-In-The-Vietnam-War&id=1095240)
 [3] Aerial Artillery (http://sill-www.army.mil/famag/1968/JAN_1968/JAN_1968_PAGES_50_58.pdf)

 [4] Attack helicopter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helicopter) >

 

 

 


 이아 드랑 계곡 작전 결과 보고서 1965 (After Action Report, IA DRANG Valley Operation)

 

 


1965년 12월 9일


주제 : 1965년 11월 14일-16일에 벌어진 제 7기병연대 1대대의 이아 드랑 계곡(IA DRANG Valley)에서의 작전 결과 보고서.

 

수신 : 제 1 (공중기동) 기병사단 3여단장 (Commanding Officer 3d Brigade 1st Cavalry Division(Airmobile)), 군사우체국(APO) US Forces 96490


 

I. 개요

 본인은 본작전 당시 제 7기병연대 1대대의 지휘관이었음. 1965년 11월 23일, 본인은 진급하여 후임자에게 대대를 인계하였음.

 

 

II. 배경

A. 11월 10일, 대대는 BR476476 지점의 안케(An Khe) 기지에서 CV-2 수송기를 이용하여 전방 비행장으로 이동하고, 플레이쿠(Pleiku) 남쪽의 ZA198340 지점의 집결지점으로 이동하였다. 모든 중대들이 이곳에서부터 수색 및 격멸 작전(search and destroy operation)에 투입되었으며, 모두 UH-1D 헬리콥터를 통해 셔틀식으로 수송되었다. 동 작전이 벌어진 지역은 플레이 메(Plei Me) 동쪽 지역으로, ZA2007에서 ZA7606 지역 일대에 해당한다. 우리는 12일까지 집중 수색(saturation patrolling)을 실시하였으나 A중대에만 가벼운 접촉이 있었다. 동 기간에는 민사작전 역시 실시하였는데, ZA237073 지점에 있는 인구 200명 가량의 몬태나족(Montagnard) 마을에 의약품과 USOM(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미 국무성 해외원조처) 식량을 원조하였다. 12일에는 부사단장이 대대에 방문하여, 여단장에게 대대를 이아 드랑 계곡으로 투입하는 데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를 경고로 받아들이고 도상 연구를 실시하였다. 11월 13일, 여단 명령에 따라 대대는 플레이 메 남쪽 및 남서쪽 지역의 새로운 작전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주간 내내 중대 기지 외곽으로 집중 수색을 실시하였으나 아무런 접촉도 없었다. 15:00시 이후에는 B중대가 공중수송(airlift)으로 여단 지휘소(CP)로 이동하여 지휘소 경계 및 여단의 신속대응부대(immediate reaction force) 임무를 수행하였다. 18:00시경에 배치가 완료되었다.

 

B. 약 17:00시 경, 여단장과 본인은 플레이 메 남쪽에 있는 A 중대 지휘소(CP)를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여단장은 본인에게 추퐁 산(CHU PONG Mountain) 북쪽에 있는 이아 드랑 계곡에 대하여, 다음날 아침 일찍 헬기를 통한 강습 공격을 실시하여 15일까지 수색 및 격멸 작전을 실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여단장은 지도 상을 가리키며 작전지역을 지목하였고, ZA023032의 LZ FALCON(착륙장 '독수리')에 배치된 105mm 곡사포 2개 포대로써 지원하겠다고 하였다 - 이 중 한개 포대는 우리의 공격 이전인 14일 일찍 플라이 메로부터 공중 수송될 예정이었다.

 

C. 본인은 플레이 메 부근의 본인의 지휘소로 복귀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참모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3여단 사령부 및 헬리콥터 부대로부터 추가 세부사항들을 수령하였다; 그리고 휘하 부대 지휘관, 참모, 지원부대에게 준비 명령(warning order)을 하달하였다. 11월 13일 22:00에는 실제 공중 정찰을 제외하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여기에는 플레이 메에 파견된 B 중대를 아침 일찍 공중 수송으로 복귀시키도록 준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A중대와 C중대 중대장에게는 여명과 동시에 각자 주둔지에서 가장 큰 승차지대(pick-up zone)로 각각의 부대들을 집결시키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모든 주요 지휘관 및 참모 장교들에게 여명과 동시에 실시할 공중 정찰에 참가토록 계획하였다. 작전 명령에 대해서는 본인의 지휘소(CP)에서 08:30에 발령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D. 이 시점에서 작전에 참가했던 본인 휘하 중대들의 유효 병력 규모("fighting" strength)는 다음과 같다:

 

 

작전 투입 인원

편제 인원

 

장교

사병

장교

사병

A중대

5

115

6

164

B중대

5

114

6

164

C중대

6

106

6

164

D중대

4

76

5

118

 

 병력이 미달된 가장 큰 원인은 말라리아 및 만기 제대(ETS discharge) 탓이다. 또한 경계병, 환자, 징계 처분, 기지 주변 개발 업무 등으로 각 중대당 3-5명 가량은 안케의 기지에 남아야 했다. 외출외박(R and R; Rest and Recuperation)중이거나 이를 준비하고 있던 인원도 8-10명가량 있었다.

 

 

 

III. 11월 14일의 작전

 

A. 공중정찰 및 결과

 

 (1) 11월 14일의 새벽은 맑고 화창했다. 06:30분 여명이 밝아온 직후, B중대는 플레이 메의 대대 지휘권 안으로 복귀했고 돌격 중대(assult company)로서의 임무를 위해 최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B중대를 수송했던 치누크 수송헬기들은 사전 계획된 대로 LZ FALCON에 있는 제 21 포병연대 1대대 A중대를 향해 출발했다. 공중 정찰에 참가할 인원들이 집결했고, 공중 정찰의 목적과 비행 경로, 살펴보아야 할 사항들에 대하여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했고, 이어 우리는 2대의 건쉽의 호위를 받으며 2대의 UH-1D를 타고 출발했다. 비행경로는 첨부 요도 A (Tab A)에 나타난 바와 같다. 우리는 4500 피트 고도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경로를 택했다; YA845255 지점의 둑코(Duc Co)를 지나 북쪽 지점에서 5분간 머물렀고, 전반적으로 같은 고도 및 경로를 통하여 플레이 메로 돌아왔다. 공중 정찰에 참가한 인원은 대대장과 작전장교(S-3), 대대 포병 연락장교, 제 21포병연대 1대대 A포대장, 돌격 중대(Assault Company)였던 B중대 중대장, 제 9기병연대 1기병대대(Squadron) C기병중대(Troop) 정찰반장(Scout Section Leader), 제 229 강습헬리콥터 대대 A중대장(제 1특수전 그룹 제 7특수전대 항공 중대)(the commanding officer, Company A, 229th Assault Helicopter Batallion(Avn Co, 7th Special Forces, 1st Special Group))이다.

 

(2) 정찰에 참가한 인원들은 공중 정찰을 하는 동안 이아 드랑 계곡의 입출입에 사용할 착륙장으로 사용할만한 개활지 몇 곳을 점찍었다. 08:15경 정찰에서 복귀하자마자, 우리는 대대로부터 작전지역을 명시한 서면으로 된 단편 명령(Frag Order)을 수령하였다. 이 지역은 첨부지도(Tab B)에 도시하였다. 이후 본인은 착륙장(LZ)으로 사용할 곳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토론 결과 3군데 - 탱고(TANGO), 엑스레이(X-RAY), 양키(YANKEE) -가 적당한 착륙장으로서 제시되었다 (Tab B 참조). 일단 탱고는 너무 좁아서 주 착륙장으로서는 곤란하다는 결론이었다. 즉, 일명 "우물"("well")지형으로서, 주변에 큰 나무들이 위치하고 있었고, UH-1D 3-4대 가량만이 착륙할 수 있는 넓이였다. 엑스레이와 양키 모두 한번에 8대 가량의 UH-1D가 착륙할 수 있는 지역으로 판단되었다. 나는 우선은 엑스레이 착륙장(LZ X-RAY)으로 하기로 결심했고, 이에 기초하여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동시에 기병 정찰반(Cavalry Scout Section)을 파견하여 이아 드랑 계곡 지역에 대한 저고도 비행을 통하여 엑스레이 및 양키 지역과 그 주변 지형에 대한 세부 정보를 수집하고, 적 활동에 대한 낌새가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기병 정찰반은 40분 가량 후에 돌아와, 양키 지역에 긴 그루터기들(high stumps)이 발견되어 착륙장으로 사용하기 어렵겠다고 보고했다. 또한 엑스레이 지역에는 한번에 8-10대의 UH-1D가 착륙할 수 있겠다고 확인해 주었다. 엑스레이 지역 주변에는 적의 낌새가 보이지 않았고, 기병 정찰반의 저공 정찰과정에서 어떠한 사격도 받지 않았다. 기병 정찰반은 오솔길(trail) 몇 개를 발견하여 그 위치를 체크하였고, 엑스레이 지점 북쪽에 있는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설치된 통신선에 대해서도 보고하였다. 엑스레이 착륙장 자체를 관통하는 오솔길은 없었다. 나는 엑스레이를 주착륙장으로 하고, 탱고와 양키는 나의 명령에 의해서만 사용하는 예비착륙장으로 하도록 결정했다. 이제 본인은 구두 작전 명령(oral operation order)을 하달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첨부 C (Tab C)에 서면 형식으로 정리해 두었다. 구두 명령을 하달한 자리에 참석한 인원은 본인 휘하 중대장 전원과 대대 일반참모, 특별참모, 수송 헬기 중대장과 대대에 파견된 그의 연락장교(the lift Company Commander and his Liason Officer to the battalion), 기병 정찰반장, 제 21포병연대 1대대 A포대장, 제 3여단 작전장교(S-3)였다. 명령 하달 과정에서 여단장이 도착하였고, 여단장에게는 이후에 간략하게 따로 브리핑을 실시하였다. 이때 본인은 양개 포대가 정위치한 사실을 보고받았으며, 이에 본인은 강습 착륙(assault landing) 시각을 10:30으로 하였고, H시각 1분 전까지 20분간 포병준비사격(tube artillery preparation; tube artillery는 rocket artillery, aerial artillery등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전통적인 포병을 의미)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A중대와 C중대 중대장들은 헬기를 타고(flown) 자기 중대로 복귀하였으며, B중대 중대장은 짚차를 타고(on a mechanical mule; mechanical mule은 M274 Truck으로 불리는 1/2톤 차량으로서, 짚차와 비슷한 용도와 형태의 차량이긴 하나 엄밀하게는 1/4톤 차량인 jeep와는 구분됨[1]) 플레이 메 비행장에 있는 자기 중대로 복귀하였다. 이 시각은 대략 09:15 경이었다.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나거나 끝나기 직전이었다. 어떤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 좌측: 첨부 A (Tab A) // 우측 : 첨부 B (Tab B) )

 

 

 

 ( 첨부 C (Tab C). < ※클릭하면 커집니다 > )

 

 

 

B. 최초 강습

 

 공중 기동에 의한 포병 배치가 다소 지연됨에 따라, 준비 사격이 시작된 것은 10:17 무렵이었다. 본인은 선도 헬기에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광경을 잘 볼 수가 있었다. 준비 사격은 정확한 위치에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돌격 중대의 선두 부대의 착륙시간에 정확히 맞춰 종료되었다. 포격은 주로 착륙장 주변의 나무들과 키가 큰 수풀지대, 그리고 엑스레이 북서쪽의 고원으로부터 뻗어나오는 마른 골짜기(draw) 및 돌출부(finger)에 집중되었다. 공중포병(aerial artillery; 이 당시에는 포병 소속의 aerial rocket artillery(ARA) 대대를 의미하는 표현임. 로켓탄을 장착한 UH-1B 무장헬기를 주력으로 하는 부대로서, 제 1기병사단과 101 공수사단에 각각 1개 대대가 배속되어 있었음[2-4])은 포병 사격이 끝난 직후에 도착하여 주변 지역에 30초 동안 보유 탄약의 절반을 쏟아 부었다- 그 후 주변 공역을 돌면서 사격 요청에 대기하였다. 공중수송대대(lift battalion) 소속의 건쉽들이 사격 임무를 인계받아 UH-1D들의 직전방에 위치하였다. 강습 착륙(assault landing)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헬기의 출입구 사수(door gunners)들이 수목과 수풀지대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우리들은 착륙한 뒤 적의 위치로 의심되는 곳을 향해 M-16 소총을 사격하며 착륙장으로부터 수목지대로 뛰어갔다. 본인의 지휘부는 본인과 대대 주임원사, 대대 정보장교, 본인의 통신병 2명, 그리고 영어를 잘하는 몬태나 족으로 여단에서 파견된 남베트남 사람(Vietnamese national)인 닉 씨(Mr. Nik)로 구성되었다. 본인의 지휘 헬기는 플레이 모와 이아 드랑 계곡 사이를 선회하였으며, 여기에 탑승한 사람은 본인의 작전 장교(S-3), 포병 연락 장교, 수송헬기 중대(helicopter lift company) 연락 장교, 전방 항공 통제장교(Forward Air Controller)였다. 공격간 이들이 지휘헬기에 있도록 하는 것이 이들 본연의 임무 수행에는 최상이었고, 이들은 통신 중계소 및 공중 관측소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지상에서는 어떤 종류의 적 사격이나 접적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다. 지형은 평탄했으며, 최대 100피트 높이의 관목들로 이뤄져 있었다; 키가 1-5피트 가량 되는 억새풀(elephant grass)들이 밀생하고 있었다; 또한 이 지역에는 최대 8피트 가량 높이의 개미집(ant hill)들이 관목 혹은 억새풀 사이에 많이 있었다. 착륙장소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서는 수목 및 수풀이 대단히 심하게 우거져 있었고 산맥 언저리 기슭의 정글까지 뻗쳐있었다. 이 지역에 대한 사진은 첨부 D와 E(Tabs D and E)에 나타나 있다. 이 사진들은 전투 종료 후 수일 후에 촬영된 것이므로 아군이 진입하였던 11월 14일에 비해서는 나무의 잎들이 적은 편이다. 16대의 UH-1D는 B중대 나머지 병력과 다음 중대 병력 일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플레이 모로 복귀하였다. 이로써 대대 병력을 작전지역으로 셔틀식으로 수송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강습시간(time of the assault)은 정확히 10:48시였다.

   

   

  (좌측: 첨부 D (Tab D) // 우측 :첨부 E (Tab E) )

(※원 문서에는 Tab E가 총 14장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용량문제로 한장만 올렸습니다.)

 

 

C. 착륙장의 장악과 최초의 접적

 

(1) B중대장은 본인의 지시와 부합하게 착륙장을 장악하였는데, 소대장 중 한명으로 하여금 착륙장에서 50~ 100미터 떨어진 여러 지역들을 분대별로 따로 수색하도록 조치하였으며, 나머지 중대 병력들은 직접 인솔하여 공세적 타격 세력(offensive striking force)으로서 착륙장 부근의 나무 그루터기 및 키가 큰 수풀 지대에 숨겨두었다. 약 11:20 경, 정찰 분대 중의 하나가 포로를 획득했다. 본인은 정보장교와 베트남인 닉 씨를 대동하고 해당 장소로 이동하여 포로를 심문했다. 포로는 비무장으로 더러운 카키색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셔츠 견장 부위(epaulet)에는 일련번호가 적혀있었으며, 빈 수통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지난 5일간 바나나밖에 먹지 못했고, 우리가 있는 지역 위에 있는 산악지대에는 미군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3개 대대 병력이 위치하고 있는데 아직 미군을 찾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북베트남 정규군(North Vietnamese Army) 소속이라고 말했다. B중대장은 산 근처의 포로가 획득된 지점 근방의 정찰을 강화하도록 지시하였고, 당초 C중대 임무였던 돌출부(finger) 및 골짜기(drew)지역을 포함한 산악지대 하부 지역의 수색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을 가정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단 지휘소에서 포로를 심문하도록 하기 위하여 본인의 지휘헬기를 이용하였다. 그러고 난 후인 12:10 경, 적과의 교전이 없는 상태에서 A중대의 상당수(sufficient) 병력이 도착하였고, 이들이 B중대와 착륙장 방호 임무를 교대하였다. 한편 B중대의 정찰 소대의 일부가 산지 근처에서 일단의 분산된 적 소총수들과 접촉하였다. B중대장에게 C중대의 정찰 임무도 수행하도록 했었다; 즉 엑스레이 지역으로 이어지는 돌출부를 따라올라가는 것(to move up the finger)과 이에 따른 상황에 대응하는 것(to develop the situation)이었다. B중대는 움직였고, 나는 A중대장에게 C중대가 착륙장 방어를 인수할 만큼 충분한 수가 도착하면, 의명 같은 지역으로 따라올라갈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이때가 12:30 경이었으며 착륙장은 적의 공격을 받고 있지 않았다. 12:45 경, B중대의 선두 병력이 상당한(moderate) 강도의 총격전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13:30 이 약간 지난 시점에서, B중대장은 최소 2개 중대 병력의 적에게 강한 공격을 받고 있으며, 우측 분대가 중대 나머지와 분단되어 숫자상 우세한 적에게 포위당할 위험에 빠졌다고 보고했다. 총격전이 격심했으며 60밀리와 81밀리 박격포 몇 발이 B중대 지역과 착륙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B중대지역에 로켓탄 역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2) 잠시 후, 격심한 총격전이 시작되었으며, A중대 나머지 병력과 A중대장, 그리고 C중대 선발대가 착륙했다. A중대장에게 휘하 중대를 이끌고 B중대 좌측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B중대와 연결함으로써 B중대의 좌측방을 보호하고, 1개 소대를 B중대로 파견하여 분단 위기에 있는 B중대의 소대를 구출하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였다. C중대장에게는 착륙장 남쪽과 남서쪽의 차단지점을 점령하여 착륙장이 이쪽 방향으로부터 유린되는 것을 방지하고 , A중대의 좌측방을 보호하도록 했다. 나는 지휘헬기에 있는 작전장교를 호출하여, 전방 항공 통제장교(Forward Air Controller)에게 산마루 아래 언저리 지역에 공습을 개시하도록 이야기하도록 하고, 아울러 산 전체에 대한 정찰과 착륙장으로 향하는 적 접근로에 대하여 서쪽에서 남쪽 순으로 살펴보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공중포병(ARA)과 포병에 대해서도 동일한 지시를 내렸다. 사격 우선순위는 기 계획 목표(fire missions)와 각 중대로부터의 요청 목표(requests from companies)에 두도록 하였다. 특정 목표(specific request)에 대하여 사격하도록 할 때를 제외하면, 상기 목표에 사격을 퍼붓도록 하였다. 중대장들과, 전방 관측장교(forward obserbers), 전방 항공 통제장교(forward air controller), 포병 연락장교(artillery Liasion officer) 모두 중대들의 선두 위치의 좌표를 부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주변에는 기준 삼을만한 특별한 지형 지물도 없었고, 관목들과 숲들은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공중은 연기와 먼지로 자욱했다. B중대는 이점에서 더 곤란했는데, 1개 소대가 정글 속에 분단되어 있었고 이 소대의 정확한 좌표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근접화력지원 요청을 하기가 곤란했다. 이 소대는 75-100명 규모의 적과 싸우며 움직이고 있었다(in a moving fire-fight). 이 소대가 B중대와 A중대 앞에 있었기 때문에 양개 소대에 대한 지원화력을 퍼붓는 것이 곤란했다. 그러나 축차 사격 기법(technique of "walking" fires)을 통해 산의 남쪽에서 서쪽으로 차례로 사격함으로써 양개 중대 - 주로 A중대 - 가 원하는 지역으로 어느 정도는 사격할 수가 있었다. 본인은 산으로부터 뻗어나오는 몇몇 골짜기(draws)들을 지정했으며, 81미리 박격포 사거리 밖에 있으면서 식별되었거나 의심되는 적의 박격포 진지에 대해 사격하도록 요청하였다. 두 차례의 공습이 실시되었는데, 목표는 북서쪽의 계곡 바닥부와 전날 상급 사령부에서 적 대대가 있을 것으로 의심했던 장소였다. 이 시점에서 오후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기가 시작되었다.

 

(3) A중대장은 지시대로 B중대에 1개 중대를 파견하였다. 이 소대는 돌출되어 교전에 말려들었고, 결국에는 B중대의 좌측이 아니라 우측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해당 소대 위치에 대해서는 오후 늦게 확인 될 때까지 A중대장과 본인 모두 헷갈리게 된다. B중대장은 이 당시 이미 완전 포위된 상태였던 휘하 소대에 도달하기 위하여 병력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A중대 1개 소대가 증강된 B중대(-)는 분단된 소대로부터 75미터 거리까지는 접근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은 가지 못했다. 이 중에서 A중대에서 증원된 소대가 가장 가깝게 접근하였다. B중대에는 어느 정도의(moderate) 사상자가 발생한 상태였다. 동시에 A중대(-)가 B중대의 좌측 및 후방으로 향했는데, 이곳에서는 착륙장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는 건천 바닥을 따라 최소 1개 북베트남 정규군(PAVN) 중대가 강력한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이 적군은 B중대의 정확히 좌측 후방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즉시 매우 격심한 총격전이 발생했다. A중대에는 약간의(light) 사상자가 발생한 반면 적은 격심한 피해를 입었다. A중대의 한 소대는 그 앞을 전진하던 50-70명의 PAVN 병력에 대하여 지근거리에서 측면사격을 가할 기회를 잡았다. 적군 대다수가 살상되었는데, 선두 일부를 쓰러트리자 나머지 병력은 그대로 사계 내를 향해 전진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A중대는 포로 2명을 잡았고, 이들은 나중에 여단으로 후송시켰다.

 

(4) A중대의 교전이 발생할 무렵 C중대의 나머지 병력들과 D중대 선발대가 착륙했다. 착륙과정에서 헬기에 많은 탄환이 명중했으나 격추당한 기체는 없었다. C중대장은 착륙한 휘하 병력들을 먼저 착륙했던 병력들과 함께 배치했다. 5분 내로, 175-200명 규모의 적군이 착륙장으로 돌진하여 C중대와 충돌하였다. C중대는 착륙장으로 도달하려던 적군 상당수를 사살하였다. 포로를 1명 잡았고 후송시켰다. C중대는 약 1시간 반동안 적과 교전하였으며, 마침내 적은 붕괴되어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적은 아군의 포격과 공습 하에서도 자신들의 부상자와 사상자들을 상당수 끌고(drag)갔다.

 

(5) C중대 잔여병력이 착륙할 때 함께 도착했던 D중대 선발대는, 상기 과정이 벌어지는 시점에서 A중대 근처에서의 총격전에 말려들었다. D중대장의 통신병 한명이 전사한 것은 착륙 전에 수송 헬기중대장 헬기 내에서였는데, 이 과정에서 출입구 사수(door gunner)와 조종사가 부상당했다. 나는 무전으로 나머지 8대의 UH-1D의 착륙을 중단시켰다. D중대 선발대(D Company elements)는 지휘부 및 박격포 소대와 대전차 소대의 일부로 이뤄져 있었다. D중대장은 이들을 이끌고 A중대 지역의 격심한 총격 소음이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이들은 하천 바닥 지역(stream-bed area)에 도달했는데, 즉시 하천 바닥을 따라 이동하고 있던 25-30명의 PAVN 병력들과 맞닥뜨렸고, 이들 대다수를 사살했다. 나머지 적은 A중대에서 사살했다. 이 전투에서 D중대장과 박격포 소대장이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그 과정에서도 사격을 멈추지 않고 직접 적군을 사살했다. 적이 격퇴된 후, D중대장은 의식을 잃었다 회복하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는 중대 지휘권을 하사(Staff Sergeant, E-6)였던 대전차 소대 부소대장에게 인계하였다. 이 시점의 병력 배치는 첨부 F(Tab F)에 기록하였다. C중대장은 이 부사관과 만났고, 내 승인을 받아 D중대 선발대를 C중대 좌측에 배치하도록 지시하였는데, C중대는 숲속 멀리 떨어진 착륙장 남동쪽 가장자리 부근을 고수하고 있었다(The Commanding Officer, C Company made physical contact with this Staff Sergent and with my approval directed the D Company elements to the left of C Company tying in tightly around the southeastern edge of the LZ off in the brush).

 

(6) 이때까지 대대 전반에 걸쳐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한 상태였고,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적의 규모는 500-600명 가량이었다. 이 숫자는 단지 우리와 접촉 중인 적의 숫자였고 더 많은 적이 접근 중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본인은 여단장에게 소총 중대를 추가로 증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여단장은 이 요청을 즉시 승인했다. 나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단장은 이미 제 7기병연대 2대대 B중대를 대기시켜 둔(alerted) 상태로, 이들은 벌써 승차지대(pick-up zones)에 집결하고 있는 중이었다.

 

(7) 이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기병 정찰반은 특정 지역을 정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산지에서 북서쪽 및 남서쪽으로 뻗는 탈출로 및 북쪽과 북서쪽으로부터 계곡 바닥으로 향하는 접근로에 대하여 알아보고 있었다. 이들은 본인의 지휘망을 통하여 본인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약 15:00 무렵이었던 이 시점에서 나는 대대의 나머지 전술 병력들 - 정찰 소대(recon platoon), UH-1D 3대 분량의 C중대 병력, D중대 부중대장(XO) 및 행정보급관(1st Sergent) - 을 착륙시킬 필요가 있다는 결심을 내렸다. 비록 착륙장 동쪽 부분은 적의 사격을 받고 있었지만, C중대와 D중대의 활약으로 그 정도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엇다. 상기 병력들은 안전하게 착륙했다. 나는 D중대 지휘권을 D중대 부중대장에게 인계하였고, 아울러 그에게 정찰 소대로 하여금 착륙장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를 경계함과 동시에 대대 예비로 있도록 할 것을 지시하였다. C중대장은 앞서 내 승인 하에 모든 소총중대의 박격포들을  착륙장 동쪽 가장자리에 배치하였다. D중대장에게는 휘하 박격포들을 여기에 합류시키고 중앙 화력통제반장(central FDC)으로부터 박격포들의 지휘를 인수하도록 지시했다. 주 사격방향은 A와 B중대 방향이었다. 또한 박격포병들은 이들 동쪽의 착륙장 방어를 하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전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 첨부 F (Tab F) )

 

 

 

 


 

D. B중대의 고립된 소대에 도달하기 위한 2차 공격

 

(1) 시각은 대략 15:45 무렵이었으며, 양군의 배치 상황은 첨부 G (Tab G)에 나타난 바와 같다. 분단된 소대로 접근하려던 A중대와 B중대의 시도는 약 300명 가량의 적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moderate) 사상자를 냈으며, 대부분 지휘자들과 통신병들이었다. 이 적들은 공격적이었으며 큰 무리를 지어 산에서 내려왔다. 저들은 잘 위장된(well-camouflaged) 상태로, 상당히 은폐(concelement) 및 엄폐(cover)를 잘했다. 또한 사격에도 뛰어났다. 적들은 다수의 자동화기와 작은 방망이 수류탄(small "potato-masher" grenades)으로 무장했다. 가슴에 여러 발을 맞고도 상당수는 죽기 전에 몇 발짝 더 나아가며 사격을 계속했다. 나는 A중대와 B중대에게 해 중대의 사상자들을 후송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엄호 사격 하에 근접전투에서 빠져나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포위당한 소대로 다시 접근하기 위하여, 강력한 준비사격으로 지원되는 협조된 공격(coordinated attack supported by heavy preparatory fires)을 준비하도록 했다. 대대 정보장교가 부상당했고, 나중에 또다시 피격되어 이번 적군의 공세 중에 전사했다. B중대의 포위당한 소대는 이들을 유린하려던 북베트남 정규군(PAVN)의 수많은 시도들을 격퇴했다. 소대는 전사자와 부상자 및 이들의 장비들을 포기하지 않은 채, 작은 언덕 지형(slight rise of ground)에서 약 25미터 폭의 진지(small 25 meter wide perimeter)를 구축하여 탄약을 재분배해가며 적의 강력한 화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2) 약 16:20 무렵, 포위된 소대로 접근하려는 A중대와 B중대의 두번째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 공격에 앞서 포병과 공중포병(ARA)의 준비 사격이 실시되었다. 첫번째와 두번째 공격, 그리고 포병과 공중의 격심한 사격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A와 B중대를 향하여 잘도 접근해 왔다. 일부는 숲에 있었으며, 어느 누구도 퇴각하지 않았다. 아군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이 적들을 해치울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상당히 힘든 일로써, 이들은 잘 위장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은폐 엄폐 기법들을 활용하고 있었다. 상당수는 작은 잠복호(spider-holes)에 몸을 숨기고 있었고, 일부는 개미탑(ant-hill)에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 A중대는 소총 소대장 3명을 모두 잃었고, 이 중 한 명은 전사자(KIA)였으며, 배속된 포병 전방 관측장교(artillery forward observer) 역시 전사했다. 중대장 근방 6피트 내에서만 4명이 사살당했는데, 이 중에는 통신병 역할을 수행하던 통신 부사관(commo sergent)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B중대는 A중대 우측 약간 앞 쪽으로 나아가 있었고, 대부분 근접 전투로만 75-100 미터 가량만을 전진할 수가 있었다. 나는 A중대에게 B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보냈던 소대를 회수하도록 지시했다. 그럼에도 A중대는 단지 150미터만을 전진할 수 있었다. A중대의 한 소대는 나머지 2개 소대보다 훨씬 더 앞서나갔는데, 훨씬 우세한 적군과 교전하게 되어 고착당하게(pinned down) 된다. 일부 적들은 수풀이 우거진 지역에서 아군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은폐된 장소에서 사격을 개시하곤 했다. A중대의 전진을 지원하기 위하여, 소대 주변 및 소대와 A중대(-)의 사이 지역으로 포병 백린탄 사격을 실시했다. 백린탄의 소이 효과로 인하여 적의 사격이 잠시 뜸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한 연기 효과로 소대와 소대의 전사상자로의 연결이 가능해져 이들을 빼내올 수가 있었다. 이 지역에는 아직도 200-225명의 적군이 남아 A중대 및 B중대와 싸우고 있었다. 17:40가 되자, 나는 강력한 지원화력 엄호 하에 A중대와 B중대를 착륙장 가장자리로 철수시켜 야간방어 배치를 실시해야되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아직 포위된 소대와 통신이 잘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고, 이들 주변으로는 아군 포병의 근접 방어사격(close-in artillery defensive fire)이 이뤄지고 있었다. 내 의도는 야간 또는 아침 일찍 또 한번의 협조된 공격을 실시하거나, 야간 침투기동을 통해 이들을 빼내거나 할 생각이었다. A중대와 B중대 모두 접촉지역에서 후송시켜야 할 다수의 전상자(WIA)와 전사자(KIA)가 발생한 상태였다; 따라서 분대 및 소대 단위로 재조직(reorganization)이 이뤄져야 할 형편이었고 탄약과 물 역시도 공급되어야 했다; 또한 대대 전 부대들을 묶어서 야간 배치를 할 필요가 있었다. C중대는 오후 내내 적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C중대는 소수의(a few) 사상자가 발생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양호한 상태였던데 반해, 적은 계속 접촉 중이긴 했지만 중대에 대한 공격은 멈춘 상태였다. D중대는 자리를 잡았고, 17:05에서 18:00에 걸쳐 2~4대의 UH-1D에 탑승한 제 7기병연대 2대대 B중대 병력들이 착륙해왔다. 이들이 착륙하자 나는 이들을 예비대로 삼아, C중대를 통과한 적에 대한 반격용 혹은 A,B중대 지역에서의 상황 대처용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불필요했다.

 

(3) A중대와 B중대의 철수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포병 백린탄 사격이 이뤄졌다. 백린탄의 소이 효과는 적을 붕괴시키는(disorganize)데 있어 고폭탄(HE)에 비해 더 효과적이었고, 백린탄 연기로 인한 차장효과는 아군 작전에 더욱 도움이 되었다. 19:00에 이르러 사주방어진지(perimeter) 조직이 완료되었다; 부대들은 야간 전투태세로 배치되었고, 포병 및 박격포 방어 사격 계획이 수립되었다(units were tying in for the night and defensive artillery and mortar fires were being registerd). 나는 제 7기병연대 2대대 B중대의 1개 소대를 C중대에 배속(attach)시켰는데 이는 C중대가 방어할 정면이 넓었기 때문이다. 정찰 소대는 대대 예비로 삼았다. 배치 상황은 첨부 H (Tab H)에 나타난 바와 같다.

 

 

   

( 좌측: 첨부 G (Tab G) ) // 우측: 첨부 H (Tab H) )

 

 

  

E. 오후에 있었던 기타 활동들

 

(1) 상기 활동들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에도 수많은 다른 활동들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 부상자 진료와 후송이 큰 문제로 떠올랐다. 대대 군의관(battalion surgeon)과 의료물자, 그리고 4명의 전방 응급치료소 요원(aid station personnel)이 오후 일찍 도착했다. 이들이 도착한 것은 14:00 무렵이며, 격심한 사격이 이뤄지는 가운데 본인의 지휘소에서 2명의 부상자를 치료했다. 나는 의료후송헬기(med evac helicopter)를 자주 부르지는 않았는데, 오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착륙장이 적 사격 하에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약 13:30 무렵 엑스레이 북동쪽에 있는 헬기 2대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개활지를 골라, 보급 및 후방으로의 후송용으로 선정하였다. 우리는 이곳을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방어해야 했다. 이 지역은 첨부 H (Tab H)에 나타나 있다. 나는 수송헬기 중대장에게 부상자를 후송하고 보급품을 가져오도록 지시하였으며, 아울러 엑스레이 지역으로 병력 및 물자수송 또는 부상자 후송을 위해 오는 모든 헬기는 내게 무전하여 착륙 지시를 받는 체계를 갖추도록 했다. 이 체계는 매우 잘 작동했다; 오후 내내 그리고 이른 저녁 동안 많은 수의 UH-1D가 들어왔으며, 각각에 대해서 특정 방향과 특정 고도로 특정 장소에 착륙하도록 했으며, 퇴출시에도 지정한 방향으로 나가게 했다. 나는 적의 포화 속에서 반복하여 우리를 도와주러 왔던 UH-1D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의 직업정신과 용기에 대하여 높은 경의를 표한다. 이들은 도와주러 오기를 거부한 적도 없었고, 지시를 잘 따랐으며, 훌륭했다. 우리는 대신 적 사격이 가장 적을 때를 골라 이들을 호출했고, 매 착륙마다 최대한 미리 준비하여 이들이 지상에 머무르는 시간을 최소화 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피탄당하기는 했지만 격추되거나 격파된 헬기는 없었다. 2대의 항공기가 들어와서 나가지 못했다. 한 대는 엔진에 피격되어 착륙장 바로 북쪽에 있는 개활지에 착륙해야 했다; 또 한 대는 착륙 과정에서 메인 로터가 나무 몇 그루의 윗쪽을 깎아내는 바람에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양 기체의 승무원들은 다른 헬리콥터를 통해 즉시 후송되었다. 착륙한 두 대의 헬기들은 대대 예규(SOP)에 따라 가장 근접한 중대였던 D중대 병력들에 의해 별다른 명령 없이 확보되었다. 두 대 모두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기 때문에 2일 후 CH-47 치누크 헬기에 매달려 후송되었다. 15:30에 이르르자 아군에게 야간 착륙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즉 지상에서 나를 보좌할 패스파인더 팀(pathfinder team)이 필요했다. 나는 제 229 A 수송헬기 중대장에게 패스파인더를 요청했으며, 다행히 그는 이미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들이 도착했고, 폭파 공병들과 함께 착륙장을 헬기 2대가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곳으로 정리했으며, 야간 착륙시 필요한 경우 불을 켤 수 있도록 세팅해 주었다. 비록 적의 감시와 사격하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만, 우리가 아직도 적군과 교전 중이었던 엑스레이 남단부에 비하면 덜 취약한 곳이었다.

 

(2) 어둠이 찾아온 19:15 경, 탄약과 전투식량, 물과 의료 물자들이 도착했다. 덱스드레인(Dexdrane; 각성제의 일종)과 모르핀(morphine; 진통제의 일종), 붕대 등의 의료 물자가 가장 많이 필요했고, 물이 가장 절실했다. 약 18:50 무렵에 나는 작전장교에게 무전을 넣어 두 대의 UH-1D를 사용해 가능한 빨리 올 준비를 하고, 포병 연락장교와 FAC, 통신병 2명 및 더 많은 물과 소구경 탄약을 수송해 올 것을 지시했다. 이들은 21:28에 착륙했다. 전 지역에 걸쳐 장막처럼 펼쳐진 먼지와 연기로 인하여 도착이 지연되었고 착륙 또한 대단히 어려웠지만, 제 229 부대의 조종사들은 이 어려운 일을 용기있게 잘 해 주었다.

 

 


IV. 11월 14일 야간에 있었던 활동들

 

A. 19:15 무렵 어둠이 몰려올 때까지 아군 부상자 전원을 후송시켰고, 전사자들은 본인의 지휘소 지역에 모아두었다(we had evacuated all our wounded and collected our dead in my CP area). 탄약과 물을 분배했고, 착륙장은 야간 착륙을 위해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격포와 포병은 사주방어진지(perimeter) 주변의 가까운 곳에 사격계획을 수립(registered)했다;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판초우의로 작은 위생병용 작업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휘체계(chain of command)를 재조직했다. 본인은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부하들의 사기가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만만찮은 적과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훨씬 강한 힘을 가진 적이 오후에 우리들을 뚫고들어오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주방어진지(perimeter) 배치가 완료되자 우리는 완벽한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B중대의 고립된 소대도 사기가 양호한 상태로 진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B. 야간에 적군이 A중대와 B중대의 앞과 A중대와 C중대의 연결지점 앞에 몇 개의 조명등(light probes)을 설치하는 동안, 포병은 산의 돌출부 아래 부분과 골짜기, 그리고 사주방어진지의 남쪽과 서쪽 가장자리 부근에 대하여 교란사격 및 차단사격(harrasing and interdiction fire)을 실시했다; 그리고 전기불 너댓개가 관측된 사면에 대해서도 실시했다. 아군은 박격포 혹은 로켓에 의한 6~7 발 가량의 고폭탄 사격을 당했다.

 

C. 대대 사주방어진지에서 북서쪽으로 300미터 떨어진 산 돌출부 지점에 있었던 B중대의 고립된 소대는 야간 내내 아군의 근접 포병 사격으로 보호되었다. 소대 전부가 적의 접근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이 지역으로 포격이 유도되었고, 이어진 함성과 비명소리는 포격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소대 인원은 야간의 시작부터 종료시까지 전사 8, 부상 12, 현재원 7의 숫자를 유지했다. 이들은 작은 사주방어 진지 내에서 2군데의 분리된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사자 중에는 소대장과 부소대장, 화기분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본대와 통신을 하고 있던 인원은 병장(E-5)계급의 분대장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적의 사격을 받았기 때문에, 하사 계급의 분대장이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병장이 중대장과 통신을 하고 지휘를 받게 된다. 야간 내내 그는 주변의 적이 움직이고 말하는 것들을 들으면서 주변의 적에게 근접 포병 사격을 유도했다. 밤 사이에 적은 3차례의 공격을 실시했으며, 각각의 병력 규모는 약 50명 가량이었다. 공격들은 소화기 사격과 포병 사격으로 격퇴되었다. 소대의 부상자 일부도 전투에 참가했다. 제 2차 공격은 03:35 무렵에 이뤄졌는데, 공격 전에 나팔 소리가 울렸으며, 소대에서 200-400미터 위에 있는 산으로(up on the mountain) 지향되었다. 나는 전술항공통제반(TAC)에게 공습을 요청하여 소대 위쪽 지역에 대한 공습이 실시되었다. 이는 공군 플래어쉽(flareship; 베트남전 당시 낙하산 투하 조명탄을 이용하여 전장을 조명하는 임무를 맡았던 C-47 수송기)이 전장을 밝혀주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공습은 적중하였고 포위된 소대에 대한 2차 공격을 격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조명탄을 사용한 것은 이번 뿐이었는데, 조명탄을 사용할 경우 주변의 적도 비춰주긴 하지만 반대로 아군의 대대 사주방어진지의 참호 위치도 노출시키기 때문이었다. 또한 23:15분 이후에는 달이 상당히 밝았다. 아침 햇살이 밝아오자 포위된 소대 주변에는 수많은 적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외에도 상당수의 시체가 주변에 점점히 박혀있는 키큰 수풀 속에 숨겨져 있을 것이었다. 야간 동안 소대원들은 적이 수많은 사상자와 부상자들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들었다.

 

D. 06:30 에 날이 밝았다. 나는 일단 방어진지를 고수하면서 동시에 포위된 소대를 구출하는 계획에 대하여 결심했다. 나는 C중대 지휘소가 가장 좋은 위치(best point of vantage)라고 판단하여, A, B, C중대장에게 이곳에서 나와 만나 계획을 정리하고 명령을 수령하자고 지시했다. 이 시각이 대략 06:40이었다. 또한 각 중대에게 진지 주변을 조심스럽게 점검하여 침투한 병력이나 저격수가 없는지 확인하도록 하였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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