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Military History Encyclopedia on the Web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polish_ottoman_1620.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chocim1621.html) >
폴란드-오스만 전쟁, 1620-1621 (Polish-Ottoman War, 1620-1621)
1620-21년간 벌어진 폴란드-오스만 전쟁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오스만 제국간 90년간 벌어진 분쟁 중 첫번째의 것이다. 한동안 코삭(Cossack)들의 오스만 영토 습격으로 국경지대에는 긴장이 감돌았지만, 전쟁을 일으킬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1618-1619년 사이에 그 긴장은 갑자기 증가한다. 1618년 오스만 2세 (Osman II)가 14세의 나이로 오스만 제국의 제위를 차지한다. 그는 군사적 영광을 추구하였다. 1620년, 몰다비아의 군주 그라티아니(Gratiani, the ruler of Moldavia)가 오스만 제국 지배에 반기를 들고 폴란드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기회는 찾아든다.
그라티아니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무려 25000명의 군대를 양성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헤트만 스타니슬라스 졸키울스키(Hetman Stanislas Zolkiewski)는 8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몰다비아로 진군한다. 이곳에서 그는 고작 600명밖에 되지 않는 미미한 몰다비아 군대와 합류하게 된다.
연합군은 이제 보다 대규모인 오스만 군대를 케코라(Cecora (or Tutora)) 근방에서 공격하게 된다. 9월 18일에 있었던 최초 공격은 격퇴당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가 퇴각을 시도하면서 추격전이 벌어지게 된다(9월 29일부터). 10월 6일에 이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의 기강은 무너지고 만다. 군대는 학살당한다. 졸키울스키는 살해당하고 그의 머리는 잘려져 술탄에게 보내진다.
폴란드인들은 이 상황을 1620년에 수습한다. 보다 대규모 군대가 모집되어 헤트만 코키에위츠(Hetman Chodkiewicz)의 지휘하에 남파된다. 이 군대의 규모는 약 75000명(이중 40000명은 코삭)으로 추정되었지만, 그래도 이제 오스만 2세가 친히 지휘하는 오스만 군대에 비해 숫적으로 열세였다. 코키에위츠는 주둔지를 요새화시켰고, 5주간 오스만 군대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마침내 그는 폴란드 후사르(Polish hussars)를 동원하여 반격을 실시하였고, 결국 오스만에 대항하여 소규모 승리를 거두게 된다. (코킴 전투; Battle of Chocim)
코킴 전투 이후, 오스만 2세는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 폴란드인들은 코삭들을 통제할 것을 약속했으며, 오스만 제국은 타타르인들이 폴란드로 약탈하러 가는 것을 통제하기로 하였다. 이 짧은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재앙을 몰고왔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 of Sweden)는 폴란드-에스토니아 연방군이 남쪽으로 가 있는 것을 이용하여 에스토니아를 침공하여 리보니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1622년 예니세리 반란이 일어나 오스만 황제가 그의 삼촌인 무스타파(Mustafa)로 교체되었다. 그 역시도 거의 금방 쫓겨나 무라드 4세(Murad IV)가 즉위한다.
Rickard, J (28 July 2007), Polish-Ottoman War, 1620-1621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polish_ottoman_1620.html
코킴전투 (Battle of Chocim, September to 9 October 1621)
코킴 전투(The battle of Chocim (or Khotin))는 1620-1621년간의 폴란드-오스만 전쟁에서 벌어진 전투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이 승리한 싸움이다. 1620년의 케코라 전투 승리로 자신감을 갖게 된 술탄 오스만 2세는 대군을 이끌고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Commonwealth of Poland-Lithuania)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지방으로 북진하였다. 그의 군대 규모는 명확하지 않지만, 최소한 10만명에서 25만명 사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연방측은 케코라 전투 패전에 대한 대응으로 1620년보다 훨씬 대규모 군대를 양성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의 규모는 약 3만명이었으며, 여기에 다수의 코삭들이 가세했다. 연방군은 코킴에서 방어테세를 갖추고 전투 중에 기병이 반격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세련된 축성진지를 건설하였다. 연방군대의 진지 규모는 약 8평방킬로미터에 달했다.
오스만 군대는 9월 2일 코킴에 도착하여 폴란드 진지에 대한 일련의 공세를 감행했다. 이 공세들은 방어지역을 돌파하는 데에 실패한다. 오스만 황제는 폴란드 진지를 근처의 드네프르 강으로부터 단절시키려고도 시도한다. 그러나 자신의 대규모 군대 역시도 보급문제에 취약한 상태였다. 9월 말에 이르자 양군 모두 식량과 탄약이 부족해진다. 9월 28일의 최종 공세에 실패한 이후, 오스만 2세는 평화 협상에 들어간다. 이 협상으로 전쟁 전 상황으로 회복되었으며, 연방측과 오스만 제국간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몰다비아는 오스만 제국령으로 인정하였다).
오스만 황제는 침공이 실패함에 따라 그 희생양을 찾았고, 그 결과 예니세리에게 촛점이 맞춰졌다. 예니세리를 개혁하려던 황제의 시도는 예니세리의 반란으로 끝을 맺었고, 제위는 그의 삼촌인 무스타파에게, 다시 무라드 4세에게로 넘어간다. 한편 연방군 대부분이 없는 틈을 타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가 에스토니아를 침공하였고, 이에 따라 1600년-1629년간의 폴란드-스웨덴 전쟁(Polish-Swedish War of 1600-1629)이 재점화하게 된다.
Rickard, J (11 August 2007), Battle of Chocim, September to 9 October 1621 (NS)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chocim16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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